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장난이라고는 하나 이쯤 되면 MA의 취향을 의심해봐야겠다. 병을 열어도 별다른 변화가 없는 자신의 손을 빤히 내려다보며 주양은 썩소를 지었다. 병을 연다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차라리 전처럼 알록달록한 형광색으로 빛나던 자신이 그리워졌다. 지금 있는 옷들 중 그나마 작은 게 뭐더라. 옷장을 뒤적거리던 주양은 이윽고 바람막이를 하나 찾았다. 여전히 자신이 입기에는 큰 감이 있어 바람막이가 하나의 원피스가 되어버렸지만 이 정도라면 그나마 붙들고 있진 않아도 될 정도니까 안심이려나.
지퍼를 단단히 걸어잠근 채 밖으로 나갔다. 아까 전. 눈이 아플 만큼 현란한 색을 뽐내던 혜향 교수님이 하신 말씀도 있고 마침 지금 하러가는 의뢰도 칼 교수님이 하신 거니까, 이번 기회에 한번 훅 치고 들어가는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현궁의 단짝과 나눈 이야기를 아직 기억하고 있다. 이건. 이건 분명 뭔가 있지 않을수가 없어.
"으음.. 오늘도 하늘이 참. 예쁘네..~"
그것때문에 잠시 미루어둔 것이 있다면, 역시 밤 하늘을 올려다보고 다시 회상했을 과거 기억에 대한 걱정이라 할 수 있겠지. 그 아이가. 어여쁜 민들레가 시들어버린 이후로 줄곧 하늘을 보지 않고 있다가 청을 데려오고 처음으로 올려다보았던 밤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주양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려서는. 지금 와서 이 기분을 다시 되짚어 생각한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 따윈 하나도 없을 텐데. 별의 움직임을. 하늘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으며. 주양은 사색에 잠긴 채 양피지에 대강대강 필기를 하기 시작했다. 장소가 금지된 숲 근처라는것만 제외한다면, 무난하고 나쁘지 않은 풀경이었다.
양피지와 옷자락을 함께 나풀거리면서 칼 교수님을 찾아갔다. 자. 하늘을 보며 든 이런저런 생각은 전부 내다 버리고, 이제 처음부터 단단히 벼르고 또 벼르던 것을 물어볼 차례다.
"교수님. 이거. 이거 써왔어요."
한참 교수님을 올려다보며 두 손으로 양피지를 잡고 쭉 뻗어 내밀었다. 어려진 채로 모든걸 한참 올려다보는 것은 꽤 힘든 일이다. 목이 아팠는지 다른 손으로 주먹을 뒤어 뒷목을 콩콩 두드리면서, 주양은 다시 뭔가 공허하지만 장난기 있는 미소를 지었다. 어렸을때의 자신을 아무리 비슷하게 흉내낸다고 한들, 한두살씩 먹어가면서 생긴 흥까지는 주체하지 못했다.
"혜향 교수님한테 칼 교수님이 니플러 혼내줬다는 거 들었어요. 근데, 왜 에반스 교수님의 결혼반지를 훔쳐가려고 한 애한테 그러셨죠? 이건 뭔가 있는 것 같아요. 저한테만 살짝 이야기해주시는 게 어때요? 비밀 보장은.. 잘 해드릴게."
요망하게 한쪽 눈까지 찡긋이니 다행히 정신마저 완전히 유아퇴행한 것은 아닌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막상 이야기로써 담아놓고 보니 이보다 더한 궁예짓이 어디 있나 싶은 모양새지만 주양은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매의 눈으로 칼 교수님의 반응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불안을 농담조로 말하면서도 안기 쉽게 몸을 숙여주고, 그녀도 느껴질만큼 안은 팔에 힘을 넣는다. 뭐든 원하는대로 해주겠다는 속삭임이 어김없이 이어졌다. 그것이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건지 그저 하는 말인지 알 수는 없으나, 들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건 분명했다. 설령 말 뿐이더라도.
"제가 원하는 때가 언제까지일 줄 알고 그런 말을 쉽게 하실까."
다시 물으면 대답해줄까 했지만 그 뒤에 이어진 그의 대답을 듣고 조금 심술이 났다.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고 정말 이름만 알려주다니. 보이지 않게 흘겨보다가 뭐 어떠냐는 듯 피식 웃었다. 이름만이라도 들은게 어디야.
