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릴꺼 같다. 그럼에도 밖에 나왔다. 언제나 그랬듯이. 신세지고 있는 인간의 집이 있지만, 거기는 후안이 있을때만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카사의 집은 아니니까, 후안이 있을때만 의미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래. 외롭기 때문이다. 아주 작았을때부터, 카사는 외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나 혼자인건, 학교에 처음 도착하고서 이후로는다시 처음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익숙한 흙바닥에서, 나무 사이에서, 별빛 아래에서 자는 것은, 얘기할 자가 없어 만들어진 비밀이었다.
바람이 분다. 그의 향이 공기의 습기와 함께 카사에게 닿았다. 익숙한 냄새에 무의식적으로 꼬리가 반가움에 붕붕 흔들리는 것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저번에 좀 더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이 상태에서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숨었다. 어릴적 그랬듯이, 숨을 참고 미동없이 가만히 있어, 그가 지나가길 바란다. 하지만 그 향이 짙어진다. 그가 다가온다.
「에릭 하르트만」
그리고 그가, 카사를 부른다.
바스락. 수풀이 걷힌다. 안 그래도 흐릿한 하늘. 짙어진 어둠속에서 흉흉히 빛나는 한 쌍의 호박색 눈. 누가 뭐라 할수도 없는 짐승의 모습이다.
인사하고 싶다고 카사의 뒤에서 흔들리는 꼬리가 수풀속에서 소리를 낸다. 그래도 에릭의 이름을 부르려다, 카사는 멈춘다.
그리고 에릭은... 각오하고 있는 자의 모습이다.
무엇이냐면, '피'를.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는 카사.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그저 말없이 그의 말대로 나올 뿐. 그렇게 조용히, 늑대보다 월등히 큰, 늑대는 아닌 짐승이 에릭을 지긋히 바라본다.
유달리도 나는 항구에서 어떤 인연이 생긴다거나 누군가와 재회한다거나 하는 일이 많은 것 같았다. 한번은 나의 의남매이자 친구, 한번은 과거의 나와 만난적있던 선배. 그리고 오늘은 정말 희미한 기억의 실타래 한 가닥속에서, 또다른 인연과 마주친 날이었다. 흐리지도 맑지도 않은, 그러면서도 서늘한 해풍이 뺨을 쓸어내는 그런 날씨였다.
"누구세...어."
플래시백. 아마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펼쳐진 것이었다. 트라우마센터의 날씨, 주변의 냄새, 들리던 소음, 모든 것들이 일순간 되돌아온 듯 주변 풍경을 덮어간다. 잊을리가 없다, 아물어지지 않은 상처위로 덮인 기억일수록 더욱.
"서......진...석?"
나이도 묻지 않은 채 서로 이야기를 하다 각자의 치료를 위해 헤어지기를 며칠, 어느날부터 다시 혼자였던 트라우마센터에서의 시간의 편린. 잊고있었던 그에대한 감정은, 걱정이었다. 그때의 일은, 잘 이겨냈을까?
본능이라는 것은 결국, 몸에 깊게 세겨진 기억. 으득, 이를 갈아 정신을 현실로 이끌어 낸다.
카사는 지금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악다문 이사이로 되묻는다.
"할멈의 후계자라니, 무슨... 개소리야."
숨을 들이쉰다. 내쉰다. 들이쉰다. 내쉰다. 카사는 언제나, 언제나 노력하고 있었다. 모두에게 당연한 것은, 새겨진 것을 없애기 위해 뼈 자체를 깍는 것. 지금 카사는 피곤했다. 힘 쓰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놀 기분도 아니었다. 누구와도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비가 언제라도 쏟아질듯한 하늘아래서, 잠시 동안, 언어라는 것을 애초에 배운 적도 없듯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그 한 순간의 휴식을 원했다.
"......"
「당장 나랑 싸워.」
이성. 언어. 복잡한 인간의 언어. 거기에 실려지는 복잡한 감정. 본능. 감정. 기억. 경험. 애정. 굶주림.
"....너랑 놀 기분 아니야, 에릭."
둘 다 필요없어. 나는 피곤해.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카사의 뜻대로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파도에 휩쓸리듯. 인간의 시선. 에릭의 무기. 공기의 의념. 이 모든 것이 카사의 본능을 자극했다. 근육은 수축한다. 발톱은 모습을 드러낸다. 목으로부터 나오는 으르렁소리를 멈출수가 없다. 언제나 그렇듯, 카사가 원하는 것은 쓸모 없다.
에릭 : 청월로 와라 카사 스카이워커. 너와 내가 힘을 합친다면 모든 게이트를 지배할 수 있다. 카사 : 당신말에는 안 넘어가! 에릭 : 네가 네 재능을 얼마나 청월에서 꽃피울 수 있는지 안다면... 아브엘라가 너에게 충분히 얘기해주지 않은 모양이구나. 카사 : 충분히 말해줬어! 네가 내 오빠를 죽였잖아!
사냥자와 사냥감 포수도 짐승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냥자와 사냥감 둘 다에 해당된다.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그 상황에서, 에릭이 아는 생존강령은 그닥 쓸모가 없을지도 모른다. 목숨을 거는 이 싸움에는 명백히 카사가 유리하다. 하지만, 자신의 우상에게 배웠으면서, 이렇게 무기력하게 있는 모습은. 너무나 꼴사납기에....
