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을 부르며 웃는 사하의 얼굴이 보인다. 무언가 만족스러워보이는 표정일까.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내가 굽히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아서 그런 것일까. 그런거라면 나도 보았으니 서로 주고 받은걸로 하자. 자신의 목으로 내 손을 가져다댄다. 결국엔 이렇게 되어버리는구나. 나는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히 속삭이며 그대로 입을 목덜미로 가져갔다.
" 잘먹을께. "
그렇게 목덜미를 아프지 않게 깨문다. 양은 소중하니까, 상처는 나지 않게. 하지만 마치 표식을 남기듯이 그 잇자국만큼은 확실히 남기기 위해서 여러번이고 깨물었다. 입안 가득 들어오는 바닐라의 향을 가득 음미하면서. 한동안의 행위가 끝나고 나는 천천히 목덜미에서 입을 땠다. 이미 부정적인 감정은 어디가고 행복함만이 가득찼다. 말을 하면서 조금씩 깎여나갔던 무언가가 한번에 차오르는 느낌.
" ... 이제 집에 데려다줄께. "
학교는 너무 늦은 시간이다. 너무 늦게까지 있으면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이미 어느정도 괜찮아졌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하도 누군가 옆에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강해인: 086 가정은 화목한가요? : 아니요. 165 불확실성과 확실성 중 선호하는 것은? : 확실성. 하지만 도박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죠. 009 오랫동안 준비해온 고백(사랑고백, 비밀 등)을 망친다면 어떤 반응일까요? :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척, 괜찮은척 하면서 나중에 혼자 울 것.
슬혜의 흰 살결을 향해 날카로운 송곳니를 깊게 박아 넣을수록 마음 속의 빈 공간이 채워져간다. 깊은 갈라진 땅으로부터 수맥이 터져나와 주변을 부드럽게 적셔가듯이. 그렇게 흡혈귀가 피를 빨듯 그녀의 살냄새와 페로몬을 목덜미와 두 손으로부터 갈구하고, 그 대신 자신의 색으로. 줄 수 있는 아픔으로 슬혜를 채우려 했다. 주원의 무는 힘은 그것이 처음이라 힘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서투름과 그래도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는 위선에 가까운 걱정이 섞여 마땅히 깊은 곳까지 송곳니를 박아내진 못했다.
그 모든것에 취해 아득해진 정신을 되찾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동안 그녀는 그 어떤 소리도, 반항도 하지 않고 주원을 그저 내려다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채워진 마음에 정신을 차린 주원은 조심히 입을 떼고 본능적으로 깍지껴 억누르던 두 손의 힘을 빼고 깍지를 풀어주었다.
"미안해."
그녀의 목덜미에 난 선명한 잇자국. 피는 흐르지 않았지만 그것은 하루 이틀로 지워지기엔 부족할, 선명한 흉터의 흔적이었다. 그런 자신에 경멸한 것일까.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후회하고 있는 것일까. 주원은 누워있는 그녀의 옆에 털썩 쓰러져 벽에 등을 기대로 고개를 숙인다. 확실하게 채워져가는 감각. 그럼에도 아직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죽을 만큼 깊은 허기를 최소한 채운 주원이었지만 그는 아직 갈구하는 눈으로 슬혜를 응시했다.
무엇을 훔칠것인지에 대해선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아랑에게 한소리 듣는것이 두려워서였을까. 뭐가 되었던간에 지금 그에게는 그런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아랑의 진해진 페로몬이 코끝을 간질이고,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고 있어서였다. 지금은 농담보다는 갑작스럽게 자신이 아랑의 목덜미를 물어버리지 않도록 하는데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 ...그야, 해본적이 없었으니까. "
그는 아라의 질문에 대답하면서도, 왜 말을 하다 마냐는 의문이 담긴 시선을 그녀에게 보냈다. 그 뒤에 이어진 아랑의 행동에 대충 알았다고 대답하려는 듯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살짝 한번 쓸어내렸다. 아무튼 해본적이 없다는 말은 조금 충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평소 그의 행동거지를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긴 하지만...
