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팔이 검은색 거품투성이가 되자 지훈이 살짝 한숨을 내쉬더니 슬며시 미소지었을까. 상황이 조금 재미있었으니까. 팔이야 뭐... 잠시 뒤에 씻으면 되는 것이었고?
" 거품 더러우니까, 먹으면 안 돼. "
알았지 대장님? 라는 듯한 눈빛으로 카사를 빤히 바라보던 지훈은 물로 팔과 손에 묻은 거품을 닦아내더니 직접 손을 뻗어 카사의 코를 닦아주었을까.
카사의 몸을 닦으며 이야기에 집중한다. 신들에게 속아 자신을 그레이프니르에 묶어버린 불쌍한 펜리르. 이 이야기에서 나쁜 건 신들이었으나, 결국 라그나로크가 일어날 때까지 묶여있던 것은 펜리르 뿐이었다. 하지만 티르는 어째서 펜리르에게 그런 약속을 했던 걸까? 처음부터 거짓말 할 작정이었으면서. 그것은 아마-
" 자신에게 내리는 일종의 벌이었겠지. "
덤덤하게 이야기했을까. 지훈은 들고있던 샤워키를 카사의 털 깊숙히 넣어 꼼꼼하게 씻으면서도, 중간중간 배수구가 털로 막히면 의념으로 잘게 잘라 흘려보내는 것을 반복했을까. 나름 나쁘지 않네, 이런 것도. 망념이 조금씩 쌓이는 것만 빼면.
"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아마 죄책감이 엄청났을테니. 일종의 자기 방어 기제이자, 조금이나마 펜리르에게 하고싶었던 속죄였겠지. "
자신이 이렇게 카사에게 정을 주는 것도 그녀를 언젠간 도구로 사용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속죄였을까? 글쎄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떠오른 질문을 억누르고는 그저 카사를 씻기는 것에 집중했다.
일본풍의 테마를 가진 게이트로 '태양왕'이라 불리는 한 초월자에 의해 운영되는 게이트의 형태를 지닌다. '태양왕'이라고 불리는 게이트의 주인을 중심으로 '무사장', '조언자', '무속가'의 세 최고 권력자가 존재하며 그 아래로 일류무사를 위시로 한 무사대가 태양왕국의 주요 전력이라고 할 수 있다. 태양 왕국의 무사는 일류부터 오류까지 존재하며 오류무사는 이제 갓 검을 잡은 병사를 칭하는 말이며 사류무사는 이런 병사들을 다스리는 백인장, 삼류무사는 이런 백인장 열을 다스리는 천인장을 말한다. 이류무사부터는 대형 게이트의 정예, 또는 네임을 가진 존재들로 구성되며 강력한 무예와 실력을 가지고 있다. 이류무사 스물이 모이면 현 시대의 준영웅이라 하더라도 위험한 결과를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최고 전력은 '무사장'의 지휘를 받는 '무사대'의 일류 무사들과, '태양왕'의 호위를 맡은 '일무검'의 무사들이다. 일류 무사들은 각기 대형 게이트의 보스들로 모아도 무방하며 한때 구 한국을 침공했던 '일마장군' 역시 태양 왕국의 서사의 일류 무사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들은 '무사도'라 부르는 개념에 집착하는 성향을 보이는데 각각 1. 주군에 대한 충정 2. 약자에 대한 존중 3. 강자에 대한 경외 4. 민간인에 대한 보호 5. 무예에 대한 믿음 을 중요시 여긴다. 특별하게도 이런 무사도의 조건에 하나씩 벗어나는 싸움을 할 수록 그 전투 능력이 감소하기도 한다.
에베베베ㅔ. 에퉤웨우텥웨. 더한 것도 먹어봤는데!! 이 대장은 튼튼하다구!! 라고 항의하는 카사. 열심히 혀에서 쓴맛을 뱉어내려고 하는 모습이니, 별 설득력은 없었다. 거기에 지훈의 손이 코에 닿으니 간지러운지, 연겨푸 킁! 킁! 푸엣취!재채기하는 카사. 그 반동에 허공에 알록달록한 비눗방울이 둥둥 떠 다닌다.
"잘 알고 있구나. 너의 말이 맞을까? 맞았으면 좋겠어."
카사는 지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어느 원본도 티르의 감정을 서술하지는 않았다. 대의였을지, 교활함이었을지, 죄책감이었을지. 일치하는 것은 단 하나의 문장, '티르를 뺀 신들은 펜리르의 몸부리침을 비웃었다.' 뿐이었다.
"죄책감이었다면, 애정은 있었다는 소리잖아? 속죄라는 것을 한다는 것은, 펜리르를 대한 게 진심이었다는 소리잖아."
마치 지훈에게 확인을 받기라도 하는 어투이다. 옛날 생각을 떠올리듯, 카사의 눈이 잠시 초점을 잃는다. 그러다 푹, 머리에 얹어지는 수건. 눈을 꼭 깜아 끄아아아, 하는 사이 몸이 지훈의 손 아래에 격렬히 흔들린다. 수건이 축축해지며, 카사의 몸에 착, 달라붙던 털이 점점 생기를 되찾는다.
"난 그게 동정일까봐 무서웠어."
불쌍한 펜리르, 나에게 속다니! 불쌍하니까, 이 정도 자비쯤은 내려줄까. 네 자유와 제 마음을 댓가로, 내 손을 네게 줄께. 공평한 거래지? 동정에는 진심이 없다. 그래도 동정에선 애정이 있다. 그래서 굶주린 늑대, 펜리르는...
"만약 그게 동정이었다면, 펜리르는 스스로 영원히 묶이기를 알고서도 선택했을꺼니까."
조금 힘드네. 내가 무슨 말 하는 지 알겠어? 수건이 머리위에 덮혀, 한 쪽 눈이 가려진 상태에서 카사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무거운 듯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카사의 눈은 한없이 맑다. 근데 한지훈아. 너 하수구 괜찮니.
마음이 답답했던 걸까. 아니면 곤란했던 걸까. 어떤 느낌일까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알고 있나요? 하지만 그것은 많이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후안에게도 말을 해서 부탁해야 하는 것이 있긴 하지만 이 상황에서 말하기란 참 곤란한 것이지요 오늘은 바지와 후드티를 입고 있습니다.
"아." 무심결에 아무런 의도 없이 나를 데려다주는 것을 봅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보인 것은 공원이었습니다. 올려다보고는 안으로 들어가서 거닐다가 본 것이 후안이라니. 천천히 앞으로 가려 합니다.
"안녕하세요" 느릿한 다림의 말이 후안에게 닿았을까요? 심란한 듯 심란하지 않은 잔잔함일까요?
그냥 서 있기도 그러니 후안은 공원의 벤치를 찾아 오른쪽 구석가에 앉았다. 조금 계속 얘기를 할 분위기이니 앉아서 얘기하는게 낫겠다 싶은것이다.
"친구랑 의뢰라니 소풍 가는 분위기인가." 후안은 복잡한 표정으로 친구와 의뢰의 관계를 생각했다. 게이트로 친구와 함께 소풍 가는 느낌으로 도시락을 싸는 그런 잡생각에서, 그 메뉴는 뭐가 좋을까 생각하다가 이내 생각을 끊는다. 의뢰는 소풍이 아니다... 위험한 것이다. 하마터면 유부초밥을 싸갈 생각을 할 뻔했다.
"친구랑 의뢰라고 하면 나도 괜찮겠네. 친구라 하지. 나도 의뢰 경험을 쌓고 싶었으니까."
소풍이라는 말을 듣고는 키득키득 웃습니다. 소풍에서 연관한 것은.. 다른 것일까? 예전에 어디서 주워들은 바로는 아프란시아는 게이트 내에서 음주를 한다는 썰이 있었던가.. 라는 다림주의 생각.
"소풍은 아니겠지만요. 친구랑 셋이서 의뢰를 다녀오고 데려오면 뭔가를 주신다고 하셨거든요." "음.. 사실 랜스 중에 친구가 있으려나..가 문제라서 저와 친구가 되어주세요. 같은 말이라도 해야 할 텐데..요.." 이 사태가 끝나기 전에 다녀와야 한다면 결국 거절해야겠지만요. 라는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나중에 연락하면 일정 잡을 수 있기를 바라요." 라고 말하는 다림입니다. 일단 여기에서 잘 살아남아야겠지만. 이라는 무거운 표정을 잠깐 지었습니다.
끄엑!!!! 내 코!!!!! 새까만 코가 말랑하다. 거센 항의! 고개를 셰킷셰킷!! 푸르르르, 물이 온데 다 튀긴다.
"그치?"
별 생각없는 듯, 가볍게 지훈의 말에 동의하는 카사. 지훈의 속내는 전혀 모르는 어투다. 당연한 말이지만 말이다.
"싫어해! 모르는 사람은 그냥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에게선 완전 싫어. 내가 그 동안 산 삶을 그냥 '불쌍하다'라는 말로 치부해버리는 거 잖아. 난 그런 말을 위해 열심히 살아온게 아닌데 말야."
그렇게 아이가 투정을 부리듯, 투덜거리며 수건 아래로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카사의 모습은...
샤라랑~~~
이제 이 거대 멍뭉이가 노숙카사라고 한다면 누가 믿겠는가! 향기로운 냄새에 윤기가 자르르 나는 부드러운 털. 흙먼지 하나 눈꼽 하나 없이 빛나는 호박색 눈! 꽂꽂이 서있는 카사! 그야말로 맹수! 그야말로 세상에서 제일로 늠름한 맹수! 지훈의 중노동 아래 만들어진 걸작!!!
그리고 힘없이 철푸덕, 바로 바닥에 누워버린다. 살도 짓눌리고 한참 빨래 당한게 워낙 지친지, 몸이 아주 늘어져 웅덩이가 되어있었다.
"펜리르가 스스로 묶이기를 선택하는 데에는 무시무시한 이유가 있어!"
뺨도 옆으로 짓눌린 주제에 말은 잘 한다. 꿈벅꿈벅. 첫번째는, 함께 지낸 시간의 의미를 티르가 자기 손으로 없앴기 때문이야. 그 애정이 진심이 아니었기 때문이야. 그리고 가장 무서운 이유는:
"늑대는 언제나 굶주려 있거든. 내가 잘 알아. 한 번 배고프면 배고픈 걸 잊지 못해. 펜리르도 그랬을꺼야. 티르빼고 모두 펜리르를 무서워 했으니까."
굶주림을 얘기하는 것은 물리적인 굶주림인가, 정신적인 굶주림일까? 아마 둘 다 일지도 모른다. 평온하게 퍼져있는 카사와 카사가 말하는 것에 괴리감이 느껴진다.
"그래서 만약에 그런 애정을 받는 이유가 불쌍해서라면, 스스로 종말의 끝까지 묶여서, 최고로 불쌍해지는 방법을 택한거야..."
지훈의 눈을 따라, 카사의 눈꺼풀도 느리게 아래를 향한다. 그때는 참 멍청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묶이기도 전에, 자신의 입에 손을 집어 넣자마자 물어 뜯어 버리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끔직하지?! 무시무시하지!? 난 저어얼대 펜리르처럼 되고 싶지 않아! ...하지만'티르'들이 생겨버린 난 이미 늦은 거 같아."
