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마법처럼 금빛으로 바랜 햇살이 내려앉으면서, 활기와 생기로 가득찼던 학교가 조금씩 차분하게 가라앉는 시간. 미술실로 가는 복도를 걷노라면 며칠 전 그 때로 되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오늘은 그때와는 조금 달리, 초대를 받아서 가는 길이다. 점심시간 때, 책상에 놓여있었던 익숙한 필체의 쪽지. "미술실에서 만나" 라고 적혀 있는.
미술실 문을 드르륵 열어보면, 그래, 거기에는 당신이 기대하고 있던 그 소년이 있을 것이다. 새하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단랑이, 미술실의 투박한 나무 스툴에 앉아있다가 당신에게로 그 빨간 시선을 들어올리고. 다만... 소년의 허리춤에는, 당신이 그때 보았던... 왠지 엄청나게 푹신푹신할 것만 같은 여섯 가닥의 꼬리가 흘러나와서는, 강아지풀 흔들리는 마냥 살래살래 흔들리고 있다. 머리에는 예의 그 여우귀가 돋아 있고.
"응, 왔구나."
눈이 마주치면, 단랑은 당신에게 반갑게 인사해온다. 얼굴에 딱히 웃음기는 없지만, 그럼에도 그 표정없는 얼굴에 조금은 반가워하는 기색이 느껴진다.
늘 신발장에 있던 쪽지가 오늘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누가 볼세라 잽싸게 쪽지를 챙긴 우리가 종이에 쓰인 글자를 찬찬히 읽고선 작게 웃었다. 막상 학교 안에선 인사 정도 하는 데면데면한 사이처럼 굴면서 이런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는 게, 어쩐지 즐거운 일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자주 웃고 있는 우리라서 수업이 마치기 전까지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딱히 수상해 보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오늘 기분 좋은가 보네—. 하는 말 정도만 들었으니까. 수업이 끝나고 우리는 느릿느릿 짐을 쌌다. 누구보다 빠르게 집에 갈 준비를 하던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곧바로 하교하는 친구들을 배웅하고, 다른 반 아이들로 북적대는 복도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린 우리가 슬그머니 교실 밖으로 나왔다. 조용하지만 즐거운 기색이 담긴 가벼운 걸음이었다. 미술실 문을 열었을 때는 우리가 예상했던 상대가 있었다. 그날은 어쩌다 보게 된 거지만 오늘은 알고 보는 단랑의 모습은... 꽤 폭신해보였다! 작게 움직이는 꼬리에 정신이 팔려 있던 우리가 뒤늦게 말했다.
“내가 조금 늦었지......”
미안한 얼굴을 하며 단랑을 보았던 우리는 저도 모르게 다시 꼬리를 바라봤다. 아차, 하는 얼굴로 민망하게 웃은 우리가 뺨을 긁적였다.
“미안, 꼬리가 멋있어서. ...이런 말 실례인가? 그랬다면 미안해.”
그제야 본 목적을 떠올린 우리가 단랑의 맞은편에 앉았다. 가방을 근처에 내려놓은 우리가 바른 자세로 앉아 단랑을 바라보며 물었다.
단랑의 여우꼬리들이 살랑, 하고 흔들린다. 바람이 불어와 흔들린 건지, 그가 가볍게 흔든 건지, 산들바람이라도 한 차례 쓸고 지나간 마냥 부드러운 하얀 털들로 뭉쳐진 꼬리가 한 차례 찰랑였다.
"그래서 평소에 내놓고 다닐 때도 있었는데.. 넌 이제 이게 보이나 보구나."
그날 그 모습을 봐버린 게 어떤 계기가 되어버린 걸까. 단랑에게서 지금껏 못 보고 지나치던 어떤 면모가 당신 앞에 드러나 있었다. 그는 여섯 꼬리를 사르륵 늘어뜨리고는 검지손가락을 치켜들어 당신의 등 뒤의 한 지점을 가리키더니, 스마트폰 화면을 밀어서 잠금해제하는 것처럼 손가락을 옆으로 슥 밀듯이 움직였다. 그와 함께 등 뒤로 미술실 문이 소리없이 닫혔다.
