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차다고 느꼈을 때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걸어왔던 길보다 훨씬 길지 않나? 아무리 뛰어도 똑같은 풍경이었다. 이미 들어온 입구가 보였어야 했는데. 다시 교차로에 선 우리가 숨을 고른다. 누구에게 도움이라도 청하고 싶은데 지나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불까지 깜빡이고, 기분 탓인지 뭔지 알고 있던 상가의 모습보다 훨씬 낡은 것 같다. 꼭 공포영화에라도 나오는 장소처럼. 그때서야 우리는 ‘괴이’를 떠올렸다. 지금까지 마주친 괴이라곤 조금 놀라고 말 것들이라 이런 식의 상황에 빠질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이젠 춥기까지 했다. 더위를 피해서 들어왔더니 추위라니! 우리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보다는 무서운 게 앞섰다. 영원히 갇히면 어떻게 하지? 진짜 귀신이라도 나오면? 발을 동동 구르던 우리의 움직임을 멎게 한 건 다시 울리는 방송음 때문이었다. 방송에서 말하고 있는 건 자신이다. 일순간 몸이 얼었다. 주머니에서 무언가 열을 내고 있다는 걸 몰랐다면 계속 그렇게 있었을지도. 급하게 주머니를 손에 쥔 우리가 몸을 반대로 돌려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제발 어떻게든 도와주라. 제발, 제발!
손 안에 거머쥔 것은 따뜻한데 공기는 이제 너무 차가웠다. 설상가상으로, 뒤를 돌아보았을 때에는 당신을 내달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줄무늬티셔츠에 데님으로 된 오버롤을 입은, 남자아이가. 키는 당신보다 머리 두 개쯤 작아보이는.
남자아이라고 묘사한 것도 그저 그 아이의 머리카락이 짧아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그 아이는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피부가 온통 누렇게 떠서는 자글자글 주름이 진 것이 마치 미라를 보는 듯한, 원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하고 괴상한 몰골이었다. 남자아이가 입을 열었다.
"......"
입을 열어도 뭔가 소리가 바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말라빠진 공기 새는 소리가 흐릿하게 들리다가, 말소리가 띄엄띄엄, 말라빠진 입 속에서 흐릿하게 흘러나온다. 그렇지만 그 흐릿한 웅얼거림은 좀처럼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 말소리를 알아들어보려면 가까이 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손 안에 거머쥔 것은, 따뜻하다뿐이지 별 온도변화가 없었다. 어떤 현상인지 모르는 이것에 가까이 다가가볼 수도 있고, 도망칠 수도 있다.
다가가도, 불쌍한 몰골을 한 아이는 무언가 움직이거나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저 아이가 웅얼거리는 소리만이 조금 더 선명하게 들릴 뿐이다. 말라빠진 혀와 말라빠진 입술로, 말하는 소리라기보다 성대 삐걱이는 소리라고 표현하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은 소리로 미약하게.
"ㄴ나, 우ㄹ.. ㅇ, 어...마... 보... 셔서요...?"
그러나, 미라처럼 말라빠진 몰골을 했음에도 알아볼 수 있다. 그 아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열심히, 말을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같다. 당신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한다는 걸 알아채기라도 한 듯이. 그렇지만 그나마도 말이 불분명해서, 알아듣기가 힘들다.
이 아이는 이 곳에서 미아가 되어버렸던 모양이다. 미아가 되어버린 아이가 가장 먼저 찾는 건 당연히도...
평범한 주말이었습니다. 이제는 즐거울 것 같아요.. uu 아이에게서 도망쳤더라면 보스를 직면했을 텐데, 우리는 역시 마음이 곱네요. 이번 괴이는 노골적으로 악 성향인 위험한 괴이인지라, 희생자의 몰골이 흉칙한 점을 이용해서 자신에게 희생당한 사람을 몰이꾼처럼 쓰고 있거든요.
