습관 같은 사과 뒤로 장난이 따라붙었다. 원래 이렇게까지 농담을 즐기는 편은 아닌데, 누르는대로 족족 반응이 나오니 괜히 짓궂게 굴고 싶어졌다. 그래도 선 넘을 생각은 없으니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한다.
"편하신대로."
엄청나게 나이차가 나는 것도 아닌데 존댓말이 뭐가 중요할까. 사하에겐 호칭도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악의 갖고 부르는 <야>나 <너> 아니고서는. 오히려 생각보다 정중하게 불러준다 싶었다. 선배라니, 당장이라도 손에 사탕 하나 쥐여줘야 할 것 같다. 슬프게도 지금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지만. 가벼운 악수 뒤 손을 놓았다. 예상 외로 부드러운 악수였다. <나는 3반.> 연호의 말에 짧게 덧붙인다. 잠깐 생각하더니 한 마디 더 하며 웃었다. <누가 괴롭히면 이르러 와.>
"비타민 D가 중요하대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공부하기 싫어서 나온 거지만. 근데 맨날 앉아 있기만 하면 못 써. 사람이 햇빛도 쐬고 좀 걷기도 해야지. 그래야 공부도 더 잘 되고 성격도 안 나빠지고.
"너는 왜 그렇게 뛴 거야? 누가 쫓아와?"
질문에 대답 다 하고 나니 궁금해졌다. 연호의 뒤쪽을 흘끔대며 묻는다. 쫓아오는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그냥 운동이었나?
"아빠하고 이미 이야기 다 끝냈어. 우리 아들. 그런 선생님의 말은 듣지 않아도 돼. 엄마랑 아빠는 우리 아들 하고 싶은거 밀어줄테니까 아무런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도 돼. 대신 엄마랑 아빠랑 약속하자. 엄마랑 아빠는 우리 아들이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하게 해줄거야. 그러니까 하늘아.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이라면 쉽게 포기하지 말고, 조금 힘들다고 관두려고 하지 말고 열심히 해보자. 알았지?"
"응! 열심히 할거야! 나!"
성장하며 어린 시절의 기억은 대부분 잊혀지기 마련이다. 자신이 세 살때 무엇을 했는지, 다섯 살 때 저 공원에서 어떤 풍선을 잡았는지, 자신이 인지하는 선 하에서 가장 먼저 본 동물은 무엇이며, 부모님과 제일 먼저 놀러간 곳이 어디인지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있을 수는 있으나 그 수는 극 소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허나 그런 어린 기억 속에서도 정말로 인상깊은 것은 기억에 남기 마련이었다. 마치 낡은 필름 속 영화가 재생되는 것처럼 흐릿한 영상이 머릿속에서 재생되며 부분적으로 끊겨가는 부분이 연결되며 단편적으로나마 떠올리는 이들은 적지 않을 것이다.
열여덟 살 소년인 하늘에게도 그런 기억은 분명히 존재했다. 넌 양이니까 피아니스트의 길은 포기하는게 낫다라는, 자신에게 정말 기초적인 것을 가르쳐준 학원 교사. 양이건, 늑대건 그 가능성은 차이가 없다고 이야기하며 자신에게 제대로 피아노를 가르쳐준 학원 교사. 그리고 아무런 장래성이 없다는, 정말로 피아노의 피도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아들이 하고 싶다고 하기에 응원해주고 격려해주며 자신을 믿어주는 부모님.
많은 필름이 하늘의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생각해보면 자신은 피아노에 대한 재능이 없었다. 그저 좋아한다. 하얀색과 검은색이 합쳐져서 만들어지는 멜로디가 너무 좋아 거기에 관심을 가지고 치고 싶다고 투정을 부렸을 뿐이었다. 다른 이들이 한번이면 끝내는 곡을 세 번을 쳤고, 열 번 쳐서 다른 이들이 겨우 익히는 곡을 그는 서른 번을 쳐서 완성했다. 뒤떨어진다는 것에 대해서 하늘은 걱정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보다 잘 못 치면 더 많이 쳐서 따라잡으면 된다고 생각하며 그저 열심히 건반을 치며 하늘은 음을 완성했다. 4분 음표, 8분 음표, 16분 음표, 4분 쉼표, 2분 쉼표, 8분 쉼표. 왜 이리 모양도 헤깔리는지. 하나하나 건반을 치며 완성하며 익혀가는 하늘에게는 그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물론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고, 간혹 가르치는 교사가 아닌 다른 교사가 와서 잔소리를 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조금 떨어진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괴롭거나 포기하고 싶진 않았어."