왜인지, 뭐라고 해야 되나. 할 말이 있다고 쪽지로 방과 후에 아무도 없는 미술실로 불러내고는, 게으르게 기우는 금빛 햇살이 비쳐드는 미술실에 단 둘이. 청춘 로맨스에서 흔히 고백 장면이 나올 때 이런 배경을 즐겨 사용하지 않던가...? 당신이 눈을 반짝이며 건넨 질문에, 단랑은 용건을 꺼냈다.
"이번 주말에, 혹시 시간을 좀 내어줄 수 있나 해서."
일반적인 고교 청춘 로맨스라면 확실히 데이트 신청 장면이라고 해도 좋을 법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단랑은 그 분위기에 초를 쳤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 당신의 머리... 정확히는 머리 위를 가리켰다.
오늘은 늦어도 너무 늦었죠... ㅇ<-< 주무시고 계시겠네요...... 어떻게 이틀 연속으로 이런 악재가. 8.8
우리의 여우귀는 실제로 머리에 여우귀가 돋아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환상이에요(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괴이와 접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심상에 이미지로 남았는데, 우리의 안에 깃들게 된 마력(마력이라고 표현하는 게 전달하기 쉬울 것 같네요)이 그 이미지대로 마치 진짜인 것처럼 물리적 환상으로 나타나는 거라고 할까요. 괴이와 근접했을 때 반응해서 나타나게 될 거에요. 단랑이의 여우꼬리처럼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요.
보통의 사람은 보지 못한다는 단랑의 말에 우리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기뻐하는 건 확실히 아닌 듯 보였으나 슬픔이나 짜증의 기색이라기에도 애매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의 속은 꽤 시끄러웠다. 그날 미술실 앞을 지나간 걸 후회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본다면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괴이와 엮인 게 달가운지를 묻는다면 아니라고 할 테니까. 살랑이는 꼬리를 본 우리는 그냥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던 우리는 단랑이 제 뒤를 손으로 가리키자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뒤를 돌아보자 부드럽게 문이 닫힌다. 누구에게 들킬까 살금살금 들어와놓고 문을 닫지 않았다니. 바보 같은 실수에 괜히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카락 끝을 꼬았다.
“미안, 문 닫고 왔어야 했는데 조심성이 부족했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상황 꽤 낭만적이다. 단랑의 뒤로 저물어가는 해는 따뜻한 빛을 내고 있었고, 조금 열린 창문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이따금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거기에 조용한 미술실에 단 둘뿐이라니. 누군가는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을지도 모르지만, 이 자리에 있는 게 우리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상대가 단랑이라면 더더욱. 단랑이 괜찮다곤 했지만 여전히 우리는 단랑에게 약간의 부채감이 있었다. 비밀과 꼬리 때문에. 그 부채감은 단랑의 어떤 말에도 귀 기울이고 어떤 일에도 협조할 마음을 먹도록 도왔다. 단랑의 물음에 우리가 지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때문에 그러는 거지? 주말 이틀 다 괜찮아.”
우리가 귀가 있을 만한 자리를 콕콕 가리키며 말했다. 자신도 최선을 다 하기로 약속했으니 했던 말은 지킬 생각이다.
“그때 지하상가에서 나왔던 곳 있잖아. 거기가 너희 집이랑 우리집 중간쯤 되나? ...다른 곳이면 말해줘! 내가 그쪽으로 갈게.”
말한 우리가 다시 무언가 굳게 맘 먹은 듯한 표정으로 단랑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무언가 떠오른 듯,
"아니... 그건 내가 고등학교 다니는 동안 방 얻어서 사는 하숙집." 단랑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우리 집 본가는 기차를 두 시간 넘게 타야 돼. 예성시에 있거든. 그래서 아마 너희 댁 부모님한테도 말씀을 드려야 할 거야."