"그게 그대로 잘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가끔씩 저는 최대한 비관적으로 보는 편이거든요. 라는 말을 합니다. 어쩌면.. 어쩌면.. 이런 비관을 바라는 것일까? 알 수가 없어요. 그렇게 무거운 건 그만하는 것처럼 밝은 말을 합니다. 친구라는 말에 쩌적 굳은 걸 기억합니다. 음. 그렇죠.
"...그렇죠? 친구는 없어요.." 사실.. 이라고 조금 망설이듯 하다가. 그나마 후안씨도 오래 알아서 친구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라고 덧붙입니다.
첫눈에 반함, 뜨거운 사랑, 애정, 하룻밤의 행복. 무엇을 보고 제 모든 걸 내주는가. 덩어리져 구르는 감정에 휘말린다면 높은 언덕으로도 그 아래의 절벽으로도 기꺼이 몸을 던질 수 있단 걸까? 확실한 건 눈에 드는 모든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 에 나이젤은 속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이었다.
"답이 되었답니다."
옆에 몸을 눕힌 거대한 늑대가 고개를 갸웃, 하는 모습을 보고 나이젤도 같은 방향으로 웃으며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이 정도까지 맞춰준다면 조금 무례를 저질러도 괜찮지 않을까? 카사가 거부의 반응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면 늑대의 털가죽에 살그머니 손을 올려보려 했을지도 모른다.
"집을 잃으셨나요?"
아까전의 철학대화적인 말은 어디가고 갑자기 돌직구를 날리는 나이젤. 뭐지, 게이트에서 나왔는데 게이트가 클로징되어버리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자연개발과 재개발 등의 이유로 집을 잃었다던가. 추욱 늘어진 카사의 귀가 불쌍함을 느끼게 하기에 딱 맞아 보인다.
"소문 속의 존재를 쫓아서 왔어요. 간단히 말해서, 당신을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생명체가 그 사람을 배신하고 도망쳐나왔다던가, 하는 소문이 돌았죠."
카사는 곰곰히 생각했다. 확실히 표지가 이쁜 역사책이라면 그렇게 빨리 내팽기치지는 않을테다. 지루한 것은 똑같지만. 아니, 오히려 잡고 지루한 걸 아면 실망감이 더 들지 않나?"
"하지만 네 마음을 빼앗을 모든 것도, 결국엔 손 밖에서 스러질텐데. 괴롭지 않나?"
읽지 못하는 역사책이나, 쓰지 못하는 스킬북이나! 결국엔 모든 것에 끝이 있다, 이 말이야! 아무리 좋아해도 결국엔 끝이 있는 그 모든 것을, 이 어린(?) 인간을 받아들일수는 있을까나? 늑대의 빛나는 눈에는 조금의 걱정이 담겨져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이젤의 손길에 감겨버리는 눈.
흠, 흠. 내 원래 이렇게 관대하지 않는 데. 원래는 콱 물어버리는 데. 근데 털이 있어서 인지, 최근 막 만지려하는 사람도 늘었고... 더구나 이 인간에게 지금 내가, 어? 가르쳐야 하는 입장이고... 내가 딱 한번 너그럽게 참아주지, 닝겐!! 네 손길의 급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자비를 베풀었는데 이 건방진 닝겐이 뼈를 때린다. 이 자식이.
"돌아가고 싶은 곳이 아니게 되면, 잃은 것이나 다름없지..."
기숙사 허울대 자체는 안전하게 있거덩! 그냥 내가 돌아가기 싫은 거 거덩!! 죽어도 가출이란 말은 생각하지 않는 카사댕. 한숨을 푸욱, 쉬고 저 멀리로 눈길을 던진다.
"나를? 한가한가보군."
그러다 작은 웃음이 코를 통해 나온다. 아니 진짜로. 학교에 별 이상한게 돌아다니는데. 나보다 큰 댕댕도 있다고! 도바라고! 그러다가 나이젤의 말을 들을 카사, 고개를 갸웃거린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생명체? 뭐, 나도 따지고 보면 맞지? 아마 생부모는 인간일테니까? 근데 그 사람을 배신하다니 대체 뭔 말이여??? '그 사람'? 이름을 말 못하는 자???? 아니면- 길다란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내리는 것은, 늑대 나름의 뾰로퉁한 표정일까. 아니 도망친건 또 어떻게 알았데. 전략적 후퇴였다고!
"....그러고보니 저는 지금 검도 화살도 없네요.." 저울이 기울어진 상태에서 행한 행동 때문에 화살 압수당했던가.. 음. 정말 이 상태에서 끌려가면 마도를 열심히 사용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의념을 마구마구 쓴다거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바라보고는...
"에고소드라도 하나 들이셔야겠어요.." 빤히 쳐다보며 말하지만 그다지 진지한 말은 아닙니다.
>>157 오니잔슈 : 하지만 내게는 아직 지훈이... 후안 : 바보 같긴. 얼마전에 혈낭검을 허리춤에 차는걸 보고도 아직도 모르겠어? 놈은 이제 너에게 질린거라구. 오니잔슈 : 그럴리가 없어! 지훈이는 아직도 날 차고 다닌다고! 후안 : 진짜 사실은 너도 알고 있잖아? 그 녀석이 항상 너를 차고 다니던 자리는 혈낭검 녀석이 차지하고 너는 반대편 허리춤으로 갔던걸 떠올려봐...
마음을 빼앗을 모든 것도 결국은 손 밖에서 스러질텐데. 괴롭지 않나. 그 말은 너무 잘 맞아들고 반박할 수 없는 말이라서, 순간 숨이 막혀버린 기분이 들어서, 나이젤은 무심코 가슴팍을 문질렀다.
"괴로울 수도 있겠네요."
그런 불확실한 말을. 그리고 왠지 조금은 부드러워진 것 같은 늑대의 눈을 바라보며, 나이젤의 손등이 털 위로 가볍게 떨어진다. 뜨거운 물건의 온도를 재어보듯 조심스럽게, 꽉 누르면 안 될 것처럼 털이 너무 눌리지 않게 위쪽을 가로지르며 손등이 움직였다. 털의 감촉이 손등을 스쳐 간지럽다거나 따가운 느낌이 들 만큼. 그리고 아까전까진 물맞댐이었다는 것처럼 이번엔 다소 대담하게 손을 대며, 손바닥으로 털을 결을 따라 쓸어내린다. 금빛으로 빛나던 늑대의 눈이 감겨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가득 흘러내린 누군가의 머리카락을 아프게 잡아당겨지지 않도록 부드럽게 잡아 빗어내리는 듯한 움직임으로 계속하고 있었던가.
"...아아, 왠지 알 것 같아요."
영원한 보금자리. 나이젤, 아니 인간에게는 영원은 아니지만 그런 곳이 있다. 나이젤에게는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고 객관적으로 보아도 좋지 않은 곳이었지만. 돌아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면 잃은 것이라는 말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 그 능력을 잃어버려 더는 가치를 느낄 수 없는 것이 되었다면, 잃어버린 것과 다를 게 없는 것이겠지.
"하릴없이 떠돌아다니는 건 맞지만요."
4학년까지 되어서. 어흑 마이깟ㅠ
"그랬던가요?"
소문과 아주 다른 건 아닌 걸까? 저 늑대에게도 무슨 사정이 있던 것 같다. 하지만 자세한 이야기까지 파고들 생각은 없었기에 나이젤은 그쯤에서 물러났다. (난 아니야 저 이야기 좀 들어봐봐 이 소나무놈아)
"어떤 사정이 있든 간에 상관없지만요, 저는 당신이 이 학교에 머무르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과거 지훈이가 구해준 것 때문에 지훈이한테 호의를 품고 있지만 과거의 비틀린 사연 때문에 솔직하게 애정을 전하지 못하고 계속 지훈이 아니었으면 기겁하고 버릴 수준으로 뒤틀린 사랑을 보내고 있던 소꿉친구 히로인 오니잔슈. 그러던 어느 날 소꿉친구와 함께 하는 놀러다니기라는 이름의 데이트에서 똑같이 위기에 빠져 뒷골목에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던 두 번째 히로인 혈낭검을 만나고, 그 혈낭검을 망설임없이 구하는 지훈이... 그리고 피에 환장하지만 살짝 덜렁거리고 질투 많은 중2병계의 아가씨 혈낭검의 적극적인 러쉬에 밀려서 단지 소꿉친구일 뿐이라고 계속 틱틱해댔던 오니잔슈는 마침내 지훈이를 쟁취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제대로 사랑을 자각해서 지훈이를 피곤하게 하는 불여시같은 혈낭검을 제거해버리고 이대로 결혼까지 함께해버리자 하는 얀데레히로인이 되고 마는 것인데...
"천재니까요?" 쿡쿡 웃으면서 재수없다는 생각보단. 천재라서 그렇구나~ 같은 생각을 할까요? 그런 이유같은 이유가 얼마나 좋은 건데요. 그렇죠? 잘 될 것인지. 안 될 것인지. 그건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해야 하는 것은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건 해야지.
"그러길 바라는 거에요" 답에 답을 돌려주며 다림은 허공을 바라봅니다. 가지런히 모아진 다리 위에 손이 올려져 있고 은근히 하얗게 질려있습니다.
"들이킬 용기가 없는 걸까요.." 이런 건 그만두고.. 상점가에서 해독계열이나 디버프 제거계를 검색해보면 값이 나가려나요? 라는 말을 합니다.
▶혈낭검◀ [ 혼천이일도세라 명명된 세계에서는 하나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붉은 혈조가 도드러진 이 검은 혼천이일도세의 혈검문이라 부르는 문파에서 사냥한 용의 시체로 만들었다고 전승됩니다. 한 검사가 자신의 재능에 아쉬움을 느껴, 상승의 경지를 엿보기 위해 들고 도주하였으나 의념계의 사람들에 의해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당시 죽었던 용의 원한이 남아 코등이에 붉은 피를 저장할 수 있으며 강력한 존재의 피를 담을수록 코등이가 짙은 적색을 띈다고 합니다. ] ▶ 코스트 - 파괴 불가 ▶ 혈낭 - 검이 피를 마시고 보관한다. ▶ 용의 저주 : 해解 - 검이 마신 피를 의념을 통해 방출할 수 있습니다. 방출된 피는 의념을 이용하여 폭발시킬 수 있습니다. ▶ 더욱 강한 자의 피를 - 강력한 존재의 피를 담을수록 폭발의 위력이 증가합니다. ▶ 명품 - 뛰어난 가치를 지닌 검입니다. 장인들의 호감을 삽니다. ▶ 흐느낌 - 이 검은 마검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소지자의 정신을 꾸준히 갉아먹으며 이 검 이외의 마검을 소지할 수 없습니다. 소지 시 두 검의 위력을 크게 감소시킵니다. ▶ 원한 긁기 - 검은 여전히 피를 탐하고 있습니다. 출혈 시 디버프 유지 시간이 증가합니다. ▶ 블루 코스트 - 원한 : 용과 관련된 사건을 끌어모으며 적룡들과의 관계도가 최악으로 고정됩니다. ◆ 사용 제한 : 검술 S, 의념 발화 A, 레벨 20 이상, 게이트 혼천이일도세僞 참여자.
