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안 해.>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상처주고 싶어. 그런데 정말로 해인이 울며 용서를 구할 거라는 생각은 한 적 없다. 말하면서도 또 웃고 넘어가겠거니 생각했다. 말은 안 한다고 했지만, 막상 그런 장면을 맞닥뜨리면 어떻게 될 지. 양은 외로움에 취약하니까, 늑대는 양의 약한 구석을 잘 파고들곤 하니까. 저도 모르게 손 내밀지 모른다.
동아리실에는 단 둘 뿐. 복도는 적막하다. 해인의 말이 맞았다. 해인에겐 사하뿐이지만, 지금 사하에게도 해인뿐이다. 처음부터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면 모르지. 잠시나마 외로움을 달래줄 누군가에게는 느껴질 리 없는 단 맛이 났다. 알고 나선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아주 달콤한 맛이었다.
"…가지 마. 옆에 있어."
사하의 얼굴이 다급한 기색을 띠며 일그러졌다. 불안한 눈초리로 해인을 살피다, 애원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로지 째깍거리는 시계소리만이 방을 가득 메웠다. 스스로도 시계초침으로 노이로제가 걸릴 거란 생각은 못했건만, 균일한 박자를 맞추어 심장이 두근거리는 기분이 드는 것은 무시할수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태연한 그녀는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기라도 한듯 어떤 저항도 없었고, 오히려 물지 못해 안달난 그에게 보란듯이 가르릉거리며 고양이의 소리를 흉내내고 있었을까? 당연스럽게도, 늑대소굴에 제발로 걸어들어간 것은 자신이었으니... 그 시점에서 무슨 결과가 도출될지는 이미 계산된 영역 내였다.
이미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오가는 것인지, 놀라우리만치 침착한 그의 시선은 마치 어느부분부터 맛을 봐야 케이크 본연의 맛을 느낄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와는 정 반대로, 마치 열병에라도 걸린듯 뜨거운 그의 뺨과 손가락 끝으로 전해져오는 미세한 두근거림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좀처럼 손을 떼질 못하고 있었다.
약하게나마 그에게서 전해지는 긴장감, 그것은 분명 '지금 당장 물어도 될까.'라는 고민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녀에게 있어선 이 다음 일을 생각하며 망설이고 있는 모습이 비추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름의 안심은 되었는지, 희미한 미소를 보이던 그 역시 천천히 왼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대야, 젠틀한 말은 굳이 마음속으로만 하지 않아도 된다구요? 적당한 언어유희도, 무드를 끌어올리기엔 충분할테니까요..."
살짝 상기된듯하면서도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로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그제서야 뺨을 어루만지던 자신의 손을 살며시 내려 그의 턱을 가볍게 그러쥐기 시작했다. 누워있는 사람치곤 꽤나 대담한 행동이었지만, 어쩌면 그녀이기에 가능한 도발이기도 했다.
"물론, 여기까지와서 순한 강아지 같은 행동을 하진 않으실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잔망스럽게 휜 눈웃음, 되려 본인이 물려고 하는 것처럼 이를 드러낸 그녀는 그럼에도 그가 움직이는걸 망설인다면 살며시 몸을 일으켜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뺨을 맞대려 했을 것이다.
눈에 잘 띄는 전통 양념 같은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거세게 휘날립니다. 다다다 학교를 뛰는 비랑의 다급한 얼굴을 찰싹찰싹 때리면서요. 왜 이렇게 야단인 걸까요? 설마 첫 등장을 멋지게 준비하려고 하는 걸까요? 비랑이는 벌써 2학년, 학교에 나오는 거 가지고 첫 등장이라고 하기엔 너무 늦어버렸을 땐데 말이죠. 아무튼 진지함이라곤 없는 이 붉은 늑대가 이렇게 급하게 달려오는 걸 보니 뭔가 큰일이 났나 봅니다.
" 와, 역대급으로 빨랐다. "
...아니었군요. 그냥 혼자 달리고 있지만 빨리 도착하고 싶었나봐요. 땀에 찬 이마에 달라붙는 빨간 머리카락을 손으로 홱홱 걷어 내면서, 숨이 차 쑤신 옆구리를 통통 두드립니다. 대체 어디부터 이렇게 달려온 걸까요? 미련하기도 하지. 정원에 위치한 오래된 벚나무 앞에 선 비랑이 웃는 얼굴로 주머니를 뒤적거려 쪽지 하나를 꺼냅니다. 어디어디, 소원 쪽지를 놓는 곳은 어디일까요? 공간이 있는 곳 반대편에서 손발로 나무에 찰싹 매달려 나무기둥의 단단한 껍질을 만지작거리는 비랑. 분명 누가 보면 벚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였을 겁니다.