예성시라고 한다면, 남부 지방에 있는 두 도의 경계선쯤에 위치해 있는 도시로, 남해와 접해 있는 관광도시였다. 남부 끄트머리까지 내려가려면 확실히 기차로 두 시간 정도는 소요될 것이다. 단랑이 제의한 여행길이라는 건 꽤나 먼 길이었다.
"빨리 가는 방법이야 있지만 그건 어지럽고 불편하니까 논외로 두고.."
뭔가 좀 떠올리기 꺼림칙한 걸 떠올린 듯 단랑의 미간에 조그만 실금이 스쳐갔다. 당신의 머리 위에 달린 그 귀와, 그의 등뒤에 흔들리고 있는 몽실한 꼬리들만 아니었으면 해수욕장이 유명한 예성시로 놀러가는 즐거운 주말 피서 여행 제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 그 귀와 꼬리들이 아니었으면 이 소년과 이렇게 빨리 안면을 트지도 못했을 테니, 하늘도 무심하다는 말을 이런 데 갖다붙여도 될까.
"네가 그렇게 멀리 가는 게 안된다면, 본가에서 어르신을 모셔올 수도 있으니까 곤란하다면 언제건 말해줘..." 하고 말을 끝맺으려던 단랑은, 당신의 심각한 표정에 따라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긁적였다. "글쎄, 괜찮다고 하고 싶지만,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복채나 새전 삼아서 뭔가를 가져가는 게 좋을 거야. 유부초밥이라면 사족을 못 쓰시니, 유부초밥을 가져가면 어떠려나."
늘어진 꼬리가 하나로 겹쳐지나 싶더니, 이내 거기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진다. 고개를 들어보면 여우귀는 온데간데없이, 단랑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평소의 단정한 얼굴을 하고 있고. 머리를 만져보거나 거울을 보면 당신의 여우귀도 사라졌을 것이다. 단랑은 추가적인 용건이 있는 듯, 당신에게 다른 질문을 꺼냈다.
"맞아... 우리 너 혹시, 이전에도 이상한 걸 봤다거나, 굿 같은 걸 받아봤다거나 한 적 있어?"
우리주의 타이밍 감각에 박수를 보내요. 네, 주말 동안 이리저리 예정에 없던 외출에 끌려다니긴 했지만(그 덕분에 답레손실이 엄청 뼈아프게 났지만 8-8) 그럭저럭 잘 보냈어요. 일단 지금은 저녁을 건너뛴 제 호적메이트랑 밤참을 차려먹기로 한지라.. 다음 답레가 또 늦어질지도 몰라요. 8.8 답레는 모쪼록 느긋하게 써 주세요.
본가는 다른 곳에 있었구나.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들과 함께 지냈던 우리에게 홀로 사는 일은 조금은 동경할 만한 것이었고, 또 조금은 신기한 일이었고, 약간은 쓸쓸하지 않을까 걱정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멋대로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실례니까. 설레설레 고개를 저은 우리가 조금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내 시간 빼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부모님께 뭐라고 말씀 드릴지가 고민이네. ...역시 친구랑 같이 공부한다고 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일까.”
어딘가 결연함마저 느껴지는 얼굴로 말했다. 이 시기 학생에게 공부나 숙제 같은 단어는 거의 프리패스권이었다. 우리라고 예외일 리 없다. 들키지만 않는다면! 예성시까지 가는 시간을 가늠해보던 우리는 무의식 중에 단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가, 아주 옅게 구겨지는 그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 방금 떠올린 방법이 딱히 좋은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에 기차를 타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섰다.
“아냐, 괜찮아.”
사실 좋은 일로 가는 거라 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이 예정된 여정에 조금 떨리는 걸 느꼈다. 어쨌거나 익숙한 공간을 떠나는 일이 아닌가. 시간이 남는다면 바다 구경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구나. 물어보길 잘 했다. 나 하마터면 과일바구니나 주스 같은 거 들고 갈 뻔 했어.”
