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응~ 그야 당연히 이야기만으로 다 담아낼 수 없을 만큼 보고 싶었지~? 반응 보니까, 역시 내가 찾아올줄은 모르고 있었구나! 이래서 깜짝 방문은 재미있는 법이라니까~"
재미있는 게 아니라 예의가 없는 일이지만 당연하다시피 그런 것을 신경쓸 주양이 아니었다. 그저 지금 당장의 반응. 평소에 보지 못했던 또 다른 모습을 보기만 하면 그것만으로 만족하며 충분히 재미있어하는 것이다. 방 안 이곳저곳을 살피며, 현궁은 이런 느낌이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사실 주궁과 크게 다를것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기숙사는 방이 크고. 또 어느 기숙사는 방이 작고. 그런 부조리함은 없을 테니. 다만, 역시 크게 체감되는 것은 온도 차이였다. 항상 껴입고 다니는 주양에게는 딱 맞을지도 모를 그런 선선함이었다. 어쩌면 밖이 더우니, 너프를 먹은 걸지도 모르겠지만.
"에이,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 아니겠어? 편지를 보내고 가는 건~ 뭐랄까. 귀찮달까! .. 라고는 해도. 요즘 생각할게 좀 많아져버려서, 머리좀 비울 겸 바람쐬면서 걸어와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지 뭐야~"
평소대로 능청스러운 당신을 보며 방싯 웃었다. 그래. 역시 사람 선택 하나는 잘 한것 같아. 적어도 당신이라면 지금의 이 깊어져가는 생각의 굴레에서 조금 숨통을 틀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하고 찾아왔는데, 기대를 져버리지 않아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지금은. 다시 이렇게 서로 이해자가 될 수 없으면서도 이해한다고 하던, 옛날부터 쭉 해오던 그 역극에만 집중하면 될 테니까.
일단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말을 꺼내기는 했어도, 내심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나 사실 현궁 학생이야! 하고 구라를 치는 건 어디까지나 주양 자신이 조용하고 온순하며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어야 믿고 넘어갈 일이지, 평소 쌓아온 업보와 행동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위치를 떠올리면 아주 무의미한 쌩 구라였다. 물론 룸메이트에게는 쫌생이처럼 일러바치면.. 알지? 하고 위협을 하는 것도 좋은 대책이 될테지만 역효과를 불러온 적이 한두번이 아니라.
말은 그렇게 했으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당신에게 착 붙어서는 조잘거리는 폼이, 아무래도 막 급하게 나갈 생각은 없어보이는 듯 싶었다. 지금 상황이 무언가에게 쫓기는 것도 아니고, 책임지는 건 당신이 아니라 자신이니까 꽤 느긋한 모습이었다. 룸메이트라는 사람이 그렇게 일찍 올 것 같지도 않았고. 걸려도 기숙사 점수 조금 깎이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 하는, 그런 당당함이 있었다. 그동안 심부름을 열심히 돌며 기숙사 점수를 꽤 많이 쌓아뒀으니까.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는 와중에도 주양은 여전히 당신에게 들러붙은 채 여유만만하게, 느릿느릿하게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시원한 현궁 공기가 꽤 기분 좋았다. 그동안 쌓인 일들으로 과부하된 머릿속이 시원하게 식혀지면서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참. 우리 여보야~ 아까전에 책상 위에 있던 편지들은 뭐야, 응? Hoxy... 러브레터? 꺄하핫! 역시 우리 여보라면 그런거 엄청 받을 줄 알았어~"
뭐든 멋대로 떠올리고서 짐작하고 그게 진짜인 양 꺼내는 것도 이젠 버릇이었다. 지금껏 만난 사람들에게 진짜 미움받지 않은 것만 해도 기적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떻게 이런 성격인데 얘가 미움받지 않을 수 있지?
유령은 무섭지만 그 외의 것은? 무섭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정정하겠다. 이젠 MA 말고 모든것이 두렵지 않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기린궁에 들어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의 마인드가 심어졌기는 하나, 그럼에도 옮기지 않는 건 역시 공명정대한 것은 제 특유의 성질머리와 맞지 않는다는 불굴의 고집 때문이었다. 아무튼 중요한건 그게 아니고, 하물며 유령이나 MA보다 덜 무섭게 생긴. 되려 조금 귀여울지도 모를 설녀한테라면. 뭔들 못 사줄까?
