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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드득, 얇은 양철 뚜껑이 열리는 소리. 새콤달콤한 액체를 야금야금 홀짝이던 새슬이 빙그레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아ㅡ들켰네. 어떻게 알았담. 못 보던 잔상처가 새슬의 팔뚝에, 허벅지에, 무릎에 스치듯 지나간 자국을 그려내긴 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평소처럼 내버려두지 않고 콜라가 선물했던 연고와 반창고로 나름 제대로 처치를 해 놓았다는 점일까. 미안, 다치긴 했지만 잘 치료했으니까 몰래 넘어가 주라아ㅡ. 듣지 못 할 중얼거림을 능청스런 웃음과 함께 흘린다.
[ 헤ㅡ 나는 중간고사 기간이라도 피곤할 일 없는데. 공부 안 하거든 ( ᐛ ) 실망했어? 이왕 이렇게 된 거, 전과목 0점이라도 도전해 볼까 생각 중이야. 듣기론 100점 맞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던데, 글쎄에. 재밌을 것 같지. 콜라도 같이 할래? ]
물음표를 막 그려낸 후에, 새슬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리곤 밑에 서툴게 무언가를 그려넣는다. 팔다리가 달린 콜라캔(콜라캔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는 점은 원통에 ‘콜라’라고 적힌 게 전부였지만)과, 작은 탁상 위에 놓여 있는 꽃병. 그림 주변에 크게 동그라미를 치고는, ‘너’ 하고 적어넣는 것이다.
그리곤 딱지 모양으로 곱게 접어 비타민 음료가 놓여 있던 곳에 다시 올려놓고는, 새슬은 다시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ㅡ
프X글스, 칠리치즈 맛. 익숙한 통에 그려져 있는 수염아저씨 캐릭터를 멀뚱하게 바라보았다. 통을 흔들면 사각사각하게 울리는 소리가 재미있다. 그러고 보니 콜라에게서 받은 선물은 거진 먹을 것 뿐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좋았다. 꾸준히 관리를 해야 하거나, 쉽게 망가지거나, 사용하기에 번거로운 것들은 손이 잘 가지 않았으니.
[ 맛있다ㅡ ( ᐛ ) 짜고, 고소하고, 살짝 매콤해. ]
거기까지 적어 놓고, 새슬이 입술을 비죽거리며 펜을 툭툭 두드렸다. 아니, 이거.. 좋은 감상평이라고 할 수 있나? 아닌 것 같은데. 제가 적어 놓고도 미묘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거창하게 묘사하는 데에는 영 재주가 없는 새슬이었다. 음ㅡ 뭐 어때! 될 대로 되라는 기분으로 다시금 펜 끝을 종이 위에 내려놓는다.
[ 나 이런 건 잘 못해. 맛있는 건 맛있는 거. 그래도 나름 맛있었다고 표현한 거니까, 봐 주라ㅡ. 그리고 나 먹을 거 좋아해. 콜라가 주는 거 다 잘 먹고 있으니까. 고마워. ]
투박하게 접힌 쪽지는, 늘 그래왔듯 선물이 놓여있던 곳에 다시 조심스레 놓인다. 새슬의 웃는 얼굴이 닫힌 사물함 틈새로 사라지고, 가볍게 뛰어가는 발걸음 소리만이 남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학교에 도착해서 학생회실로 들어오니 샌드위치가 플라스틱 통 안에 들어있는채로 놓여있었다. 이것도 설마 마니또의 선물인걸까 싶어서 가까이 다가가보니 역시나 마니또의 쪽지와 함께 놓여있었다. 허어, 마지막날까지도 이렇게 챙겨주다니. 부학회장이라서 잘 보이려는걸까 싶기도 했지만 내가 뭐가 되는 사람도 아닌데 그럴리가 없지. 샌드위치의 내용물은 알차게 들어있었고 양도 꽤나 많았다. 그런데 오늘은 나 밖에 없는데. 내가 집에 가져가서 저녁으로 먹어버릴까 싶었지만 같이 먹으라고 준거니까 그럴 수는 없지.
[선착순으로 학생회실에 오는 사람들한테 샌드위치 나눠준다.]
학생회 인원들이 들어와있는 단톡방에 그렇게 전송해둔 나는 하나를 꺼내서 한입 크게 물었다. 오 맛있어, 버터쿠키는 태워먹더니 샌드위치는 꽤나 잘 만들었네 같은 무례한 생각이나 하면서 책상에 가만히 앉아있으려니 단톡을 보고 온 학생회 인원들이 한두명씩 오고 있었다. 오는 순서대로 만들어진 샌드위치를 나누어주고, 마지막 하나까지 나누어주고서 선착순 끝! 이라는 메세지를 보낸다. 못보고 뒤늦게 온 친구들한테는 주머니의 사탕을 주면서 보냈고.
- 샌드위치 잘 먹었어요. 지금까지 준건 다 맘에 들었어요, 특히나 만년필. 소중히 사용할께요.
커피는 결국 못먹고 버렸지만 그런건 모를테니까 굳이 적지 않는다. 내가 못먹는걸 알고 보내지는 않았을테니까. 그리고 못먹는걸 강제로 먹는 것을 상대방도 바라지 않을꺼라고 생각 ... 아니, 일부러 엿먹으라고 보낸건가 설마?