유부초밥 네 글자를 머리에 꼭꼭 눌러 쓴 우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알았다는 표시였다. 직접 만드는 게 나을까, 사람들이 맛있다고 하는 곳에서 사 가는 게 나을까. 소소한 고민에 침묵을 지키던 우리가 시야를 간질이던 꼬리가 조금씩 줄어드는 모양에 단랑을 쳐다봤다. 아차, 실례가 됐을지도. 잠깐 다른 쪽으로 눈을 굴린 우리가 단랑의 물음에 다시 그를 바라봤다.
“어..., 아니. 그런 적은 없는 걸로 알아.”
우리는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보통을 벗어나 본 적 없는. 비록 지금은 평균 키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긴 했지만, 평균 밖인 건 그게 고작이었다.
시간내어 답레 이어주셔서 감사해요. 우리... 뭐라고 해야 될까 똘망똘망하고 호기심많고 예절바른 게 골든두들 같아서 귀여워요.. 네, 답레는.. 지금 바로 잇고 싶지만, 아무리 봐도 지금 답레를 이을 만한 기력이 없으므로 내일 이어오겠습니다.. 우리주도 평안한 밤 되시고, 좋은 한 주가 되기를 바라요. 안녕히 주무세요.
제가 재밌어서 잇는 답레인걸요! 골든두들 검색해보고 왔다가 귀여워서 심호흡 해야 했네요... 우리를 귀엽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단랑이는 잘생긴 여우예요. 같아요를 쓰지 않은 건 이게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ㅎ-ㅎ 오늘도 자기 전에 뵐 수 있어서 좋았어요. 푹 주무세요, 단랑주~
엄밀히 말해 혼자 사는 건 아니었고, 개성 강한 하숙집 메이트들이 있지만... 음, 그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당신이 알아도 좋을 만한 사실은, 그도 당신만큼이나 하숙집 말고 아예 원룸 얻어서 혼자서 자취를 해버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일까. 당신의 고민에 단랑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덧붙인다.
"음... 그렇게 말하고도 부모님이 납득 못하시면, 내 번호 줄 테니 내가 부모님과 통화하게 해줘."
그는 자기 옆에 놓여있던 연습장의 종이 한귀퉁이를 쪽 찢더니 정갈한 필체로 연락처를 삭삭 써내려서는 당신에게 건네어준다. 당신의 부모님을 설득할 좋은 수단이 있는 걸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기도 하다. 단랑의 성적은 전교 최상위권이었으므로, '저번 중간고사 때 우리 학교에서 몇 등 한 애랑 친해져서 같이 공부하기로 했다' 고 말하면 "그것 참 좋은 친구구나" 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굳이 타박하거나 비평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당연하게도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하니까.
"과일-" 당신의 말을 단랑이 가만히 되뇌어보다가, 딴데 팔려있던 정신을 다잡는 듯이 눈을 깜빡인다. 그러다 당신이 꼬리에 시선을 두는 것을 보았는지 소년은 옅게 웃었다. 그의 허리춤에서 줄어들던 새하얗고 복슬복슬한 꼬리가 다시 여섯 갈래로 피어나 폭신하게 살랑인다. "왜. 만져볼래?" 하고, 조금 장난스러운 질문이 건네어져온다.
공부에 영 취미가 없는 우리라 아마 부모님은 공부라는 단어를 꺼냈다는 것으로도 기뻐하며 등 떠밀어주실 테지만, 또 혹시나라는 게 있으니까. 아마 단랑의 등수까지 얘기한다면 그 혹시나도 사라질 것 같긴 하다. 오히려 공부하고 맛있는 거 사 먹으라면서 용돈을 쥐여주실지도. ...그걸로 유부초밥을 사서 갈까? 우리가 잠깐 생각했다.
“아, 응. 고마워.”
쪽지를 받자마자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 우리가 적힌 번호를 저장했다. “잠깐만....” 중얼거린 우리는 계속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저장만 하는 거라면 아직까지 휴대폰을 붙들고 있을 리 없는데, 우리의 손가락이 이상하게 오래 꼬물댔다. 조금 지나면 단랑의 휴대폰이 울렸을 것이다. 확인해 보면 도착해 있는 메시지. <안녕, 나 우리!> 느낌표 뒤에는 웃는 얼굴을 한 이모티콘이 하나 붙어있다.
