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마음이 복잡했다. 당신이 말하는 달라졌다는 것은 신체적인 변화일까, 아니면 마음 속의 변화일까? 어느쪽이라도 당신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좋게 받아들였으면 했다. 괜히 또 신뢰가 깨질까 두려웠다. 지팡이를 부러트리고 당신에게 성질을 내고 싶지 않다. 그가 참으면 되는 일이지만, 가끔은 참아서 더 일이 커지는 법도 있다. 그래서 결국 돌이킬 수 없다면, 그건 싫다. 당신을 안은 팔에 약하게 힘을 줬다.
"살이 붙었다니, 그나마 다행인 소리구나."
그는 품에 조금 더 밀착하고 깊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코로 가볍게 내뱉었다. 한 번의 심호흡으로 잡념이 벌써 떨어지는 것 같았다. 만약 그의 생각이 현실로 나타난다면 지금쯤 바닥을 애처롭게 구를 것이다. 그는 당신의 등을 가볍게 쓸고 토닥였다. 아이를 달래는 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렇구나. 알려주어 고맙다."
이렇게 알려주는 것도 당신의 신뢰다. 그는 당신을 눈에 담는다. 눈에 비친 자신의 미소를 보고 달라졌음을 체감한다. 나는 이리도 달라지겠고, 당신은 이 변화를 같이 볼 것이다. 아니, 당신 덕분이다. 모든 것이 당신의 덕분이고, 당신을 위한 것이다. 당신은 입에 사탕을 물었다. 입술에 가장 먼저 단 맛이 닿고, 그 이후로는 입 안을 채운다. 제법 귀여운 맛이다. 저번에는 복숭아, 이번에는… 딸기다. 보기 좋아. 당신의 말에 그는 어딘가 뭉클한 감정을 느꼈다. 형용하기 어려웠다.
"아가."
그저 바닥에 다소곳이 놓인 레이스 안대를 한 손으로 고이 잡았다. 양 손으로 끄트머리를 잡았고, 팔을 뻗어 당신의 눈을 가리려 했다. 당신이 거절하지 않는다면 그는 몸을 천천히 기울였을 것이고, 나직히 속삭였을 것이다.
"싫다면 혀를 깨물어도 좋단다."
가벼운 입맞춤이 당신을 향했다, 입술과 입술이 닿았을 뿐인 첫 인사, 그리고 여운이 가시기 전에 다시금 입을 맞췄을 것이다. 결국 나는 네게 이리도 무너지고 마는구나.
우연찮게 양반탈, 멜리스 리델의 이름을 알게 된 것처럼 앞으로 또 다른 우연한 기회에 그의 이름을 알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직 그의 수족들도 모르는 걸 그렇게 쉽게 얻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그녀는 그렇게 멀리 보는 타입은 아니었다. 과거 현재 미래 중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하느냐고 물으면 당연히 현재를 택할 사람이었으니까.
"!!!"
추욱 쳐졌던 귀가 다시 쫑긋 서는 순간. 그녀는 하마터면 그 귀를 덥석 잡을 뻔 했다. 저런 요망한 귀 같으니. 잡고 싶은 걸 참느라 부들거리는 손을 어떻게든 해야겠다 싶어서 그의 손을 꼬옥 잡는 걸로 대신한다. 그래도 귀를 만지고 싶은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어 손만 아쉽게 만지작거리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불로불사..."
그가 한 말 중 유난히도 귀에 들어오는 말을 꼽자면, 바로 불로불사였다. 늙지도 죽지도 않는 도술이라. 전날 들었던 자장가의 탓일까. 그녀는 문득 어릴 적이 생각났다. 혼미한 정신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그저 이 고통이 끝날 수만 있다면 숨이라도 놓아버리고 싶던 나날을. 그러니 자연스럽게 머리가 식어 그의 손을 조물대던 것도 멈췄다. 그것이 어색하지 않게 슥 손을 옮겨 그를 안고 종알댔다.
"...선배는, 예나 지금이나 정말 한결같네요. 왜 그렇게 순혈만 남기고 싶어하는 거에요?"