앗 지금부터 즐거운 이유가 혹시..? u////u ㅋㅋㅋㅋ 우리의 우리.. 오지랖이 넓은 덕에 일단은 보스몹(?)을 피했네요. 역시 착하게 사는 게 정답이다...! 노골적으로 악 성향인 괴이라니.. 피해자도 있다니..... 뭔가 해결해도 이미 벌어진 일들이 있으니까 슬플 것 같고 ㅠ-ㅠ 피해 본 사람 중에 아이도 있다는 게.. 흑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서 당신의 손을 잡는다. 역시, 차갑다... 그리고 목석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어서, 도무지 살아있는 사람의 손을 잡는다는 느낌이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기분 탓일까, 당신의 손이 닿자 아이의 손이 온도를 되찾기 시작하는 것 같다.
"응."
하고, 희미한 목소리를 한 채로 아이는 힘겹게 대답했다. 다른 손에 쥐여있는 주머니는, 당신 외에도 데워줘야 할 것이 늘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조금 더 따뜻하게 온기를 내기 시작했다.
"ㄸ뜻... 해..."
하고 아이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찰나, 또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울렸다.
딩동댕동. 운정지하상가 안내센터에서 안내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미아를 찾고 있습니다. 미아를 찾고 있습니다. 나이 8세, 줄무늬 티셔츠에 데님 오버롤을 입은 ○○○ 어린이를 찾고 있습니다. 다시 안내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미아를 찾고 있습니다. 미아를 찾고 있습니다. 나이 8세, 줄무늬 티셔츠에 데님 오버롤을 입은 ○○○ 어린이를 찾고 있습니다. 해당 미아를 발견하신 분께는, 지체없이 신속히, 다른 어떤 곳으로도 향하지 말고 지하상가 안내센터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딩동댕동.
아이의 손은 차갑고 뻣뻣했다. ...이 애 역시 사람이 아니었구나. 잠시 아이를 내려다 본 우리가 다시 들리는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도 둘이라고 아까처럼 무섭기만 하지는 않았다. 방송이 가리키고 있는 건 이 아이 같았다. 아니, 이 아이였다. 어쩌면 착한 방송일지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우리가 아이에게 말했다.
“아래에 엄마 계신대. 같이 가보자.”
그리고선 아이에게 맞춰 한 걸음씩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까처럼 또 길이 반복된다면 어쩌지. 그럼 길 잃어버릴 것 같은데. 심각한 생각도 잠깐, 일단은 알고 있는 길로 향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데,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자박자박. 아이는 솔이 터진 신발로 당신을 따라 말없이 발걸음을 느릿느릿 떼어놓기 시작했다.
...십자로를 건넌다. 이상할 정도로 통행인이 한 명도 없는 것과, 모든 가게의 셔터가 내려가있는 것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쭉 뻗은 길은... 당신의 눈에 조금씩 익숙한 지리를 되찾는다. 비록 낡아있지만 익숙한 간판도 보이고, 광장이나 꺾어진 곳 등 일직선으로 쭉 뻗어있던 아까의 이상한 모습과는 다르게 원래 모양으로 돌아와있는 것 같다.
그것과 별개로, 기분 탓일까... 안내센터 쪽으로 나아갈수록 손 안에 거머쥔 노리개 주머니의 온도가 조금씩 올라가는 것 같다. 아이는 문득 주머니를 거머쥐고 있는 당신의 손을 힐끔 건너다보았다.
한 걸음씩 나아갈 수록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혼자가 아니라 의지가 됐던 건 사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걱정이 되기도 했다. 혼자 길을 잃은 채 헤매는 것과 함께, 더군다나 제가 먼저 이끌어 따라오게 된 아이와 함께 헤매는 건 마음에 얹히는 무게 자체가 달랐다. 그나저나 안내 센터에 가까워질 수록 손에 쥔 것의 온도가 올라가는 것 같았다. 이전의 예시라도 있었다면 파악하기 쉬웠을 텐데. 처음 겪어보는 일인 탓에 이게 옳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판단하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일단 아무것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길을 안내해준 건 방송뿐이니까.
“어, 그게, 아까 방송에서는 그렇다고 했는데......”
아이가 묻자 조금 자신감이 떨어진 목소리로 우리가 답했다. 우리와 아이는 손을 꼭 잡은 채로 안내센터 앞에 서 있다.
