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잘 지냈다고 하면 다행이네. 미안해. 성을 빠져나오다가 그만 걸려서. 그 이후로 못 나오게 되었거든. 경비가 더욱 철저해져서 이용하던 개구멍도 막혀버려서."
다들 자신을 찾았다는 그 말에 란델은 미안함을 느꼈는지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원래대로라면 그 날도 성을 무사히 빠져나와서 모두와 함께 놀 생각이었지만 그만 걸려버린 바람에 한동안은 방에 갇혀있었던 기억이 문뜩 떠올랐고 자연히 란델의 입가에 쓴 표정이 지어졌다.
아직도 자신을 찾는 것일지. 혹은 그녀 말고도 다른 이들도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지. 차마 그것을 묻는 것조차 미안한지 마음 속으로만 가라앉히면서 란델은 그녀의 말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거야 나는 제 2 황자니까. 어릴 때처럼 지낼 수는 없거든. 이 자리에 있으면 워낙 주변 눈치를 보게 되고 신경써야 할 것이 많고 기품이나 그런 것도 따져야 하니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며 란델은 괜히 소리를 내어 웃으면서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놓으면서 잠시 생각을 하다가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좋아. 너 나의 전속으로 있어볼 생각 없어? 황족은 기사들 중에 자신의 전속을 붙일 수 있거든. 물론 네가 괜찮다면이야. 어릴 때의 친구가 전속으로 붙어있는 것이 나로서는 편하긴 한데 너는 너대로 꿈이 있을 수 있으니까. 이를테면 형님인 제 1 황자의 전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을테고, 같은 성별인 황녀의 전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을거야. 물론 형님이나 동생이 허락을 해줘야 가능하겠지만 말 정도는 전해줄 수 있어."
이런 말조차도 사실상 란델로서는 조심스러웠다. 자신과 그녀는 더 이상 옛날 같은 관계가 아니었다. 분명하게 자신이 위고 그녀는 아래였다. 결국 황자와 귀족 공녀로서 다시 마주한 것이었으니까.
/조금 널널해져서 답레를 달아놓을게! 그리고 햄스터의 건강상태가 안 좋구나. 햄스터가 빨리 나아지길 바라!
"노블리스 오블리주와는 조금 다른 것 같지만 비슷할지도 모르겠네. 아무튼 괜찮아. 갑자기 연락이 끊어진 것에 대한 사과 표시로 생각도 좋아."
슬슬 옆에 기사를 하나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시기였다. 란델은 어느 정도 검을 다룰 수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기사 정도로 훌륭히 잘 다루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몸을 스스로 지킬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검술을 익혔으나 어떻게 전문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기사에 미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보면 그녀는 적합한 이였다. 자신의 친구이기도 하고 조금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존재였기에 아예 모르는 이보다는 그녀가 란델에게서도 편했다. 허나 이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이야기일 뿐. 귀족 공녀의 입장에선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알 수 없었다.
"네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본 적이 없어. 하지만 시험에 합격한 시점에서 충분히 제 몫은 할 거라고 생각해. 오히려 검술 실력도 나보다 훨씬 나을걸?"
씩 웃으면서 승낙하는 그녀의 말에 란델은 바로 임명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으며 일단은 그 정도로 대답했다. 어릴 때처럼 편하게 대하면 좋으련만, 마냥 그렇게 대할 수 없었기에 답답함을 느끼며 란델은 눈을 감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약간의 거리감을 두듯, 그 침묵이 조금 길었다.
"정말로 좋다면 전속으로 삼겠어. 후회하지 않을거야?"
물론 자신의 전속이 된다면 엄연히 황족을 지키는 전속 기사가 되는 것이었기에 지금 란델이 친구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명예인 셈이었다. 허나 그 자리는 큰 명예가 따르는만큼 그만큼 큰 책임감이 필요했다. 황족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야말로 난리가 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에 란델은 신중하게 대답하라는 듯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만약 후회할 것 같고 생각해보고 싶다면 답은 미뤄도 괜찮아. 물론 난 네가 전속으로 붙어있는 쪽이 편하긴 해. 조금이라도 아는 이냐, 아니면 모르는 이냐를 떠나서... 쌓인 이야기라던가 그런 것을 풀고 싶기도 하니까. 너도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여럿 있을지도 모르는 거잖아. 사실 제일 큰 이유는 뭔가 다른 기사들은 내가 마을로 가려고 하면 무조건 막을 것 같아서 말이지. 아. 너도 막으려나? 그건 곤란한데."