단랑이 웃는 얼굴을 조금 신기하게 쳐다 본 우리가 다시 늘어나는 꼬리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들린 말엔 도리어 제가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래도 돼?”
미간을 좁힌 채 고민하던 우리가 물었다. 우리에겐 꽤 심각한 고민 끝에 나온 질문이었는지, 입술까지 동그랗게 모은 채였다.
당신이 핸드폰을 잠깐 붙들고 있자, 부모님한테 연락드리는 건가 하고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단랑은 뜬금없이 자기 핸드폰의 알림음이 울리자 조금 놀랐다. 눈에 띄게 움찔하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에 눈을 조금 휘둥그레 뜨는 정도로. 그는 자기 핸드폰을 꺼내며, 멋적게 머리를 긁적였다.
"네 번호를 달라고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하고 그는 웃는다. 곤란해하는 듯한? 아니, 저건 쑥쓰러워하는 듯한-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뜻밖에, 가족과 선생님들의 전화번호만이 저장되어 있던 삭막한 전화번호부에 처음으로 반 친구의 전화번호가 남았다. 그것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몰라 단랑은 말을 아꼈다. 절대로 나쁜 기분은 아닌데, 티내기에는 왠지 쑥쓰러운 그런 기분이었기에.
"...그래도 알려줘서 고마워." 단랑은 핸드폰을 톡톡톡 건드렸다. 곧 당신의 핸드폰에 알림이 간다. 채팅창에 들여다보면, 참 짓궂게도 뭐라 말은 없이 🦊 이모지 하나가 대답으로 톡 띄워져 있다.
당신은 힘겨운 고민 끝에 내놓은 대답임에도 그는 여전히 너그럽다고 해야 되나, 느긋하다고 해야 되나 옅은 웃음을 얼굴에 건 채로 꼬리들을 살랑 흔들었다.
"어디까지나 네가 그러고 싶다면."
꼬리를 만지는 게 (어쩌면, 허락하에 꼬리를 만지는 게) 딱히 크게 실례되거나 하는 일은 아닌 모양이다.
끝에 가선 조금 자신감이 줄어든 목소리였다. 그야 괴이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것도 단랑이었고, 성적도 단랑이 월등히 좋은 데다 학교 생활도 무난하게 잘 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내 도움이 필요할까? 고민에 빠진 우리의 얼굴이 또 다시 심각해졌지만 곧 좋은 대답을 생각해낸 듯 환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 그래도 친구니까.”
어떤 조건을 만족해야 단랑의 친구가 될 수 있는지는 몰라도, 일단 단랑은 제 친구였다. 친구라면 휴대폰 번호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우리의 지론이다. 고맙다는 말에 웃은 우리가 다시 울리는 제 휴대폰을 봤다. 여우 이모티콘을 하나 보낸 게 참 잘 어울리기도 하고, 의외이기도 하고.
흔들리는 꼬리에 시선을 뺏겼던 우리가 단랑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실례합니다.”
조심조심 손을 뻗어 살짝 건드리곤 눈치보듯 단랑을 쳐다봤다. 어정쩡하게 꼬리에 손을 올린 채로. 손에 닿은 하얀 털은 보이는 것만큼이나 부드러웠다. ...근데 손을 언제쯤 떼야 하지?
조금씩 줄어들던 목소리가 갑자기 피는 게, 왠지 나팔꽃 같아 단랑은 하려던 말도 잊고 당신을 바라보았다. "친구..." 단랑은 문득 다시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고우리, 라고 적힌 이름이 전화번호부에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친구. 친구. 낯선 울림이다. 당신의 손끝이 폭, 하고 하얀 털 사이에 파묻힐 때 단랑은 당신에게 시선을 둔 채로 당신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우리야. 고우리. 맞지?" 하고는, 조금은 어색하게 웃는다. "제대로 입으로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그러고 보면, 서로 누가 누군지도 알고, 편지도 자주 주고받았고, 서로 이름도 알고 있었을 텐데 서로를 제대로 불러본 적은 없다. 그래서, 당신과 이 소년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알고 있는 정도에 비해 조금 뒤늦게서야- 그러니까 이제서야 시작했다.
