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 당연히 뭔가 특별한 게 있을 리가 없다. 그가 시선을 돌린 건 뭔가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뭔가를 마주보기 힘들어서였으니까.
"응?"
방향이 같구나, 하는 말에 단랑은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방향이 아주 같은 건 아냐." 그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한 발짝 비스듬하게 앞으로 나섰다. 우연하게도 그가 그렇게 움직이자 단랑의 그림자가 당신에게로 길게 드리운 덕에, 더 이상 손으로 차양막을 만들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가 고개를 돌리고 당신을 내려다보면, 자연히 뉘엿뉘엿 기울어지는 태양을 등지고 오렌지빛 햇살에 휩싸인 모습이 되었다. 하얀 머리카락에 쏟아지는 햇살이 말갛다.
"응."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가 생긴 것은 맞지만... 당신의 원래 귀는 분명히 당신의 머리 양쪽에 잘 달려 있었다. 머리 위로 새로운 귀가 돋았나 싶어 머리 위를 쓸어보면 당신의 머리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을 테고.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아직 인간인 모양이다. "그거 말고도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 아는 선에서 대답해줄게. 당신을 따라 횡단보도에 발을 들여놓으며 그가 덧붙였다.
"내 집으로 가려면 아까 지하상가에서 ○○동 방향으로 나갔어야 돼."
확실히 지하상가쯤에서부터 길이 겹치긴 하지만, 방향이 미세하게 달라 당신은 이쪽 인도, 그는 저쪽 인도에서 등하교하는 그런 길이다. 당신과 달리 단랑이 일찍 등교하는 편이라는 것은 차치해두고서라도, 당신이 등하교하면서 길 건너편만 바라보고 있다거나, 그가 학교 근처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대신에 좀 더 일찍, 지하상가 근처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게 아니라면- 단랑을 지금껏 등교길에서 발견하지 못했을 만도 하다. 그러나 그것뿐만이 이유가 아닌 듯, 단랑은 얼굴에 옅은 웃음을 지었다. 조금 장난스러워도 보이는.
단랑의 반응에 오히려 우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손을 내린 우리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단랑을 보고 있었다.
“난 아주 같은 줄 알고 같이 가자고 한 건데...”
우리가 시무룩한 티를 내며 말했다. 피곤할 텐데 괜히 돌아가게 만든 건 아닐까,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물론 이렇게 얘기하면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올 테고 어쩌면 정말로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이제와 돌려보내기도 애매한 데다 구태여 계속 거절하며 선의를 무시하는 것도 좋은 행동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단랑과 발을 맞춰 걸었다. “궁금한 거...” 중얼거린 우리가 고민에 빠졌다.
“네가 준 거말이야. 아까 따뜻해지던데 그건 무슨 뜻이야?”
추운 데서 따뜻해지는 거라고 하기엔 괴물과 가까워졌을 때 온도가 더 올라갔었지. 어렴풋이 경고의 의미가 아닐까 예상은 해보지만 조금 더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응, 그렇구나. 다른 방향이네.”
같은 방향이었던 건 지하상가까지였던 셈이다. 고개를 끄덕이다 이어지는 말에 단랑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언뜻 비치는 웃음. 흔치 않은 모습에 저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다 뒤늦게 반응하고 말았다.
그래서 거의 같은 방향이라고 말한 거고. 시무룩하게 변해버린 당신의 얼굴에, 단랑은 고개를 살살 저었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게 맞았다. 그것도 그것이고, 단랑에게는 오늘 귀갓길 내내 평생 생각도 못 해봤을 받아들이기 힘든 일에 고초를 겪은 사람을 상황 종료됐답시고 혼자 보내는 것은 너무 매몰찬 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러나저러나 자신과의 만남을 징검다리 삼아 이 세계를 접해버린 것이기에, 당신에게는 가이드가 필요하기도 했고, 기왕이면 이렇게 된 것- 연관이 있는 자신이 그 노릇을 하는 게 낫지 않겠나. 단랑의 생각은 그랬다.
"그 노리개가 따뜻해진 게 아냐."
우리의 질문에 단랑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너한테 옮겨간... 기氣라고 하면 될까? 그게 네가 무의식적으로 떠올린 이미지대로 그 노리개를 통해서 구현된 걸 거야. 그 노리개, 그러는 데 쓰는 물건이 아니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 덕분에 같이 그 유충을 무찌르는 데 도움이 됐네."