괜히 장난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듯 란델은 괜히 장난스러운 웃음소리를 풍겼다.
/나 역시 느긋하게 하고 있어. 이번 주는 어쩌다보니 여유로운 주간이 되어버려서 푹 쉬는 느낌이지만 다음 주는 다시 바빠질지도 모르겠네. 휴무가 없는 주간이라니. 에고. 컨디션 조절 잘하기야!
"나로서는 후회하지 않는다는 답을 원했지만 그래도 알겠어. 그럼 내 목숨, 너에게 맡길게. 잘 지켜줘."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는 있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기사만큼의 검술 실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황족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황족에게는 전속 기사가 있는 것이었고, 다른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오직 황족들을 수호하는 임무만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맡기는 것이기에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이에게 맡기는 것이었고, 황족의 신뢰를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사에게는 큰 명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짊어져야 할 것이 많았고, 책임져야 할 것 역시 많을 수밖에 없었다.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하면 거짓말이라는 것으로 보아 이 제안이 그녀에게 있어선 뭔가를 후회하게 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지만 지금의 란델은 그녀에게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지금은 물어도 아무 것도 답하지 않을 것 같았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느 정도 짐작 가는 것도 있었으니까.
"아. 역시 그렇게 되는거야? 혼자 마을로 가도 상관없을텐데. 네가 가면 내가 높은 신분이라는 것이 들킬게 뻔하잖아. 하지만 네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기도 싫으니까 나도 고집 부리진 않을게."
그 부분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수용해야겠다고 란델은 생각했고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그녀를 바라보며 손을 가만히 내밀었다.
글쎄. 지금의 란델이라면 빌만한 소원은 역시 제국이 앞으로도 번성하는 것 그 정도가 아닐까 싶네. 물론 이야기가 진행되고 서사가 쌓이다보면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아. 두 번째 소원이라면 어릴 때 놀던 친구들이 모두 다시 한 번 그때처럼 모여서 노는 것을 바랄지도 모르겠어. 물론 그것은 절대로 이뤄지기 힘든 소원이겠지만..
어떻게든 모일 순 있겠지만 그때처럼 모여서 노는 것은 아무래도 힘드테니까? 일단 란델은 제 2 황자인만큼 다시 모인다고 해도 아무래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기도 할테니까. 그런 것은 란델이 그리 좋아하지 않거든. 물론 스스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렇게 보면 란델이 대등하게 지낼 수 있는 친구를 바라는 것처럼 보일텐데 그게 맞습니다. 물론 자신의 위치와 자리를 잘 알고 있기에 란델은 어느정도 포기한 상태야.
찌통은 아니야!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그러진 않거든! 그냥 약간의 욕심과 아쉬움? 딱 그런 느낌에 가까울 것 같아. 아무튼 그렇다보니 내심 헬레나를 만난 것을 기뻐하고 있고 반가워하고 있어. 물론 그때처럼 막연하게 지내긴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그냥 이렇게 다시 본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그런 것에 가깝다고 보면 돼.
황자님의 안전이 우선이라는 말에 란델은 살며시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서로의 입장은 그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은 황자이고, 상대는 기사였다. 황족과 귀족, 황자와 기사. 이렇게 구분지어 보여도 그녀는 당연히 해야 할 말을 하고 있는 것을 충분히 이해했으나 그럼에도 불만족스러움이 어느정도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허나 그 이상 말을 하지 않으며 알았다는 듯이 무언을 지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딱딱하게 할 필요는 없는데. 하지만 절차는 절차니까. 어쩔 수 없지. 내가 양보할게."
검을 받아들이며 란델은 헬레나의 어깨에 살며시 검날을 가져가며 가볍게 툭 쳤다. 이럴 때 자신의 형님은 어떻게 말을 했었는지 떠올리며 나름 근엄한 목소리로 진지하게 란델은 이야기했다.
"그대. 헬레나 스노우 하트. 이 제국의 제 2황자인 란델 리노이드 칼바니아가 명한다. 나의 기사가 되어 나의 검, 나의 방패가 되어 충성을 맹세하라."
딱히 누군가에게 보여줘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이것은 형식뿐인 절차. 이 절차를 끝마친 후, 직접 기사단장에게 가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그녀는 자신의 전속기사가 되는 것이었다. 정말로 간편하지만, 어쩌면 정말로 무거운 맹세를 고하면서 란델은 그녀의 말이 끝나는 것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