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지금 얌전히 귀와 꼬리를 내놓는게 좋을 거라구요. 당장이라도 데려가버리고픈 걸 참고 있으니까요?"
언제부터였는지 자각은 없었지만, 그가 그인 걸 알게 된 후로, 윤일 때의 모습으로 순진한 척 쑥맥인 척 구는 모습을 보는게 어느샌가 그녀의 작은 즐거움이 되어있었다. 그 모습 너머에 숨은 본성을 알기 때문에 태연하게 아닌 척 구는 행동이 정말- 미워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 부분까지 그라는 사람이라 이해하려 하는 그녀의 마음은, 아니 연정만큼은 한없이 진심이었다.
"못 보긴요. 기분 탓이에ㅇ, 아잇, 선배 지금 무ㅅ..."
약초학 수업에서의 일을 얼버무리려 하는 그녀와 달리 그는 어지간히도 억울했나보다. 중요한게 아니지 않느냐며 끼를 부리는 그녀에게 넘어가주지 않을 듯 목소리를 깔며 귀에 속삭이는 그에게 그녀는 짐짓 토라진 척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건 시도도 못 했다.
옆으로 돌렸던 눈을 그에게로 돌려 바라보는 순간, 가장 먼저 색이 바뀌는 머리카락이 보인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인지를 하는 것보다 그가 변하는게 훨씬 빨랐다. 한순간, 정말 한순간이었다. 그가 지금의 그녀보다 더 압도적인 기운을 흘리는 남자로 변한 건. 뭐, 몸만 스물일곱이지 내용물은 열일곱인 그녀와 이쪽이 본모습이라는 그를 비교하는게 더 말이 안 되겠지만.
"어...어...?"
반항은 커녕 상황 파악조차 느린 그녀가 그의 손길을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의 한 팔에 가는 허리가 쏙 안기는게 느낌이 참, 새삼스럽기도 하고 뭔가 이상하다. 간질간질해서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 동시에 그녀는 가슴 왼편이 뻐근해지며 죄어드는 감각이 들어 잠시 표정을 흐렸다.
...누가 심장을 쥐고 비트는 것만 같아...
그게 그에게는 못 믿겠다는 표정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감각이 사라질 때까진 가만히 말없이 있다가 나아진 후에야 입을 연다. 지워졌던 웃음을 다시 띄우면서.
"저, 전에 말했잖아요.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고. 지금도 그다지 신용하진 않아요? 보여주는데로, 들려주는대로 다 믿었다가 배신당하고 버려지면 저만 손해인걸요."
아까 못한 토라진 척 대신 새침한 척을 하며 말한다. 그 말처럼 믿기 어렵다는 듯이 두 손으로 그의 변한 얼굴을 천천히 어루만져본다. 좀전까지 제갈 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용물은 그대로, 아니 오히려 이쪽이 진짜라는게 아이러니하다. 눈가와 볼을 지나 얼굴의 윤곽을 훑던 손이 찬찬히 선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연한 보라색 머리카락을 스친다. 그대로 꼭대기까지 올라가 여전히 달린 귀를 잡아 만지작대곤, 재밌다는 듯 키득거린다. 아까만큼은 아니지만 살살 간질이듯 만지며 그에게만 들리도록 소곤댄다.
"당신은, 제가 당신을 믿었으면 좋겠어요? 일말의 의심도 의문도 가지지 않고 그저 믿어주기를 원해요?"
뿌듯한 표정을 보니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다. 당신이 그만큼 순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첫 만남을 기억한다. 당신은 그가 쓰러졌을 때 여기서 자면 안 된다고 했다. 이렇게 꾸며졌단 것은 가문원이 그를 데려왔단 뜻일 것인데, 당신은 내가 그 순간에도 잠들었다 생각하면 어쩌나 싶다. 지금도 굳이 건강해진 이유를 대지 않기로 했다. 담담하고 평온하게, 예민함이 사라진 온화한 눈길로 "그래, 참 다행이지." 하고 울고 있는 당신을 쳐다볼 뿐이다.
오, 이제 생각하니 고민할 법도 하다. 그가 언제 이렇게 살갑게 대했나? 두통이 없으니 팔자가 늘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당신은 순순히 품에 안겼다. 뼈마디가 바로 느껴졌던 앙상했던 몸은 이제 보기 좋게 마른 체형이 됐는지 안아도 앙상한 느낌이 별로 없다. 그는 생각을 차분하게 정리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듯 당신의 어깨에 턱을 기대고 있다가, 느릿하게 허공을 향해 눈을 깜빡였다.
