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설명이 필요할까, 오늘은 외출하기엔 썩 좋은 날은 아니었다. 먹구름이 하늘에 잔뜩 끼어있었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처럼 습한 공기가 폐를 꾹꾹 누르는 듯한 느낌이 불쾌하게 그지없었다. 숨을 내쉬면 습기를 머금은 공기와 함께 비냄새가 느껴졌다.
다시 말하지만, 외출하기엔 썩 좋은 날은 아니었다.
이전에 쓰던 가죽장갑을 손에 씌우며, 벨트를 조였다.손가락의 끝까지 들어가 확실하게 차오르는 느낌을 확인하며,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폈다. 하얀색 셔츠위엔 단검따위를 수납할 수 있는 하네스를 차며, 가슴이 답답하진 않게 적당히 사이즈를 조절하면서 어깨를 가볍게 몇번씩 돌려보았다. 바지 위에는 긴급용으로 쓸 수 있게, 주사기 형태의 힐킷을 수납하는 벨트를 허리에 둘렀다.
준비가 끝난 듯, 가디언칩을 찬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본 뒤, 컨디션을 체크하고, 청월의 교복인 서코트에 팔을 넣어 입었다. 등에 있는 검집에 밤동안 날을 세운 프룬을 납도하고, 현관으로 가서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는 부츠를 신은 다음. 하나하나 꼼꼼하게 부츠의 끈을 당겨 조인다. 무슨 일로 나가냐는 고로의 머릴 한 번 쓰다듬어주고, 괜시리 메리에게 '다녀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일어난다.
외출하기에 썩 좋은 날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같이 습기가 많고 비냄새가 공기에 섞인 날은 후각이 뛰어난 짐승이 쇳냄새를 쉽게 맡지 못한다고 들었다. 즉. 외출하기에 썩 좋은 날은 아니지만, 사냥하기엔 좋은 날이다. 짐승이라지만 숲에 숨어있는 녀석도 아니고.....
가디언 넷에서 그 사실을 봤을 땐, 반신반의했다. 왜?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너는 그런 꼴로 돌아다니는거지? 너는 재능도 있고, 아브엘라의 선택도 받았고,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지냈잖아. 그런데 도대체 왜??
지훈이가 웃는다.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려져 있다. 보통은 눈치채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카사에게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의 섬세한 변화 같은거, 어려웠다. 그래서 언제나 배의 노력을 쏟아부었다. 언제나 누구든 자세히 살펴보았다. 정확히 무슨 감정을 내보이는 지 언제나 아는 것은 아니라도, 이를 드러내어 위협이 아닌 기쁨을 내보이는 이상한 자신의 종족을 알기위해서 노력했다. 애정을 쌓기 위해서, 애정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카사는 지훈이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르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 짐승이 무릇 모르는 상황에 반응하듯, 카사도 똑같이 반응했다. 불안으로.
그리고 다가오는 지훈의 손.
아아. 나는 이 상황을 몰라.
칼에 찔리는 것은 알아. 검에 베이는 것은 알아. 총에 관통당하는 것은 알아. 사지가 뜯겨나가는 것은 알아. 이에도, 주먹에도, 발톱에도, 밧줄에도, 신체가 아프고 피가 흐르고 아드레날린이 요동치고 본능이 비명을 지르는 것은 알아.
하지만 이 것은 몰라. 본능이 조용해. 머리 속이 고요해. 난 이 상황을 몰라.
모르는 것은 무서워.
따뜻한 지훈의 손이, 어느때나 처럼 머리에 닿는다. 나는 분명 그저, 그냥, 이것더것 하찮은 한탄을 하고 있었는데.
".....뭐?"
목에 나오는 소리가, 목소리 같지 않다. 언어같지 않다. 나는 그저 늑대의 성대를 이용해 신음소리를 내고,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불쌍한 카사. 불쌍한 카사. 너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늑대의 얼굴 근육은, 인간이나, 길들여진 강아지와 다르다. 감정 표현을 위해 발달한 강아지의 근육이 늑대에게는 없다. 인간과 소통할 필요가 없는 야생동물은 무릇 그렇다. 늑대를 닮은 야수의 모습을 가진 현재의 카사는, 보통 때와 달리,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그래, 얼굴 근육을 사용해 표정을 굳히 크게 만들어내지 않아도...
비가 내릴꺼 같다. 그럼에도 밖에 나왔다. 언제나 그랬듯이. 신세지고 있는 인간의 집이 있지만, 거기는 후안이 있을때만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카사의 집은 아니니까, 후안이 있을때만 의미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래. 외롭기 때문이다. 아주 작았을때부터, 카사는 외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나 혼자인건, 학교에 처음 도착하고서 이후로는다시 처음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익숙한 흙바닥에서, 나무 사이에서, 별빛 아래에서 자는 것은, 얘기할 자가 없어 만들어진 비밀이었다.
바람이 분다. 그의 향이 공기의 습기와 함께 카사에게 닿았다. 익숙한 냄새에 무의식적으로 꼬리가 반가움에 붕붕 흔들리는 것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저번에 좀 더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이 상태에서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숨었다. 어릴적 그랬듯이, 숨을 참고 미동없이 가만히 있어, 그가 지나가길 바란다. 하지만 그 향이 짙어진다. 그가 다가온다.
「에릭 하르트만」
그리고 그가, 카사를 부른다.
바스락. 수풀이 걷힌다. 안 그래도 흐릿한 하늘. 짙어진 어둠속에서 흉흉히 빛나는 한 쌍의 호박색 눈. 누가 뭐라 할수도 없는 짐승의 모습이다.
인사하고 싶다고 카사의 뒤에서 흔들리는 꼬리가 수풀속에서 소리를 낸다. 그래도 에릭의 이름을 부르려다, 카사는 멈춘다.
그리고 에릭은... 각오하고 있는 자의 모습이다.
무엇이냐면, '피'를.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는 카사.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그저 말없이 그의 말대로 나올 뿐. 그렇게 조용히, 늑대보다 월등히 큰, 늑대는 아닌 짐승이 에릭을 지긋히 바라본다.
유달리도 나는 항구에서 어떤 인연이 생긴다거나 누군가와 재회한다거나 하는 일이 많은 것 같았다. 한번은 나의 의남매이자 친구, 한번은 과거의 나와 만난적있던 선배. 그리고 오늘은 정말 희미한 기억의 실타래 한 가닥속에서, 또다른 인연과 마주친 날이었다. 흐리지도 맑지도 않은, 그러면서도 서늘한 해풍이 뺨을 쓸어내는 그런 날씨였다.
"누구세...어."
플래시백. 아마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펼쳐진 것이었다. 트라우마센터의 날씨, 주변의 냄새, 들리던 소음, 모든 것들이 일순간 되돌아온 듯 주변 풍경을 덮어간다. 잊을리가 없다, 아물어지지 않은 상처위로 덮인 기억일수록 더욱.
"서......진...석?"
나이도 묻지 않은 채 서로 이야기를 하다 각자의 치료를 위해 헤어지기를 며칠, 어느날부터 다시 혼자였던 트라우마센터에서의 시간의 편린. 잊고있었던 그에대한 감정은, 걱정이었다. 그때의 일은, 잘 이겨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