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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잊으라고 한 주제에 정작 자신은 잊지 못했다니, 그녀는 스스로의 무능함과 미련을 저주했다.
애써 떨어뜨리고나서의 일곱밤, 그리고 해가 돌아 다시 이곳에, 마음을 정리하는동안 자신에 대한 것도 정리할만하거늘, 완전히 내려놓진 않은 건지 당신이 다시금 손을 뻗어오자 그녀는 묵묵히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까맣고 긴 비단을 흐트려놓은듯한 머리카락도, 달콤하게 느껴지는 갈색빛의 눈동자도, 가느다란 팔다리와 뺨에 어린 풋풋한 분홍빛까지... 전혀 느끼지 못했던 그때와 다르게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그때는 억지로 피했던 얼굴을 다시 마주해보면, 어째서 이런 사람에게 손을 들었을까 싶을 정도로 가녀리면서도 아름다웠다.
...뒤늦게나마 그녀 역시 당신이 품었던 생각을 쫒는것 같았다. 이미 늦은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왜인지 모르게 당신이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밝은 미소와 함께 자신을 끌어안듯 목에 팔을 두르자 그녀 역시 당신의 행동을 따르듯 조금 뻣뻣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것조차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기분이 들어 다행스러우면서도 한켠으론 아쉬웠을까, 그래도 그녀는 그저 당신이기만 하면 그걸로 만족한다는듯 부드럽게 자신쪽으로 끌어당겼다.
"기억 못할 리가 있겠나요..."
아마 집에 돌아가자마자 오늘이 무슨 중대한 날이었는지 달력을 미친듯이 훑어보았을 것이다. 결국 찾은 거라곤 미팅날짜만 가득 적한 비지니스캘린더였지만 그녀는 그날을 제법 소중하게 여겼었다. '기념일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고,
"......"
당신에게서 들려온 말은 오히려 무언가를 돌려받는 느낌이었다. 분에 넘치는 사람, 차마 욕심내어 붙잡을 수 없을 정도로 고귀했던 사람, 그렇기에 더더욱 자신의 옆에 두어선 안되는 사람... 오히려 자신이 그런 느낌을 받고 살아왔노라 말하고 싶어도 굳이 꺼내지 않았다. 다만, 마찬가지였다는듯 조금 애잔한 미소를 지으며 당신을 바라보았을까?
천천히 뺨을 맞대고, 상냥하게 부비적대던 그녀의 얼굴이 떨어지자 그제서야 눈을 접어 웃어보이는 당신을 바로 볼수 있었다.
"미안하고 죄송스러운건... 저도 마찬가지인걸요..."
살랑살랑, 자신의 뒷머리를 매만지는 손길 그러다가도 가볍게 입술이 맞닿자 저도 모를 찌릿한 느낌에 움찔거렸는지 당신을 안고 있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저도, 부족했으니까요... 마주할 용기도, 사실을 말할만큼의 배짱도 없어서... 그리고 이쯤 되면 알겠지, 같은 무책임한 생각만 해서..."
제법 가까워진 거리인만큼 그녀는 서로의 코끝을 건드리듯 톡톡 부딪히다가도 살살 쓸어보기도 하고, 다시 짧게 입을 맞추다가도 이전의 기억을 되살리듯, 체취를 다시금 기억해내려는듯 당신의 목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그것이 어째 다리에 몸을 부비며 자신의 소유임을 나타내려는듯한 고양이들의 행동과 다를게 없어 스스로가 우스웠지만, 이젠 구태여 거리를 벌릴 필요도 없었기에 장난스럽게 당신의 목덜미를 물어보기도 했다.
빗 속에 혼자 둘 수는 없었다고 둘러대는 작은 변명에, 새슬이 조그맣게 키득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러게ㅡ. 덕분에 혼자, 있지 않아도 되었네. 고마워. 말하는 도중 새슬의 안색이 아주 미묘하게 변했으나, 금방 나른하게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아주 찰나의 순간. 뚫어져라 새슬의 얼굴을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면 눈치채지 못할 빠른 변화였다.
“멋진 이름이야.”
하.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의 이름을 나지막히 입술에 담아 본다. 새슬은 특이하지만 퍽 근사한 이름이라고 어렴풋한 감상을 남겼다. 어떨 땐 기쁨의 소리로, 혹은 탄식의 소리로, 수만 가지의 의미를 내포할 수 있는 한 글자를 이름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억하기 쉽다. 머릿 속으로 몇 번 더 하, 문하, 하고 이름을 되새긴 새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비가 그치면, 여름이 올까.”