그 노리개는 아직도 당신의 품에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이제는 괴이의 막이 부적으로써의 능력은 잃어버리고 예쁜 장신구일 뿐이지만. 그래도 소년에게 말해보면 다시 고칠 수 있기야 할 것이다(아마도). 당신이 다음 번에 건넨 질문에,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목소리를 낮췄다.
"그렇게도 할 수 있지만, 나는 아직 그걸 그렇게 오래 유지하진 못해...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이 나를 인식하는 감각을 흐린달까, 존재감을 흐린달까 해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단랑의 설명에 우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모르게 무의식 중에 불을 떠올렸던 모양이다. 덕분에 쥐어도 뜨겁지 않은 불로 괴물에게 타격을 줄 수 있었지. 사실 여전히 제대로 다루는 법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익숙해지지 않는 편이 나은 걸까?
“그런 거구나. 추워지고 나서부터 따뜻하게 느껴져서 난 노리개가 경고라도 했던 걸까 생각했어.”
결과적으론 틀린 예상이었지만 상황을 해결하는 것에 도움이 되었으니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랑의 말에 귀 기울여 듣던 우리가 조금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일찍 나온 몇 번은 함께 등교했던 적도 있겠구나, 짧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럼 앞으로는 전보다 자주 마주치게 될 지도 모르겠네.”
우리가 웃으며 얘기했다. 질문이 있냐는 말에는 조금 고민했다. 궁금한 건 많았다. 괴이라는 것에 어떤 종류가 있는지, 오늘 만난 것처럼 악의를 가진 것들이 많은지, 또 비슷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유충치곤... 좀 크지 않았는지. 하지만 집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고 궁금한 걸 모두 물어봤다간 단랑을 아주 오래 잡아두어야 할 게 분명했다. 입가에 힘을 주고 계속 생각하던 우리가 단랑을 보고선 물었다.
"아마 네가 무의식적으로 위기감을 느껴서 그랬던 걸 거야. 그게 경고 기능이 있었긴 한데... 네 위기감을 먼저 느끼고 거기에 반응하느라 그게 작동을 하지 않았나 봐."
단랑은 주머니에 손을 폭 찔러넣고, 주섬주섬 무언가를 주머니에서 꺼낸다. 들어올려서 보면, 그것은... 매달려 있는 옥패가 까만색인데다 가운데에 커다란 금이 딱 깨어져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가 당신에게 건네준 것과 상당히 똑같은 노리개였다.
"원래 같으면 여우로 변해서 네 발목을 물고 잡아당겨야 하는데, 나도 이게 뜨거워져서 알아챘거든."
그는 그것을 주머니에 쿡 집어넣었다. ...이야기 한 번 변변히 못 나눠본 소년과 커플 아이템을 갖고 있었다는 건가.
"...그게 뭐하는 물건인지 너한테 정확히 설명을 해줬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미안해. 미처 정확히 말해주지 못했지만- 괴이라는 건 일종의 밈 전염을 통해 확산되니까,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괴이에 대한 이야기나 사실을 접하면 접할수록 조금씩조금씩 괴이의 세계에 가까워지게 되거든. 너한테 그 영향이 조금이라도 덜 미치게 하기 위해 그것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마저도 하지 않기로 했었지만, 그 유충이 하필 지하상가에 숨었다가 너와 마주칠 줄 알았더라면... 얘기해 주는 게 나을 뻔했다."
단랑의 말맺음은 조금 씁쓸했다. 괴이에 대해 알면 알수록 괴이의 세계에 가까워지는 것... 단랑이 말한 이제부터 내가 네 눈에 좀더 잘 띌 것이라는 이야기도 그런 맥락의 이야기였다. 괴이로부터 거리를 두고 평범한 삶을 계속 살아가도록 도와주고 싶었는데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그러나 당신에게선 참으로 별난 대답이 돌아왔다. 별나게 해사한 웃음과 함께. 전보다 자주 마주치게 될지 모르겠다고.
"그랬으면 좋겠어?"
씁쓸한 심정과는 별개로 그는 이런저런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괴이라는 것은 종류가 아주 다양해 괴이에 대해 모두 아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던가, 악의를 가진 것들도 많지만 사람들이 활발히 살아가는 생기가 가득한 장소에 침투하는 놈은 드물다던가, 새로운 대책을 준비해 주겠다던가, 성충이 된 다른 차원의 벌레 신을 보면 그게 유충이라는 것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라던가... 그러나 당신이 건네온 질문은 전혀 의외의 질문이었다.