멜로디를 만드는 것이 좋았고, 연주하는 것이 좋았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더 뛰어난 연주자가 되고 싶어 다시 한 번 피아노에 앉아 시간을 투자했다. 뒤떨어진 감각을 많은 연습으로 채우며, 때로는 좋아하는 곡을 일부러 피아노로 치려고 음을 하나하나 치며 스스로 악보를 써보기도 하고,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곡을 쳐보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을 경험삼아 부족한 부분에 채워넣으며, 하늘은 자신의 실력을 키웠다.
처음 나간 경선에선 정말로 비참할 정도로 안 좋은 성적을 냈고 하늘은 매우 분해했다. 역시 안되는걸까. 어릴 적 선생님이 말한대로 자신은 안되는걸까. 눈물이 핑 돌지만 애써 안 울려고 눈에 힘을 꽉 주며 밖으로 나가니 부모님이 서 있었다. 아무런 말 하는 일 없이 품 속에 토닥여주며 엄마와 아빠는 우리 아들 곡밖에 안 들리더라 라는 말 한마디에 하늘은 숨을 꽉 죽였다.
더욱 연습하며 하늘은 이를 악물었다. 누구보다, 누구보다 더 위에 서고 싶었다. 자신은 피아노를 좋아했으며, 연주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그와 비슷하게 꼭 이루고 싶은, 정말로 이뤄내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역시 늑대는 다르네. 완전 재능 넘치는거 봐. 진짜." "미안하지만 나는 늑대가 아니야." "뭐?" "그러니까 늑대가 아니야. 실망시켰다면 미안해."
인간이건 양이건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자기 자신임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늑대가 될 순 없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많은 것을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었으니까.
/라고 별 내용없는 독백을 써보기도 하고! 정말로 별 내용없지만 이것으로 내가 하늘이에게 부여한 것은 다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뒹굴거리면서 학창생활을 보내게 하는 것 뿐!
그정도는 고민할 거리도 아니라는듯 당신에게서 들려오는 대답, 상냥한 미소와 조용히 입을 여는 모습에서 괜한 걱정을 했던걸까 싶은 생각이 드는 그녀였다. 아무렴, 언제 다시 가까워지든 그 행동은 변함없을 것이라고 스스로 이야기하는 당신에게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후후후... 그건 또 그것대로 상냥한 말이네요..."
마치 정해진 일인양 오늘이 아닌 내일이었어도, 어쩌면 더 지난 뒤였어도 변함없이 항상 인사를 건네왔을 거라는 당신의 말에서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한켠으로는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 자신 역시 이전과 다르게 변한 부분이야 있겠다만, 그래도 변화된 당신의-어쩌면 미처 눈에 담지 못했을 수도 있던- 움직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당신 또한 노력했고, 노력할거라는 말은 이런 뜻이었을까?
"물론... 아파하거나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안타까워하는게 당연하겠지만, 괜찮아요. 눈물 흘릴 때가 있어도 이렇게 바로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잖아요?"
수줍은 웃음, 어떻게 보면 귀엽다고 느껴질만한 그 미소를 보면 즐거웠고 그녀 또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된다면 당신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웃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좋아지겠지. 악순환이 있으면 그 반대도 있는 법이었다.
"후후후~ 그만큼 진심이시란 건가요? 그래도 너무 무리하는건 좋지 않은걸요~ 가끔은... 얼토당토않은 요구에 화를 내는 모습도 보고 싶을지도...?"
자신의 요구에 부응하도록 노력할것이라는 당신의 말조차도 안정이 되는 느낌이었다.
"...... 정말이지... 그런 말씀을 하시면 울지 않을 수가 없는 부분인데도, 이상하게 눈물이 안나오는걸 보면 제 감정선도 참 눈치가 없나 보네요~"
겁먹을 필요도, 망설일 필요도 없이 무엇을 하든 밀어내지 않는다는 당신의 이야기는 꽤 간질간질하게 다가왔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법이니, 겁먹지 않아도 되는 것은 맞지만... '그래도 그 실수가 반복되면 안되는 법이니까요. 이미 몇가지는... 꽤 크게 저지른것 같고...' 문득 그날 이후의 흉터라던가 남아있는건 아닐까 살피고 싶었지만, 당장 볼수 있는 곳에는 없는듯 싶었다.
"그 말, 그대야에게도 돌려드리고 싶네요..."
손끝으로 자신의 뺨을 간질이듯 매만지는 당신의 조곤조곤 이어지는 말에 그녀 또한 버릇처럼 당신의 귓가에 손을 가져가 엄지로 부드럽게, 닿을듯 말듯 원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