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 및 카페테리아에서 하절기 메뉴를 개시합니다. 추가 메뉴의 가격은 기존 메뉴와 차이가 없으며 카페테리아의 경우 일일 판매량이 정해져 있음을 미리 알립니다. 빙수 및 파르페의 토핑이 별도 추가 가능하도록 메뉴가 개선되었습니다.
부활동 상반기 실적 제출 기간이 시작되었습니다. 현재 활동 중인 모든 부는 기한 내에 부활동 보고서를 제출하기 바랍니다. 기한을 넘길 경우 패널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최근 소모성 비품의 소모량이 비정상적으로 많습니다. 각 부는 자체적인 관리에 주의를 기울여주세요.
상담부에서 교내외 환경미화를 도와줄 사람을 구합니다. 자세한 건 각 교실에 배부된 안내문을 참고해주세요. (지난 이벤트 후속편. 자세한 내용은 이쪽 > https://bbs.tunaground.net/trace.php/situplay/1596248900/627) (후속편 현황은 캡틴에게 문의)
관심이 없는 것과 흥미가 없는 것을 따로 생각할 수 있었던가. 현율은 다홍의 대꾸를 들으며 소매를 만지는 행동을 옆눈으로 흘깃 본다. 그 손짓의 의미가 민망함임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다. 현율이라면 더욱. 소리없이 입꼬리를 올려 웃고 나직한 중얼거림에 나직한 목소리를 돌려주었다.
"그래. 생각은 나뉠지언정 사실은 변함없으니까."
다홍의 손이 무안하게 거두어졌지만 현율이 그걸 신경쓰는 눈치는 없다. 느긋한 대답을 내놓으며 가까이 다가오는 다홍을 옆으로 돌아서 눈으로 쫓을 뿐이다. 제법 가까이- 아마 팔을 다 뻗지 않아도 닿을만큼 일까.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다홍을 보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선배는 자신이 해야 할 일만 기억하고 자신만 챙기면 돼. 나를 신경쓰는 건 선배의 일이 아냐."
현율은 다홍의 말을 들으면서 거대한 무언가를 향해 돌아선다. 그것을 다 덮을만큼 넓은 천의 자락을 두 손으로 움켜쥐더니 그대로 확 잡아당겨 거둔다. 천은 얼마나 매끄러운지 방대한 넓이에도 불구하고 거의 소리를 내지 않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천이 걷히고 드러난 그것의 정체는 다름아닌 캔버스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흰색의 거대한 캔버스. 천을 거둠과 동시에 어떻게 했는지 두 팔로 천을 정돈해 든 현율은 소파에 천을 올려두고 돌아오며 말을 이었다.
"실수까지 뭐라고 할 생각은 없어. 신경써준다면 그걸로 족해. 하지만 내가 선배를 언니라고 부를 일은."
절대로 없어.
"그러니 선배가 싫으면 이름으로 부르겠어. 상관없다면 선배인 걸로."
그렇게 말한 뒤 캔버스 앞에서 다홍과 마주보고 선다. 한 손을 들어 캔버스를 짚고 잠시 무언가 생각하다가. 손을 떼고서 입을 열었다.
"앞으로 할 일에서 선배가 지켜야 하는 룰은 세가지야."
하나. 나와 일정거리 이상 떨어지지 말 것. 떨어진다면 그 자리에서 합류를 기다릴 것. 둘. 필요 이상으로 주변에 접촉하지 말 것. 셋. 절대 베일 없이 숨을 쉬지 말 것.
역시나라면 역시나일까. 별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듯한 반응에 현율은 작게 웃는 걸로 대꾸했다. 아예 안 먹어도 된다는데 이슬만 먹는 건 또 뭔가 싶다. 그래도 요정이라 불린 건 좀 마음에 들지도. 라고 마음에도 없는 생각을 머릿속으로만 흘린다.
"못 믿겠으면 나중에 뭐든 가져와봐. 독약을 가지고 온다고 해도 눈 앞에서 전부 먹어줄게. 네가 믿어준다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어."
나란히 계단을 오르며 이것 역시 농담으로 치부해야 좋은 걸까 싶은 발언을 한마디 더 얹어준다. 손을 잡은 만큼 가깝기도 하겠다, 끝말은 귓가에 흘려주는 친절함까지 더해서. 현율의 생각을 희수가 안다면 또 발칵 하겠지만.