수긍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느리게 고개를 내려, 나이젤의 볼... 같은 부분을 콧등으로 툭툭 건드린다. 볼인거 같다. 빛때문에 잘 안 보인다. 평범하게 어두우면 잘 보일텐데. 늑대 눈 살려.
"그 괴로움 자체가 소중했다는 증명이니까."
많이 괴로운 사람은, 그 만큼 행복한 것을 많이 가졌던 사람이란다, 라고 낮은 목소리로 알려주는 카사다. 괴롭지 않다면, 그 만큼 소중한 것이 없었다는 뜻이야. 잘 알겠냐는 뜻을 담아, 부드럽게 나이젤의 볼(추정)을 톡톡 건드린다. 나야 말로 이쪽 분야엔 전문카사니까! 선배의 마음을 담아 어린 새끼늑대를 대하듯이 나이젤을 대하는 카사였다.
...근데, 그러고보니 말인데. 오호라. 손맛이 예사롭지 않구나 닝겐. 꽤나 하는데? 기분이 좋은 듯, 땅에 평온하게 늘어있던 꼬리가 느리게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리기 시작한다. 응, 응! 그래, 그래, 바로 그쪽! 그래, 손가락으로 막! 빗거나 긁듯이 막! 와우!! 잘한다!!! 아이고 잘한다!!!
띠리링. 카사의 호감도가 올라갔습니다! 축하!
"너도 비슷한 상태인가보구나..."
알 것 같다니! 하염없이 떠돌아다닌다니! 말랑말랑한 카사의 마음이 뭉클, 해진다. 너도... 너도 가출했구나!!! 흠, 흠, 그러면 뭐, 어차피 아기 재롱급이었으니까, 함정에 대한 건은 용서할수도 있겠지! 저 소나무 아니 더 학생도 내 말을, 어? 의심하지 않고, 어? 워낙 나쁜 학생은 아닌 듯하-
닥쳐오는 것이 두려운 걸까? 아니면 깊은 곳에서 잠든 것이 눈을 뜬 걸까. 분명 소중한 것들은 전부 버려둔 것일 텐데.
"잘.. 모르겠네요." 후안의 질문에 말하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들이킨다는 말이란 어떤 것을 생각해서 내뱉은 말이었을까. 그걸 자신도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가까이 있던 것을 또다시 상기되는 것은 그다지 좋은 건 아니었잖아요?
"후안 씨는.. 가까운 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어떨 것 같나요?" 그런 게 좀 두려운 걸지도 몰라요? 그것보다는 랜스도 생각해보고, 상점가에서 뭘 사야 할지 알아보는 건 어때요? 라는 말을 하며 웃으려 합니다. 무릎에서 손을 떼면 질린 곳에 피를 공급하려는 듯 조금 발그레해져 있을 겁니다.
"그렇네요. 어째 친구 없는 둘이 친구와 친구 이야기 하는 거 참.. 어색하네요" 친구라는 생물체를 어떻게 말해본다고 해도 그건.. 알 수 없어요? 다림은 멋쩍은 웃음을 짓습니다. 그러다가 신경쓰이는이라는 물음에는 조금 고민하는 듯 하네요. 그건 어쩔 수 없어요?
"으음.. 징크스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은근 징크스가 있는 편이거든요." "가끔 동전 줍는 그런 것과 그것에서 비롯되는 일들로 끝나면 상관없는데.." 그런 걸로 해프닝으로 끝나면 괜찮은데. 가까워진다거나. 그런 일들이 생기면 그걸 자기 자신이 제어할 자신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제어가 되었으면 그냥 평범하게 자라서 평범하게.. 음. 민간인이나 일반인의 생활을 했으면 했겠죠." 아마도.. 라는 걸 붙인 걸 보면 상상되지 않는 영역인가 봅니다.
>>44 늦었지만...이상하네요. 저만 그렇게 느낀 걸수도 있겠지만 뭔가 이상해요. 얘네 무사도랑 얘네 관련 게이트 주변에서 벌어진 일들이 뭔가 따로 노는 듯한...? 약자를 존중하고 민간인을 보호한다는 애들이 북한을 초토화시키고 학생들을 휘말리게 했다...? '약자'의 기준이 많이 빡빡한 것이 아닐까요. 혹은....후보생들에게 홍왕의 흔적(유찬영의 의념속성을 이용한 의념기 강제 각성)이 있어서 유찬영 찾으려고 일단 근처에 보이는 애들 다 잡아들였다든가? 혹은 얘네가 사이비 종교나 다단계마냥 태양왕 믿으세요 태양왕 섬기세요 안믿으면 죽어랏!!해서 몸집을 불리려는 성향이 있다든가?? 그래서 '징용' 패턴이 있는 거고 어정쩡하게 강하면 살해되거나 살기 위해 변절자가 되거나 둘 중 하나를 고르게 되는 그런...? (오들오들
밤치고는 밝으나 적당한 어두움 속에서 짐승의 숨결이 뺨에 와닿는다. 툭, 툭. 친애를 표시하듯 온기를 전해주고 떨어지길 반복하는 부드러움에, 나이젤이 멍하니 뺨을 감싸쥐었다. 많이 괴로운 사람은, 그만큼 행복한 것을 많이 가졌던 사람. 정말로 그런가. 세상에는 빼앗김으로 인한 괴로움만 있는가? 정말로 그런가. 나는 무엇을 빼앗긴 거지?
근데 정말 이런 단순한 쓰다듬에 넘어가도 좋은가! 카사!!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며 나는 미지근한 바람을 맞으며 나이젤이 계속 털을 쓸어내렸다. 지금 이 상황, 당신에게 꽤 나쁘지 않은 기분인가 보다. 밤의 편안한 어둠에 무심코 긴장이 풀린 건지, 나이젤은 아직 쌀쌀한 2월의 공기를 온기를 나누어 견뎌내려는 듯 카사에게 점점 다가간다. 나이젤의 호감도(to 늑대 씨)가 무관심->지인으로 상승했다구!!
"?"
나이젤은 집이 있다. 아니, 집이 아니라 기숙사긴 한데. 단순히 방랑벽 때문에 채집부에서 바람쐬고 상점가 돌아다니고 도서관 가고 이랬다저랬다 할 뿐이다. 하지만 가출(x)상태인 카사의 사정을 모르는 나이젤은 뭔가 공감할 부분이 있었나? 하고 넘어갔다. 그리고 완전히 위엄이 깨져버리고 입을 열어 물음표를 엄청 많이 붙인 말을 하는 카사를 보고 ?를 머리 위에 띄우는 듯한 표정을 해보인다. 하지만 곧 진지한 듯이, 미소 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여기는 위험하잖아요. 당신을 노리는 사람이 많고요."
당신은 이곳에 계속 흔적을 남겼고, 당신을 노리는 사람도 많이 생겼고, 그 때문에 죄없이 피해입은 3자도 있었다.
"지금 저도, 당신을 노리는 사람이 아닐 거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나이젤은 꽤 전에 만들었던 단검, E-89라 이름붙은 창조물을 품속에서 빼들었다. 혹여 카사가 보지 못할까 봐, 달빛이 칼날을 타고 흐르도록 들어올려 확실히 보여준다. 휘두를 생각은 커녕 쓸 생각도 없지만.
"말이 많아지나요?" 가끔은 말해서 입을 풀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라는 속삭임을 내보내며 다림은 발을 까닥거립니다. 입에 뭐 아이스크림은 무리라도 물고 있을 만한 거 하나정도 있어도?
"조금 더 적극적이 된다고 해서 이렇게 게이트가 막 열리고 그러진 않겠죠." 그게 징크스면 진짜 UGN에서 절 잡아가도 할 말은 없겠지만.. 설마 그러겠어. 라는 말을 하며 큭큿하고 웃음을 참는 듯 웃네요. 물론 다림주가 미래의 if의 if한 걸로는 풀어본 적 있지만 그건 애초에 if의 if잖아요..
"징크스는 징크스니까요. 언젠가는 달라지면 깨지는 거죠?" 그러길 바라면서 그렇게 말하는 다림의 표정은 화사한 편이었을 겁니다.
시선, 할인안됨 : 재밌어보이긴 했지만 청천이 쪽에서 으르렁컁컁!!하느라 이점을 살리긴 커녕 노답트롤러 될 각이라 기각. 특히 시선 특성이면 청개구리짓할 각이라 fail...(절레절레
인간이 아닙니다 : 요정 혼혈로 내볼까 생각했지만 과거사 짜다 막혀서+꼭 혼혈캐 아니어도 머리색 눈색 자유라는 걸 깨닫고 굳이 이걸로 해야 할 이유가 없어서 기각.
마지막에 황금비, 수재, 의문의 코스트를 놓고 고민했었는데요... 의문의 코스트는...루이아나의 광휘 데이터를 보고 이건 진심 의적 플레이에 특화된 코스트구나 해서 진심으로 굉장하다고 생각했었지만, 곧 청천이가 거의 2m짜리 지팡이를 달고 도심을 누비다가 지팡이가 전선이나 남의 자동차나 가로수나 좁은 골목길 같은 K-도심의 흔한 장애물에 걸린다든가 지팡이 때문에 은신에 실패한다든가 하는 상상을 해버렸...
동정을 받길 싫어하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 별로 그런 말을 들으려 치열하게 살아온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뭐, 모순적이게도 그 동정 또한 자신에 대한 애정이자, 자신이 걸어온 길- 즉, 존재를 증명해주는 말 중 하나였으니 좋아하기도 했지만. 여러모로 이상하다, 모순적이라는 감정은.
아까와는 달리 꽤나 멋이 나는 카사의 모습에 지훈은 뿌듯함을 느끼는지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을까. 곧 웅덩이처럼 누워있게 되자, 지훈은 카사의 눌린 살을 콕콕 찌르며 작게 키득이기도 했겠지.
" 이미 한번 애정의 맛을 알아버린 늑대는, 다신 공복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거구나. "
알 것 같았다. 모르고 사는 것은 쉽다. 하지만 알고도 그것을 무시하고 사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애정이라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그 자체로 마약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 넌, 펜리르라고 했지. 티르가 생겨버려 이미 늦은, 한 명의 티르에게는 이미 실망해버린 티르. "
막중한 책임이라는 말.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는 카사. 그것은 지훈의 죄책감을 두드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느슨해져버린 비밀이다. 아니, 비밀인가? 오니잔슈의 말대로 일부러 비밀을 퍼트리는 것인가? 내 감정이 배신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카사의 감정 역시 배신하고 싶지 않기에?
모르겠다. 이미 방아쇠는 당겨졌다. 카사가 막중한 책임이 있다고 말한 이상, 지훈은 안 해도 돼. 난 네 모든 삶을 긍정하니까. "
동정을 받길 싫어하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 별로 그런 말을 들으려 치열하게 살아온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뭐, 모순적이게도 그 동정 또한 자신에 대한 애정이자, 자신이 걸어온 길- 즉, 존재를 증명해주는 말 중 하나였으니 좋아하기도 했지만. 여러모로 이상하다, 모순적이라는 감정은.
아까와는 달리 꽤나 멋이 나는 카사의 모습에 지훈은 뿌듯함을 느끼는지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을까. 곧 웅덩이처럼 누워있게 되자, 지훈은 카사의 눌린 살을 콕콕 찌르며 작게 키득이기도 했겠지.
