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친구를 집에 초대한듯 큰 거리낌 없이 말하는 그라곤 해도 역시 컴퓨터는 최후의 보루인가보다. 다만 그것을 억지로 열 생각도, 의욕도 들지 않았던 그녀였기에 예상외의 친절함(?)에 감탄 아닌 감탄사를 흘려보냈을까? 아무리 그녀가 고양이같은 훼방꾼의 성질을 가졌다 한들 가죽은 사람, 그 본질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닥에 드러누운 지금만큼은 그저 사람의 탈을 쓴 고양이나 마찬가지였을까, 단순히 눕는 것도 모자라 뒤척이다가도 똑바로 누워선 한참 윗공기에 있는 그를 올려다 보았다.
신발을 정리하는 모습, 책상 위에 안경을 내려놓고선 눈 주변을 마사지하는 모습까지 주욱 지켜보던 그녀는 이쪽 가까이 다가왔던 그가 슬쩍 내려다보는것 같다가도 이내 양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 양 옆에 탁 소리가 날 정도로 내려놓자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살아생전 벽쿵은 들어봤어도 바닥쿵은 들어본적이 없었을까? 그런데도 그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걸 수행하고야말았다.
"음~ 이 상황은 뭘까요~?"
위아래로도, 양옆으로도 옴짝달싹 못하게된 그녀였지만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눈매를 휘며 웃어보였을까? 날선 눈이 계속 자신을 눈여겨보다가 이내 오른손을 움직여 무언가를 쥐어주고는 그것에 대해 알려주자 그녀는 못말리겠다는듯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만약 그를 밀쳐낸다면? 예상하건데 별 힘을 주지 않아도 저항했다는 그 자체에서 그는 순순히 물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가 예의바른 늑대라면... 그럼 이 상황을 받아들인다면? 분명 그 뒤는 그녀의 예상대로 흘러가겠지. 최후의 순간에도 선택권을 주다니, 자신의 영역에까지 먹이를 몰아넣은 포식자의 행동치고는 꽤나 관대해보였다.
넥타이가 흘러내리는 모습에 열쇠가 쥐어진 손은 그대로였지만 그녀의 다른 손은 그의 생각대로 위를 향해갔다. 하지만 그것은 넥타이를 휘어감아 잡아당기려는 것이 아닌, 그보다 더 위에 있는 그의 얼굴까지 닿으려 했을까?
"......"
딱히 말을 하진 않았지만 애틋하면서도 그만큼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려 했다. 차분한 웃음과 상냥한 손길, 그럼에도 여전히 냉랭하게 느껴질 수 있는 적막한 실내였지만 그녀는 그런 풍경이 제법 마음에 들었을런지도 몰랐다. 그래도 언젠가 넘겨야 할 고비라면, 이렇게나마 그에게 도움받는 것도 나쁘진 않을거라 생각하는 그녀 역시 이 공간에 함께 있었기 때문일까? 분명 고양이는 없는데도, 어디선가 기분좋게 골골거리는 낮은 소리가 들려왔다.
두 소년이 마주보는 시선은 고작 한칸 사이의 거리. 즐거운 재회라고 할 수 있었을까. 만월에 홀린 양과 늑대는 서로에 가까워졌다 착각했겠지만 사실 그건 달빛이 속삭이는 지독한 거짓말이었다. 감정이란 것은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조차도 바보로 만들어버릴만큼 얄궂다. 그러니 건네오는 손길을 거부할 수 없는 힘은 나에게 없다. 나 역시 달빛 앞에서는 무력한 한마리 늑대일 뿐이니까. 1년만이다. 만월과 마주하기 전까지 우리는 각자의 삶에 속해있었다.
"사는 건 숙제의 연속인가봐. 재미없는 일 투성이야."
오래오래 참았다가 쏟아져 내려오는 구름처럼 감정이 돋아나는 밤에 서로는 그리움을 솟구쳤다. 작게 감긴 목소리가 머나먼 영역을 향해 닿는다. 손이 닿아 멀지 않음에도 왜인지 나는 그렇게 느낄수밖에 없었다. 사실 인사할 기회는 얼마든 있었다. 당연히 알고 있을 일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1년 전의 밤이. 그래서 형이 보일때면 방향을 틀어 외면했었다. 그러니 마주칠수 없었던거지. 이 좁디좁은 새장 안에서도.
"그때 일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크크, 짓궂다 참. 내가 그걸 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밝은 빛이 내리는 밤, 어리석었던 실수에 응해주었던 모습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다음날이 되면 수치심에 침대 시트 위에서 이불을 뻥뻥 찼었지. 실없는 웃음이 새어나와 괜히 타박이 담긴 말을 흘려보지만, 나 역시도 쉽게 잊지 못했다.
밉다는 말에도 웃기나 하는 너. 참, 속도 없지. ……어디서 들은 말인 것 같다. 지금은 뱉고 싶은 말이다. 그때 그 애도 이런 마음으로 말했나. 이런 점이 싫다는 거야. 내가 나쁜 말을 했으면 너도 너를 보호해야지. 상처받지 않는 사람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어떻게 해? 그런 게 나를 외롭게 해. 옆에 있는데도 없는 것 같아서.
"무릎 꿇어도 용서 안 해줘. 울면서 빌어도 안 해줄 거야."
사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해인의 어깨에 걸쳐둔 얼굴 때문에 표정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 안 해. 그냥 네가 싫은 거야."
말과는 다르게 사하는 해인을 더 바짝 끌어안았다. 우리는 그냥 각자 난 길대로 뻗다 잠시 겹쳐진 직선에 불과하지. 함께 있던 시간은 순간의 점이고, 각자 가야 할 시간은 억겁처럼 긴. 혼자서는 쓸쓸하니까 그 순간을 붙잡는 거야. 펜을 계속 종이에 대고 있으면 잉크가 번지는 것처럼.
"그래도 솔직하게 말했으니까 봐줄게."
사하가 해인의 품에서 떨어져 나온다. 고개를 숙이고 손등을 덮은 카디건 소매를 걷고, 손목의 셔츠 단추를 풀어 접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