"비슷하지? 혼자서는 생각하는데도 한계가 있으니까."
생각이라는 건 혼자서 무한히 쏟아내는 것이 어렵다. 홀로 하는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제자리로 돌아오기 쉽상인 탓이다. 결국 되돌 뿐이라는 걸 알면 자연히 생각하기를 그만둔다. 그 역시 현율이 원치 않는 것 중 하나였다.
계단을 올라가는 걸음이 한결 가벼워졌음을 눈치챈 희수가 혼잣말마냥 중얼거리길래. 그걸 들은 현율은 다시 웃음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걸 곧이 곧대로 말해줄까 또 적당한 말로 둘러볼까. 곁눈질로 희수를 보는 현율의 시선엔 그런 생각이 담긴다. 그러길 몇초, 계단 몇단을 지나간 후 가벼운 말투로 혼잣말한다.
"편히 올라갈 기력이 어디선가 흘러들어갔을지도?"
어디가 어디일진 모르겠지만.
태연스레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들어 앞을 본다. 올라가기 편한 만큼 속도도 제법 있어서 이대로라면 전망대까지 금방일 듯 하다. 현율은 경쾌하게 다리를 움직여 계단을 오른다. 잘 짜인 나무 계단이 오를 때마다 건반을 두드리듯이 맑은 소리를 울린다. 조금 더 올라갔을 쯤엔 현율이 전에도 흘렸던 허밍을 작게 흘리고 있었다.
도약을 가지고 온다고 해도 먹어주겠다는 말을 듣고 말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그녀에게 먹일 무언가를 상상해본다. 사카린? 매운고추? 여러가지 맛이 난 다는 음식인 똠양꿍? 아니, 이 동네에 그런 걸 파는 전문적인 음식점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면 레몬즙? 가지고있는 예산도 예산이었기에 구하기 힘든 음식은 제외해야겠지.
귓가에서 가깝게 들리는 목소리에 뒷걸음질 치며 귀를 매만지고는 이게 뭐하는거냐는 표정을 지으며 현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차피 또 웃는 얼굴로 모르는 척 할 것은 눈에 보이는 일 이었기에 그저 자신이 깨달은 사실을 내뱉었다.
"그렇다면 네 부 활동의 대부분의 시간은 따분하겠네."
아무리 그래도 학교에 봉사부를 원하는 학생이 그렇게까지 많을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니까. 대부분은 그냥 그 부가 있는지도 모르는 채 집으로 돌아가고 말겠지. 어쩌면 그런 따분한 시간을 넘기고자 다른 부로 찾아가는걸지도 모르겠다고 단정짓고 그녀보다는 힘겹게 계단을 올라갔다.
"넌 정말 사람을 성가시게 하는 녀석이야."
그 애매한 대답에 그런 대답이 올 줄 알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말하며 마치 피아노를 연주하는 듯 계단을 올라가는 그녀를 간신히 따라갔다. 아무래도 그녀는 기분이좋을때 허밍을 하는게 습관인 것 같았다.
가까운, 팔을 다 뻗지 않아도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갔지만 거기에서 멈춰버렸다. 손을 무안하게 거뒀지만 정말로 무안하지는 않았다. 내가 해야할 일. 나만 챙기면 되는 것. 다르게 말하자면- 지독하게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다홍은 현율의 말에 접어내렸던 눈을 깜빡이며 어딘지 명확하지 않은 시선을 던졌다.
내 일이 아니라는 건가. 다홍은 가까이 다가갔던 걸음을 일순 뒤로 물려냈다. 넓은 천을 거두자 모습을 드러낸, 이질감이 느껴지는 거대한 물체가 그 정체를 보였다. 흰색의 깨끗한 캔버스의 등장에 다홍은 더욱 이질감을 느꼈다. 이게 미술실이 아니라 상담부실에 있다고?
“언니라고 부르지 않아도 돼. 나는 싫다는 걸 억지로 강요하지 않을 것이고, 선배라는 호칭보다는 이름으로 불리는 게 나을 것 같으니까.”
