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유리병 안에는 애초에 선물 같은 건 없던 게 아닐까. 솟아난 토끼 귀와, 몽글한 꼬리는 다른 학생들의 시선을 끌고. 한 번만 만져보고 싶다며 몰려오니. 처음에는 한두 명이라 허락해 주었던 게 점점 그 수가 늘어나기 시작하니 문제였다. 한 번만 만지고 끝내는 게 아니라, 귀를 잡고 늘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있으니 애완 토끼가 된 기분이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직 자신은 만져보지 못했다며 비는 아이들을 조심스레 밀쳐 빠져나오고, 쫓아올까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달리며 본 건 몸이 반짝이던 아이였을까. 선물은 없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지는 장면이었다.
그렇게 다른 학생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며 숨을 골랐을까. 인적 드문 이곳 한구석에도 유리병이 굴러다니는 것을 보고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지 이 학원 내에 유리병이 없는 곳이 있기는 한 걸까.
"...당장 잡아서 어떻게 해버리고 싶은거, 열심히 참고 있으니까, 그렇게 귀엽지 굴지 말아줄래요, 선배?"
일부러다. 이건 일부러인게 분명하다. 저렇게 말하면서 귀를 쫑긋거리면 잡고 싶어지는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래도 그녀는 참았다. 안 만지겠다고 했으니까. 그 대신 품에 파고드는 그를 한껏 끌어안아주었다.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르게 무감정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귀에 손이 닿지 않게 조심히, 살살 그의 뒷머리를 쓰다듬는다.
"마음에 안 드니까 전부 없앤다니 과격하다는 느낌이 없잖아 있네요. 굳이 그런 수고를 들일 가치가 있을까, 라는 느낌?"
기본적으로는 무시하고 걸리적거리는 것들만 없애는게 가장 효율적이지 않을까. 잠시 그렇게 생각만 해본다. 죽이지 않는다거나 그런 생각은 아예 없다. 그야, 그가 그걸 생각하지 않으니까. 정말로 저 이유 때문에 그러는 건지 확실하지 않기도 하고. 그래도 듣다보니 새로이 궁금한 건 있었다.
"흐음. 마법학교가 여기만 있는게 아닐텐데 굳이 여기인 이유도 궁금하네요. 순혈만 받는 학교는 있어도 대부분 혼혈이나 머글 태생도 받는 학교일텐데."
앞선 의문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아서인지 그에 꼬리를 물고 새로운 의문들만 퐁퐁 생겨난다. 그러던 중 그녀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녀와 친분을 나눈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면 뭐라고 대답할까.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내리깔며 웃는 얼굴은 뭔가를 저지를 때의 얼굴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 절벽에서 뛰어들 때 같은.
그녀는 머리를 어루만지던 손을 내려 그의 등을 꼭 감싸 안아주려 하며, 소곤거림보단 그저 목소리를 조금 낮춘 정도로 말했다.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선배는 어떻게 그리 긴 시간동안 한 목표만 보고 움직일 수 있는 걸까요. 거기에 불로불사까지 되려고 하고. 저는 나이를 먹는데 선배는 그렇지 않게 되면 정말 슬플 거라구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 역시 여자였다. 늙지 않는 연인의 곁에 추하게 늙은 자신이라니, 그 때에 그녀 스스로 절망하지 않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절망하고 한탄해 이 마음이 뒤집힌다면. ...그녀는 이 애정이 죽는 그 순간까지 애정이길 원했다.
주인은 못 보았다. 등골에 소름이 돋는 말이었다. 매구는 살아있고, 당신이 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교정 내라는 암묵적인 뜻일 것이다. 그는 매구가 교내에 숨어있을 지도 모른다고 자연스럽게 추측했다. 추종자의 말썽이 조금 이해가 가는 것 같다. 매구는 극단적인 순혈주의자고, 여기는 머글과 혼혈도 다닐 수 있는 학교다. 만약 매구가 사람과 어울리는 성격이라면, 자연스럽게 혼혈과 머글과 접촉했을 것이다. 그처럼 다녀야 할 이유라도 있는 건가? 사실 그가 알 바는 아니다. 전쟁이 다시 발발한다 해도 그와 상관 있는 일은 아니었으니 이 생각은 고이 접어두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다.
당신은 여전히 울고있다. 흰 레이스 안대는 당신의 눈을 덮어 가리고 눈물을 머금었다. 투명한 자국이 번지는 것이 눈에 담겼다. 입을 맞추기 전 마지막으로 본 당신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 옥색의 머리도, 레이스에 가려진 틈새로 비치는 눈동자도.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살고싶다. 죽고싶지 않다. 당신과 함께 하고 싶다……. 수많은 후회를 삼켜내고 당신에게 담담히 입을 맞췄다.
당신은 그를 부른다. 그는 당신을 받아들이며 팔을 뻗었다. 자연스럽게 레이스를 쥐었던 손이 풀렸다. 두 사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듯 안대는 그 자리다. 그는 당신의 목 뒤를 끌어안고, 머리카락을 가볍게 헤집는다. 아무리 향락에 젖었어도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던 것을 당신에게 허락했다. 당신은 넥타이를 풀고, 단추를 풀어낸다. 입술이 떨어치는 찰나의 순간 그가 눈을 짐짓 도발적으로 치켜뜨고는 달뜬 숨을 짧게 내뱉었다.
"아가, 내 신도야. 응? 시체 쫓는 까마귀가 절애하는 내 작은 매야."
