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 강렬하게 생겨서 순진한 데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봐도 마음 다칠 일이 없는데 다쳤다고 하니 곧이곧대로 믿어준다. 울리려고 한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믿어주길 기대한 것도 아닌데. 치료법까지 묻는 게 꽤 진심 같았다. 거짓말이면 아주 훌륭한 연기자인 거고. 문제는 사하가 뒷일까지 생각 안 했다는 거다. 치료법을 묻는 말에는 어깨만 으쓱였다. 모르니까 어쩔 수 없다. 마음에 난 상처도 자가치유가 되던가?
내민 손을 잡는 연호를 보자 입꼬리가 다시 꿈틀댔다. 혹시 이게 치료법이라 생각하고 있는 건가. 안 까졌다고 말했는데. 부탁한 적도 없는 마사지까지 받고 있으려니 조금 황송해진다. <착하네.> 가볍게 칭찬한다. 이건 뻥 아니다.
"나는 너 자주 봤는데, 너는 나 한 번을 못 봤어?"
금세 납득하는 연호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특기라는 말에 대한 동의이기도 했다. 어딜 봐도 쉽게 잊힐 인상은 아니긴 하다. 언제나 구석에서 활동적이었던 면까지. 근데 조금 더 생각해보니 약간 억울하다. 나도 흔하게 생긴 편은 아니지 않나. 머리색 때문에라도 특이하다 생각할 법한데. <너무하네. 진짜 상처난 것 같아.> 시무룩한 기색과 함께 중얼거린다.
의문을 표하며 홍현의 얼굴을 한 번, 더 떨어진 약이 없는지 바닥을 한 번 더 본다. 본인의 얼굴을 훑는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고 가볍게 웃었다. 그러면서 명찰이 위치해야할 곳을 슬쩍 훑었으나 그 위로 흰 가운만 보일 뿐이었다. 약학부 소속이라는 이야기에 아, 하며 수긍한다. 실험용이구나.
"시험기간인데 고생하네. 약학부 애들끼리 하는 거야? 아니면 혼자?"
주말이니 약학부 소속인 학생들이 학교까지 나와서 실험을 하긴 쉽지 않겠다는 생각에 물어본 것도 잠시, 다음으로 홍현이 한 질문에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눈썹을 더 미묘하게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알고 있지. 말하고 있는 게 양이 먹는 억제제라면 말이야."
본인이 파악한 사실을 말하는 게 좋을까, 그러지 않는 게 좋을까 가늠하듯 고민하다 그냥 말하기로 한다. 거짓말은 할 수록 뒤로 가서 꼬이니까. 이 시점에선 굳이 할 필요도 없고. 아는 사람이 늘어 좋을 건 없겠지만 본인이 양인 걸 알게 되어서 당장 나쁠 건 없고. 자연스레 떠오르는 의문을 바로 묻는 것을 보류한 채 몸을 천천히 일으킨다.
"전부 그것 같지는 않지만. 그럼... 억제제로 실험을 하는 거야?"
'너는 양이거나, 일반적이지 않은 루트로 억제제를 구한 거고?' 라며, 약의 출처에 대해서 묻고 싶었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화두로 떠오르지 않는 이상 보류하기로 했다.
앞에서 허둥대는 연호를 물끄러미 본다. 상처받은 척하던 얼굴도 없고, 눈치보는 듯한 기색도 없다. 방울토마토 관찰일기 쓰는 사람 같은 눈이다. 오늘은 몇 cm가 자랐는지, 열매가 얼마나 달리고 얼마나 붉어졌는지를 따지는 것 같은. 연호를 방울토마토 보듯 바라보던 사하의 감상은…,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제 말 하나하나에 쩔쩔매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뭐라고 한 거 아닌데. 울지 마."
사하가 다시 어깨를 으쓱인다. 정말로 그냥 해 본 말이다. 기억하는 게 신기했다. 연호가 눈에 띈 건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저는 움직이긴 커녕 그냥 가만히 앉아서 바람 맞으며 꽃구경이나 하고 있었다.
"너의 죄를 사하노라."
사하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한다. 생각없이 던진 말에 지나치게 미안해하는 것 같아서 분위기를 좀 풀고 싶었다. 진담으로 듣든 농담으로 듣든 의미는 용서로 귀결되니 듣는 사람 마음은 좀 가벼워지지 않을까 싶다.