유순한 눈매를 내려접은 뒤에 다홍은 팔짱을 끼고 현율을 마주 바라봤다. 일정거리 이상 떨어지지 말 것. 베일 없이 숨쉬지 말 것. 그리고- 필요이상으로 주변과 접촉하지 말 것. 다홍은 제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룰보다 다홍의 발목을 붙잡는 건 저 두번째 룰이였다. 온전히 상냥하지 않고 일정 선 이상을 지키고 있다고 해도 본성이 어딜 가겠나.
“두번째 룰을 지키는 건 자신이 없는데-.. 노력은 해볼게.”
사실은, 그 규칙을 어겼을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지를 묻고 싶었지만 그것은 물을 수 없었다. 팔짱을 꼈던 손을 풀어내고 머리를 한번 쓸어내린 뒤, 다홍은 작게나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노력은.” 뒤의 나긋한 소근거림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기겁하는 표정을 하며 자신을 보는 희수를 웃는 얼굴로 마주보며 말한다. 희수가 잊지 않고 뭐든 가지고 오면 현율은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입으로 뱉은 말은 꼭 해버리는 사람이 현율이다. 이제는 희수도 익히 알고 있을테지만. 어쨌거나 당분간은 뭘 가지고 올지 생각할게 생긴 셈이었다.
부 활동의 대부분의 시간- 이라. 그 말에 현율은 대답하기 앞서 할 말을 고른다. 있는 그대로 대답해주는 대신 약간의 짜깁기를 거친 대답을 머릿속으로 준비해 입 밖으로 꺼낸다. 그저 대화를 이어가기 위한 말에 필요 이상의 정보는 담을 필요가 없으니.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학교는 있으면 별별 일이 생기니까."
현율이 손을 뻗치는 건 학생이나 부활동에 한정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 이해가 쉽겠지만 몰라도 그냥 그런가보다 하며 넘기기에도 적당한 말이다. 잔가지는 많이 자랄수록 좋은게 아니기도 하고. 적당히 넘기기 좋게끔 말을 잇고 작은 허밍을 흘리다가 후후, 하는 웃음에 잠시 끊긴다.
"그러는 너는 그 성가신 녀석하고 왜 자꾸 마주치는 걸까?"
희수의 말에 왜, 라는 물음을 휙하니 던져주고 현율은 마저 흥얼거린다. 계단 오르는 소리를 박자 삼아 나직하게, 나긋하게.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피아노라면 허밍은 바이올린의 선율 같다. 그러면서 속도는 희수가 따라올 수 있게 조절하고 있었으니. 얄밉다면 얄미운 행태라고 할 수 있겠다.
"아, 다 왔다."
문득 중얼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면 언제 그 많은 계단을 올랐는지 계단의 끝자락이 보인다. 현율은 잡은 손을 일부러 끌어당겨 속도를 내게 만든다. 얼마 안 남은 계단을 정신없이 올라가게 만들어 마지막 단을 올라섰을 땐 재밌다는 듯 웃었다. 짖궂은 장난을 치고 마냥 즐거운 어린아이 같이.
잊지 말라는 그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고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아직 계단은 남아있었다. 저 위에는 뭐가 있으려나. 요즘같은 시기에 굳이 전망대에 올 사람은 많지 않을텐데. 게다가 아무런 특색도 없는 장소라면 말이야. 하지만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나름 사람들이 오는 장소려나.
"별의 별 일 말이지?"
부 비품 실종사건이라거나 끔찍하게 리얼한 연극의 상연이라거나 말이야. 도대체 뭐 하는 학교인데 이런 일이 생기는걸까.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면 당장이라도 전학을 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긴 했다. 분명히 터가 안 좋은거야. 이 학교를 세운 땅도 비싼 값은 아니었겠지.
"뭐 '너를 좋아하니까' 같은 말이라도 듣고싶은거야? 우연의 일치야."
톡 쏘는 느낌으로 대답을 한 후에 바로 다 왔다는 그녀의 말과 같이 그의 시야에는 계단의 마지막 부분이 보였다. 아, 드디어 도착했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다. 사실 이와 똑같은 거리를 돌아갈 때 걸어야 했지만 그래도 오르막길은 아닐테니까.
"좀 천천히 가지?!"