예나 지금이나. 전쟁을 일으켰을 때나 지금이나 라는 의미였다. 학교에서 역사를 배웠을 때도 별궁의 역사서를 봐도 그가 지독한 순혈주의라서, 라는 이유 밖에 없었다. 정말 그 이유 뿐일지도 모르지만 본인이 앞에 있으니 말이다. 역사의 당사자에게 직접 들을 기회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거야, 라며 의식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바꾼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레오는 침대에 누워있던 와중에도 이따금씩 일어서서 옆에 자신의 친구가 그대로 있는지를 확인했다. 일단 눈으로 보이면 한 번 불러보고 대답이 돌아오면 툭툭 건드려보거나 어깨를 주물러보거나 얼굴을 쓰다듬어 진짜 있는것인지 확인하고 자신이 혼자있는게 아니라는것이 확실해지면 다시 침대에 누워 노래를 흥얼거렸다. 창을 통해 보인 바깥은 먹구름이 끼어있고 어두웠다. 시원해서 좋네. 레오는 다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 흠.. 살짝 출출한데. 야, 뭐 먹을래? "
레오는 고개를 들었다가 우르릉 하는 소리를 들었다. 어, 이거 설마. 교수님께 조언을 들었지. 번개가 치는 날 넓고 안전한 장소로 나가 약을 마시고 주문을 외우라고. 이거 설마. 다시 우르릉 하는 소리가 들리자 레오는 몸을 일으켰고 하늘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레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숙사 문을 열고 나갔다. 어디가냐는 말에도 그런게 있어! 하고 말하곤 자신만의 비밀공간에 보관해둔 약을 꺼내 품에 안고 내달렸다.
" 비켜!! 비켜비켜!!! 부딪히면 쳐죽인다!! 비켜!!!! "
다친건 상반신이지 다리가 아니다. 뛸 때마다 배와 가슴이 아팠지만 참았다. 이런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으니까. 생각해둔 장소라면 있다. 달리고 달렸다. 레오는 헉헉 거리며 미리 점찍어둔 공터로 나왔다. 약병을 열기 직전까지 두고 심호흡을했다. 추적추적 비가 내렸고 레오는 '빨리..빨리..' 하고 조바심을 냈다.
준비과정은 완벽했다. 첫 보름이 떴을 때 맨드레이크 잎을 입에 물었고 다음 보름이 뜰 때 까지 단 한 순간도 입에서 뱉지 않았다. 잠을 잘 때도, 물을 마시거나 밥을 먹을때도 입에서 뱉거나 삼키지 않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보름이 뜨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완벽하게 달빛을 받으며 약병에 애니마구스 잎을 뱉어넣었다. 달빛을 받은 약병에 자신의 머리카락 한 가닥, 일주일 동안 햇빛을 받지 않았고 인간에게 간섭 받지 않은 이슬 한 스푼, 그리고 죽음머리 나방의 번데기도 넣었다. 그리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조용한 장소에 약을 넣어 보관했으며 매일 해가 뜨고 질 때마다 주문을 정확하게 외워주었고 그 때마다 지팡의 끝이 심장을 향하고 있어야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번개가 치는 날까지 모든게 완벽했다. 공기가 갑자기 건조해지고 머리카락이 살짝 붕 뜨는 느낌 입술이 살짝 끈적해지고 온 몸의 털이 살짝 곤두서는 느낌.
" 지금 "
번개가 침과 동시에 레오는 약을 삼켰다. 썩 좋은 맛은 아니었지만 그런게 대수일리가 없지. 한 입에 약을 털어넣었고 큰 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너무 흥분했다. 동시에 속이 울려 상처부위에 진한 통증이 가해졌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한 차례 더 번개가 큰 소리로 치고나서야 레오는 성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썩 맛이 좋지 않은 약이었기에 속이 더부룩하고 토할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당장에 변신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느껴졌으니까. 약을 마시고 몸 속 깊은곳에서부터 무언가가 달라졌다는게 느껴졌으니까. 빗방울이 굵어졌다. 넓은 공터에 레오는 혼자서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