"... 당과점. 지금은 괜찮을까나..~"
그때. 무기 사감님을 끌고 겨우겨우 당과점을 나와 어떻게든 학원까지 돌아가기는 했다만.. 그 이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았다. 8살때의 몸과 허약했던 그때의 체력으로 돌아간 채,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어른을 들쳐매고 학원까지 돌아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마차라는 현명하고 좋은 선택지가 있으나... 머리가 무식하면 몸이 고생한다고, 딱 그런 꼴이 된 것이다. 어찌저찌 학원까지 돌아가고. 기숙사 방에 들어서자마자 쓰러져 기절하듯 잠들었던 것이다. 생각난 김에. 이번엔 마차를 이용해서 당과점까지 향하기로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몇 개를 사줘야하나 곰곰히 생각했다. 2개로는 아무래도 영 쪼잔하다. 5개? 뭔가 애매하다. 한참 고민하던 주양은 이윽고 손가락을 탁 튕겼다. 그래. 어차피 쌓아둔 갈레온은 넘치고 또 넘친다. 그렇다면, 그동안 갈고 닦아두었던 갈레온이 오늘에서야 빛을 볼 때가 아니겠는가?
"자. 여기 60 갈레온이요!"
그렇게 풀매수하다시피 쓸어담은 지렁이 젤리 20봉지를 한가득 안아들고서 당과점을 나선다. 주변 사람들이 본다면 도대체 뭐 하자는 사람인가 싶을 모양새였다..
양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정말 드릴 말씀이 없어요. 제 이기심 때문에 괜히 상처를 드리는게 아닐까 싶어서. 그냥...그런 것 같아서..죄송합니다. 죄송해요.
귀속이 풀려도 괜찮습니다. 차라리 제가 더 유한 성격인 아이로 데려왔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겠거니 싶었네요. 정말 많이..예뻤어요. 일단 벨을...한대만 세게 칠게요.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이..이 나쁜 녀석아. 누가 중립이라면서 삶을 자처하래..! 내가 그렇게..키웠어도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아니근데진짜..!((때려요...!! 아주 세게 때려요!!!))
그녀는 머리장식과 귀걸이를 제외한 장신구는 잘 하지 않는 편이었다. 반지나 팔찌는 손이 걸리적거리고, 발찌도 같은 이유로 해본 적이 없다. 하물며 목에 거는 것들은 오죽할까. 초커는 간지러워서 싫고 목걸이는 조금만 격하게 움직여도 팬던트가 몸을 때리는 감각이 싫었다. 남매들이 매년 선물로 준 악세사리도 선물받은 그대로 고이 모셔두기만 한지 몇년이던가.
그랬던 그녀가 가는 사슬로 메인 목걸이를 했다. 잠금을 푸는 고리도 없이 하나의 고리로 된 그걸 과연 목걸이라 불러야 할까 싶지만, 그것만 빼면 길게 늘어진 모양새가 목걸이와 다를 바가 없다. 늘어진 끝에 달린 로켓이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걸 모른다면 말이다.
"...후훗."
라온으로 향하는 길, 마차 안에서 바깥을 보다가 가슴팍에 슬쩍 손을 대고 가늘게 웃었다. 목에 둘러진 사슬은 어쩔 수 없지만 로켓만큼은 옷 안쪽에 잘 가려둔 상태였다. 그 위로 손을 대면 감촉이 살짝 느껴져, 손끝에 그 감촉이 닿을 때마다 웃음이 나는 걸 참을 수가 없다. 마차 안에 그녀 혼자라서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혼자 웃는 그녀를 보고 무슨 말이 퍼졌을지.
내리기 전에 그녀는 옷깃을 한번 손봐서 로켓을 단단히 가린 후 손에 작은 가방만한 꾸러미를 들고 내렸다. 복주머니를 닮은 꾸러미는 이미 뭔가 들은 듯 불룩하다. 왠지 달달한 향이 나는 것도 같고. 주머니의 끝을 손목에 걸고 가방마냥 들고서 라온의 거리로 들어갔다. 그 난리가 나고, 사단이 있었어도 오늘도 학생들은 이 유희의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리다는 건 정말 좋은 장점이네. 응. 그런 생각을 하며 길을 따라 마냥 걸어본다. 어딘가 목적이 있는 듯, 하면서도 그냥 정처없이.
이불 속에 숨어서도 할 말은 하는 레오였다. 그렇게 맞고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걸 아는 상황에서도 할 말은 하고야마는 그런 성격인것이다. 이불로 몸을 두르고 있으니 맞아도 덜 아플것 같았고 무언가 안심이 되어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것이겠지. 문제라면 이불속에 있으니 갑갑하고 숨이 조금 막힌다는 것이었을까. 이대로 어떻게든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맞더라도 버티고 숨이 막혀도 조금만 버티자. 상대방이 흥미를 잃을때까지.
" ...! "
지금 나가면 유리병을 준다는 말. 그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 레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머리를 빠르게 굴리면서 어떤것을 선택하는게 맞는 것일까. 밖으로 나간다면 또 머리에 불이나고 볼이 쭉 잡아당겨지며 물건을 보듯 이리저리 품평을 당하겠지. 하지만 반대로 밖으로 나가면 유리병을 받을 수도있고 그럼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가능성이 생긴다. 레오는 결정을 마친듯 꿈지럭거리며 이불속에서 얼굴만 내밀었다.