갑자기 끌어당겨져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하면서도 갈팡질팡 어떻게든 다리를 움직여 마지막까지 계단을 올랐다. 이렇게 장난을 치며 좋아 할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의심의 눈초리로 마냥 즐겁게 웃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일단은 아이스크림이다.'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희수가 말하는 그 별일이 어떤 일인지 알 것 같지만 정정하지 않기로 한다. 오해한 채로 두는게 나중에 어떤 즐거움을 줄지 모른다는 걸 먼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일단 말해두자면, 현율이 말한 건 사소한 교내 점검 같은 그런 일이었다. 공공 화단에 물을 준다거나 시설물의 파손 정도를 확인한다던가. 남들은 시켜도 안 할만한 걸 하니까 학교에서의 따분함은 오히려 덜하다. 그 이후에 찾아오는 밤시간에 비하면 더더욱.
"어머. 내심 노렸는데. 이걸 안 걸리네?"
킥킥- 웃으며 하는 말은 한없이 농담 같다. 희수가 하는 말에 장단을 맞춘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의도는 자연스럽게 가려진다. 느긋한 그 태도에, 장난스럽게 웃는 그 얼굴에.
어떻게 봐도 고의적인 행동으로 희수가 당황하자 그만큼 현율의 웃음소리는 높아진다. 당황해 헐레벌떡 올라오는게 그렇게도 재밌나보다. 희수가 올라온 뒤에도 웃음은 쉽게 그칠 줄을 모른다. 웃음이 그치지 않아 자신도 곤란한 듯 미간을 살며시 찡그리다가, 어찌어찌 그치게 하곤 여운이 남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아직 제대로 본게 없는데 마음에 들고 말고 할게 어딨어. 넌 그저 아이스크림이나 얼른 먹고 싶지?"
희수의 생각 쯤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고 이쪽이야, 라며 살짝 손을 당긴다. 아이스크림의 존재를 알려준게 현율이었으니 가게의 위치도 현율이 알고 있나보다. 여기에 올 때처럼 망설임 없이 어디론가 걸어간다. 얼마 걸어가지 않아 그 앞에 작은 소프트콘을 파는 매점이 보이고 그 앞까지 가는 것도 금방이었을거다.
"무슨 맛 할래?"
무슨 맛이냐고 해도 초코 바닐라 딸기 세가지 밖에 없었다. 콘도 그냥 평범한 와플과자 콘이다. 먼저 고르라는 듯 권하고 현율은 시선을 돌렸다. 카페에서 그랬던 것처럼.
합의점을 찾은 이상, 그걸로 됐다. 그러니 논쟁은 여기서 멈춰도 되는 것이였다. 자신이 긍정했고 그 긍정에 현율이 대답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본다면 의아해할지도 모르는 호칭의 정리였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싶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다홍은 현율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룰이라는 게 있는 이유가 꼭 나를 보호해주기 위한 최선의 비방이라는 소리로 들리는구나.”
그나저나 반드시라는 단어가 없다는 건, 룰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는 하고 싶은대로 해도 괜찮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지. 필요에 의해서라면 룰을 조금 어겨도 괜찮을거고. 다만 걸리는 건-.. 다홍의 벚꽃색 눈동자가 현율에게 향했다. 그 룰이 이 아이까지 보호해주지 않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위험한 상황이 일어났을 때 누가 이 아이를 보호해주지? - 아, 이 이상은 오지랖이다.
“-허..”
다홍은 캔버스가 연못의 수면처럼 일렁이고 그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새하얀 캔버스 안으로 잠겨드는 것처럼 현율의 손이 잠겨드는 것을 보고 감탄사와 비슷한 소리를 흘렸다. 이 학교, 정상적인 학교는 맞겠지? 아니 그 전에 저 아이. 정말로 사람인가. 어지간한 상황도 당황하지 않고 포용하는 다홍이였지만 지금의 상황은 아무리 자신이라도 받아들이기에는 오래 걸릴 일이였다. 아무리 나라도 말이지.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어차피 마음은 정해져 있지 않냐는 현율의 그 말에 다홍은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풀어내고 뺨을 감쌌다가 제 붉은색 머리카락을 감아내며 현율이 사라진 뒤에 남은 캔버스를 노려보듯 바라봤다. 그것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다홍만이 알 뿐이었다. 다홍의 손이 아직 파문이 일렁거리고 있는 캔버스 위에 올려졌다. 고민이나 주저함은 길지 않았기에 행동으로 이어지는 건 금방이였다.