"내 이름 은사하야. 3학년. 이제 와서 존댓말 쓰라고 안 할 테니까 안심해."
말과 다르게 눈은 은근히 연호를 흘겨본다. 장난이었는데 이거에 또 놀랄까 봐 금방 표정 풀었다. <다음에 기억하는지 볼 거야.> 덧붙이며 여즉 잡고 있던 손을 가볍게 흔든다. 아까는 일방적으로 호 받기 위한 거였다면, 이번엔 상호교류를 위한 악수였다. 나 까먹지 말라고.
때로는 미련이 도움이 될때도 있구나, 싶은 그런 날이었다. 그녀가 남긴, 당신이 남긴, 어쩌면 정말 하찮은 수준에 다다라버렸을지도 모를 미련 앞에서도 사람은 언제든 변할수 있구나 싶었다. 그리고 아마 그 미련의 형태가 깊게 각인된만큼, 되살아나는 속도도 빨라졌겠지.
"그러게요... 한 한달쯤 고양이처럼 그대야 주변을 빙빙 돌고나서 말을 걸어봐야 했을까요?"
체념은 할지언정 포기는 하지 않았기에 언제든지 다시 만날 수 있었고, 그 기회와 선택이 있었기에 지금 이런 상황까지 다다르게 된것이다.
과연 이걸로 당신의 마음이 제대로 치유가 될지는 그녀로선 알수 없었지만, 설령 아니라 해도 다시금 보듬어나가면 될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최소한 당신이 그녀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기 전까진, 계속 이어질 일이었다.
살짝 장난치는 손길에 마치 앳된 아이마냥 맑고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금방이라도 꽈악 안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그건 조금 뒤의 일로 미뤄두기로 했다. 우선은 느긋하게 시작하고 싶으니까, 초반부터 힘을 빼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재회가 반가워도, 너무 불타오르면 나중에 갈피를 못잡을테니.
"아, 물론... 경우에 따라선 우는 것도 괜찮으니까요?"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하는지 비죽이던 그녀는 순순히 자신의 손길대로 끌려오는 당신에게서 익숙하면서 낯선 무언가를 느꼈을지도 몰랐다. 서로의 가슴이 맞닿은만큼 어쩌면 심장소리도 한층 더 또렷하게 전해질까? 만약 정말 그런 거라면 이런 두근거림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자신의 목을 감싸안던 당신이 이번엔 몸을 빙글 돌려 누워있던 서로의 위치를 바꾸자 잠깐 놀란듯 당신을 지켜보는 그녀였지만 얼마 안가 그 행동을 이해한듯 조용히 웃어보였다.
"그러네요... 어쩌면 제가 지나쳤을, 어쩌면 새로이 알게 되는 걸지도 모를 모습이 궁금해요..."
이제야 제대로 보기 시작했으니 궁금할 거라는 당신의 말에 끄덕일 수밖에 없던 그녀는 차분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서 조심스럽게 당신의 머리에 손을 가져다대어 살살 쓸어보였다.
" 귀엽긴 할 것 같은데.. 어떻게 말을 걸든, 슬혜가 내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면 나는 아마도 오늘처럼 슬혜를 반겼을거야. 그게 언제가 되었든 말이야. "
슬혜의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슬혜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고 있던 시아는 이내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술을 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역시 고민거리가 아니라는 듯 망설임이라곤 단 한점도 보이지 않는 대답이었다. 언제라도 슬혜가 자신에게 다가와 주었다면 자신은 어떻게 행동할지 정해진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분명 오늘의 자신과 큰 차이점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분명 오늘처럼 미소를 지으며 ' 잘 지냈어? ' 하고 인사를 건내겠지.
" 아하하.. 그래도 슬혜한테는 웃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서. 왠지 내가 울면 슬혜가 아파할 것 같단 말이야. "
물론 오늘처럼 눈물이 날 정도로 기쁘면 울지도 모르지만.