" 이미 한번 애정의 맛을 알아버린 늑대는, 다신 공복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거구나. "
알 것 같았다. 모르고 사는 것은 쉽다. 하지만 알고도 그것을 무시하고 사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애정이라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그 자체로 마약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 넌, 펜리르라고 했지. 티르가 생겨버려 이미 늦은, 한 명의 티르에게는 이미 실망해버린 티르. "
막중한 책임이라는 말.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는 카사. 그것은 지훈의 죄책감을 두드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느슨해져버린 비밀이다. 아니, 비밀인가? 오니잔슈의 말대로 일부러 비밀을 퍼트리는 것인가? 내 감정이 배신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카사의 감정 역시 배신하고 싶지 않기에?
모르겠다. 이미 방아쇠는 당겨졌다. 카사가 자신에게도 막중한 책임이 있다고 말한 이상, 지훈은 그저 그 말마따나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려는 것이었을 뿐이다.
" 만약 또다른 티르 역시 거짓말쟁이였다면, 카사 넌 어떤 반응을 보일 거야? "
누워있는 카사를 내려다보는 지훈의 눈빛이 어쩐지 조금 싸늘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기쁨과 상실은 양면의 동전이니 말이지. 우리는 만남과 이별을 반복할수 밖에 없단다. 너도 누군가를 잃을 것이고, 누군가는 널 잃을 것이야."
어른 카사에게 책임감이 있다! 연장자(아님)으로서! 교육자(늑대한정)으로서! 인생선배(또 아님)으로서! 아직 어리면 앞으로도 잃을 것이 많을 텐데, 조금 힘내야 겠다. 비밀을 알려주듯이, 나이젤의 귓가를 향해 숙이는 카사. 은근히 아이취급함으로 내적 친밀감이 좀 많이 쌓인 거 같다. 호칭이 바뀐 것만 봐도.... (꼴 사납다, 카사야!)
"하지만 기억해주렴, 네가 상실한 것, 그리고 상실할 것들은 소중하고, 누군가가 상실할 너도 소중하단다."
우리가 작별인사를 해도 너는 나를 기억하고, 나는 너를 기억할테지. 너의 세포는 너의 존재를 몰라. 하지만 나는 너를 알고, 너를 상실한 슬픔을 알 것이야. 그게 우리가 거대한 세상에 남기는 작은 증표. 예정된 상실을 괴로워해도, 그것만은 잊지 말아주렴. 느끼는 괴로움 만큼, 함께 보낸 짧은 시간이 얼마나 많은 기쁨을 가져와 줬는지.
...를 조곤조곤 말하는 카사. 이쯤이면 대충 전달됬으려나? 확실히 이럴땐 언어가 편하긴 편하다. 아직 어린(아님) 아이에게 조언도 해줄수 있고. 카사 본인도 자주 써먹는다. 음. 엄마가 보고 싶다.
으이고. 근데 조막만한게 춥나보다. 확실히 아직 2월이고 닝겐은 따뜻한 털이 없으니 오죽하겠냐! 어린 카사도 겨울은 아주 그냥 껌딱지가 되어 보냈었다! ...근데 이 인간 다가오는게 왤케 느려. 역시 연장자(아님)이 힘내야 겠다!
"가까이 다가와주렴. 늙은 뼈에게는 아직 밤 공기가 너무 차갑구나."
가출청소년(?)이지 않은가! 역시 늙은(아님) 카사가 양보해줘야겠다. 흠흠!
"아 휴우 난 또 쫒겨나는 줄"
얼마나 경박하고 안심했는지 마침표도 안 찍은 카사. 너 허세 빼먹었다 야. 진짜로 안도했는지, 길게 한숨을 빼다, 나이젤이 한 말을 곱씹는다. 그리고 달빛에 반짝, 빛나는 단검.
이내 거대한 늑대가 부르르, 진동하기 시작한다. 그 진동의 정체는, 사실 카사가 웃음을 참는 소리인 것을, 나이젤은 조금 늦게 알아챘을수도 있다.
그리고 그대로, 길쭉한 혀를 주욱, 빼밀어, 카사가 어린 새끼늑대를 대하듯이 나이젤 얼굴 옆을 기이일게 핥으려 한다.
"그런 걱정을 해준 자는 처음이구나. 나는 태어날 때부터 노려지고, 지금도 노려지고, 네가 모르는 미래에도 계속 노려질 것이란다. 너의 단검에게도, 총에게도, 온 갖 덪에게도, 어디든, 언제든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야."
그것은! 의외! 사실이었다! 먹이로서, 재미로서, 가축먹는 맹수로서, 카펫재료(?)로서, 조기 의념 각성자로서, 등등! 딱히 유감이나 원망은 없지만 불편한 건 사실! 그래서 여기는 아주 좋았다! 인간 사냥 금지였으니까! 와! 최고! 오히려 여기서 와서 본 덪은 아직 초기라 그런가, 친절하다 못해 상냥했다!! (소문의 늑대를 위한) 거대한 철장이 있으면 그저 인간모습으로 수욱, 나갈수 있고! 전에는 그냥 굴도 팠고! 그런 덫을 만드는 가출청소년이라면 그리 무섭지는 않았다.
...물론 거기서 진화할 제노시아생은 무섭지만....
사실 이쯤이면 카사에게 뭘 원하기에 노리려는 지 물어볼텐데, 가출청소년(아님)은 제노시아인이지 않은가. 제노시아 사람들은 머리 속을 알지도 못하고 솔직히 별로 알고 싶지 않다. 알면 새로운 악몽을 꾸기 시작할꺼 같았다. 사슴뱀혼령 악몽도 겨우 겨우 익숙해 졌는데!
"아, 아니면 혹시 나를 걱정하는 거니? 그렇다면 자취를 숨기려 노력하지."
양 앞발을 교차하며 물어보는 투는, 약간의 장난기가 묻어나갔다. 물론! 날 잡으려고 함정도 팟고! 어? 건방지게 뼈도 때리고 했지만! 카사는 멋진 카사니까! 막상 만나면 막 걱정되고 아깝고 그럴수도 있지! 누굴 탓하겠냐, 카사의 털이 너무나 멋진 탓인 걸!
"내가 원하는 건.." 네가 울어주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 라는 말을 하는 목소리는 들뜬 듯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나는 너의 웃는 모습만을 봐왔단 말이지.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울어줄 수 있어요." 그러나 당신이 말하는 그 울음이 떠난 뒤라면 한 번 울어준 다음에는 미련없이 떠날 거에요. 라고 조용히 말했습니까? 그런 말을 들은 당신은 그렇게까지 진지하진 않아보입니다. 오히려 생기가 넘쳐보이는 느낌일까요.
"아 그건 괜찮아. 어차피 난 네가 우는 모습은 못 볼 것 같거든." "아니면 가물가물할 때 눈물 감촉은 느낄지도" 좀 기운이 생겨서 말이지. 저번에 뭐 던져서 머리에서 피난 건 미안. 피하지 말라고 소리쳤을 때 진짜 안 피해서 놀랐다고? 키들키들 웃는 사람입니다.
"그럼. 내가 부탁할게. 나를 막지 말고 나를 위해 울어줄래?" "거절 못하는 거 알고 말하는 거죠?" "그럼. 이제야 각오가 섰거든. 무기력함에서 드디어 벗어났으니까. 다 네 덕분이야." 순간적이지만 한없이 공허한 표정을 드러낸 상대방을 보던 다림은 눈을 깜박였습니다. 어떤 방식일지 모를 것이기 때문에 다림은 기다렸고, 그의 끝에서 피로 옷을 적시면서 울어주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뒤에 후회하면서도 또다시 찾으려 했을 겁니다.
어떠한 설명이 필요할까, 오늘은 외출하기엔 썩 좋은 날은 아니었다. 먹구름이 하늘에 잔뜩 끼어있었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처럼 습한 공기가 폐를 꾹꾹 누르는 듯한 느낌이 불쾌하게 그지없었다. 숨을 내쉬면 습기를 머금은 공기와 함께 비냄새가 느껴졌다.
다시 말하지만, 외출하기엔 썩 좋은 날은 아니었다.
이전에 쓰던 가죽장갑을 손에 씌우며, 벨트를 조였다.손가락의 끝까지 들어가 확실하게 차오르는 느낌을 확인하며,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폈다. 하얀색 셔츠위엔 단검따위를 수납할 수 있는 하네스를 차며, 가슴이 답답하진 않게 적당히 사이즈를 조절하면서 어깨를 가볍게 몇번씩 돌려보았다. 바지 위에는 긴급용으로 쓸 수 있게, 주사기 형태의 힐킷을 수납하는 벨트를 허리에 둘렀다.
준비가 끝난 듯, 가디언칩을 찬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본 뒤, 컨디션을 체크하고, 청월의 교복인 서코트에 팔을 넣어 입었다. 등에 있는 검집에 밤동안 날을 세운 프룬을 납도하고, 현관으로 가서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는 부츠를 신은 다음. 하나하나 꼼꼼하게 부츠의 끈을 당겨 조인다. 무슨 일로 나가냐는 고로의 머릴 한 번 쓰다듬어주고, 괜시리 메리에게 '다녀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일어난다.
외출하기에 썩 좋은 날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같이 습기가 많고 비냄새가 공기에 섞인 날은 후각이 뛰어난 짐승이 쇳냄새를 쉽게 맡지 못한다고 들었다. 즉. 외출하기에 썩 좋은 날은 아니지만, 사냥하기엔 좋은 날이다. 짐승이라지만 숲에 숨어있는 녀석도 아니고.....
가디언 넷에서 그 사실을 봤을 땐, 반신반의했다. 왜?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너는 그런 꼴로 돌아다니는거지? 너는 재능도 있고, 아브엘라의 선택도 받았고,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지냈잖아. 그런데 도대체 왜??
지훈이가 웃는다.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려져 있다. 보통은 눈치채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카사에게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의 섬세한 변화 같은거, 어려웠다. 그래서 언제나 배의 노력을 쏟아부었다. 언제나 누구든 자세히 살펴보았다. 정확히 무슨 감정을 내보이는 지 언제나 아는 것은 아니라도, 이를 드러내어 위협이 아닌 기쁨을 내보이는 이상한 자신의 종족을 알기위해서 노력했다. 애정을 쌓기 위해서, 애정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카사는 지훈이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르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 짐승이 무릇 모르는 상황에 반응하듯, 카사도 똑같이 반응했다. 불안으로.
그리고 다가오는 지훈의 손.
아아. 나는 이 상황을 몰라.
칼에 찔리는 것은 알아. 검에 베이는 것은 알아. 총에 관통당하는 것은 알아. 사지가 뜯겨나가는 것은 알아. 이에도, 주먹에도, 발톱에도, 밧줄에도, 신체가 아프고 피가 흐르고 아드레날린이 요동치고 본능이 비명을 지르는 것은 알아.
하지만 이 것은 몰라. 본능이 조용해. 머리 속이 고요해. 난 이 상황을 몰라.
모르는 것은 무서워.
따뜻한 지훈의 손이, 어느때나 처럼 머리에 닿는다. 나는 분명 그저, 그냥, 이것더것 하찮은 한탄을 하고 있었는데.
".....뭐?"