그녀의 농담에 농담으로 답 해주고 주변의 경치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예상대로 딱히 특별하다고 할 만한 장소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냥 동네에서 산책을 나올 만한 장소. 딱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아침이면 나이드신 분 들이 많이 올 것 같은 인상이었다. 힘들게 올라온 그를 보고 계속 웃다가 급기야 미간을 찡그리는 모습을 보았고 이제 그가 웃음을 보일 차례였다.
"그건 그렇네. 그럼 천천히 살펴보라고."
'아이스크림이나 얼른 먹고 싶지?' 라고 말하며 손을 당겨 아이스크림 가게까지 안내받아 그 아이스크림 가게를 보았다. 작은 소프트콘 가게. 별 다른 특징이라고는 볼 수 없는 어디에서나 볼 법한 가게였다.
"아니다. 그냥 안 먹을래. 경치나 좀 보자."
가게에서 시선을 돌리는 그녀를 보고는 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등을 돌렸다. 어차피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을테고 정말로 그녀에게 음식이나 물이 필요하지 않는다면 다른사람이 무언가를 먹는걸 바라보는게 어떤 기분일지는 모르겠지만 내 예상으로는 그리 좋은 기분일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현율은 다홍의 말이 맞는지 틀린지 답해주지 않았다. 룰의 존재 이유가 다홍을 보호하기 위한 비방인지 아닌지. 만약 대답을 했다면 이런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갇혀있다고 생각하면 이곳은 감옥이 되고, 나를 지켜준다 생각하면 성이 되는 것과 같다, 라고. 룰이 다홍을 구속할지 보호할지 역시 다홍에게 달려있다는 비유로 말이다.
어디까지나 만약일 뿐. 실제로는 말하지 않았으니 다홍에겐 그저 의문만 남아있었겠다.
평범한 캔버스로 보일 뿐인 그것의 안으로 현율이 사라진 후, 다홍이 그 표면에 손을 대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은 듯 하다. 현율이 들어가며 남긴 말 탓일까. 어쨌거나 손을 대면 캔버스의 표면에 새로운 파문이 번지며 다홍의 손을 받아들인다. 현율이 그랬던 것처럼 손부터 서서히 빨려들어가다가 어느 순간 뒤에서 누가 민 것 마냥 훅- 밀려진다. 그만큼 캔버스도 다홍을 끌어들여, 잠시 후엔 다홍의 모습마저 부실 안에 남지 않게 된다.
느긋하게 파문이 번지던 표면은 마치 늪처럼 다홍을 잡아채 깊이, 더 깊이 가라앉힌다. 앞을 보며 들어갔는데 감각은 가라앉는 감각이다. 혹여 눈을 떠 주변을 봐도 새까만 사방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끝없이 내려가지던 다홍의 앞에 서서히 빛이 들기 시작하더니 곧 사방을 채운다. 어둠과 달리 눈을 뜨기 어려울만큼 밝은 빛 속에서 다홍은 어딘가에 두 발이 닿는게 느껴질 것이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 살짝 거칠은 표면에 닿는 느낌이 나고, 빛이 눈을 뜰 수 있을만큼 사그라들고 나면 현율의 목소리가 근처에서 들린다.
"금방 왔네. 그럴거 같았지만."
눈을 뜨면 현율이 몇걸음 앞에 서서 다홍을 보고 웃고 있다. 어쩌면 금방 알아보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거기 서 있는 현율은 방금 전까지 입고 있던 교복이 아닌 검은 이브닝 드레스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으니까. 거디가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귀끝이 뾰족히 드러나있고, 등 뒤엔 옷에 맞춘 듯 검은 나비의 날개가 달려있다. 얼굴엔 콧등에 걸친 얄팍한 베일까지. 차림새는 바뀌어도 머리의 리본이나 팔의 붕대가 그대로인 걸 보면 장신구는 그대로인가 싶다. 후후. 반투명한 베일로 인해 어렴풋이 보이는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다시금 웃었다.
"일단 스스로 확인부터 해. 설명은 그 다음이야."
가벼운 손짓으로 다홍을 가리키며 말한 현율은 얼마든 기다려주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주변에 대한 것도, 할 일도, 다홍의 확인이 끝나야 할 것처럼.