"이번은 이름만으로 만족해줄게요. 싫다니 계속 묻진 않겠지만, 언젠가는 다 들어낼테니 두고봐요."
무게 없는 호언장담을 하며 살짝 팔을 풀자 그가 윤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단단히 감싸주던 팔이 없어진 건 솔직히 아쉬웠지만 그가 이 모습이 좋다니 어쩌겠는가. 이제 다시 귀를 만지며 힐링이나 할까 했는데, 고새 못 하게 하는 말에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혀를 찼다. 쳇.
"이렇게 귀여운 귀를 달고서 만지지 말라니 그건 고문이나 다름없다구요. 얄밉긴. 그런 귀 안 만질테니까 조금만 더 놀아줘요."
그러지 않았어도 벌써 갈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의 든든했던 팔과 달리 그녀의 여린 두 팔이 윤이 된 그를 안아 끌어당긴다. 제 몸으로 질식시키라도 할 듯 꼬옥 안았다가 놓으며 재밌다는 듯이 웃는다. 귀와 꼬리는 안 만지겠다고 했던 말을 지키기라도 하듯, 그의 손이나 얼굴을 조물대긴 해도 그 위로는 가지 않는다. 남자에서 소년으로 돌아온 얼굴을 신기한 듯이 만지작대며 말을 꺼낸다.
"그러고보니 요전에 주궁에 몇번 들렀다가 신탁을 들었거든요. 쥐는 여기에서 힘을 키운다, 라고. 선배, 기린궁에 가려던 이유가 혹시 그거에요? MA라는 신의 힘을 얻으려고 했다던가."
좀 지나친 비약이긴 했지만, 매구인 그라면 뭔가 수를 쓸 수 있으니까 그래서 무기 사감이 매번 막았던게 아닐까 싶었다. 들이는 것만으로도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누가 누구에게 위험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오른손에 붕대를 칭칭 감아놔서 제대로 펜을 집기도 힘든데. 레오는 밖으로 나와 숲으로 향하는 내내 궁시렁거렸다. 이런건 전문가를 부르면 더 쉽고 빠르지 않겠냐거나 이걸 왜 내가 하고있냐거나 따위의 것들. 레오가 같이 가달라고 몇 번이고 생떼를 부려 같이 끌려나온 친구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럼 안하면 되잖아. 하고 핀잔을 주었다.
" 그래도 해야지... 칼 교수님 부탁이잖아. 그런게 있어. "
레오는 걸어가는 와중에도 몇 번이고 옆을 돌아보며 친구가 그 자리에 있는지, 계속해서 함께 걷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무엇이 불안하기라도 한듯 몇 번씩 고개를 돌리자 친구는 뭐 묻었어? 하고 물었고 레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금지된 숲 근처에 도착하고 레오는 이 쯤이 좋겠다며 자리를 깔고 앉았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보기를 잠깐이었고 필기를 부탁한다며 펜을 넘겨주었다. 자기 손이 이래서 제대로 필기를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 아유... 하기싫어... 아 그리고 거기 내 이름 써줘. 응 거기 오른쪽 구석에. 오케이. 땡큐. "
자기가 보고 느낀 것을 적은 레오는 그만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가는 동안에도 몇 번이고 옆을 돌아보며 확인했다. 정말 이 자리에 같이 있어주고 있는 것인지, 자기가 사실은 혼자가 아닌지에 대한 것들을.
한 번더 고개를 살짝 숙인 레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신이 났는지 조금 흥분한 목소리와 톤으로 미소를 조금 띄운채로 자기가 어떤 노력을 했고 얼마나 알고있는지에 대해서.
" 약은 만들었어요! 달빛을 받은 약병에 제 머리카락 한 가닥, 일주일 동안 햇빛을 받지 않았고 인간에게 간섭 받지 않은 이슬 한 스푼, 그리고 죽음나방의 번데기요! 맨드레이크 잎도 제가 한 달동안 입에 물고다녔구요! 이 약을 만드는데만 3년이 걸렸어요. 그리고 매일 해가 뜨고 질 때마다 주문도 외워주고 있어요! 아마토 아니모 아니마토 아니마구스, 지팡이 끝은 항상 제 심장쪽을 향하게 했구요. "
너무 신나서 떠들었나. 레오는 한 번 숨을 삼키고는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 그.. 문제는 그 다음인데. 그 다음으로 넘어가는 법을 못찾았어요.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