모든 건물이 다 셔터가 내려가 있는데, 이상하게도 안내센터만큼은 셔터가 내려가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상하다. 안내센터의 안이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보통 투명해서 안이 다 들여다보일 안내센터인데, 마치 유리창 뒷면에 새하얀 종이를 빈틈없이 붙여놓은 것마냥 안내센터의 문이며, 유리창이 새하얗게 보일 뿐이다. 공기가 마치 차가운 족쇄처럼, 당신의 피부에 차갑게 처덕처덕 달라붙어 얼어붙고 있는 것 같다.
아이는 느릿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당신의 손을 잡아끌고 있다. 아까 방송에서는 그렇다고 했는데... 하는 당신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득 새하얀 유리창 위로 -_____- 같인 모양의 자국이 아래에서부터 슬라이드되듯 스멀스멀 올라온다. ...눈과, 입?
그리고 그 세 갈래 금 중에서, 가운데 아래쪽에 나 있는 길다란 금이 슬몃 벌어진다. 새까만 진흙 같은 그 입안에서, 스피커같은 게 슬쩍 고개를 내밀고 삐져나왔다.
지지직 지지직.
하얀 잡음이 그 괴물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딩동댕동. 운정지하상가 안내센터에서 안내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미아를 찾고 있습니다. 미아를 찾고 있습니다. 나이 17세. 홍림고 하복을 입은 고우리 학생을 찾고 있습니다. 다시 안내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빠지직, 하고 안내센터의 유리창이 금이 가는가 싶더니,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와르르르 무너진다. 그것의 눈이 떠진다. 새하얀 눈알에, 점 같은 동공이 섬뜩한 악의를 품고 당신과 소년을 쳐다보고 있다.
그 새하얀 것은 그것의 몸뚱아리였던 모양이다. 눈과 입만 달린 새하얗고 거대한 애벌레같은 몸뚱아리가 안내센터 정문을 부수고 스멀스멀 기어나오고 있다. 이제 손 안에 쥐어져 있는 부적은 뜨거울 정도다...
부적이 따뜻해지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구나. 끔찍한 입이 벌어지는 걸 보고 한 번, 거기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한 번 생각했다.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던 우리가 유리창에 금이 가기 시작하자 아이를 덥석 안아들었다.
“미안!”
그리고 정문이 부서졌을 땐 냅다 뛰기 시작했다.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뛰었는데... ...나 짱 느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서러웠다. 왜 내 다리는 이 정도에서 성장을 멈춰서, 왜 내 달리기는 50m를 간신히 9초 대에 뛰는 게 다라서....... 그래도 전부 포기하는 것보다는 뛰는 게 나았기에, 목이 따끔하고 팔이 후들거렸음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달렸다.
더욱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당신의 다리도 느린데... 이 아이는 아예 뛰지도 못했던 것이다. 굳어버린 무릎을 최대한 움직이려고 해보지만, 달리지를 못해서 그만 당신의 손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아이는 당신에게로 손을 뻗다가, 손을 툭 떨어뜨린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다.
아이의 등 뒤로, 눈을 치켜뜬 괴물이 입을 쩍 벌린다. 징그러운 이빨이 드러나는가... 싶더니... 더 징그러운 게 입안에서 드러났다. 입이 끝도 없이 찢어지면서 윗입술이 머리 위로까지 휙 들려올라가면서, 얼굴 가죽이 통째로 들려올라가서는 새빨간 근육으로 뒤덮인 해골 같은 그 괴물의 본모습이 입술 아래에서 드러난 것이다.
아이를 데리고 도망갈 수는 없다. 아이를 이대로 두면 아이는 잡아먹힌다.
...도망가야만 할까. 그렇지만 도망가지 않는다고 해도 저 괴물을 상대로 맞설 수 있는 것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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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셋 중에서 우리가 지금 이 순간, 괴물을 물리치는 상상을 하며 떠올릴 만한 것이 있나요?