그럴 만큼의 노력이라. 현율은 무심코 튀어나올 뻔한 말을 혀끝에서 거두어 목으로 삼킨다. 어느 정도의 노력이어야만 인정 받겠느냐는 물음도 함께 삼켜버린다. 그 말은 지금 나와서는 안 되는 말이었기에. 무거워진 속만큼 표정은 가볍게, 가볍게 웃어넘긴다.
천천히 살펴보래도 일단 아이스크림부터 사고 그럴랬는데, 갑자기 뭘까. 기껏 매점 앞까지 데려왔더니 안 먹는다며 등을 돌린다. 잠시 딴 곳을 보던 현율은 놀란 얼굴로 희수의 뒤를 따라간다. 따라가는 와중 들린 말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이유 같았지만. 그게 과연 코 앞까지 와서 돌아설 이유가 될까?
"먹어도 안 먹어도 목 마른 건 똑같지 않아? 땀 흘린 만큼의 수분 보충은 해야지."
현율은 희수를 따라 전망대 중에서도 가장 경치가 잘 보이는 곳에 서서 말했다. 왜 그랬느냐는 말 대신 희수가 했던 변명을 되돌려주는 식으로. 슬쩍 고개를 돌려 옆에 있을 희수를 보고 다시 앞을 본다. 아직 해가 다 저물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야경이라 할 만한 풍경은 아니지만, 깔끔한 도시 전경이 멀리까지 보이는 건 분명 장관이었다.
"나도 먹으려고 했는데. 소프트 아이스크림."
풍경을 내려다보던 현율이 불만을 담아 툭 하고 내뱉는다. 시선은 앞에, 말엔 주어가 없었으니 혼잣말이나 다름없지만 누구보고 들으라고 한 말인지는 명백하다. 그러고보면 이런 곳에 있는 저런 작은 매점을 알고 있는 것도 어쩌면 위화감이 들지 모르겠다. 상점가의 카페야 오다가다 보거나 누군가에게 들었다고 쳐도, 마땅한 간판도 없는 매점의 존재는 가보지 않으면 알기 어려우니 말이다.
기묘하네. 뒤에서 누군가 밀어버린 것처럼 캔버스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에 다홍은 생각했다. 걸음은 앞으로 향하는데 아래로, 저 아래로 가라앉는 것 같은데. 늪. 그래 늪에 빠지는 감각이 이런 건지 싶었다. 어둠에 익숙하던 눈 앞에 퍼지는 밝은 빛은, 다홍으로 하여금 그 벚꽃색 눈동자를 가늘게 뜨다가 결국 질끈 감아내게 만들었다. 눈을 뜨기 힘든 밝은 빛에 눈이 부셨기 때문이다. 맨발에 거친 표면이 느껴지는 것보다 겨우 눈을 뜰 수 있을만큼 빛이 사그라들었다. 다홍은 그제서야 질끈 감았던 눈을 겨우 뜰 수 있었다.
“내가 금방 올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잖니. 지금 네가 말한 것처럼.”
모습을 보고 알아봤다기보다 목소리를 듣고 알아봤다는 것이 더 가까웠다. 다홍은 어두워졌다가 갑자기 밝은 빛을 쬐어서 아려오는 제 눈 사이를 손으로 눌러서 자연스레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 나서야 현율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목소리가 안들렸다면 한번에 알아보기 힘들었겠다. 머리의 리본이나 팔의 붕대가 그대로여서 다행이지. 안그랬으면 현율을 흉내낸 무언가라고 생각할 뻔했다.
“호접몽이라도 꾸는 기분이네.”