숨 섞인 웃음 뒤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헤집던 손이 둘 사이에 떨어진 레이스를 쥔다. 검지와 엄지로 집어올리고 나서는 당신의 품에 파고들듯 허리를 숙이며 가볍게 목을 손가락으로 쓸어본다. 우아하고도 경박한 손길이 어디에 매야 당신이 더 아름다울지 고민하는 예술가처럼 맴돌다 멈춘다. 맴돌던 손도 레이스를 쥐고, 그는 가볍게 당신의 몸에 붙어 목을 감싼다. 눈물에 젖어든 레이스가 당신의 목을 스친다. 찰나의 시간. 그는 당신의 귓가에 나직히 속삭이려 했다.
"네가 정녕 날 미치게 해. 이리 네 목에 내 사람이란 증표를 묶어주는 건 나인데. 정작 나의 결단도, 삶도 모두 네가 묶어 쥐고 흔드는구나……."
제대로 변신을 오갈수 있게 되면 그 때 마법부에 등록을 할테고 그렇게 하면 제대로된 애니마구스가 되는 것이다. 그 때까지는 연습에 연습을 거듭할 뿐. 연습해야할 것이 두 개로 늘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저주와 제대로 변신하고 원하는 떄에 변신을 푸는 방법. 제대로 익히기 전까지 레오는 계속해서 음지를 찾아다니며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연습을 이어나갔다. 이유라고 한다면, 동물로 변신을 한 후에 다시 돌아오면 옷을 하나도 입지 않는 상태가 되어버리니까. 그런 모습으로 남들 앞에 나섰다간 학원생활이고 뭐고 끝이다. 끝.
" ..... "
자신이 변한 모습은 노란 눈과 검은 털이 인상적인 흑표범이었다. 이름과 생김새를 따라가는건가. 학원 근처 인적이 드문 곳에는 검은 표범이 돌아다닌다- 라는 소문이 도는 것도 별로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으니 레오는 이 쯤에서 슬슬 돌아가기로 했다. 변신을 마칠 때에는 항상 자신이 변신했던 장소로 돌아가야한다. 인적이 전혀 없고 변신할때 벗어진 옷가지가 가지런히 놓여있는곳. 레오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네 발로 걷는 것이 어색할 법도 하지만 신기하게도 동물로 변하고 나면 모든 것이 원래 있었던것 마냥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남들 몰래 교정을 걸어다니다가 레오는 굉장히 어려보이는 누군가를 만났다. 하늘색 머리가 인상적인, 마치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어린아이.
그 빌어먹을 유리병. 단태는 소매를 걷어올렸다. 대체 몇번이나 몸집이 어려지는 건지 모르겠다. 자신만 이 현상에 시달리는 게 아니여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역시, 작아진 몸집에는 평소에 입던 옷이 맞을리 만무했기에 소매를 걷어올리고, 바짓단까지 걷어올렸다. 신발을 신는 건 포기해야할지도 모르겠네. 지팡이를 쥐었지만 그 마저도 여의치가 않았다. 힐끗, 바라본 자신의 얼굴로 나이를 가늠해봤다. 8살, 9살 정도의 모습이었는데나이를 가늠할 수 있었던 건 목덜미가 드러날 정도로 짧은 머리카락 때문이었다. 현궁에서 빠져나온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 경박하고 불성실하며 가벼운 주단태가 꼬맹이가 되었으니 이제껏 저질렀던 업보를 피해 현궁을 빠져나온 것이였다. 주문을 외운다면 옷 사이즈나 신발 사이즈를 줄일 수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되돌아온다는 걸 아는 이상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주단태는 교정에 도착했고, 곧 표범과 마주했다.
"아무리 상식을 벗어나는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지만 그 유리병을 열었을 때 토끼가 아니라 표범이 되는 건 보지 못했는데."
18살의 몸이라면 표범과 마주쳐도 동요하지 않았을텐데 안타깝게도 단태는 지금 8살 정도의 자그마한 몸뚱이었다. 지팡이도 간신히 쥘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그 사실은 단태가 헛웃음을 짓게 하기 충분했다. "인카서러스." 하지만 별 수 없지. 저 표범이 왜 교정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위험하니까- 단태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속박 주문을 외웠다.
//((아까 레스가 플래그였을지도 모르겠다)) 주문은 맞았다고 해도 되고 빗나갔다고 해도 좋아:D 렝주가 편한대로 해주기!
그런게 아니야!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 몸으로는 말을 할 수 없다. 저도 모르게 으르릉 하고 속을 갈아버렸다. 인카라서스. 그 주문이 들리자 레오는 '피해야해' 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몸을 굴려 피할 수 있었다. 한 바퀴를 굴러 피하고 레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의미. 그리곤 앞 발을 들어 좌우도 까딱였다. 마찬가지로 공격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곤 눈치를 보며 천천히 다가가 발톱을 세워 바닥에 글씨를 써내려갔다.
' 나야. 레오. '
이해가 돼? 라고 묻듯이 레오는 눈을 들어 단태를 바라보다가 다시 글을 써내렸다.
' 애니마구스가 됐어 '
사실은 정식으로 등록도 안돼있고 아직 연습생 정도지만. 자세하게 설명하기에는 이 몸은 적합하지 않다. 언제까지고 바닥에 글을 쓸 수는 없으니까. 슬슬 원래몸으로 돌아가야겠네. 레오는 잠깐 고민에 잠겼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듯이 미소를 지었다. 아니, 미소를 짓고 싶었다. 레오는 다시 천천히 다가가 몸을 낮춰 눕고는 마지막으로 바닥에 글씨를 썼다. 일단 여기서 나가고 원래 몸으로 돌아와야 얘기를 하던 뭘 하던 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