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통을 끊기 직전의 먹잇감을 도망치지 못하게 포박하듯이 위에서 퇴로를 막은 주원은 슬혜를 내려다본다. 말 없이 지나가는 시간 속에선 마치 그 시간의 흐름을 알리듯 시계의 초침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사실은 주원의 탁상시계의 소리일 뿐이었지만. 도망칠 곳 없는 방 하나짜리 공간의 단 둘. 그럼에도 주원은 슬혜에게 마지막 선택을 양보했다. 마지막까지도 주원은 치사했다. 눈 앞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생크림 위에 탐스러운 과일 얹은 시트러스 케이크를 먹고 싶어서 안달난 주제에.
'네가 날 밀어낸다면.'
'나는 아마 네 눈 앞에서 사라질거야.'
'더이상 다음은 없겠지.'
그도 그럴것이, 이런 일이 있고도, 그렇게 거절당한 후에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할리 없지 않은가. 페로몬에 취한듯한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슬혜를 내려보고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최악의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슬혜의 낮잠에 취한듯한 손길이 주원의 상기된 볼을 향해 다가오고 그 손은 부드럽게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주원은 거부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 손길을 느꼈다. 그녀는 아마 마치 화상을 입을 듯이 뜨거운 뺨의 온도에 조금은 놀랄지도 모른다. 긴장하지 않고 있는 듯이 보여도 주원은 그녀가 거부하면 어쩔까 하는 두려움에 초침보다 빠르게 심장을 쿵쾅대고 있었고 그 긴장에 얼굴은 잔뜩 뜨거워져 있었으니까. 다만 그렇게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써 두려움을 억누르고 있었을 뿐이다.
먹이 뿐만 아닌, 포식자도 두려운 것이었다. 주원에게 있어서 이것은 단순히 먹고 끝내는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녀가 대답 대신 주원의 볼을 쓰다듬자 그는 희미하면서도 확실한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퇴로를 막고 있던 왼손을 들어 천천히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주원의 큰 손으로 전부 그녀의 볼을 쓰다듬기엔, 그녀의 얼굴은 작고 가녀려서, 엄지손가락과 엄지기부(엄지손가락이 이어지는 손바닥)로만 그녀의 볼을 쓰다듬는다.
그 어떤 말도 주고 받지 않고 그저 손짓만이 남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것은 확실히, 먹고 먹히는 그런 관계는 아니었다.
미움 받는 것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고작 고등학생이 할만한 생각은 아니었나보다. 있는대로 상처는 다 받아놓고 아무렇지도 않은척. 아물기는 커녕 곯아터지는데도 아무렇지 않은척. 하지만 내가 그런 사람인걸 어떡하겠어.
" 진짜 울면서 빌어도 안해줄꺼야? "
아까보단 좀 더 여유가 생겨서 농담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감정은 가라앉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평소의 성격으로 돌아가는건 무리. 그러니까 지금은 있는 그대로의 내가 노출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울면서 빌어도 용서 안해주면 조금 자존심이 상할지도?
" 그래 나한테는 너 밖에 없지만, "
그러니까 지금 감정에 충실하다는 소리는 결국 나 자신이 너무나도 솔직해진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서로를 싫어하는 입장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 너한테도 나 밖에 없는거 잘 알아. 은사하. "
지금 내가 당장 떠나버리면 너는 어쩌게? 은은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인다. 품에서 나온 사하의 얼굴은 아직도 눈물에 젖어있었고 그녀가 보는 내 얼굴도 비슷한 처지이지 않을까. 손목을 드러내는 것은 본체만체도 하지 않은채 얼굴을 아주 가깝게한다.
" 어때, 진짜 갈까? "
손을 들어서 손가락 끝으로 볼을 쓸어내리며 얘기했다. 늑대의 본성이란 원래 이런 것이니까.
사하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안 해.>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상처주고 싶어. 그런데 정말로 해인이 울며 용서를 구할 거라는 생각은 한 적 없다. 말하면서도 또 웃고 넘어가겠거니 생각했다. 말은 안 한다고 했지만, 막상 그런 장면을 맞닥뜨리면 어떻게 될 지. 양은 외로움에 취약하니까, 늑대는 양의 약한 구석을 잘 파고들곤 하니까. 저도 모르게 손 내밀지 모른다.
동아리실에는 단 둘 뿐. 복도는 적막하다. 해인의 말이 맞았다. 해인에겐 사하뿐이지만, 지금 사하에게도 해인뿐이다. 처음부터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면 모르지. 잠시나마 외로움을 달래줄 누군가에게는 느껴질 리 없는 단 맛이 났다. 알고 나선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아주 달콤한 맛이었다.
"…가지 마. 옆에 있어."
사하의 얼굴이 다급한 기색을 띠며 일그러졌다. 불안한 눈초리로 해인을 살피다, 애원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로지 째깍거리는 시계소리만이 방을 가득 메웠다. 스스로도 시계초침으로 노이로제가 걸릴 거란 생각은 못했건만, 균일한 박자를 맞추어 심장이 두근거리는 기분이 드는 것은 무시할수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태연한 그녀는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기라도 한듯 어떤 저항도 없었고, 오히려 물지 못해 안달난 그에게 보란듯이 가르릉거리며 고양이의 소리를 흉내내고 있었을까? 당연스럽게도, 늑대소굴에 제발로 걸어들어간 것은 자신이었으니... 그 시점에서 무슨 결과가 도출될지는 이미 계산된 영역 내였다.
이미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오가는 것인지, 놀라우리만치 침착한 그의 시선은 마치 어느부분부터 맛을 봐야 케이크 본연의 맛을 느낄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와는 정 반대로, 마치 열병에라도 걸린듯 뜨거운 그의 뺨과 손가락 끝으로 전해져오는 미세한 두근거림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좀처럼 손을 떼질 못하고 있었다.
약하게나마 그에게서 전해지는 긴장감, 그것은 분명 '지금 당장 물어도 될까.'라는 고민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녀에게 있어선 이 다음 일을 생각하며 망설이고 있는 모습이 비추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름의 안심은 되었는지, 희미한 미소를 보이던 그 역시 천천히 왼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대야, 젠틀한 말은 굳이 마음속으로만 하지 않아도 된다구요? 적당한 언어유희도, 무드를 끌어올리기엔 충분할테니까요..."
살짝 상기된듯하면서도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로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그제서야 뺨을 어루만지던 자신의 손을 살며시 내려 그의 턱을 가볍게 그러쥐기 시작했다. 누워있는 사람치곤 꽤나 대담한 행동이었지만, 어쩌면 그녀이기에 가능한 도발이기도 했다.
"물론, 여기까지와서 순한 강아지 같은 행동을 하진 않으실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잔망스럽게 휜 눈웃음, 되려 본인이 물려고 하는 것처럼 이를 드러낸 그녀는 그럼에도 그가 움직이는걸 망설인다면 살며시 몸을 일으켜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뺨을 맞대려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