그가 그의 상처를 알아채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피부 위에는 아무 것도 느껴지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황량한 바람뿐. 그가 통각에 둔감해진 것에는 특별한 요인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런 조그맣고 대수롭잖은 상처 따위는 전혀 신경도 쓰이지 않을 만한 치명적이고 거대한- 평생을 안고 가게 될지도 모를 상처가 가슴 깊숙한 곳에 고통스레 남아있었기에. 자잘한 고통에 둔감해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랑이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에 대해 문하가 조금 이상하다고 여기는 이유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래서 문하는 아랑이 잠깐 기다리라는 말에 그대로 그 자리에서 별 저항 않고 순순히 자세를 낮춘 채로 아랑을 기다려주었다.
다만 반창고를 붙여줘도 되냐는 아랑의 제안은 뜻밖이었기에, 문하는 괜찮겠냐는 듯 아랑을 새까만 눈동자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조금 경계하는 것도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랑이 가까이 다가오는 게 신경쓰였기 때문이다. 자기 상처를 너무 가까이에서 보여주게 되는 게 아닐까 싶어서. 컷팅 몇 개로 저렇게 걱정하는 애한테, 그 친절함에 취해버려서 바보처럼 숨기고 있던 상처까지 보여줘버리게 될까 봐.
늑대는, 그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최대한 팔팔하고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조금이라도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면 무리에서 쫓겨나버리니까. 사실, 진작에 무리에서 쫓겨나 외톨이가 되어버린 지 오래지만 그럼에도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늑대의 본능적 프라이드는 남아있는 것이다.
문하는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 하나만 입 다물고, 멍청한 생각 하지 않으면 돼. 그는 눈을 감고 아랑의 손길에 얼굴을 내맡겼다. 딱히 아프거나 하는 기색은 없는지, 약을 바르는데도 문하는 얼굴근육 하나 미동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생각보다 반창고를 좀 많이 붙이네.
"너한테 날아올 일 없잖아."
권투종목 특기생은 아랑이 아니고 자신이었으니까. 어두운 나날들로 걸어들어가는 것은 아랑이 아니고 자신이었으니까. 아랑이 조심스레 손을 떼자, 문하는 자연스레 한 발짝 물러섰다. 그야, 피부 위로 고통은 안 느껴져도, 아랑의 손이 갈수록 떨리는 것은 느낄 수 있었으니까. 아닌 척해도 꺼림칙하겠지. 당연한 일이다. 자기 처지는 자기가 잘 알았다.
"고마워."
반창고투성이 얼굴이라도 흉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상처투성이보단 나아보인다. 문하의 트레이너가 옆에 있었다면 깜짝 놀라지 않았을까. 어떤 닥터도, 자신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고. 반창고가 붙은 얼굴을 매만져보던 문하가 자기 책상을 한번 흘끔 바라보더니 아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137 흑흑 친절해(꼬옥) 좋아요 화력에 휩쓸리기 쉬운 우리 스레지만 그래도 파이팅 파이팅
다들 프롬파티 이야길 하고 계시는군요... 새슬이는 도저히 드레스를 갖춰입고 파티에 서성거리는 게 상상이 안 가는 것... ㅇ)-(.... 대충 평소의 세일러복 차림으로 옥상이나 뒷뜰 한켠에서 음식이랑 무알콜 샴페인같은 거 한 잔 가져다가 야금거리면서 농땡이 칠 것 같은데... ^.^....!!!!!
조심스레 손가락을 뻗어 다육이 잎 끝을 톡, 건드렸다. 잎 안 쪽도 만져보려다가 말았다. 식물은 사람 체온에 닿으면 화상을 입는댔지. 조금 거리를 둬야 하는 걸까. 다행히도 최민규는 그런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햇볕에 잘 드는 창가에 두고, 가끔 잎을 닦아주고. 물을 언제 주었더라, 가물댈 쯤에 분무기로 물을 뿌려주고.
학교에 화분을 계속 두면 분명 언젠가 사고가 나겠지. 누가 화분을 엎거나, 하다못해 잎 하나가 똑하고 떨어져버릴 수도 있다. 결국 최민규는 오늘 학교 끝나자마자 바로 집에 가기로 했다. 양 손에 작은 화분을 소중히 들고, 조심조심.
'저는 햇볕을 좋아해요. 햇볔이 잘 드는 창가에 놓아주세요. 물을 너무 많이 마시면 아파요. 잎이 말랑해지면 흠뻑 물을 주세요. 적당한 관심을 주면 기쁠 거예요.'
펜을 들고 답장을 썼다.
[같이 기다리는 거면, 너도 아직 겨울인 걸까. 그래. 혼자보다 둘이 기다리는 게 더 즐겁겠지.
그동안 고마웠어. 나중에 정체를 안 뒤에 만나게 되면, 꼭 고맙다고 직접 말해주고 싶네.
그리고 다육이 이름은 펭귄으로 지으려고.]
팻말처럼 말풍선 스티커를 창문 근처 벽에 붙이고, 그 아래 선반 위에 화분을 뒀다. 여기가 제일 햇볕이 잘 들어왔었지, 아마.
매직을 꺼내 화분 옆면에 '펭귄'이라 서툴게 적었다. 한동안 최민규의 최근 검색이 '다육이', '다육이 기르는 법' 등으로 도배될 것이 틀림없었다.
"늑대는, 그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최대한 팔팔하고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조금이라도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면 무리에서 쫓겨나버리니까."
TMI) 이 습성은 체코슬로바키아 늑대개에게도 있는 습성이야. 그래서 수의사들 사이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늑대개는 최악으로 꼽혀. 병에 걸려서 골골대도 골골댄다는 사실을 필사적으로 숨기려 하기 때문에, 우연히 진단을 했다가 병을 조기에 발견하는 게 아니면 병이 더이상 숨기지 못할 정도로 악화되고 나서야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곤 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