목에 나오는 소리가, 목소리 같지 않다. 언어같지 않다. 나는 그저 늑대의 성대를 이용해 신음소리를 내고,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불쌍한 카사. 불쌍한 카사. 너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늑대의 얼굴 근육은, 인간이나, 길들여진 강아지와 다르다. 감정 표현을 위해 발달한 강아지의 근육이 늑대에게는 없다. 인간과 소통할 필요가 없는 야생동물은 무릇 그렇다. 늑대를 닮은 야수의 모습을 가진 현재의 카사는, 보통 때와 달리,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그래, 얼굴 근육을 사용해 표정을 굳히 크게 만들어내지 않아도...
비가 내릴꺼 같다. 그럼에도 밖에 나왔다. 언제나 그랬듯이. 신세지고 있는 인간의 집이 있지만, 거기는 후안이 있을때만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카사의 집은 아니니까, 후안이 있을때만 의미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래. 외롭기 때문이다. 아주 작았을때부터, 카사는 외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나 혼자인건, 학교에 처음 도착하고서 이후로는다시 처음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익숙한 흙바닥에서, 나무 사이에서, 별빛 아래에서 자는 것은, 얘기할 자가 없어 만들어진 비밀이었다.
바람이 분다. 그의 향이 공기의 습기와 함께 카사에게 닿았다. 익숙한 냄새에 무의식적으로 꼬리가 반가움에 붕붕 흔들리는 것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저번에 좀 더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이 상태에서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숨었다. 어릴적 그랬듯이, 숨을 참고 미동없이 가만히 있어, 그가 지나가길 바란다. 하지만 그 향이 짙어진다. 그가 다가온다.
「에릭 하르트만」
그리고 그가, 카사를 부른다.
바스락. 수풀이 걷힌다. 안 그래도 흐릿한 하늘. 짙어진 어둠속에서 흉흉히 빛나는 한 쌍의 호박색 눈. 누가 뭐라 할수도 없는 짐승의 모습이다.
인사하고 싶다고 카사의 뒤에서 흔들리는 꼬리가 수풀속에서 소리를 낸다. 그래도 에릭의 이름을 부르려다, 카사는 멈춘다.
그리고 에릭은... 각오하고 있는 자의 모습이다.
무엇이냐면, '피'를.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는 카사.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그저 말없이 그의 말대로 나올 뿐. 그렇게 조용히, 늑대보다 월등히 큰, 늑대는 아닌 짐승이 에릭을 지긋히 바라본다.
유달리도 나는 항구에서 어떤 인연이 생긴다거나 누군가와 재회한다거나 하는 일이 많은 것 같았다. 한번은 나의 의남매이자 친구, 한번은 과거의 나와 만난적있던 선배. 그리고 오늘은 정말 희미한 기억의 실타래 한 가닥속에서, 또다른 인연과 마주친 날이었다. 흐리지도 맑지도 않은, 그러면서도 서늘한 해풍이 뺨을 쓸어내는 그런 날씨였다.
"누구세...어."
플래시백. 아마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펼쳐진 것이었다. 트라우마센터의 날씨, 주변의 냄새, 들리던 소음, 모든 것들이 일순간 되돌아온 듯 주변 풍경을 덮어간다. 잊을리가 없다, 아물어지지 않은 상처위로 덮인 기억일수록 더욱.
"서......진...석?"
나이도 묻지 않은 채 서로 이야기를 하다 각자의 치료를 위해 헤어지기를 며칠, 어느날부터 다시 혼자였던 트라우마센터에서의 시간의 편린. 잊고있었던 그에대한 감정은, 걱정이었다. 그때의 일은, 잘 이겨냈을까?
본능이라는 것은 결국, 몸에 깊게 세겨진 기억. 으득, 이를 갈아 정신을 현실로 이끌어 낸다.
카사는 지금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악다문 이사이로 되묻는다.
"할멈의 후계자라니, 무슨... 개소리야."
숨을 들이쉰다. 내쉰다. 들이쉰다. 내쉰다. 카사는 언제나, 언제나 노력하고 있었다. 모두에게 당연한 것은, 새겨진 것을 없애기 위해 뼈 자체를 깍는 것. 지금 카사는 피곤했다. 힘 쓰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놀 기분도 아니었다. 누구와도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비가 언제라도 쏟아질듯한 하늘아래서, 잠시 동안, 언어라는 것을 애초에 배운 적도 없듯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그 한 순간의 휴식을 원했다.
"......"
「당장 나랑 싸워.」
이성. 언어. 복잡한 인간의 언어. 거기에 실려지는 복잡한 감정. 본능. 감정. 기억. 경험. 애정. 굶주림.
"....너랑 놀 기분 아니야, 에릭."
둘 다 필요없어. 나는 피곤해.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카사의 뜻대로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파도에 휩쓸리듯. 인간의 시선. 에릭의 무기. 공기의 의념. 이 모든 것이 카사의 본능을 자극했다. 근육은 수축한다. 발톱은 모습을 드러낸다. 목으로부터 나오는 으르렁소리를 멈출수가 없다. 언제나 그렇듯, 카사가 원하는 것은 쓸모 없다.
에릭 : 청월로 와라 카사 스카이워커. 너와 내가 힘을 합친다면 모든 게이트를 지배할 수 있다. 카사 : 당신말에는 안 넘어가! 에릭 : 네가 네 재능을 얼마나 청월에서 꽃피울 수 있는지 안다면... 아브엘라가 너에게 충분히 얘기해주지 않은 모양이구나. 카사 : 충분히 말해줬어! 네가 내 오빠를 죽였잖아!
사냥자와 사냥감 포수도 짐승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냥자와 사냥감 둘 다에 해당된다.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그 상황에서, 에릭이 아는 생존강령은 그닥 쓸모가 없을지도 모른다. 목숨을 거는 이 싸움에는 명백히 카사가 유리하다. 하지만, 자신의 우상에게 배웠으면서, 이렇게 무기력하게 있는 모습은. 너무나 꼴사납기에....
" 놀자고 찾아온 것 같아? "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이 점점 굵어질 기미가 보였다. 에릭은 카사에게 한발자국씩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 앞에 검날을 겨누었다.
으르렁대는 소리, 발톱, 짐승과 같은 눈동자. 침묵, 검, 사냥감을 찾는 사냥꾼
싸울 준비가 끝났다면. 해버리면 그만이다.
" 왜 아프란시아의 기숙사로 안돌아가는거냐.... "
한 발은 더 앞으로. 양손으로 잡은 검을 힘껏 쥐고 횡으로 휘두른다. 전면전에 쿵쾅거리는 심장을 타고 흐르는 철분이 가득한 피가 빠르게 맴돈다.
정말 의외였다. 아니, 그의 예전 상태는 솔직히 말하자면 더이상 어디에도 방향을 두지 못한 사람 같았다. 마치 그때의 나처럼, 삶에서 어떠한 이유도 찾지 못하고 그저 실 끊어진 사람 같았다. 아마, 같은 처지였을 것 같으리라 생각했었고, 얼핏 안개속에 흐려진 기억은 스스로의 실수로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것 같아, 나또한 그랬었다며 마음을 터놓은 유이한 상대였던 것 같았다.
"...그, 잘 지내셨나요?"
나는 조금 조심스럽게, 겨우겨우 말을 꺼냈다. 왜냐면, 아직 나는 그가 마음 정리를 했을까 모르기 때문에.
우연인가, 운명인가. 어느 쪽이든 재회의 기쁨과 무엇인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그저 눈 앞에 있는 이 소녀에게 들키지 않도록 나는 두려움을 꽉 눌러댈 뿐이었다.
"...응. 너는?"
그때의 우리는 서로 망가진 상태에서 영문모를 말들을 서로 나누며, 서로의 버팀목이자 배출구로써 버텨왔다. 머리속이 완전히 깨져버린 상태에서,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대충 맞춰놓은 것 처럼 뒤죽박죽인 기억을 터놓고 이야기 할 사람은 오히려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더 적당했었다.
카사가 카사가 아니었을때. 작디 작은 존재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둠이 무서웠다. 수풀너머가 무서웠다. 굴 밖, 저 멀리가 무서웠다. 인간이 무서웠다. 큰 키와 두 다리가 무서웠다. 그들만의 알수 없는 울음소리가 무서웠다. 이름조차 없는 작은 존재는, 굴 안에 숨어 몸을 떨을 뿐이었다.
모르는 것은 무서워.
"난, 아직도 네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르겠어."
모르는 것은. 무서운 것은. 상처란 것은.
"하나도 모르겠어. 너의 말은 너무 어려워. 난..."
...너무나도. 화가 나.
순식간에 일어난다. 누워있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카사. 바닥에 있던 머리가 순식간에 높아진다. 낙아채려 하는 지훈의 손. 날카로운 이. 그 사이에 카사가 낄려고 하는 그의 손.
그의 손.
'티르'는 법의 신이면서, 법에서 증명을 하기 위해 필요한 오른손을 잃었다. 지훈아, 너는 검사니까, 얼추 그의 심정을 알지 않을까?
"지훈아."
만약에 지훈의 손을 잡는 대에 성공했다면, 그는 아마 카사가 말을 할때마다 내뱉는 뜨거운 숨을 느낄지도 모른다.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송곳니를 대고 있는 주제에, 너무나도 부드럽게 그의 손을 이로 잡고 있었을테니까. 한 발자국. 다가간다. 카사의 야생적인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을까.
"'친구'가 뭐야. '도구'가 뭐야. 알기 쉽게 설명해."
굶주린 카사. 불쌍한 카사. 욕심이 많지. 욕심도 많지. 세상을 품에 가두어 영원히 지킨다는 꿈을 꾸는 어리석을 카사. 세상을 삼키어 영원히 소중히 지켜버린 펜리르...
갈증을 호소하는 한지훈.
갈증을 호소하는 친구. 무리의 일원. 나의 책임. 나의...
나의 '티르'.
"그래서. 그게 무슨 상관을 가진거야. 나를 뭘로 생각하는 거야."
어리석은 지훈. 바보같은 지훈. 피가 혈관을 타고 울부짖는다. 본능적인 분노로 형성된 아드레날린이 숨을 가쁘게 한다. 새빨간 잇몸. 흘러내리는 침. 머리를 어지럽히는 수많은 화학반응 와중의 작은 웃음소리. 아브엘라도 모르는 것이 있구나, 라고 확신했을때, 작은 카사가 지은 웃음소리.
멍하니 하늘을 바라다 보고 싶을땐 늘 항구에 들르곤 한다. 거기서라면 적어도 상념에 방해될 일은 없을 테니까. 지훈오빠와 헤어진 후 정말 수많은 생각속에 하루를 보냈다. 내게 그 사실을 밝힌 이유는? 대체 왜? 친구가 수단이라면 목적은? 상념은 나를 무의식중에 항구로 이끌었고, 거기서. 좀 빠른 재회를 하게되었다.
"...아."
사실,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너무나도 바뀌어 있을까? 두가지 상반된 생각이 충돌하며, 나를 서서히 그쪽으로 이끌어간다.
싫어. 나를 내버려 둬. 나는 너무 피곤해. = 뛰어, 뛰어! 더 빨리. 더 빨리. 더 빨리!!
이제 조금 쉬게 해줘. = 어서, 어서! 더 빠르게, 더 빠르게!
자고 싶어... = 살아!!!