" 놀자고 찾아온 것 같아? "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이 점점 굵어질 기미가 보였다. 에릭은 카사에게 한발자국씩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 앞에 검날을 겨누었다.
으르렁대는 소리, 발톱, 짐승과 같은 눈동자. 침묵, 검, 사냥감을 찾는 사냥꾼
싸울 준비가 끝났다면. 해버리면 그만이다.
" 왜 아프란시아의 기숙사로 안돌아가는거냐.... "
한 발은 더 앞으로. 양손으로 잡은 검을 힘껏 쥐고 횡으로 휘두른다. 전면전에 쿵쾅거리는 심장을 타고 흐르는 철분이 가득한 피가 빠르게 맴돈다.
정말 의외였다. 아니, 그의 예전 상태는 솔직히 말하자면 더이상 어디에도 방향을 두지 못한 사람 같았다. 마치 그때의 나처럼, 삶에서 어떠한 이유도 찾지 못하고 그저 실 끊어진 사람 같았다. 아마, 같은 처지였을 것 같으리라 생각했었고, 얼핏 안개속에 흐려진 기억은 스스로의 실수로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것 같아, 나또한 그랬었다며 마음을 터놓은 유이한 상대였던 것 같았다.
"...그, 잘 지내셨나요?"
나는 조금 조심스럽게, 겨우겨우 말을 꺼냈다. 왜냐면, 아직 나는 그가 마음 정리를 했을까 모르기 때문에.
우연인가, 운명인가. 어느 쪽이든 재회의 기쁨과 무엇인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그저 눈 앞에 있는 이 소녀에게 들키지 않도록 나는 두려움을 꽉 눌러댈 뿐이었다.
"...응. 너는?"
그때의 우리는 서로 망가진 상태에서 영문모를 말들을 서로 나누며, 서로의 버팀목이자 배출구로써 버텨왔다. 머리속이 완전히 깨져버린 상태에서,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대충 맞춰놓은 것 처럼 뒤죽박죽인 기억을 터놓고 이야기 할 사람은 오히려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더 적당했었다.
카사가 카사가 아니었을때. 작디 작은 존재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둠이 무서웠다. 수풀너머가 무서웠다. 굴 밖, 저 멀리가 무서웠다. 인간이 무서웠다. 큰 키와 두 다리가 무서웠다. 그들만의 알수 없는 울음소리가 무서웠다. 이름조차 없는 작은 존재는, 굴 안에 숨어 몸을 떨을 뿐이었다.
모르는 것은 무서워.
"난, 아직도 네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르겠어."
모르는 것은. 무서운 것은. 상처란 것은.
"하나도 모르겠어. 너의 말은 너무 어려워. 난..."
...너무나도. 화가 나.
순식간에 일어난다. 누워있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카사. 바닥에 있던 머리가 순식간에 높아진다. 낙아채려 하는 지훈의 손. 날카로운 이. 그 사이에 카사가 낄려고 하는 그의 손.
그의 손.
'티르'는 법의 신이면서, 법에서 증명을 하기 위해 필요한 오른손을 잃었다. 지훈아, 너는 검사니까, 얼추 그의 심정을 알지 않을까?
"지훈아."
만약에 지훈의 손을 잡는 대에 성공했다면, 그는 아마 카사가 말을 할때마다 내뱉는 뜨거운 숨을 느낄지도 모른다.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송곳니를 대고 있는 주제에, 너무나도 부드럽게 그의 손을 이로 잡고 있었을테니까. 한 발자국. 다가간다. 카사의 야생적인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을까.
"'친구'가 뭐야. '도구'가 뭐야. 알기 쉽게 설명해."
굶주린 카사. 불쌍한 카사. 욕심이 많지. 욕심도 많지. 세상을 품에 가두어 영원히 지킨다는 꿈을 꾸는 어리석을 카사. 세상을 삼키어 영원히 소중히 지켜버린 펜리르...
갈증을 호소하는 한지훈.
갈증을 호소하는 친구. 무리의 일원. 나의 책임. 나의...
나의 '티르'.
"그래서. 그게 무슨 상관을 가진거야. 나를 뭘로 생각하는 거야."
어리석은 지훈. 바보같은 지훈. 피가 혈관을 타고 울부짖는다. 본능적인 분노로 형성된 아드레날린이 숨을 가쁘게 한다. 새빨간 잇몸. 흘러내리는 침. 머리를 어지럽히는 수많은 화학반응 와중의 작은 웃음소리. 아브엘라도 모르는 것이 있구나, 라고 확신했을때, 작은 카사가 지은 웃음소리.
멍하니 하늘을 바라다 보고 싶을땐 늘 항구에 들르곤 한다. 거기서라면 적어도 상념에 방해될 일은 없을 테니까. 지훈오빠와 헤어진 후 정말 수많은 생각속에 하루를 보냈다. 내게 그 사실을 밝힌 이유는? 대체 왜? 친구가 수단이라면 목적은? 상념은 나를 무의식중에 항구로 이끌었고, 거기서. 좀 빠른 재회를 하게되었다.
"...아."
사실,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너무나도 바뀌어 있을까? 두가지 상반된 생각이 충돌하며, 나를 서서히 그쪽으로 이끌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