확인하라는 현율의 말에 대한 다홍의 대꾸였다. 손등을 덮을 정도로 길게 내려온 화려하지 않고 수수한 붉은색 안료로 물들어 있는 평범한 장옷의 끝자락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다홍으로 하여금 지금 모습이 현율과 비슷하게 바뀌었겠구나하고 짐작하게 만들었다. 장옷 안에 입은 게 안어울리게 이브닝 드레스는 아닌 것 같다. 그랬다면 교복 치마를 입었을 때와 같은 감각일테니까. 눈물을 닦아내던 다홍의 손이 스스로의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었다. 둥근 곡선을 그리던 귀 끝이 뾰족하게 걸렸고 이내 “설마-..” 하고 다홍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서 등 뒤를 더듬는 것처럼 움직였지만 그것보다 먼저 시선이 그것을 발견했다. 푸른빛을 띄는 날개가 그곳에 있었다. 세상에. 다홍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장옷의 안쪽으로 두겹정도 되는 화려한 무늬가 인상적인 동양의 특별한 날에 입을 법한 복식을 입은 채, 다홍은 헛웃음에서 진심으로 즐거운 웃음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들어오기 전에 했던 말을 그저 예상이라 치부해버리는 현율의 말은 언뜻 듣기에 오만함이 엿보인다. 한수 앞이 아닌 두수, 혹은 그 이상의 수를 내다보고 있는 것만 같다. 그것도 그다지 친분이랄게 없는 상대를 향해 그리 말하니 더욱 그렇다만. 일순간 스쳐가는 쓴 웃음이 오만함의 기색을 지운다. 반전시킨 말의 의미는 과연.
호접몽. 틀린 말도 아니다. 실제로 지금 현율과 다홍은 나비의 날개를 달고 있었다. 어둠을 잘라 만든 듯 새카만 현율의 날개와 달리 다홍의 날개는 신비로운 푸른빛이다. 그에 어울리는 동양의 복식을 한 다홍을 보고 현율은 익숙하게 미소지었다.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한 복장이 되는거니까. 잘 어울릴 수 밖에. 응. 다홍에겐 그게 제격이라는 느낌이네."
이리저리 옷을 살펴보고 날개를 확인한 다홍이 즐거운 듯이 웃는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며 대답한다. 제격이라고. 누가 보더라도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저런 장옷과 복식이 어울리는 이는 다홍 밖에 없을 거라고 말이다. 어울리는 걸로 치면 현율도 충분히 어울린다고 할 수 있겠으나- 홀터넥 디자인의 검은 드레스는 아무리 장식이 화려하고 디자인이 좋아도 날개와 같은 검은색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붕대나 머리의 리본이 아니었다면 현율은 죽음의 사자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모습이었다.
"확인이 끝났으니 설명할게. 다홍아."
아이처럼 들뜬 다홍을 좀더 보고 싶어도 계속 여기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현율은 다홍을 불러 자신에게 신경을 돌리게 했다. 그와 동시에 다홍을 향해 휙, 하는 느낌으로 손짓을 하자 현율의 것과 같지만 색만 다른 엷은 베일이 얼굴에 걸린다. 룰에 있던 베일이 이것인가보다. 현율은 검은 베일을 두른 채 고개를 돌려 다홍을 보면서 앞으로 나아갈 길을 손으로 가리켰다.
"일단은, 어서와. 셸레-압생트의 숲에."
그제야 돌아본 앞은 어느 숲길의 입구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림으로 그린 듯한 풍경이었는데. 마치 입체 전시물 같은 초목들이 마찬가지로 그려진 듯한 대지에서 자라나있다. 분명 감촉은 보통의 흙바닥과 보통의 나무인데. 간간히 지나다니는 금빛 나비 역시 정교하게 만들어진 예술품 같다. 현율은 유독 초록빛이 짙은 듯한 그 숲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간다.
"다홍은 지금부터 이 숲을 날아다니며 황금의 가지를 찾으면 돼. 어떻게 생겼는지는 따로 알려줄 것도 없어. 이 숲에 어울리지 않는- 현실적인 형태를 하고 있을테니까. 그건 어느 고목의 정상에 있을 수도 있고, 갓 자라는 어린 나무의 가지로 붙어있을 수도 있어. 찾아야 하는 건 하나가 아니지만 몇개를 찾아야 할지는 다홍이 하기 나름이야."
시작부터 목표가 불분명한 일이라니. 잘못 걸렸다고 생각해도 이미 돌이킬 수 없다. 설명을 마친 현율이 술을 향해 몸을 돌리자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시원스럽게 파인 등을 살짝 보인다. 그대로 날개짓을 두어번 하더니 소리없이 공중으로 떠오른다. 그러자 바닥에 늘어져있던 드레스자락이 허공에서 일렁거리며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제법 큰 날개를 느긋하게 펄럭이며 다홍에게도 어서 오라 손짓한다. 조금씩 숲 쪽으로 향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