흐릿 잿빛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여름의 하늘을 떠올렸다. 높고 푸르른 창공, 뭉게구름. 새파란 녹음 같은 것들을. 그런 것들을 눈 앞에 두고 여름의 냄새를 만끽하다 보면 마음 한 켠이 그나마도 자유로워지는 느낌이 들어서, 새슬은 여름이 좋았다. 중간에 걸린 장마와 태풍은 견뎌내어야 할 지독한 시련이었지만. 새슬이 다시 물었다.
목을 끌어안으며 몸을 가까이하자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는 슬혜의 손길이 느껴진다. 어색하지만, 너무나도 오랜만에 자신의 몸을 감싸안는 슬혜의 감촉이라서 한순간 아찔함마저 느껴졌다. 그래서 조금 더 힘을 주어 슬혜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밀착시켰다. 지금 느껴지는 슬혜의 온기를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슬혜의 대답에, 한순간 목을 감싸안고 있던 시아의 눈이 커지고 순간 조용히 내쉬던 숨이 멈춘다. 몇초간의 정적, 그러다 기쁜 듯 슬혜에게 들뜬 목소리로 속삭이며 뒷머리를 사랑스럽다는 듯 쓸어내려준다. 정말로 따스하고 기쁜 일이다. 자신만 기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는 확신과 그 증거를 얻게 되니 혼자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방황하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다.
뺨을 맞대고, 조금이라도 자신의 온기를 전해주고 싶은 듯 부비적거리던 시아는 천천히 떨어져선, 자신의 웃는 얼굴을 제대로 슬혜에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 이해해.. 나도 무서웠으니까, 혹시라도 널 만나면 제대로 내 마음을 말하지 못할 것 같아서 무서웠으니까.. 그런 생각을 한 건 다 이해할 수 있어. "
코를 톡톡 부딪혀오는 슬혜에게 답례를 하듯 똑같이 따라서 톡톡 코를 부딪히고, 부비적대기도 하고, 그리고 다시 한번 입을 맞춰오는 슬혜가 조금이라도 더 기분이 좋아지도록 열렬히 호응하면서 점점 희미해가던 슬혜의 체취를 다시 한번 머릿속에 새겨넣는다. 이토록 달콤했었지. 시아는 그렇게 아찔할정도로 달콤한 슬혜의 향을 되새기다가 자신의 목에 얼굴을 묻어오는 감촉에 자신도 모르게 귀여운 소리를 흘린다.
" 슬혜...야앗.."
자신의 목덜미를 물어오는 슬혜에게, 상대방의 기분이 들뜰 수 있게 하는 법을 아는 듯 귀여운 소리를 한번 더 흘리며 슬혜의 팔 사이로 팔을 밀어넣어 끌어안고는 몸을 더욱 밀착시킨다.
" ... 다시 봐줄거야? 이젠 슬혜 옆에 있어도 괜찮은거야, 나..? "
조심스럽게 고개를 든 슬혜의 말을 듣던 시아는 용기를 내어 고개를 기울이곤 입술을 겹친다. 그리곤 어리광을 부리듯 슬혜의 아랫입술을 혀 끝으로 훑어주곤 오물거리다 떨어진다. 두사람의 호흡이 그대로 서로에게 바로 와닿는 거리에서 눈을 마주한 시아가 천천히 손으로 슬혜의 등을 쓸어내리며 반짝이는 눈동자를 고정시킨 체로 속삭인다.
눈 앞의 슬혜가 늑대가 아니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왠지 이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았는지, 어리광을 부렸던 아랫입술에 한번 더 쪽하고 입술을 맞춰주곤 소곤소곤 속삭인다. 이미 두사람이 있는 빈교실은 두사람만의 공간이 되었음에도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이고 마는 시아는 수줍은 소녀 같았다.
가볍게 말하지만 주원의 인생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설령 어떤 맛이라고 해도, 그 맛을 깊이 느끼고 즐긴 만큼 다른 맛 또한 깊게 느낄 수 있는 법이니까. 한가지 맛만 추구하다보면 언젠가 질리게 되는 법이니 말이다. 그러니 주원은 다가오는 모든 인생의 맛을 즐기기로 한 것이었다. 그의 인생관이 저 한 마디로 슬혜에게 전달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아, 아무튼! 그건... 그 머시기... 그 머시기 협약에 위반되는 것으로오오..."