"나 어쩌면, 너한테 도움을 엄청 많이 받아야 할지도 몰라." 살랑, 하고 흔들리는 하얀 꼬리가 푹신해서, 털이 길고 숱이 많은 어떤 동물의 등을 쓰다듬기라도 하는 느낌이다. 그것은 꽤 따뜻했다. "어머니는 나더러 항상 교우관계를 넓게 가지는 게 좋다고 말씀하시는데... 사실, 나 사람 대하는 걸 잘 모르고... 조금 무서워서, 여태껏 누구와도 전혀 가까워지지 못했거든."
당신도 알고 있었겠지만, 단랑은 반에서 자기 혼자 조금 둥실 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에 대해 험담을 하는 사람은 없었고, 좋은 인상을 갖고 있는 사람은 많았지만, 정작 또 그와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모범생의 신비한 거리두기로 보였던 그것은, 그의 정체를 알고 나서는 영물이라는 정체를 들키지 않도록 거리를 두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 동급생은... 그저 인간관계에 대한 경험이 없는데다 겁이 많아서 그랬던 것인 모양이다.
그야, 우리처럼 햇살같은 아이가 친구가 되어주겠다는데... 무자각 아싸인 단랑이에겐 너무 과분한 찬스니까요 u.u... 네, 답레는 모쪼록 원하시는 만큼 천천히 써주세요. 귀엽게 보이는 부분은 그저 단랑이가 미숙한 부분일 뿐이에요... 잘하는 것이 있는 만큼 부족한 면도 많은 아이지만, 우리 단랑이를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u.u 모처럼의 휴일인데 답레를 너무 늦게 가져왔다는 생각이 드네요.. 오늘 밤에도 푹 주무시고, 좋은 꿈 꾸시기를 바라요.
무자각 아싸 ㅋㅋㅋㅋ큐ㅠㅠㅠㅠㅠㅠ 우리랑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단랑이에게도 다른 친구들이 조금씩 생겨가면 좋겠네요...! 우리도 여러모로 부족한 부분이 많은걸요. 우리도 잘 부탁드려요 ㅎ-ㅎ 아니에요, 이렇게 잠깐 뵙는 것도 반갑고 좋은걸요! 답레 잘 생각해서 써올게요. 단랑주 평안한 밤 되세요~
제 이름을 부르자 우리가 단랑과 눈을 맞췄다. 눈치를 살피듯 조심스럽게 바라보던 직전과는 다른 시선이다. 아주 또렷하게 단랑을 마주보고선 웃는다.
“응, 너는 단랑이지? 백단랑.”
단랑이 한 말을 비슷하게 반복했다. 같이 이상한 일을 겪고 대화도 나누어 봤는데, 이렇게 이름을 부르는 건 처음이다. 어딘가 간지러운 느낌이 드는 것도 같다. ...아니, 부드러운 느낌인가? 무의식 중에 손에 닿는 따뜻하고 보들보들한 털을 조금 더 쓰다듬다가 손을 떼어냈다. “그러네.” 대답한 우리가 조금 멋쩍게 웃었다. 곧 그 얼굴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게 되었지만.
조곤조곤 이어지는 단랑의 말을 들은 우리는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였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거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거라 예상했는데, 단랑도 그저 타인에게 쉽게 마음주는 일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건 꽤나 의외였다. 아무리 조금 다르다고 해도 똑같은 또래의 아이인데. 우리가 혼자 조용히 반성했다. 자신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알 수 없는데 더더욱 알 수 없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자신을 내보이는 일은 쉽지 않다. 어떤 상처를 받을지 모르고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까. 하지만 마음을 열고 난 뒤에만 보이는 타인의 세계도 있기 마련이다. 거긴 아름다운 꽃밭이기도, 울창한 숲이기도 했는데 제각각 아름답다는 점만큼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