시아는 그렇게 덧붙여 말하며 수줍게 웃어보인다. 괜스레 수줍어지는 것은 자신의 입술에 장난을 치던 슬혜의 눈에 한순간 불꽃이 일렁이는 것이 보인 듯한 느낌 탓이었다. 무언가 슬혜의 안에서 어떤 충동이 일어난 것만 같은 그런 느낌. 하지만 그 충동이 전혀 자신이 꺼릴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왠지 느낌으로 알 수 있을 것 같은 시아였다.
아무튼 용기를 내어 몸을 움직인 시아는 서로의 위치를 바꾸었고, 그 탓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는 슬혜였지만, 자신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어보이는 것을 확인하곤 시아 역시 안도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역시 너는 웃는게 가장 예뻐
" 그건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야, 슬혜야. 네가 바라는 건 내가 바라는 것. 네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줄거야. 저 하늘의 별을 따다달라고 하면 어떻게든 노력해볼게. "
자신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미소를 머금은 슬혜의 말에 애교스럽게 머리를 비비적대던 시아가 눈을 게슴츠레 하게 뜨고선 작게 속삭여 답을 돌려준다. 무엇을 하려고 하던, 무엇을 바라던 자신은 그것에 부응하려고 노력할거라고 제대로 말해주고 싶은 시아였다.
" 적어도 나한테 뭔가를 하더라도 망설일 필요는 없어, 슬혜야. " " 네가 무엇을 하든 난 절대로 널 밀어내지 않을테니까. 겁 먹을 필요도, 망설일 필요도 없어. 실수를 하더라도 괜찮아. 사람은 언제나 실수를 하는 법이니까. 너도 나도 언제든 실수를 할 수 있는거니까. 그러니까 겁 먹지 않아도 괜찮아. "
시아는 차분한 미소를 입가에 건 슬혜의 뺨을 간질거리게 손가락 끝으로 매만져주며 조곤조곤 속삭여준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박하다는 말에 하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며 그저 고개를 가볍게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물론 스스로도 자신의 연주가 뒤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자신이 목표로 하는 그 곳까진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다. 당당하게 늑대와도 겨룰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자신에겐 너무나 필요했고, 적어도 지금의 자신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다. 늑대로서 이름을 떨치는 피아니스트와 비교해서 더 높은 평가를 받으려면 지금보다 얼마나 더 연습을 해야할까. 그 막막함이 살며시 느껴졌으나 하늘은 다시 고개를 저으면서 그 생각을 저버렸다.
피아노 끝자락의 건반을 두어번 치는 것을 바라보던 하늘은 아주 조금 멜로디가 이어가듯이 한 가닥 정도를 즉흥적으로 친 후에 살며시 손을 아래로 내렸다. 물론 그 음이 깔끔하게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즉흥적이었으니까.
"걱정까지는 조금 애매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조금 신경 쓰이는 것은 사실이죠. 나쁜 쪽이 아니라 걱정과 가까운 쪽으로 말이에요. 설명이 애매하네요. 그러면 걱정하는 것으로 쳐도 괜찮아요. 조금 다르지만 비슷하니까."
결국 따지고 보면 오늘 자신이 음악실을 쓰는 것 때문에 그녀의 원래 하려던 일정이 조금 흔들린 것은 사실이라고 하늘은 생각했다. 물론 상대에게서 저렇게 말이 나왔으니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나 사람의 마음이 어디 마냥 그렇게 쉽게 돌아가던가.
"방해가 된다거나 불편하면 바로바로 말하니까 제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지 않으면 그렇게 생각할 일은 없어요. 무엇보다 혼자서 연주하는 것보다, 들어준 사람이 있으니까 좋고요. 사실 피아노 곡을 굳이 일부러 들으려고 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이 없잖아요? 무엇보다 듣고 싶으면 동영상 사이트라던가 많기도 하고. 그래서 들어줘서 고마워요."
작은 미소를 머금으며 하늘은 두 손을 살며시 건반 아래에서 내린 후,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역시 고3이 되면 많이 피곤하고 그래요? 듣기로는 정말로 힘들다고 하지만, 아직 실감은 잘 나지 않네요. 이렇게 쉬러 오는 선배도 있을 정도니 그건 틀림없는 것 같지만요."
/갱신이야! 다들 안녕안녕이다! 물론 이 레스를 남기고 나는 바로 밥을 먹으러 갈테니 인사 안해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