" 찾았다! "
그걸 굳이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은 비랑은 끌어안던 불쌍한 벚나무님을 놓아주고 반대편으로 향합니다. 조그만 나무틈에 쪽지를 밀어넣고 아까 전까지 방정을 떨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드물게 진지해 보이네요. 꼬옥 두 눈을 감고 손을 모아선, 요정님이 놀라서 도망갈까 목소리도 내지 않고 속으로 소원을 간절히 빌어봅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짜라란, 쪽지가 있던 곳이 아주 깨끗하네요. 흔적도 없어요! 놀란 비랑이 펄쩍! 뛰어오르자 괜히 쌓여 있던 벚꽃잎만 팔랑팔랑 날리고 있습니다. 벚나무의 요정님이 야단이라며 귀를 막는 것처럼요. 그러거나 말거나, 신난 비랑은 다시 목적지도 없으면서 어디로 우다다다 달려갈 뿐입니다. 이 욕심 많은 소원들이 이뤄지긴 할까요. 하나가 이뤄지면 다른 하나가 이뤄질 수 없을 것 같단 느낌마저 드는, 그런 단순하고 별 거 없는 소원이...
하지만 그녀가 쉽사리 용서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고 용서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언젠가 그녀에게는 정말 울며불며 용서를 구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때 사하는 어떤 반응을 취할까. 그대로 냉정하게 꼴좋다고 비웃으며 날 떠나갈까, 아니면 손을 내밀어줄까. 어떤 것이 되어도 괜찮지만 개인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은-.
" 강한척하지마 은사하. 너가 나에 대해서 아는만큼 나도 너에 대해서 잘 아니까. 좀 더 애원해, 그리고 매달려. "
뺨을 쓰다듬는 내 손에 그녀가 기대온다. 늑대가 양을 잡아먹기 전에 행하는 유희 마냥 저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흘러나온다. 나중의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저 본능에 충실하기로 마음 먹는다. 밤이 깊어질수록 만월의 기운이 강해질테니까. 볼을 쓰다듬던 손을 그대로한채 눈을 마주친 나는 그녀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아주 작게 속삭이듯 읊조린다.
" 그만큼 너가 원하는대로 다 해줄테니까. 해달라는건 뭐든. "
분명 눈은 웃고 있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나 자신이 이런 눈빛을 보일 수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이 사람, 은사하가 너무나도 먹음직스럽다는 것이다. 휘몰아치던 부정의 소용돌이가 가라앉은 자리에는 이성 대신 본능만이 들어차기 시작했으니까. 볼을 쓰다듬던 손가락이 입술 근처를 지나가려 슥 움직인다.
시아는 조심스럽게 소원을 적은 예쁜 편지지를 접어선 학교 정원의 벚나무 아래로 향한다. 원래라면 이런 소원을 믿지는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왠지 요즘은 이런 것에도 믿음이 생기는 것은 어째서일까.
조심스럽게 소원이 적힌 편지지를 나무 기둥 틈에 밀어넣고는 눈을 꼭 감아봅니다. 살들 산들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어주는 느낌이 좀 더 확실하게 느껴집니다. 자신의 소원을 떠올리는 시아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 별거 아닌 소원일지도 모르지만 부디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
금은보화를 달라는 소원 따위는 아니지만, 시아에게는 의미가 있는 그 소원을 예쁜 편지지에 적어 나무 기둥 틈에 밀어넣은 시아는 두손을 모으고 간절하게 소원을 빌기시작합니다. 부디 자신의 마음을 누군가가 알아주어 이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몇분이고 두눈을 감은 체 ,마음속으로 몇번이고 되뇌인다.
(프로주접러들을 피해 도망치는 비랑이) >>264 귤 이모지 단 규리주가 더 귀엽다! >:3 >>266 아닛?! 커다란 벚나무는 누구나 좋아할 만하지! 아쉽게도 귀요미 랭킹엔 출전하지 않을 예정이닷. >>267 378493918662원이라니 너무 많잖아! 길쭉한 과자 짧은 과자 네모난 과자 동그란 과자 바삭한 과자 부드러운 과자 다 사서 바구니 하나 정도 꽉 채워주면 공중제비 돌고 손도 줄 거라굿. >>268 (홍삼캔디 같은 것만 아니면 대부분...)