"네가 그랬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그랬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이라는 말은 당신의 두 가지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자주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인사해도 되냐고. 피했던 시선을, 단랑은 당신에게로 가만히 되돌렸다. 빨간 눈이 깜빡인다.
여우로 변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단랑의 말을 듣는 우리의 표정은 내내 아주 신기한 것을 접한 사람처럼 보였다. 단순히 부적 같은 용도일 줄로만 알았지, 직접 여우로 변하기까지 할 거라곤 미처 예상치 못한 것이다. 그날 봤던 것처럼 하얀 여우였을까? 이상한 호기심이 따라 붙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응, 그때 편지로 말해줬던 것처럼 말이지? 지금 이야기해주기도 했고 아까도 도와주러 와줬잖아. 해결도 잘 됐고.”
오지랖에서 나온 괜한 추측일지도 모르지만 우리에겐 단랑의 말이 이상하게 자책하는 것처럼 들렸다. 얼떨결에 전혀 모르던 세계와 연결되긴 했어도 그게 누구의 잘못이라곤 생각 않는 우리였기에 더욱 신경이 쓰였는지도 모른다.
“난 만나면 반갑고 좋을 것 같아서.”
물론 그러려면 내가 더 일찍 다녀야겠지만, 덧붙인 우리가 조금 민망한 듯 웃었다. 눈이 마주치자 민망한 기색은 가시고 조금 더 친밀한 웃음으로 바뀐다.
“그럼 우연히 만나게 되는 날엔 내가 먼저 인사할게.”
어쩌면 가까워질 리 없었을 텐데. 우리는 이 낯선 세계가 두렵기도 했지만 새로운 관계를 열어준 것 같아 조금 즐겁기도 했다. 우리의 걸음이 조금 더 가벼워졌다. 가벼운 걸음은 얼마 남지 않은 집까지의 거리를 빠르게 줄여나갔다.
물론 일종의 부적은 맞았다. 다양한 기능이 있었을 뿐. 원래대로라면 당신을 괴이한 일들에게서 서서히 밀어내는 물건이었지만... 지하상가에 숨어있던 그것이 일을 그르쳤다. 비록 그것은 퇴치되었고, 지하상가의 이용객들이 그것에 해코지를 당할 일은 더 이상 없게 되었지만, 당신의 발목은 평범한 세계의 이면에 또 한 발짝 깊숙이 내딛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 말대로, 우선은 최선의 형태로 해결된 것이 맞긴 하다. 얼마든지 더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사건이었으니까.
"그래?"
당신의 얼굴에 민망한 기색은 날아가고 웃음만이 남자, 단랑의 시선이 조금 흔들렸다.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리려다 말았다는 느낌. 그것이, 왜인지... 비단 당신에게뿐만 아니라 단랑에게도, 무언가가 시작되어버리고 만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 생전 처음 느껴보는 낯선 느낌에 단랑은 무표정한 얼굴 너머로 조금 갈팡질팡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인지 엄마나 할아버지한테 쟤를 소개시켜줬다간 불필요한 오해를 사서 엄청 놀림받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과 함께.
"그랬으면 좋겠네."
하고 단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이 웃고 있으니, 조금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웃는 표정은 제대로 지을 수 있는 게 신기햇다.
"조심히 들어가. 내일 봐."
희한하게도, 주말에 본가에 한번 들러볼 일정보다, 내일 학교에서 당신을 만날 모습이 좀더 생생하게 그려진다. 이래저래, 무언가 낯선 게 시작되는 느낌에, 단랑은 현관으로 발을 뻗는 당신에게 막연히 손을 흔들어주는 것이다.
시간이 늦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으시다면 부탁드릴게요. 편지 내용은 아마 "안녕. 막상 이렇게 또 편지를 보내려니 기분이 이상하네. 혹시 오늘 방과후에 시간 괜찮아? 만나서 이야기할 일이 있어. 심각하거나 한 일은 아니지만, 중요한 일이야. 오늘 방과후에 시간을 낼 수 없다면 언제가 괜찮은지 적어서 나한테 편지해 줘." 정도였을 것 같네요. 그리고 교실에서 아주 잠깐 눈이 마주치면, 단랑이는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조그맣게 끄덕, 하면서 눈짓 보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