역시 아이를 들고 뛰는 건 무리수였던 모양이다. 후들거리는 손으로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같이 뛰려는데, 잡고 있던 손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이상하다 싶어 뒤를 돌았더니 아이와 그 뒤에 입을 벌린 괴물이 보였다. 입을 벌렸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것 같은데, 아무튼. 우리는 징그러운 것을 보았을 때 자연히 찌푸려지는 얼굴을 했다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가 결국엔 울상이 됐다. 다가가기엔 괴물이 너무 가깝고, 이대로 도망가면 저 괴물이 아이를 다치게 할 것이다. 찰나의 순간 뜨거울 정도로 온도가 높아진 손이 눈에 띄었다. 화염구까지도. –어차피 그만한 힘도 없지만–일반적인 힘으로는 괴이를 물리칠 수 없을 테니까, 답은 지금 보이는 이 불꽃이었다. 우리가 괴이가 있는 방향을 향해 손을 뻗더니 그대로 탈탈 털었다. 조금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아직 제대로 쓰는 방법을 모르는 우리에겐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손을 탈탈 털어제끼자, 손 안에 맺혀있던 화염구가 이지러지며 불똥이 돼서 새빨간 해골 얼굴에게로 후드득 쏟아져내려갔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괴물은 화들짝 놀라 몸을 비틀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쩍 솟구쳐올라갔던 허연 가죽을 다시 얼굴로 덮어내리며, 몸을 뒤틀며 뒤로 물러서는 것이 분명 어떤 효과가 있는 듯했다. 그러나 잠깐 물러서게만 할 뿐으로, 괴물은 다시금 허연 가죽을 제치고 벌겋고 흉물스런 얼굴을 드러내며 도롱뇽같은 팔로 땅을 짚고는 다시 다가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물러난 괴물을 보고 환호를 질렀다가 다시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일단 좀 많이 물러나게 해서 아이만 구한 다음에... 다음에...? 우리가 고개를 저었다. 생각을 길게 할 시간이 없었다. 우리는 손을 더 크게 휘적였다. 방금 전보다 더 큰 불길이 일어나 괴물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기를 바라며.
푸드득푸드득. 손을 힘차게 흩뿌리듯이 턴 보람이 있는지 이번에는 불똥이 아니라 불 붙은 휘발유라도 내다뿌린 마냥 불꽃의 조그만 파도가 일어 괴물의 얼굴을 덮쳤다. 당신은 왜인지 몇 시간 연달아 공부한 것처럼 머리가 찌뿌둥해지는 것을 느꼈다. 괴물은 괴성을 지르며 비틀비틀 물러섰다. 불꽃이 얼굴에 달라붙어 괴물의 얼굴을 태우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아이의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괴물은 황급히 허연 가죽을 얼굴 위에 덮어씌웠고,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가죽 아래에서 역겨운 고기 타는 냄새가 나는 증기가 솟구쳤다. 이번에는 괴물은 얼굴가죽을 벗지 않았다. 얼굴에 덮어씌워진 하얀 가죽에 난 눈구멍이 벌어진다. 소름끼치는 점같은 동공이 가죽 사이로 드러난다. 괴물이 다시 전진해오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열심히 움직인 덕인지 불꽃은 훨씬 커졌다. 더 큰 타격을 준 것도 맞는 것 같았다. 문제가 있다면 머리가 아팠다는 걸까. 가능성이야 많았다. 추워서 그럴 수도 있고, 그제야 공포심이 몰려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 불꽃이 원인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말곤 저 괴물에 대응할 방법이 없으니까. 우리가 재빠르게 달려가 아이의 손을 붙잡고 일으켰다.
“뛸 수 있어? ...아님 업힐래?”
으아아—. 다시금 다가오는 괴물을 향해 힘껏 손을 휘두른 우리가 아이를 데리고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한번 더 불길을 휘두르자 이젠 경미한 빈혈이 오는 듯한 어지러움까지 느껴진다. 아이는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움직이려 했고, 삐걱거리는 걸음으로나마 우리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아까보다는 확실히 도망칠 수 있다... 는 느낌이지만, 역시 느리다.