" 너 그 말 진짜야? 그 말 지킬 수 있어? "
잔뜩 만져져서 홍조를 띄듯 빨개진 볼을 한 레오는 부- 한 표정으로 주양을 빤히 쳐다보았다. 적어도 자기가 한 말은 지키겠지. 이래봬도 주궁의 학생대표인데다가 자신의 숙적이니까. 그 정도 자존심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었다. 다시 이불 속으로 몸을 숨긴 레오는 음.. 으음... 하고 잠시간 더 고민하다가 꼼지락거리며 이불 속에서 완전히 몸을 드러냈다.
" 약속지켜. 그리고 한 가지 더. 밖에 나가면 너, 나 지켜줘야해. "
어차피 유리병을 찾으려면 밖에 나서야한다. 레오는 자기 볼이 잡히고 머리에 꿀밤을 맞는 한이 있더라고 걸어볼만한 도박이지. 레오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주양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눈을 질끈 감았다. 볼을 잡으려면 잡고 머리를 때리려면 때리라는듯 그렇게 눈을 질끈감고 다가오려는 미래를 맞이하려했다.
할미탈이라 불린 남성이 엎어진 청년의 등에 다리를 꼬고 앉았습니다. 그의 손에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고 머리는 풀어헤쳐졌습니다. 졸지에 바닥에 눌린 청년은 앓는 소리를 내며 1분 간, 인간 의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 각시탈. ' ' 어, 어? '
할미탈의 부름에 갓을 쓴 청년을 보면서 비웃던 각시탈이 화들짝 놀란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할미탈은 머리를 틀어 올려서, 다시금 자신의 지팡이를 비녀처럼 고정시켰습니다.
' 나갔다 올 동안에, 초랭이가 쓸 데 없는 짓 하지 않게 감시 잘 해. ' ' 어..... ' ' 돌아올 때, 내가 시체 두 구 정도는 가져올게. 백정이 부르기도 했으니까. ' ' 내가 그런 걸로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다면.... 정답입니다! 잘 다녀오세요! 선생님!!! '
각시탈이 깍듯하게 인사하자, 초랭이 탈은 ' 배신자.. ' 하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나갈 채비를 마친 할미탈은 한 쪽 머리에 자신의 할미탈을 대충 올려뒀습니다. 돌아올 수 있는 준비물은 다 준비 되었네요.
그는 라온으로 향할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미치광이들과 같이 있으면, 자신의 상식이 망가져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요.
' 어? '
그는 펠리체를 발견한 할미탈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습니다.
' 수업은 다 끝났나보네? '
펠리체에게 다가간 그가 고개를 한 쪽으로 비뚜름하게 기울이며 물었습니다. 아무래도, 학생이 있으니까요. 손톱을 길게 기르고 염색했으며 치파오를 입은 남성의 모습은 어떻게 비춰질지는 모릅니다. 할미탈은 그걸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니까요.
마차를 이용한 것은 꽤 현명한 선택이었다. 20봉지를 다 들고 도보를 이용해 돌아갔다가는 분명 이 날씨 속에서 녹고 엉겨붙은 황천의 꾸물거리는 지렁이 뭉치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초콜릿 때야 들고 냅다 달렸으니 되었다지만, 지금 이건 두 손 가득 담아두고 뛰었다면 분명 중간중간 흘리는 게 있고. 그거 줍고 뛰고의 반복이었을 테니까. 그런 당연한 사실을 처음으로 도출해낸 제 지능에 주양은 굉장히 만족하는 듯 보였다.. 놀랍게도.
"네가 설녀니? 자, 요청했던 지렁이 젤리 가져왔어! 앞으로도 주궁 최고 갑부인 내가 잔뜩잔뜩 사줄 테니까,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만 하렴~!"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게 두가지 있었다. 말로 표현한 것에서의 오류는, 일단 주양은 최고 갑부가 아니다. 자신의 기숙사에서도 자신보다 더 열심히 심부름을 뛴 학생도 있을 것이고,자신보다 더 많은 양의 갈레온을 소지한 사람도 있을 테니까. 마음 속으로 떠올린 것에서의 오류는, 진짜 갑부는 돈을 아끼며 과소비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돕는 것이 과소비라고 할 순 없겠지만, 하여튼 모은 돈을 가차없이 써대는 것부터가 모순이었다. 당장 지금 소지한 갈레온을 다 탕진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어버리는 것을.
여튼, 뿌듯한 마음으로 설녀에게 지렁이젤리를 한아름 안겨주면서 주양은 한쪽 눈을 찡긋였다. 뭔가.. 자신이 학원에서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도울 거라고는 예상도 못 했는데. 교수님도. 주작도. 그리고 설녀도. 생각보다 훨씬 착실해진 자신의 모습이 꽤 우스웠다. 확실히 무뎌졌다니까,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