. ...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내게 그렇게 말하는 거야.
툭. 툭. 물방울 하나. 둘. 셋. 처음에는 알아채지 못한다. 카사의 털은 두꺼워, 웬만한 비는 그저 그 두꺼운 털을 타고 다시 땅으로 떨어지기에. 하지만 결국, 카사의 얼굴위에도 닿는 빗물. 포식자의 상징인 앞으로 바라보는 눈으로, 그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 에릭. 에릭 하르트만. 그 둘 사이를 갈라 흐리게 하는 빗물. 그리고 검. 날카롭고 날카로운, 인간이 스스로 만든 무기. 이빨. 살육의 도구.
지훈은 아무 저항 없이 카사에게 손을 붙잡혔다. 진실의 입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걸? 이상한 농담 따위가 지금 떠오른다. 이빨에 살짝 긁혀 피가 주륵 하고 카사의 입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 그래. 그렇겠지. "
화를 내 카사. 날 향해 화를 내. 진심을 보여, 언제나 날 향해서 네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 난 그게 보고싶었어.
지훈은 카사의 뜨거운 숨을 느끼면서도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금방이라도 카사가 입을 다물면 팔이 고깃덩이마냥 짓이겨질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나의 펜릴. 네가 원한다면, 이 모든 상황에 대한 화풀이를 원한다면, 난 그 이야기처럼 팔 한짝 정도는 내어줄 수 있다. 그걸로 우리의 관계는 끝날 테니까.
" 친구란, 내 존재를 확인해주는 사람. 도구는, 내가 필요하면 쓰고 아니면 내려놓는 것. 내게 있어 친구는 도구였고, 도구는 친구였지. "
그는 카사의 절망을 예견했다. 그는 카사의 분노를 예견했다. 그렇기에 담담하게 받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 나는 너를... "
지훈은 말을 망설였다. 카사가 웃고 있었기 때문에. 실성한 것은 아닌데, 어째서 웃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어?
" ...도구라고, 생각하고 있어. "
"그러니까 결정해. 도구임을 자각하고도 내 도구가 되어줄지, 아니면 그저 도망칠지." 지훈은 어두운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카사의 생각을, 알 수 없었으니까.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아 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기에 거기 있을 거라고 확신한 것 뿐이었다. 지훈은 빤히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이 목소리도, 사실은 그리웠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그에 대한 호감도를 전부 지워버렸으니 잘은 몰라도 말이다.
" 그동안 잘 지냈어? "
희미하게 웃어보이며 지아 쪽을 바라보았다. 마치 이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하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조금 이질적이었던가.
잘 모르겠다. 사실 나는 그의 발언에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 나는 인연을 목적삼아 살아가는, 그걸 위해서라면 수단따위 가리지 않을 극단적인 인간이니까. 그래서 계속 궁금했다. 대체 그러면 살아가는 목적은? 그 미묘한 분위기와 감정의 줄타기 사이에서 망설이길 15초. 먼저 선들의 수평을 깨뜨린 것은 나였다.
"오빠, 수단이 그거라면. 결국 목적은 뭐였던거야?"
내 목적은 하나였다, 제자리.리셋이 아닌, 업데이트. 재정립. 사람대 사람이란건 그런거니까.
자신 같은 인간도 필사적으로 노력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청월이다. 청월의 교육체계는 완벽하기에, 카사라도 틀림없이 적응 할 수 있을 것 이다. 프랑켄박사의 의학서도 읽을 수 있을 것 이다. 그렇다면 다시 선물해줘야지. 아프란시아 놈들이 이 아이를 이용하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 이다.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이다. 그렇다면..아브엘라도 날 다시 봐주지 않을까?
의념발화를 휘감은 검을 회피한 카사를 쳐다보며, 느릿하게 검을 회수한다. 검의 충격만으로 작은 구덩이가 생긴 땅에서 꺼내진 검을 다시 카사에게 겨눈다.
" 난 진심이야. "
의념으로 강화한 육체에서 힘이 넘친다. 투기가 일렁이는 눈동자에 카사의 모습을 담는다.
" 내가 이기면 청월로 전학와라 카사. 아프란시아에서 네가 배울만한 것은 없어. "
" 하지만, 꼭 그 학교에 의미없이 남고 싶다면, 날 쓰러트려. "
물론.
프룬이 그의 팔을 벤다. 스스로 베여진 팔에서 피가 뚝 뚝 흘러내리더니 점점 방패의 형상을 갖춘다. 붉은 철로 이루어진 방패는 에릭의 주변을 빙글 회전하며 배회하였고. 곧 에릭의 몸이 카사를 향해 돌진했다.
오히려 그의 목적을 듣고나니 조금 허탈해졌다. 내게 친구는 목적이며 살아가는 이유 그 자체였다. 내가가진 귄력, 사회적 지위 같은 것들은 결국에는 '친구'라는 존재를 유지시켜주기 위한 수단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알고나니 정 극단에 서있는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느끼지 못하는 감정, 아무리 발버둥쳐도 가까이 좁혀지지 않는 친구라는 존재, 결국 남는건 자기자신. 그런 과정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유지시켜주기 위한 네트워크로 친구라는 수단을 갈구한게 아닐까? 인간은 결국 그 한자대로 사람 사이에서 빛나는 존재니까.
"그런데 왜 그걸 먼저 말 안하고..."
진짜...바보같았다. 친구를 수단으로 삼는다는 고백이며, 말할 순서를 완전히 도치해버린 지금의 발언들까지. 대체 어떻게 그것들을 다 누른 채로 살아왔던거야? 그의 심장위로 새겨진 해묵은 흉터들이 고스란히 새겨져 내 심장이 아파오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바보같이, 털어놓는, 거야?"
올라오는 감정에 말 사이에 물기가 섞인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그런건 좀 말할때 포장을 하라고 멍청아!!!!!!!!!!"
그건 아마도, 윤지아 인생 처음으로 가족에게 뱉는 분노였을것이다.
"좋게 말 할 수 있잖아? 내 존재를 증명해줄 사람을 찾는다고, 친구는 그런 존재라고!!!!!!!!!!!! 그런식으로 말하면 오려던 친구도 다 떨어져 나가겠다!!!!!!!!!!!!!!!!!!!!!! 대체 왜이렇게 사람이 그 감정없는건 잘 숨기다가 이런데서만 직설적이고 솔직한건데! 좀!!!!!!!!!! 적당히!!!!!!!!!! 숨길줄도 알아야 할거아냐!!!!!!!!!!!!!!!!!!!!!!!!!!!!!!!!!!!!!!"
아무리 힘들어도. 계속, 계속. 되지 않으면, 될때까지. 손발이 뛰기에 적합하지 않으면, 적합할때까지. 살이 부르터지고 물집이 자리잡고 결국엔 두꺼운 굳은 살이 만들어 질때까지.
뛰지 않으면 도태당한다. 도태당하면. 죽는다. 구걸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이라는 것을 한번 손에 쥐어버리면, 무엇을 해서라도 놓기 싫어진다. 그래서 카사는 달렸다. 뛰었다. 되지 않으면, 될때까지. 다른 선택지는 죽음 밖에 없기에. 아무리 좌절하고, 쓰러지고, 울음을 삼키고 피를 삼키고 고통에 경련해도 끝까지. 몇번이나 넘어져도. 몇변이나 굴러도.
카사는 다시 일어서 뛰었다.
그리고 지금. 에릭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금.
될때까지. 카사는.
"그러니까."
혈향.
이 소년은. 정말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맞을까.
모르면서도. 이렇게 하는 것일까.
"왜. 왜 나에게 진심이야."
본능이 비명을 지른다. 본능이 속삭인다. 나에게 모든 것을 맡겨. 그리고 카사는 따른다. 다른 선택지가 없기에. 일직선의 도로 밖에 없는 삶이었기에, 카사는 숨을 들이쉰다. 몸이 낮추어진다. 숨을 내쉰다. 용수철 마냥, 앞으로 튀어 올라가는 카사.
"내가..."
싸워! 쓰러트려! 목덜미를, 목숨을!
"너에게 뭐라고! 나에게 명령질이야!!"
에릭은 앞으로 돌진한다. 카사는 위로부터 떨어져, 에릭을 몸으로 깔아 뭉개려 한다. 가장 기본적인 움직임. 그로 인해 가장 익숙한 움직임.
그거야 간단하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너에 대한 질투 그게 첫번째. 아브엘라씨의 보살핌, 가르침, 가족애. 그것들 전부 내 것이었으면 했다. 하지만 가지지 못했기에.. 그것을 가진 너는 나보다 분명 대단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브엘라씨에게 선택받지 못한 내가 너무 비참해지니까. 그러니까 너는 더 발전해야한다. 여기서 이렇게 한심한 몰골로 있으면 안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건.
쿵 ㅡ!
철혈의 방패로 카사의 몸을 가로막았다. 그 충격은 의념으로 강화한 신체 덕분에 어찌어찌 커버할 수 있었다.
" 어쩌면, 내가 조금 더 유능했더라면, 너의 가족이 될 수 있었으니까. "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쇠의 색이 진해지고, 땅의 색이 진해지도록. 굵은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간단한 증오 였으면 좋겠어. 나를 사냥하던 지금까지의 수많은 자들, 그리고 앞으로 나의 목숨을 노릴 수 많은 자들. 이득과 손실로 이루어진, 내가 이해하는 자들. 너를 그저 간단히 그들 사이에 끼어넣어 잊어 버릴수 있으면 좋으텐데.
하지만 나의 사냥꾼씨의 표정들은, 내가 여태껏 알지 못하는 것이고. 나의 사냥꾼씨의 말에 의하면-
"큭!"
방패에 막힌 충격이 고스란히 다시 카사에게 전해진다. 그에 따라 다시 몸을 떨어트리는 것이 맞는 선택이다. 충격을 흡수하고 흘러보내, 그 반동으로 더 크게, 더 강하게 뛰어 올라,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는 것이다. 배울 필요가 없는 지식이다. 본능이, 뼈에 새겨진 기억이 카사에게 그리 지시했다.
그러나 카사는 그 지시를 무시했다.
충격이 고통으로 변환해도 버텨내어, 방패를 발디딤 삼아 고개를 숙이는 카사. 귀가 납작하게 서있고 붉은잇몸이 드러나아, 영락없는 맹수의 형태. 그리고 에릭위의 서, 비가 내리는 세상에서, 단 하나 비가 닿지 않는 공간을 만든다.
에릭의 얼굴과 카사의 얼굴 사이.
비가 거세진다.
사냥꾼씨의 말에 의하면-
"- 그게 왜, 너에게 중요한데."
그런 이루어질수 없던, 단 하나의 과거의 가능성. 카사가. 지금까지. 미련을 가지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에릭은. 대체.
에릭은 카사에게 소중한 사람이 아니다. 카사는 에릭에게 소중한 사람이 아니다. 가족이 될뻔했단 이유. 가능성의 이유는 카사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해할수 없는 영역이었다. 이해 할수 있는 영역이라면.
"할멈- 아니..."
실이 휘감는다. 이 것은 대체 무슨 기술이지? 고민할 시간은 없다. 방패를 딛어, 다시 에릭에게서 떨어진다.
"아브엘라는..."