그러나 이번에는 참 보람없게도, 괴물의 얼굴가죽에 닿은 불은 효과적으로 괴물에게 피해를 주지 못하고 얼굴가죽을 조금 그슬러버린 정도에 불과한 모양이다. 괴물은 잠깐 움찔한 것을 끝으로 점점 가속도를 붙여가면서 우리와 아이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얼마 가지 못해, 추격전의 양상이 당신에게 아주 나쁜 방향으로 바뀌었다... 갑자기 온 지하상가의 불이 꺼지더니, 붉은색의 비상등이 점등되면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천장의 스프링쿨러에서 물이 거세게 쏟아지기 시작했고, 복도 저편의 방화셔터가 당신 혼자 전력질주해도 따라잡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빠르게 드르륵 내려와서는 닫혀버린 탓이다.
양옆으로 고개를 돌려봐도, 옆으로 샐 만한 골목에서도 이미 방화셔터가 내려와 닫히고 있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셈이다. 이 지하상가의 그림자 같은 곳은, 이 괴물의 영역... 괴물은 소방수로 축축하게 젖은 새하얀 얼굴가죽을 뒤집어쓴 채로, 가죽에 난 입을 쩌억 벌렸다. 온통 새까만 진액으로 가득찬 입 사이로 날카로운 이빨들이 비어져나온 게 보인다. 속도는 줄어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 순간, 이변이 발생했다.
갑자기 땅에서 엄청난 기세로 날카롭게 부러진 파이프같은 게 튀어나오더니, 괴물의 윗입술을 비스듬하게 꿰뚫어버린 것이다. 그 풀에 괴물의 윗입술이 훌렁 벗어져 천장에 못박히는 바람에 괴물의 새빨간 얼굴이 다시 드러났다. 괴물은 가속도를 잃지 않고 계속 전진해오려 했지만, 파이프를 조금 구부리는 데에 그쳤다. 당신과 겨우 사오 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그 괴물은 저지당해버리고 말았다.
확실히 해두고 싶었던 건지, 천장과 땅바닥에서 몇 가닥의 굵은 파이프가 더 튀어나와서 괴물의 가죽을 무두질 선반에 걸어놓듯이 꿰면서 감옥 창살처럼 괴물을 옭아맸다. 괴물은 입을 벌려 분노와 고통에 가득찬... 말로 형용하기 불쾌한 소리의 고함을 질러댔다.
그때 당신은 방화셔터의 한구석이 무슨 꽃송이라도 된 것처럼 자연스레 벌어지며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 틈새로 들어오는 것은... 당신이 언젠가 본 적이 있던, 그러나 그때 봤던 것보다 훨씬 커다란... 황소만한 체구의, 꼬리 여섯 개 달린 새하얀 여우였다. 여섯 갈래의 꼬리 끄트머리마다 자주색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여우는 당신과 소년에게로 고개를 돌려서는 꼬리를 흔들었다. 여우의 입은 벌어지지 않는데 당신의 머릿속에 말소리가 들린다.
조금 느리지만 천천히 움직이는 아이와 발 맞춰 걷던 우리가 갑자기 쏟아지는 물에 깜짝 놀라 짧은 비명을 질렀다. 머리도, 교복도 축축하게 젖었지만 일단은 도망치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잠깐만, 안 돼!”
우리가 빠르게 내려가는 방화 셔터를 보며 외쳤다. 당연히 괴물이 우리의 말을 들어줄 리 없으니 상황이 나아지는 일은 없었다. 아이의 앞에 서서 천천히 뒷걸음질치던 우리가 눈을 질끔 감았다가, 괴상한 소리에 눈을 떴다. 괴물을 공격한 파이프를 멀뚱히 보던 우리는 저 끔찍한 광경을 아이가 볼 수 없도록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 탓에 닫힌 셔터를 밀어내고 들어오는 흰 여우를 조금 늦게 발견하고 말았다.
“그렇게 세게 쥐어도 되는 거야? 응, 어. 그럴게!”
우리가 불꽃을 꽉 쥐었다.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하나도 뜨겁지 않다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선 아주 힘껏, 온 힘을 다해 괴물을 향해 던졌다.