" 나를 숨겨서 얻는게 뭐야? 내가 인간이라고 믿고 사귀는 친구들? 그런 허울뿐인 관계는 필요 없어. 내가 늑대라고 생각하면서도 같이 지낼 그런 사람들. 난 그런 관계를 원하는거야. "
늑대라는것에 불만을 품었던 적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남들과는 다른 자신에 대해 슬퍼했지만 그것은 그를 좌절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오히려 한발자국 더 나아가는데에 도움을 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려운 길이겠지만 그는 늑대라는것을 숨기고 살아가는 인생을 그만두었다. 오히려 자신이 늑대라고 당당히 밝히면서, 그것에 경계하며 떠나가는 사람은 잡지 않았다. 불편한 관계를 지속할 만큼 어리석은 늑대는 아니었으니까.
" 그래? 안좋은건가? "
외박.... 그에게 외박을 정말로 그냥 '밖에서 잔다' 혹은 '밖에서 밤을 샌다'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신체능력 특성상 위험했던 적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지금 아랑이 큰일 날 소리를 한다는 것에 대해 조금 의문을 품고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엄격한 얼굴로 훈계하는 아랑에게 뭐라 말대꾸는 못하고, 그냥 눈동자를 슬그머니 다른 쪽으로 돌렸을 뿐이다.
그런 작은 해프닝 뒤라도, 아랑의 목을 물었을 때의 만족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까부터 왠지 모르게 진해진 향이 계속해서 그를 미치게 하고 있던터라, 그는 몇십초 동안이나 그렇게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것을,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닭의 목을 비틀더라도 아침은 찾아오듯이, 입을 떼어내야 하는 순간도 오고야 말았다.
" .......? "
그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아랑을 마주보았다. '문다고? 나를? 그것도, 양이?' 그의 상식에서 벗어낫을듯한 그런 질문에 잠시 혼란에 빠져 뭐라 말하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고개를 느릿하게 한번 끄덕였다.
" 어... 그래라. "
자신은 두 번이나 아랑을 물었으니, 아랑도 한번쯤은 자신을 물어도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테다. 그는 아랑이 편하게 물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조금 낮춰주었다. 위아래로 마주치던 시선이 이제는 거의 정면에서 마주치고 있었다. 그는 아랑의 눈속에 빠져들어갈듯이 바라보다가, 눈을 감으며 목덜미를 내주었다.
우위를 점한 척 굴었지만, 이를 세워 타인의 살을 파고들 권리를 가진 건 늑대뿐이다. 목덜미에 이가 박힌 양은 고작해야 몇 번 바르작댈 수나 있겠지. 동물과 차이가 있다면 숨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걸까. <잘 먹을게.> 귓가에서 들리는 소리에 뒤늦게 덜컥 겁이 났다. 해인의 어깨를 붙잡는다. 목덜미에 이가 닿았다. 어깨를 쥐고 눈을 꽉 감았다. 너무 세게 감은 탓에 이따금 눈가가 경련했다.
늑대의 이는 살을 파고들지 않았다. 상처도, 피도 없었다. 여러 번 깨물린 자리가 조금 쓰리긴 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수차례 감당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이런 걸로 허기가 채워진다니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뭘 먹는 것도 아니고, 고작 몇 번 깨문 것 가지고. 하긴, 그렇게 따지면 누가 있어줘야 해소 되는 외로움도 말이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타인이 가진 것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제가 가진 걸 믿을 수 있다니. 진짜 이상한 일이다. 앞으로 이런 일을 몇 번이나 겪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까지도.
"아니야, 혼자 갈 수 있어."
사하가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기분은 아래쪽에서 선을 긋고 있다. 겨우 바닥을 탈출한 셈이다. 하지만 이제 누굴 보고 눈물을 쏟을 만큼은 아니었다. 허기를 채워주고, 덕분에 외로움을 견뎠으니 나쁘지 않은 거래다. 이성적인 사고는 아직까지 무뎠다. 그래도 이제 헤어질 시간이라는 건 알아.
"…시간이 늦었어. 각자 돌아가자."
말을 마친 사하가 그대로 동아리실을 빠져나갔다. 귀 한쪽이 먹먹해서 꼭 물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