말 없이 서로의 볼을 쓰다듬는 그 순간이 그녀에겐 조금 어색하게 느껴진 것인지 무엇이라도 말해보라 한다. 그것에 주원은 베시시 웃으며 할 말 마저 잊어버렸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 감정 또한 진실이었으니까.
허기로 가득했던 마음이, 조금씩 채워져간다. 기나긴 공복의 끝에 그렇게도 먹고 싶었던 그것을 입에 넣듯이. 그러나 주원은 그것을 게걸스럽게 입에 채워넣진 않았다. 최대한 있는 힘을 다해. 마지막 남은 마음을 쥐어짜 입을 열었다.
"어쩌면, 내가 맞는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어쩌면, 지금이 옳은 때가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 나는. 네가 아니면 안돼."
주원은 슬혜의 어둠으로 끌어내리는듯한 보라빛 눈동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또렷하게. 거짓 한톨 없는 목소리로. 단순한 양과 늑대의 서로를 채우는 행위. 그렇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서로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한, 한낱 하룻밤에 불장난에 불과한 것. 혹은 인공호흡같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되는지도.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 늑대는 그렇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주원은 그녀의 볼을 매만지던 왼손을 열쇠를 쥐어준 그녀의 오른손에, 주원의 볼을 매만지던 왼손을 오른손으로 거두어 깍지를 끼려 했다. 그리고 그녀가 그것에 응한다면, 주원은 천천히 입을 벌리고, 그 먹음직스런 조각케이크에 천천히 이빨을 갖다댈 것이다.
목 위에 이빨을 갖다대어 목에 들어오는 감촉. 허기를 참아온 자의, 입 안의 뜨거울 정도로 농도 짙은 숨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박혀들어오는 이의 감촉. 한순간에 고통을 끝내는 것이 아닌, 시간의 초침보다 느리게 흐르는 아픔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게. 언젠가 목의 상처가 사라지더라도, 슬혜의 기억에서 절대 지울 수 없게. 마치 자신의 이로 각인을 새겨넣듯이.
주원의 심장박동은 점점 빨라지고 피냄새를 맡은 육식동물같이 그것을 더욱, 더욱 추구하고 원하고 있었다. 슬혜의 두 손과 깍지낀 손의 힘이 억누르듯 지그시 강해져간다.
평소에 하는 말은 딱히 들어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아니 이따금은 자기 고집을 좀 부려줬으면 했다. 그러나 사라의 말을 따르는 것이 시아의 고집이었다. 그게 부담스러워서, 사라는 시아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자기 행복을 찾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런데, 하필이면, 지금, 드물게도... 한 달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할 만큼 드물게 있는, 시아가 자기 말을 들어줬으면 하는 하필 이 순간에. 시아의 얼굴에 미소가 걸리는 순간 사라의 등골에 저주받은 계시와도 같은 섬뜩한 몸서리가 훑고 지나갔다. 그렇잖아도 창백하게 질려 있던 사라의 얼굴은 숫제 납빛이 되었다.
"공원이 아니라… 병원에… 가야 하는데……."
시아가 손목을 움켜쥐는데도 사라는 변변한 반항 하나 하지 못했다. 사라는 문득 마치 자기 목에 단단한 개줄이 채워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러면……."
안돼. 시아의 손끝이 자기 피에 물들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사라는 몸부림을 쳤다... 아니 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비틀거리는 다리는 씰룩이지조차 않았고, 사라의 다른 손이 힘없이 시아의 손을 자신의 얼굴에서 밀어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이었다. 그 손마저도 결국 시아의 손을 그러쥐었고.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 있던 기하학적인 수식들이 사라지고, 과부하가 걸려 몽롱하던 의식이 차차 또렷해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생각이 사라진 자리에 본능이 와글와글 들어차고 끓어오르고 있는 것을. 이제 시아를 밀어내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이유가 무기력 때문이 아니라 본능 때문으로 바뀌었음을. 아아. 배고파.
"시아야…"
그렇지만 사라는, 시아와 사라라는 관계의 이름이 양과 늑대라는 미친 운명에 더럽혀지도록 두기 싫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오직 사라만이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사라는 힘겹게 입을 열었지만, 가엾게도,그 입마저 이미 본능이 지배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