그물을 찢듯이, 의념으로 만들어진 실을 향해 발톱을 휘두르는 카사. 포효가 목에서부터 터져나간다.
콰득 하는 소리와 함께, 실을 향해 발톱을 휘두르는 카사의 발톱에 닿은 모양이다. 팔에서 뚝뚝하고 붉은색의 피가 실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고통을 느낄 시간은 길지 않았다. 포효를 터트리는 카사를 경계하며 검을 들고 주변을 빙빙 돌았다. 보통은 늑대가 하는 행동이었지 이거?
" 네가, 그 사람에게서 충분히 배울 수 있는 시간을 낭비한거잖아..아브엘라씨를 폄하 하지마 카사 "
이것은 관점의 차이다. 함께 하지 못했기에 뒷모습을 볼 수 밖에 없던 에릭과. 함께하였기에 앞모습을 보던 카사의 관점 차이다.
그렇기에 하나의 공통점을 깊게 지니고 있는 두 사람이어도.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겠지.
의념사를 끊고 포효하는 카사의 주변을 돌던 에릭의 몸이 멈추더니. 곧 카사를 향해 다시 돌진했다.
카사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망념을 채워 신속을 강화한다. 그리고 검 끝을 세워 짐승을 향해 내질렀다.
날카로운 발톱에 익숙한 살이 짖이기는 감촉. 피가 흩뿌려진다. 카사는 순식간에, 본능적인 희열을 느낀다. 선명한 붉은 색이 거센 비에 희색되어 사라진다. 애초에 혈투 같은 건 없었다는 듯이.
찰팍. 카사의 발이 웅덩이에 디딘다. 피가 들끓는다. 전투, 그 익숙한 두근거림. 비가 거세어 혈향은 전혀 전해지지 않지만, 그 새빨감이 각막에 각인된듯, 사라지지 않는다. 쿵쾅. 쿵쾅. 거세게 뛰는 심장. 지금 당장 카사의 가슴을 도려낸다면, 그것은 어느 괴생물의 장기일까.
"배울 시간을. 낭비해?"
삐죽. 헛웃음이 튀어나온다. 아드레날린. 희열. 분노. 콰드득, 카사의 발톱이 땅에 깊은 흔적을 만들어 낸다.
같은 사람을 바라보며 자랐다. 그 한 사람을 바라보며 자랄수 밖에 없었다. 그 멀고 먼 등을 쫒아 앞으로 나아갔던 소년. 그 얼굴을 마주보아 입술의 움직임을 따라했던 소녀.
그들의 비틀린 성장은, 결국엔 옳은 것이었을까.
"네가 뭘 알아."
그 둘의 영웅은, 결국엔 신화도 뭣도 아닌 그냥 인간이었을 뿐인 것을.
"X발. 네가 대체 뭘 아냐고 그렇게 떠드냐고!"
그리고 평생 다른 관점에 서있던 둘. 애초에 보고 있던 것은 같은 것이었을까.
"아브엘라씨, 아브엘라씨, 아브엘라씨! 네 머리속 환상 같은 걸로 자꾸 내게 왜 이러냐고!!! 내가 언제 그딴거 원한다고 했냐고!!!"
모르는 것을 단정하고. 움직이고. 멋대로 평하고. 그에 따른 줏대로 멋대로 행동하고.
닮은 것일까.
그렇게 날 볼꺼라면, 차라리 증오해주면 좋겠어.
증오하게 만들어 줄께.
빨라진 에릭. 그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하는 카사. 날카로운 검사와 짐승. 그리고 폭력. 익숙하리만큼 익숙하다. 카사는달린다. 일직선으로 달린다. 멈추고 싶지 않다. 검 같은 거 조금만 비껴가기만 하면 좋다. 난 저 X끼의 오른 팔부터 물어 뜯어버리고 싶다.
머리속 환상? 내가 본 아브엘라씨는 영웅이다. 내가 직접 보고 배울 기회가 있었으나, 내가 부족해서 닿지 못한 영웅이다. 그 우상과 함께 했으면서 왜 너는.......
" 너에겐 재능이 있어! 그러니까 아브엘라씨가 선택한거야! 그걸 왜 부정하는거야! 나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너는 그걸 부정하기만 하는거야!? 그냥 인정해! '너 같은 x신과는 다르게 나는 재능이 있기에 아브엘라가 선택했어!' 그럼 편해지는 거잖아! 그리고 청월로 전학오고...다시 시작해. 그런 학교에서 뭘 배우겠다는거야! 친구조차 없이 고립되서 이 모양 이 꼴이잖아!!!!! 청월로 오면... 적어도 혼자 있진 않을거야 그러니까!! "
팡 소리와 함께 카사가 나를 향해 돌진했다. 아무래도, 설득이 통하지 않을 것 같다.
망념을 쌓아올려 건강을 강화한다. 그리고.
핏방울이 튀어올랐다. 오른쪽의 어깨가 콰득하고 물리는 격통 이번에는 견디기 힘들었다. 아마도 건강을 강화하지 않고, 아이언 스킨을 쓰지 않았다면 정말로 절단되었을 것 이다. 하지만 허무하게 쓰러지지 않았다.
철퍽 소리와 함께 비 탓에 물렁해진 지면을 밟아 버틴다. 고통에 파르르 떨리는, 프룬을 쥔 오른손을 힘차게 들어올려, 검자루의 끝..폼멜이 있는 부분을 카사의 얼굴을 향해 내려치려한다.
지독하게 아프다. 뚝..뚝 하고 카사의 송곳니를 타고, 턱을 타고 흐르는 피가 바닥에 고인다. 지독한 쇠향이 난다.
피부 가죽이 뚫린다, 근섬유가 찢어진다. 뼈가 으스러진다. 나의 팔은 눈앞의 짐승에게 그저 고깃덩이 처럼 여겨지며 고통을 전달했다. 카사를 떨어트린 후에도, 내 오른팔은 힘없이 떨면서 축 늘어져 있을 뿐 이었다. 프룬을 들고있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몰골로... 이렇게..
포기할 순 없다. 단념이란 것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끔찍한 말이었다. 여기서 단념하고, 카사라는 존재는 저런 모습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아브엘라에게 내 처진 나라는 존재가 너무나도 처량해진다. 벨트에서 미리 챙겨온 주사바늘 형태의 힐킷을 꺼내 캡을 뜯었다. 왼팔로 들어올린 힐킷을 오른쪽 어깨에 박으며, 의념을 건강쪽에 돌려 상처를 수복했다.
지혈..급한대로 품에 있던 영웅건을 꺼내 어깨에 묶었다. 왼 손으로 한쪽을 잡고, 이빨로 다른 한쪽을 물고 힘껏 당기자, 꽈악하고 조여들어 지혈이 어느정도 되는 느낌이었다. 프룬을 쥔 오른팔을 살짝 들자, 뼈가 아직 안붙은 느낌에 입술을 깨물었다.
" 내가 지금 하고 있는게. 지x이어도 상관없어. 니가 뭐라하든, 난 내가 동경한 아브엘라씨의 모습을 쫓을거다. "
방해하지마. 이기적이지만, 어쩔 수 없어.
지면이 파해치는 소리와 함께, 카사가 또 다시 나에게 달려들었다. 또 똑같은 곳을 노린다면 이번엔 달랐다. 최대한 힘을 줘, 의념발화를 사용하여. 거대한 늑대의 입과 이빨을 손으로 가로막았다. 깨물지 못하게, 그 입을 닫지 못하게 힘으로 버텼다.
마치 북유럽신화에 나오는 펜릴과 토르처럼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 마냥 쏟아지는 비속에서 그렇게 하염없이 힘싸움을 시도했다.
" 성학교에서 널 이해할 인간 따윈 존재하지 않아!! 넌 평생 혼자일꺼야! 지금도 느끼고 있잖아! 넌 이 학원섬에서 고립되었다고! 그걸 그냥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이상한거다! "
힘껏 다리를 처올렸다.
" 프랑켄슈타인 의뢰 때도 넌 약했어! 메리는 위험하다고? 그런 경고 뿐이잖아! 네가 할 수 있는게 뭔대! "
다시 다리를 처올렸다.
" 지금도..고작 나 하나 완벽하게 제압 못하면서 이 모양 이 꼴이 너라는 소리 따윌 해대고 있지!! "
핏줄을 타고 뜨거운 피가 달려나가는 느낌을 아시나요. 하늘을 향해 비틀려 올라가는 나뭇가지처럼, 심장으로부터 뻗은 혈관이 뇌로 피를 전달하는 걸 느낄 수 있나요. 기쁠 때나 부끄러울 때처럼, 뺨에 따스한 열기가 어리는 걸 느껴요.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분명 거울을 보고 있다면 붉은기가 오른 발그레한 뺨을 볼 수 있을 거에요.
자그마한 꿈을 기억하시나요. 기억도 안 나는 꿈. 하지만, 모든 꿈은 너무나 상냥해요. 잊어버리려 한 기억도, 잊어버리고 싶던 기억도, 잊어야 할 기억도 모두 삼키고, 아주 때때로 그것들을 보여주곤 하는 거에요. 가장 편안한 곳에서 잠자리에 들 때, 아무것도 경계하지 못할 만큼 약하고 순진하고 물러졌을 때. 건드릴 수 없을 만한 상처를 아주 조금씩 꿰매가며 치유를 기다리는 일. 자그마한 꿈은 그런 일을 하곤 해요.
아아, 무관심한 나.
무엇이든 잘 잊어버리는 나.
필요없는 것이라고, 지금껏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이름을 잊어왔던가요.
그래서, 이 순간도 잊을 수 있을까요?
치유될 수 있을까요?
"B군, 바쁜가 보네."
그래서 내 연락을 받지 않는 거야.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너무해."
친구라면 좀 더 자주 만나야 하잖아.
"...지금까지 그런 걸 입에 담아온 적은 없었지만."
그래, 역시 B군은 바쁜가 봐. 슬펐다. 나를 봐주지 않다니. 외로웠다.
유리창을 바라보면, 눈은 가려져 보이지 않는, 하지만 미소짓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린 사람이 있었다. 나다, 루.
뜨거운 뺨 위를 가르는 두 줄기 빗방울이 있었다.
가슴이 먹먹했다달려나가는 느낌을 아시나요. 하늘을 향해 비틀려 올라가는 나뭇가지처럼, 심장으로부터 뻗은 혈관이 뇌로 피를 전달하는 걸 느낄 수 있나요. 기쁠 때나 부끄러울 때처럼, 뺨에 따스한 열기가 어리는 걸 느껴요.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분명 거울을 보고 있다면 붉은기가 오른 발그레한 뺨을 볼 수 있을 거에요.
자그마한 꿈을 기억하시나요. 기억도 안 나는 꿈. 하지만, 모든 꿈은 너무나 상냥해요. 잊어버리려 한 기억도, 잊어버리고 싶던 기억도, 잊어야 할 기억도 모두 삼키고, 아주 때때로 그것들을 보여주곤 하는 거에요. 가장 편안한 곳에서 잠자리에 들 때, 아무것도 경계하지 못할 만큼 약하고 순진하고 물러졌을 때. 건드릴 수 없을 만한 상처를 아주 조금씩 꿰매가며 치유를 기다리는 일. 자그마한 꿈은 그런 일을 하곤 해요.
아아, 무관심한 나.
