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소년이 마주보는 시선은 고작 한칸 사이의 거리. 즐거운 재회라고 할 수 있었을까. 만월에 홀린 양과 늑대는 서로에 가까워졌다 착각했겠지만 사실 그건 달빛이 속삭이는 지독한 거짓말이었다. 감정이란 것은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조차도 바보로 만들어버릴만큼 얄궂다. 그러니 건네오는 손길을 거부할 수 없는 힘은 나에게 없다. 나 역시 달빛 앞에서는 무력한 한마리 늑대일 뿐이니까. 1년만이다. 만월과 마주하기 전까지 우리는 각자의 삶에 속해있었다.
"사는 건 숙제의 연속인가봐. 재미없는 일 투성이야."
오래오래 참았다가 쏟아져 내려오는 구름처럼 감정이 돋아나는 밤에 서로는 그리움을 솟구쳤다. 작게 감긴 목소리가 머나먼 영역을 향해 닿는다. 손이 닿아 멀지 않음에도 왜인지 나는 그렇게 느낄수밖에 없었다. 사실 인사할 기회는 얼마든 있었다. 당연히 알고 있을 일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1년 전의 밤이. 그래서 형이 보일때면 방향을 틀어 외면했었다. 그러니 마주칠수 없었던거지. 이 좁디좁은 새장 안에서도.
"그때 일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크크, 짓궂다 참. 내가 그걸 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밝은 빛이 내리는 밤, 어리석었던 실수에 응해주었던 모습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다음날이 되면 수치심에 침대 시트 위에서 이불을 뻥뻥 찼었지. 실없는 웃음이 새어나와 괜히 타박이 담긴 말을 흘려보지만, 나 역시도 쉽게 잊지 못했다.
밉다는 말에도 웃기나 하는 너. 참, 속도 없지. ……어디서 들은 말인 것 같다. 지금은 뱉고 싶은 말이다. 그때 그 애도 이런 마음으로 말했나. 이런 점이 싫다는 거야. 내가 나쁜 말을 했으면 너도 너를 보호해야지. 상처받지 않는 사람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어떻게 해? 그런 게 나를 외롭게 해. 옆에 있는데도 없는 것 같아서.
"무릎 꿇어도 용서 안 해줘. 울면서 빌어도 안 해줄 거야."
사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해인의 어깨에 걸쳐둔 얼굴 때문에 표정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 안 해. 그냥 네가 싫은 거야."
말과는 다르게 사하는 해인을 더 바짝 끌어안았다. 우리는 그냥 각자 난 길대로 뻗다 잠시 겹쳐진 직선에 불과하지. 함께 있던 시간은 순간의 점이고, 각자 가야 할 시간은 억겁처럼 긴. 혼자서는 쓸쓸하니까 그 순간을 붙잡는 거야. 펜을 계속 종이에 대고 있으면 잉크가 번지는 것처럼.
"그래도 솔직하게 말했으니까 봐줄게."
사하가 해인의 품에서 떨어져 나온다. 고개를 숙이고 손등을 덮은 카디건 소매를 걷고, 손목의 셔츠 단추를 풀어 접어 올렸다.
숨통을 끊기 직전의 먹잇감을 도망치지 못하게 포박하듯이 위에서 퇴로를 막은 주원은 슬혜를 내려다본다. 말 없이 지나가는 시간 속에선 마치 그 시간의 흐름을 알리듯 시계의 초침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사실은 주원의 탁상시계의 소리일 뿐이었지만. 도망칠 곳 없는 방 하나짜리 공간의 단 둘. 그럼에도 주원은 슬혜에게 마지막 선택을 양보했다. 마지막까지도 주원은 치사했다. 눈 앞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생크림 위에 탐스러운 과일 얹은 시트러스 케이크를 먹고 싶어서 안달난 주제에.
'네가 날 밀어낸다면.'
'나는 아마 네 눈 앞에서 사라질거야.'
'더이상 다음은 없겠지.'
그도 그럴것이, 이런 일이 있고도, 그렇게 거절당한 후에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할리 없지 않은가. 페로몬에 취한듯한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슬혜를 내려보고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최악의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슬혜의 낮잠에 취한듯한 손길이 주원의 상기된 볼을 향해 다가오고 그 손은 부드럽게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주원은 거부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 손길을 느꼈다. 그녀는 아마 마치 화상을 입을 듯이 뜨거운 뺨의 온도에 조금은 놀랄지도 모른다. 긴장하지 않고 있는 듯이 보여도 주원은 그녀가 거부하면 어쩔까 하는 두려움에 초침보다 빠르게 심장을 쿵쾅대고 있었고 그 긴장에 얼굴은 잔뜩 뜨거워져 있었으니까. 다만 그렇게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써 두려움을 억누르고 있었을 뿐이다.
먹이 뿐만 아닌, 포식자도 두려운 것이었다. 주원에게 있어서 이것은 단순히 먹고 끝내는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녀가 대답 대신 주원의 볼을 쓰다듬자 그는 희미하면서도 확실한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퇴로를 막고 있던 왼손을 들어 천천히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주원의 큰 손으로 전부 그녀의 볼을 쓰다듬기엔, 그녀의 얼굴은 작고 가녀려서, 엄지손가락과 엄지기부(엄지손가락이 이어지는 손바닥)로만 그녀의 볼을 쓰다듬는다.
그 어떤 말도 주고 받지 않고 그저 손짓만이 남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것은 확실히, 먹고 먹히는 그런 관계는 아니었다.
미움 받는 것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고작 고등학생이 할만한 생각은 아니었나보다. 있는대로 상처는 다 받아놓고 아무렇지도 않은척. 아물기는 커녕 곯아터지는데도 아무렇지 않은척. 하지만 내가 그런 사람인걸 어떡하겠어.
" 진짜 울면서 빌어도 안해줄꺼야? "
아까보단 좀 더 여유가 생겨서 농담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감정은 가라앉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평소의 성격으로 돌아가는건 무리. 그러니까 지금은 있는 그대로의 내가 노출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울면서 빌어도 용서 안해주면 조금 자존심이 상할지도?
" 그래 나한테는 너 밖에 없지만, "
그러니까 지금 감정에 충실하다는 소리는 결국 나 자신이 너무나도 솔직해진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서로를 싫어하는 입장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 너한테도 나 밖에 없는거 잘 알아. 은사하. "
지금 내가 당장 떠나버리면 너는 어쩌게? 은은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인다. 품에서 나온 사하의 얼굴은 아직도 눈물에 젖어있었고 그녀가 보는 내 얼굴도 비슷한 처지이지 않을까. 손목을 드러내는 것은 본체만체도 하지 않은채 얼굴을 아주 가깝게한다.
" 어때, 진짜 갈까? "
손을 들어서 손가락 끝으로 볼을 쓸어내리며 얘기했다. 늑대의 본성이란 원래 이런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