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예전이랑 비슷한 상황이 반복적으로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두번 연속으로 크루시오를 맞았다고 한들. 작열통에 익숙해지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게 익숙해지면 사람인가? 돌덩어리겠지. 적어도 주양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 걸음 물러나 이를 악물었다.
"보자보자 하니까 진짜...!! 죽여버릴거야. 넌 내가 재도 안 남게 태워주겠어...!!!"
아득바득 악을 쓰며 상대에 대한 저주를 내질러대던 주양은 이윽고 주저앉았다. 지금 더 서있는 것은 무리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야만 해. 입술 사이를 비집고 새어나오는 신음을 꾹 억눌러가며 주양은 바닥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래. 그때도 그랬지만. 금새 다시 싹 가시겠지. 그 이후에도 얼얼하고 아린 느낌이 끝 없이 맴돌아 남아있겠지만... 한 번 당해봤으니까. 다시는 무기력하게 파들대며 있지만은 않을거야.
"안 닿으니까 어떠냐고....? 머리부터 발 끝까지... 그대로 동강내서 불구덩이에 집어 던져버리고 싶네 그래..! 두고 봐. 너네들은 반드시... 저항도 할 수 없는 힘 앞에서....!"
그리고 작열통이 극한에 달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은 산재물이었다. MA와 거래 아닌 거래를 한 것. 지금 여기서. 자신과 아무런 관계 없는 사람 30명을 바치겠다고 선언하고 저 탈을 즉지도 살지도 못 하는 굴레 속으로 내던져달라고 빌고 싶었다. 허나 그렇게 된다면.. 학생대표의 존심은 깨질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잘못 없을 사감님은. 분명 학생인 자신 대신 큰 책임을 물게 될 지도 모르지. 정신 차려야 해. 고통을 떨치기 위해. 지팡이를 거꾸로 잡았다. 제 배를 향해 그대로 칼로 쓰셔대듯 몇 번 찍어내며, 어떻게든 작열통을 상쇄해보려 애를 썼다. 차라리. 이런 통증이 작열통보다 나을 테니까.
그녀는 쪼개진 탈 사이로 보이는 표정과 대조되는 미소를 지었다. 절망으로 물드는 건 어림도 없다는 듯이.
"대체 무엇에 절망해야하는지 모르겠는데 말이에요."
그래. 그녀에게 지금 상황은 전혀 절망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탈의 안부를 신경써 달라고 했으면 모를까, 그런 말은 일절 들은 적이 없는 상태에서 선비탈의 안위를 신경쓸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호기였다. 그의 심장이라 하는 로켓을 손에 넣을 호기였다.
그 생각을 하자 그녀의 금안에 광기가 술렁이기 시작한다. 맑은 금빛에 그늘이 드리워 진한 금빛으로 그 색을 변모시킨다. 그녀는 지팡이에 흐른 피를 한번 털어내고 허리춤에 꽂았다. 그 김에 팔의 상태를 한번 보고, 진짜 그냥 보기만 하고 손을 한번 푼 뒤 고개를 돌려 윤을 보았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말했다.
"다녀올게요."
자질구레한 말은 필요없다. 단지 그것만 말하고 그때까지 잡고 있던 손을 놓는다. 손끝이 떨어질 땐 그 잠깐이 아쉬워 다시 잡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돌아선다. 후. 짧게 날숨을 내뱉고 단숨에 선비탈에게로 거리를 좁힌다.
"가져가라면 못 가져갈 줄 알구요?"
여유롭게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한 손으로 선비탈의 멱살을 쥐려 한다. 그리고 동시에 가슴팍을 향해 손끝을 세워 찔러넣으려 하며, 틈을 타 로켓을 손에 넣으려 시도한다.
섹튬셈프라를 피하고 탈을 복구시킨 모습에 단태는 웃음기 없는 표정과 달리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여전히 일들은 계속 벌어지고 있었고 단태는 그가 했던 말을 곱씹어보고 있었다. 이해는 하되, 공감이 되지 않는다. 그건 주단태와 관계없는 일이여서 그런것일수도 있다. 아니면 주단태에게는 이해만 가능한 감정들일수도 있고. "아까부터 느낀 건데 너." 지팡이를 돌려서 집어넣은 뒤에 단태는 현성, 선비탈의 옷을 붙잡아 당기며 그대로 바닥으로 메다꽂으려했다.
"타인의 감정에 관심이 많네? 너는 어때? 다른 사람들이 슬퍼하고 화내고, 괴로워하고 울고 싶은 감정을 느낄 때, 어떤 기분이 들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나?"
타인의 절망이 그에게는 환희인가. 이해를 하려는 듯 고개를 살그머니 기울이던 단태가 헤죽, 미소를 지어보였다.
말하자면 자신의 불찰이긴했다. 애니마구스에 용서받을 수 없는 저주의 연습에 열을 올렸더니 일반적인 마법의 연습을 게을리 한 탓이었다. 레오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지팡이를 꼭 쥐곤 가만히 서서 선비를 노려보던 레오는 머리를 빠르게 굴리기 시작했다. 보는 눈이 많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는 저주의 사용은 힘들다. 애니마구스로 변하자니 여기서 바로 변신을 하기도 조금 애매한 노릇이고. 그렇다면 가까이 붙어서 다시 시도해보는 수밖에.