"무엇이 다를.."
그는 말을 멈추고 등을 매만지는 당신의 행동에 몸을 크게 움찔 떨고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럴 줄은 예상도 못했다. 그저 평소와 같이 안아주겠거니 했더니 익숙하지 못한 감각이 찾아왔다. 사람의 온기는 이래서 어렵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며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달라도 괜찮다. 네 보기에 건강하니 다행이지. 그런데 선비까지 우리 학교에 있더니?"
그건 의외다. 중의 정체는 이전번 수업 덕분에 어렴풋이 추측만 할 뿐이고 윤곽이 잡혀가지만 선비는 또 처음 듣는다. 새로운 인물이 추가되니 머리가 복잡하다. 그렇지만 두통이 없으니 또 낯설다. 이런 복잡한 사실엔 두통이 생기고 예민해져야 다행인데, 이게 평범한 사람의 고민이란 건가. 그는 눈을 느릿하게 내리감고 뜨기를 몇 차례 반복하다 고개를 떼어 등을 당신이 안은 팔에 조심스럽게 기대고, 얼굴을 마주했다.
당신의 눈에 그가 비친다. 이제 어렴풋이 모습이 확인이 된다. 하얀 머리카락, 색이 미묘하게 다른 두 개의 동공, 그 동공을 덮어 흐리게 가리는 새하얀 속눈썹. 외형적인 변화가 있는 건 확실했다. 그것도 아주 큰 변화다. 물끄러미, 대답을 고르듯 그는 당신의 눈을 가만히 마주보다 미소를 짓는다. 고통을 참고 예민하게 미소짓던 평소와 달리 누그러지고 담담한 미소다. 그의 예민함을 벗겨보면 이런 초연함이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잘 녹아든 미소였다.
잠시 말은 하지 않아도 그의 손길이 뻗어오면 그에 당연히 응했을 것이다. 숨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표정은 그이 큰 손이 쓸어줌에 따라 서서히 풀려, 얼굴을 보여달란 말에 고개를 들었을 땐 평소에 가까운 낯빛으로 돌아와있었겠지. 연한 자색과 벽안빛이 섞여든 금안이 올곧게 그를 바라본다. 슬쩍 눈을 휘어 웃어도 그 빛은 흐려지지 않았다.
"만약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기억 정도야 지울려면 얼마든지 지울 수 있을거고, 그 다음에 완전히 사라져버리면 전 저도 모르는 새에 버려진게 될 텐데."
그가 그이기 때문에 그녀는 그런 생각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매 수업마다 옆에 붙어도, 이렇게 같이 있는 순간에도 완전히 떨쳐낼 수 없는 생각이었다. 그가 매구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가 매구가 아니었으면 좋았을거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알고도 옆에 있겠다고 한 그녀다. 이제와서 그런게 중요할 리가 없었다. 적어도 그녀에겐.
입맞춤을 할 때는 그래도 분위기라는게 있으니까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천천히 떴다. 그 분위기 탓인지 얼굴이 금방 달아오른 듯 싶지만. 아니 이건 몸 때문인가. 묘하게 감각이 곤두서 예민한 거 같다 생각하며, 덕분에 더 기분 좋게 느껴지는 그의 쓰다듬을 만끽했다. 모습이 달라져도 그녀를 대하는 행동이 그대로라 이건 이거 나름대로 신기했다.
"제 믿음은 그런 충정하곤 다른건데 말예요. 뭐, 맘대로 하라니까 맘대로 할거에요."
그녀가 그를 신용하지 않으면서 그에게 제가 확신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해준다 한들 믿을지 어떨지 그녀 자신이 모르는 상황이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마음에 들었다 해준 것이 일말의 위안이 되어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러니 좀더 대담하게, 그의 목을 끌어안고 다가가 속살거릴 수 있었다.
"그야 당연하죠. 줄곧 제 옆에만 두고 싶은걸요."
지금의 모습이건 윤의 모습이건 패밀리어를 가장한 동물의 모습이건, 본질이 그라면 상관없었다. 열일곱이었다면 완전히 안기는 것도 가능했을 그의 품에 기대어 잠시 꼼질거리다가, 전부터 묻고 싶었던 걸 꺼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