말도 안되는 변명을 머릿속에서 지어내며 말해보지만, 그녀의 환하게 웃는 얼굴에 이제 변명은 어찌되든 상관 없는지 함께 미소짓는다. 서로 장난스럽게 장난으로 슬쩍 깨물고, 놓고, 어지럽히고. 친구들은 많았고, 친한 친구들도 있었지만 이런 경험은, 주원에겐 처음이었다. 친구와 함께할 때와는 조금 다른 종류의 즐거움. 단순히 즐거움이 아닌 좀 더 간지럽고 웃음이 나오는 그런 경험. 그것은 슬혜의 어떤 단편적인 한 부분에서만 느낀 것이 아닌, 지금까지 본 그녀의 모든 부분에서 느낀 것이겠지.
이렇게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걸어오는 장난 하나 하나가 크고 작은 깜짝 선물처럼 느껴져왔다. 그리고 그 내용물이 어떻던, 전달 방식이 어떻던, 감정은 최종적으로 '행복한 웃음'에 다다르는 그런 선물. 함께 있어주겠다고 한 건 자신인데, 어째서 반대로 선물을 받고 있는 것인지.
슬혜가 입으로 무언가 소리를 내며 어서 숟가락을 놓으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주원은 거기에 "으으으으음!"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젓는 것으로 지지 않겠다는, 먼저 놓지 않겠다는 응전의 의사를 보였다. 거기서 슬혜는 치사하게도 손가락의 손잡이를 홱 놓아버린다. 숟가락을 쥐고있던 슬혜의 손에 어느정도 몸을 기대고 있던 탓에 갑작스레 그 힘이 사라지자 주원은 그만 자신이 쥔 숟가락을 놓아버림과 동시에 슬혜쪽으로 고꾸라져버렸다.
뭐라 말하려다가 문하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까딱 잘못하면 너무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게 될 것 같았다.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뭔가 달라질 것도 없다느니, 내게 여름은 오지 않을 거라느니. 그런 말 같은 것을 할 수는 없다. 쓸데없이 상처 자랑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문하는 품위있게, 데면데면한 척을 하기로 했다.
"그러냐."
하고, 개구리 소리를 찬미하는 활기차고 감성있는 반문에 참 무뚝뚝하기 그지없는-어찌보면 그다운 대답을 툭 내놓은 문하는, 스트레칭 운운 하는 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스트레칭은 남들 하는 만큼만 하는 정도야... 스트레칭 잘 하는 사람은 컨토셔니스트."
컨토 어쩌구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문하의 전공 종목이 스트레칭이나 체조가 아닌 것은 분명해졌다. 사실, 문하의 전공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홀쭉한 체형에 어울리지 않도록 딱 벌어진 어깨와 발달된 광배근과 승모근, 그리고 마디가 두드러져서는 보스턴 백 끈을 잡고 있는 주먹이 평평하고 굳은살이 박혀있는 손. 십중팔구 격투기, 그것도 주먹을 아주 많이 쓰는 격투기겠지. 복싱.
혼자 산다는 말에, 문하는 규리를 흘끗 돌아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이혼했고 아버지를 따라와 사는데, 아버지는 원양어선 기관사라 일 년에 한두 달 정도만 집에 얼굴을 비추기 때문이다.
"동물..." 문하는 규리의 말을 되뇌어보았다. "아니, 딱히."
문하는 동물과 그렇게 친하지 못했다. 남들이 동네서 하루에 두어 번은 마주칠 법한 길고양이도 이상하게 문하가 지나갈 때만 아예 발자국 소리를 듣고 피해버리기에 길고양이 한 번 본 일이 없었고, 개 근처를 지나가면 아무리 얌전하던 개도 갑자기 불안해하며 짖어대거나 숫제 어디에 고개를 처박고 낑낑대는 게 다수였다. 그것도, 자신에게 남은 얼마 안 되는 역할이려니 하고 문하는 그러려니 여기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살갑게 다가오는 존재라는 것은 대단히 독특한 것이었다.
>>172 문하 내면에 있을 거 같은 이미지 아녜요...? :Q (문하주 : (절레)) 문하 반응이 생각보다 담담해서 안심했는데... (우리집 대럼쥐가 또....) (내가 이 대럼쥐를 어쩌면 좋을까) 문하 내면에 좀 보호해줘야 할 것 같은 삽살말티즈 강아지가 있는데, 상처줄까봐 무섭단 거예요... <:Q....
>>196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안 보이게 체코슬로바키아 늑대개로 포장 한군데도 안 삐져나오게 잘 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알아챈것이지 당신? 눈썰미가 아주좋은걸? 아랑이가 하고 싶은 대로 둬봐. 나도 문하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힌트라던가 팁이라던가 잘 던져주려 노력할게.
>>198 아니아니 이런 시니컬한 분위기가 새슬이 매력이라 너무 좋습니다 좋은데 그냥 문하주가 쫄보라. (쭈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