레오는 멈칫멈칫하며 선비와 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결단을 내려야하는 순간이다. 공격할지 말지. 공격한다면 어떻게 할지. 레오는 다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넘기고 바닥에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직접 죽음의 문턱에 다녀와본 레오였다. 크루시오를 맞았고 섹튬셈프라를 맞았으며 이상한 동물에게 온 몸이 채여 갈기갈기 찢기기도 했다.
" .... 사람은 쉽게 안죽어. 네가 이해해라. "
어쩔 수 없잖아. 레오는 뿌득, 하고 이빨을 갈곤 지팡이를 집었다. 선비를 겨누곤 주문을 외웠다.
그는 말마따나 성격이 좋은 편이 아니다. 친절하긴 하지만 상냥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 상처를 받더라도 그 사람 몫이거니 넘겼고, 자신의 상처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인격자는 절대 못 되는 편인 것이다.
"많은 걸 시켰지. 널 위한 과자를 사왔으니 먹거라, 체하지 않게 꼭꼭 씹어라, 편하게 쉬고 있어라, 아프지 말거라, 좋은 꿈 꾸거라. 내 몫까지 살아라. 자네는 죽어서도 절대 받지 못할 것들 있지 않나. 온정이라고들 하지. 더 이야기 해줄까?"
비명소리가 하나 더 들린다. 윤의 것이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왜 탈을 공격하면 윤도 죽는 건지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 방금 전 둘에게 뭔가 얘기하던 상황도 그렇고, 갑자기 비명을 지르는 것도 그렇고. 만약 특수한 마법이라면 당신과 대화한 자신도 고통스러운 것이 정상일 것이다.
알마나 제 배를 내리찍었을까. 슬슬 작열통이 가실 때 쯤이 되어서야 주양은 다시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날 수 있었다. 고통은 고통으로 이긴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이를 얼마나 세게 악물었는지 입 안에서 비릿한 맛 마저 감돌고 있었다. 피 섞인 침을 입 밖으로 뱉어내는 대신 도로 목 너머로 삼켜버리는 짓거리를 하며 주양은 씩 웃었다. 어찌 되었든 제 몸을 돌고 있던 거니까 다시 삼켜버린다 한들 문제 없겠지. 속이 살짝 좋지 않아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주인이니 뭐니 하는 작자보다 훨~씬 높은 뭔가에게 사주할 생각인데. 내 분노를 오롯이 감당하겠다고~? 탈 따위가~?? 아하하하하핫!! "
앞뒤 맥락 다 떼어놓고 말한 애매모호한 이야기였지만 주양은 자신있는 표정을 지으며 경박하게 웃었다. 재앙 그 자체보다 격이 높은 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 적어도 그때. 자신이 그렇게 위축될만한 분위기를 풍기던 것이 재앙이자 MA였으니. 그리고 정말 간사하게도. 지금 주양은 건 사감에게 내기를 걸 때의 천진난만하며 밝은 모습과는 반대로, 자신이 알지도 못하고 친하지도 않은 30명 쯤이야. 얼마든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물론, 그것은 분노 같은 감정이 뒤섞인 탓이기는 했지만.
"..... 아아. 진짜 열뻗치네. 졸업 때려칠까나.."
심하게 공격하면 백궁 학생대표가 죽는다. 그렇다고 공격을 하지 않으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당하고 있을 뿐이다. 도대체 왜 선비탈을 공격하면 윤이 죽는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지금 그런 건 뒷전이었다. 여기서 더 화를 냈다간 정말 졸업이고 뭐고 MA부터 물러서 지구 상의 무작위 사람 30명을 제물로 바치겠다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기린궁 사람은 아니었으나, 한 번 보고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자신도 그 힘을 써먹을 권리가 있다는 주양의 극히 자기중심적인 생각이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파고들었으면 그 줄을 낚아 챌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찰나였지만 그녀의 얼굴에 절망에 가까운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길게 이어지지 못한 건 선비탈의 말 때문이었다. 그것 보라는 듯 얄미운 말에 두 눈이 분노로 물들어 서늘하게 노려본다. 절로 튀어나오는 상소리가 잇새로 흐른다.
"XX..."
이 팔이 멀쩡했다면 성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책이 들다가도 뒤에서 들리는 비명소리에 다급히 뒤를 돌아본다. 웅크려 고통스러워하는 윤을 보자 이성이 끊어질 것만 같았으나, 주먹을 세게 움켜쥐어 그 고통으로 이성을 붙든다. 당장 달려가 안아주고 싶은 걸 참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학생들을 향해 내뱉었다.
"제가 당신들을 막을 권리는 없으니 이거 하나는 말해두죠. 오늘 송장 셋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온갖 감정으로 어지럽게 물든 눈이 뒤를 한번 훑고 매몰차게 돌아선다. 저들이 어쩌기 전에 로켓을 빼앗으면 된다. 당장이라도 충동적으로 나가버릴 것만 같은 몸을 한가닥 남은 이성으로 억누르며 다시 선비탈에게 손을 뻗는다.
"내놔. 그건 내 거야!"
으르릉. 짐승의 소리와도 같은 중얼거림과 함께 그녀의 양 손이 선비탈의 목을 노리고 뻗친다. 단순히 로켓을 뺏는 것을 넘어 그 이상... 해하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