무엇이든 잘 잊어버리는 나.
필요없는 것이라고, 지금껏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이름을 잊어왔던가요.
그래서, 이 순간도 잊을 수 있을까요?
치유될 수 있을까요?
"B군, 바쁜가 보네."
그래서 내 연락을 받지 않는 거야.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너무해."
친구라면 좀 더 자주 만나야 하잖아.
"...지금까지 그런 걸 입에 담아온 적은 없었지만."
그래, 역시 B군은 바쁜가 봐. 슬펐다. 나를 봐주지 않다니. 외로웠다.
유리창을 바라보면, 눈은 가려져 보이지 않는, 하지만 미친 듯 입꼬리를 끌어올린 사람이 있었다. 나다, 루.
호흡을 갑갑하게 가로막는 느낌에 가슴을 문지르고, 혼란에 떨고, 거칠게 달아오른 숨을 내쉰다.
[ ▶ 원한에 목 놓아 우놀아. ▶ 동아리 부장 발주 의뢰 ▷ 게이트 '통곡무덤'을 클로징하고 귀신의 원한을 풀어주시오. ▶ 제한 인원 : 3인 ▶ 보상 : (사오토메 에미리)정보 - 고스트 다이버 ] [ 이게 내가 우리 서포터에게 받은 의뢰에 대한 정보. ] [ 무조건 적이 귀신이라고 장담하긴 어렵지만 그럴 확률이 높긴 하네. 이건 조금 곤란하려나. ] [ 아군의 피를 사용하는 건 가능해? 우리팀 서포터가 힐러인만큼 네가 쓴 양을 힐로 채우면 될 것 같은데. ]
핏줄을 타고 뜨거운 피가 달려나가는 느낌을 아시나요. 하늘을 향해 비틀려 올라가는 나뭇가지처럼, 심장으로부터 뻗은 혈관이 뇌로 피를 전달하는 걸 느낄 수 있나요. 기쁠 때나 부끄러울 때처럼, 뺨에 따스한 열기가 어리는 걸 느껴요.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분명 거울을 보고 있다면 붉은기가 오른 발그레한 뺨을 볼 수 있을 거에요.
자그마한 꿈을 기억하시나요. 기억도 안 나는 꿈. 하지만, 모든 꿈은 너무나 상냥해요. 잊어버리려 한 기억도, 잊어버리고 싶던 기억도, 잊어야 할 기억도 모두 삼키고, 아주 때때로 그것들을 보여주곤 하는 거에요. 가장 편안한 곳에서 잠자리에 들 때, 아무것도 경계하지 못할 만큼 약하고 순진하고 물러졌을 때. 건드릴 수 없을 만한 상처를 아주 조금씩 꿰매가며 치유를 기다리는 일. 자그마한 꿈은 그런 일을 하곤 해요.
아아, 무관심한 나.
무엇이든 잘 잊어버리는 나.
필요없는 것이라고, 지금껏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이름을 잊어왔던가요.
그래서, 이 순간도 잊을 수 있을까요?
치유될 수 있을까요?
"B군, 바쁜가 보네."
그래서 내 연락을 받지 않는 거야.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너무해."
친구라면 좀 더 자주 만나야 하잖아.
"...지금까지 그런 걸 입에 담아온 적은 없었지만."
그래, 역시 B군은 바쁜가 봐. 슬펐다. 나를 봐주지 않다니. 외로웠다.
유리창을 바라보면, 눈은 가려져 보이지 않는, 하지만 미친 듯 입꼬리를 끌어올린 사람이 있었다. 나다, 루.
호흡을 갑갑하게 가로막는 느낌에 가슴을 문지르고, 혼란에 떨고, 거칠게 달아오른 숨을 내쉰다.
제가....저번 수업 때 필기내용을 날려 먹기라도 한 모양입니다....? 기억이 리셋되기라도 한 것일까요?? 정말이지 눈물이 나는 걸요! 그건 그거고 오는 길에 분위기가 좀 많이 심상치 않았었는데, 무슨 일인진 잘 모르겠지만 일단...쉬는 동안 아버지께 안부 인사를 드립시다! 마도일본에서도 연락을 못 드렸는데 적어도 제가 의뢰 가기 전에는 연락을 드려야 하지 않겠는지요? 하지만 아버지는 위치가 위치이신만큼 지금 매우 바쁘실테니까, 다른 안부를 여쭐수 있는 분께 대신 여쭤보는 게 더 빠를 것이라고 생각했답니다.
[(대충 기둥 뒤에서 머리만 빼꼼하고 있는 고양이 이모티콘)] [야마모토 씨, 야마모토 씨? ] [잠시 시간 괜찮으신지요? ] [(*ˊ˘ˋ*)♪]
그래서 야마모토씨께 문자를 보낸 것 뿐이랍니다! 정말 그 이유 뿐이어요!! 다른 이유라던가 정말로 없으니까요??? 정말로 안부 묻기하려는 이유랍니다????
# 야마모토씨께 문자를 보내 보아요! 만약에 다른 연락도 온 게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면 문자를 보내고 나서 확인해 보도록 합시다! # 현재 망념 20!!!
자기 이마를 팍 팍 팍... 친다. 아이고... 교내 분위기가 안 좋더니만... 이게 그 이유구나. 한숨을 팍 내쉬며 성큼성큼 걸어가 찬후 옆에 앉는다. 다른 부원분들은 몰라도 츤유 선배가... 안 올리는 없잖아... 미술부에... 끄으응!!! 좋은 사람이라면 여기서 어떻게 할까... 곁에 있어주겠지... 안심하라고 말해주겠지... 하지만 난 그런 거 진짜 잘 못하는데... 어떻게 말해야 하나? 다 잘 될거야? 이건 너무 낙관적이야. 애초에, 난 사람 마음 같은 거 잘 모른다고... 만화로 인간관계를 배운 사람에게 뭘 바라는 거냐고~!~! 고민고민하다가 찬후 선배를 슬쩍 바라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게요... 그... 손유 선배와... 연락은 되세요? 연락처는 남아 있는거죠?"
그리고 찬후 선배는 뭘 그렇게 웃고 계신거냐고요~!~!~!~! 아니, 이런 상황에서 굳이 웃을 필요는 없는데!!!
긴장되어 빠른 손놀림. 아무 이유도 없이 손이 마구 떨려와 오타라는 흔적으로 새겨진다. 나는 이런 급박한 패닉룸스러운 상황에 여전히 약한 것 같다. 내가 더이상 상처를 외면치 않기로 한 순간부터 이런 패닉에 약할거라는 각오정도는 했지만, 귀에 이명이 울리고 시야가 어지러운, 여전히 남은 트라우마반응은 솔직히 좀 괴롭다. ...릴렉스, 진정. 여기는 십여년전도 아니고 하멜른이 다시 열린것도 아니다. 심호흡을 가다듬고, 다시한번 더 가다듬고. 침착하게, 문자를 입력하는 손이 빨라진다.
<아빠> [ 무슨일ㅇㅣ야? ] [ 당분거ㅏㄴ? ]
<엄마> [ 집/ 직금 언마는 괘찮은거 맞지? ]
아직 떨리는 것이 사라지진 않아서 조금 오타가 있긴 했지만, 어쨌든 심하진 않으니까, 괜찮을거다.
>>825 " 상냥한 당신이 좋아요. " " 손이 따듯한게 좋고, 부드러운 목소리도 좋아요. " " 장비를 볼 때 집중하는 모습도,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는 모습도, 언제나 노력하는 모습도... " " 그리고 보고 싶은 모습도 너무 많아요. " " 나 혼자만 보고 싶은 모습이 너무 많아요. "
>>832 "저도, 목소리가 예쁜 당신이 좋아요." "시원한 당신의 손도, 상냥한 말도." "무지개의 여섯째 색을 줄여 펼쳐놓은 듯한 머리카락이 바닷물에 펼쳐들 때, 귀한 보석 같은 눈을 떠서 이쪽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을 때. 꽉 껴안고 눈을 감을 때 느껴지는, 어느새 멀리 온 것 같다고 느끼게 하는 추억 같은 기분." "당신이 원하는 제 순간을 모두 드릴게요. 그러니 남한테 넘기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시간을 저에게 주세요. 가진 동안 소중히 간직하고, 뜨거운 감정들을 하나하나 식혀서 동그란 자갈처럼 맑고 기분 좋은 추억으로 만들어 가져 주세요. 저 또한 그렇게 할 테니." "이루 말할 수 없이, 당신을 좋아합니다."
>>886 화살은 찔린 걸 더 강한 출혈 위협으로 뽑지 못하고 아파하면서 걷는 거나 독화살이라서 이 악물고 뽑아서 그걸 들고 피 흘리면서 퇴각하는게 좋고, 검은 길게 찢겨나간 시각적 효과가 좋고요, 총알은 안도하다가 탕 하는 소리가 울리며 고통이 몰려오는 청각적 효과가 좋고요. 창은 스칠 듯 스치지 않는 그러다가 점점 상처가 늘어나는 역동적인 게 좋아요.
>>886 창은 너무 아프고 일방적이어 보이고... 검도 너무 아프고 상처가 깊어 보이네요. 총은 파괴력이 높다는 거랑 상처부위가 적고 작은 구멍이 뚫린다는 점이 좋고, 화살은 상처도 뚫으면서 푹 박히고 뽑으려 할 때 화살촉이 걸려서 아파한다던가 억지로 뽑으려나 부러져서 부러진 화살대에 긁혀서 손에서 핏방울이 흐른다던가... 하는 게 좋으니까 저는 창<검<총알<화살입니다. (전문적)
지아의 말에 지훈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넌 그렇게 말했음에도, 나를 걱정하고, 가족으로 생각해주는구나. 너는 나와의 관계 자체가 목적이겠지. 오히려 그렇기에 더 놓을 수 없는 건지도 몰라.
하지만 놓지 않겠다면 난 오히려 더 끌어들일 뿐이야. 라고 생각하며 지아를 향해 천천히 일어서 다가갔을까.
" 그야, 너희가 더 깊이 나와 관계를 맺기 전에 밝히는게 너희들이 덜 상처받는 방법이었으니까. "
과연 조금이라도 거짓을 섞었다면, 포장했다면, 내게 좋은 쪽으로 말했다면, 나중에 내게 수단으로서 쓰여지고 버려졌을 때, 자신이 날것 그대로 듣고 선택한 만큼 후회하지 않고 개운할까? 그럴리가. 오히려 사람에 따라서는 듣지 않았을 때보다 더 상처를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지훈은 날것 그대로 말하기로 했던가.
" 떨어져 나가면 그것대로 상관 없어. 너희에겐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니까. "
" 말했잖아. 수단이라고. 단순히 내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친구가 아냐. 내 존재 의의를 위협하면, 나는 내 친구들을 가차없이 버릴 거야. 이건 적당히 숨겨서는 의미가 없어. 이건, 그대로 드러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 "
나중에 받을 절망을 없애기 위해, 후회를 없애기 위해, 포장따위는 필요 없었다.
" 자 지아야, 네게도 선택권을 줄게. 나를 이제껏 했던 것처럼 가족으로 대하며, 수단으로 남아있을지, 혹은 그 모든 관계와 내가 널 버릴지도 모르는 미래를 던져버리고 도망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