불꽃을 거머쥐자, 그것은 손 안에서 마치 스펀지나 종이뭉치를 구기는 것처럼 쪼그라들었다. 손을 펴봤을 때에는 조그만 살구씨만한 불잉걸 덩어리 같은 게 손에 들려 있었다. 한 번 손을 뒤로 잦히고, 휙 던지자 그것은 마치 유성처럼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괴물의 입 안으로 빨려들어갔고... 괴물은 그걸 덥석 삼켰다.
그리고 괴물의 몸이 들썩하면서 괴물의 눈과 입, 콧구멍을 통해 벌건 섬광이 한번 번쩍 비치는가 싶더니, 그것은 이내 입을 떡 벌리곤 완전히 뻗어버리고 말았다. 눈, 코, 입, 구멍이라는 구멍에서 연기가 풀풀 나오는 몰골로 보아, 이로 보나 모로 보나 확실히 "잡았다".
여섯 꼬리 여우는 꼬리를 살랑 흔들며, 폴짝 뛰어서는 재주를 한 번 넘었다. 뛰어오를 때는 여우의 발이었는데 도로 내릴 때는 단화를 신은 발이 되어 있다. 단화를 신고, 하복 셔츠와 바지 차림에, 크로스백을 메고 있는 고운 소년이 그 자리에 있었다. 몇 번인가 눈인사 정도나 하고 이름만 알고 있었을 뿐인, 별나고 이상한 반 친구. 분명 단랑, 이라는, 조금 별난 이름이었지.
소년은 크로스백에서 길다란 공책과 빨간 색연필 같은 것을 꺼냈다. 공책을 펼치자 노르스름한 종이가 드러났고, 소년은 그 위에 익숙한 손길로 뭔가를 휙휙 그린 뒤에 책장을 북 뜯어서는 그것을 연기를 뿜는 괴물의 이마에 착 붙였다. 괴물은 서서히 쪼그라들었다.
그리고는 이번엔 괴이라기엔 좀 이상한 게 나왔는데... 그는 핸드폰을 꺼내들어서는 뜬금없이 그 괴물의 사진을 한 장 찍더니 어디론가 보내는 것이다. 그러고서야 자기 일을 마쳤는지, 괴물(의 시체인지 아니면 빈사상태인지)을 내버려두고 당신에게로 돌아섰다.
"...늦게 와서 미안해. 많이 놀랐지."
처음으로 꺼내는 말은 그것이다. 방화셔터는 언제 내려갔냐는 듯 사라져 있고, 쇼핑몰은 아직도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어두침침하거나 싸늘한 기색은 모두 사라져 있는... 점포 문만 전부 닫혀있지 않았던들 평소의 지하상가와 별다를 게 없어보이는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우리는 비록 제가 던졌지만 아무리 봐도 불덩어리인 것–이미 알고 있어 그렇게 보이니?–을 삼키는 괴물의 행동에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불안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우리가 번쩍이는 섬광에 눈을 꼭 감았다. 또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터질 줄 알았는데. 연기가 나는 괴물을 본 우리가 잠깐 표정을 찌푸렸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단랑이 무언가 붙이자 쪼그라드는 괴물의 모습이 썩 유쾌한 장면은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사건이 해결되었다는 사실에 더 안심이 됐다.
“아니야, 이렇게 된 게 네 잘못도 아니구... 오히려 와줘서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겨우 긴장이 풀린 얼굴을 한 우리가 다시 안도의 한숨을 뱉는다. 계속 괴롭히던 추위도 가시고, 아까보단 덜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걸 보니 정말로 끝난 모양이다. 우리가 제게 내밀어진 손을 보다가 조심스레 제 손을 뻗어 그 손을 쥐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아, 하고 짧은 소리를 냈다.
“나가기 전에 이 애 엄마 찾아주고 싶은데...”
계속 제 뒤에 숨겨두었던 아이를 보여주기 위해 살짝 비켜서며 말했다. 잘못된 곳에 가서 놀라게 한 것에 책임이 있으니 부탁을 꼭 들어주고 싶었다. 우리가 간절한 표정으로 단랑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