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습을 숨기고 살다가 훗날 들키면 사람들이 싫어할까봐, 처음부터 숨기는것을 거부하고 솔직하게 나가는 것일수도 있다. 그는 그녀가 용감하다고 하는것에는 확신이 없었지만, 적어도 그 자신은 지금의 모습을 좋아하고 있다고 확신 할 수 있었다. 꿈같은 거짓과 냉혹한 진실. 둘 중에 하나를 고른다면, 그가 더 원하는 쪽은 누가 뭐래도 냉혹한 진실이었다.
처음 만난 늑대...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그는 어떻게든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는 아랑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지 못했다. 심한 일을 당했을수도, 슬픈 일이 일어났을수도 있다. 그녀가 처음 만난 늑대가 자신이었다면 좋았을거라는 말은, 여러 의미가 숨어있을 테다. 무언가 위로라도 건넬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머리가 그렇게 명석하지 못한 그로써는 아무 말도 못한채로... 할 수 있는것은 그저 그녀의 머리를 더 부드럽고 상냥하게 쓸어주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는 몸을 숙이고, 그녀가 목덜미를 깨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녀는 조금 혼란스러운 듯 했지만 이내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는 자신이 그녀를 깨물었을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싶은 느낌을 받으면서 목에 들어오는 감촉을 느꼈다. 전혀 아프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한 짖궂은 장난 때문에라도 아프게 깨물릴거라 예상했건만. 괜히 조금 긴장했던것 같아서 뻘쭘해진 모양이다.
......? 뻘쭘해졌다?
무언가 이상했다. 그는 지금까지 그녀의 페로몬에 의해 헤롱거리면서 다른 감정은 느낄 새도 없이, 그저 무언가를 취할 생각만으로 머리가 가득 차있었다. 그녀가 깨믈던 자신의 목에 반창고를 붙이는 동안에도 그 이상함을 깨달으려 노력하다가, 노력하다가...
결국에는 깨달아버렸다.
" 아. "
짧게 나온 탄식을 기점으로 그의 표정이 조금씩 파리하게 변했다. 무언가 복잡한 감정들이 하나둘 앞다투어 머릿속으로 밀려오는 가운데, 집나갈뻔 했던 이성도 다시 돌아와 머릿속에 자리했다. 되찾은 이성 덕분에 다른 생각들과 감정들을 머리 한켠으로 미뤄두고서, 그는 다시 눈동자를 도륵 굴려 아직 품에서 내보내지 못한 아랑을 보았다. 아직 목을 깨물린 뒤로 낮추었던 자세를 일으켜세우지 않아서 서로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구도에 있었다.
적어도 비랑은 그 이들 사이에 끼지 않으니 그걸로 충분한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상 그 사람들에 대해 비랑이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건 지금의 너와 나니까요.
비랑은 노래를 들으며 가만히 눈을 감고 손을 푸는 하늘이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노래만 듣고 있으면 심심하니까요. 평소라면 댓글창으로 넘겨서 이미 읽은 댓글이라도 또 읽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댓글을 읽을 수 없습니다. 책상 위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가만히 사람구경을 하다가 하늘이가 말하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네요.
"빌 때 아니면 음악실을 다른 사람이랑 쓰기도 해?" "오, 기대할게-!" "응, 다음 기회를 꼭 노려봐야겠네."
막상 가서도 딱히 할 일이 없어서 뭔가 보거나 먹기만 하고 오거나 하는 일도 있지만, 남의 집에 놀러간다는 건 기본적으로 두근두근한 상황이라는 겁니다. 그것만이 목적인 건 아니지만요.
"와, 개인 연습실. 완전 멋지다. 부잣집 같아."
하늘이네 집은 두 명의 자리가 있나 봅니다. 그냥 하늘이의 방과 연주자 하늘이를 위한 방이 따로 있으니까요. 물론 비랑은 외동이라 집에서 개인 방이 없진 않았지만, 집에 개인 서재나 전시장을 둔다는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감탄을 뱉던 비랑이는 손이 하도 들락날락하다 보니 어느새 텅텅 비어버린 과자봉지를 보고 봉지 안에 손을 털었습니다. 잠깐 얘기했는데 벌써 다 먹어버렸네요.
"으... 난 매점 가서 뭐 좀 먹어야겠다. 과자만으로는 배가 안 차."
볼멘소리를 하는 식탐 많은 빨간 늑대는 가져온 의자를 원래 자리에 갖다두고 일어나 하늘이를 향해 손을 흔듭니다. 봉지는 이미 종이비행기로 접어서 쓰레기통 속으로 쏙 날려버렸지요. 하늘이는 이미 적당히 떼웠다고 하니 같이 갈 필요는 없겠죠? 하늘이가 인사를 받아주면 그대로 미련없이 교실을 떠나려 할까요? //슬슬 막레... >.-
늑대가 되지 못하고, 개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한 그런 애매한, 늑대개라고도 하기 애매한 상태에서 그 무엇도 이루어낼 수 없었던 남주원. 좀 더 밀어 붙였어도, 되지 않았을까 하고 뒤늦은 후회를 해보지만 이미 시간은 흐르고 난 뒤이니.
그녀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던, 그녀가 보여준 것은. 그녀가 준 것은 온기와 상냥함 뿐. 평소의 그녀에게서 받을 수 없었던 것들을 만월의 시간을 빌려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주원은 생각했다.
그녀를 강하게 안고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시트러스향에 몸을 맡긴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아침잠이 많은 소년이 그 빠르게 도망쳐가는듯한 시간을 붙잡으려는듯 필사적인 마음을 안지만.
"언제든지. 잊지 않아. 그 말."
만월이 지나간다고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비록 이 기분이 아니게 되더라도 말이다. 그녀는 마치 이 만월에 끝을 고하듯 손가락을 튕긴다. 그런 것으로 끝날린 없다, 아직 시간이... 어라?
꼬옥 안은 슬혜의 감촉이 바뀐 것은 아니다. 그 따스함과 포근함까지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아무리 채워도 구멍난 바닥같던 외로움이 슬혜의 핑거스냅에 '뿅'하고 사라져버린듯 자취를 감추어버린 것이었다.
"..."
'꿈을, 꾼거지?'
아직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 아니, 현실로 돌아왔다간 폭발해버릴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주원의 자세는 그 자세에서 바뀌지 않고 - 슬혜를 안고 있는 - 잠시동안 유지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그녀를 꽉 끌어안은 두 팔이 부드럽게 풀려간다. 이렇게 보면 정신을 잃은 것 같기도 하고, 잠든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고개를 들었다간 토마토보다 새빨개진 얼굴을 들키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