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혁은 이제 보니까, 저 사람의 표정에 어떤 악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체 왜 그러나 하고 표정을 봤는데, 순수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순수 악인가? 사이코패스가 그렇지 않은가, 살인이 왜 죄야? 왜 나쁜 거야? 왜 하면 안되는 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저 악의가 없는 표정이면 그럴 법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했다. 아무리 청월고교가 무슨 나이 60 먹은 노친네들마냥 꼰대만 만드는 공장이라 해도, 적어도 기본적인 인간성 자체는 다 좋았다. 청월고교의 모든 평가기준은 때론 악의적이라서, 누군가를 쳐내는 방향으로 작동한다고도 하니까. 하지만... 이 사람은, 이 행동을 행하는데 아무런 악의도 없어보였다.
소년은 같은 가디언이 될 인연이니 선배라고 칭하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었다. 더구나 저보다 한 살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어색하고, 살면서 누나라는 말은 한 번도 입에 담아본 적이 없어 도저히 입 밖에 낼 수 없는 단어이기에 선배 말고는 달리 부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허나 편하게 대해달라는 말에 부정을 할 수는 없어서 얌전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확실히는 모르겠다는 소녀의 말에 소년에게서 조금 아쉬워하는 눈빛이 드러난다. 때때로 기도를 드리는 것만으로도 기뻐하실 거라는 말은 깊이 와닿지 않았지만, 연락처를 알려준다는 말에 수줍게 시선을 내리며 가디언 칩이 들어있을 손목을 만지작거리고만 있다.
"종교에 관심이 생긴 건 아니지만, 성당이라면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지금 하루 선배와 대화하고 있는 것처럼요."하고 조용히 덧붙인 소년은 혹여 제가 종교인에게 실례가 되는 말을 하지는 않았는지 눈치를 살피듯 소녀를 흘금 바라보았다.
강찬혁은 너무나도 무해하게 대답하는 상대방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아니, 힐 건이면 힐 건이라고 이야기를 해야지 왜 저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길게 끌었단 말인가. 강찬혁은 답답해서 한숨을 쉬고, 총으로 오해했냐는 말에 당연히 총으로 오해할 만하다며 일장연설을 했다. 선도부도 여태까지 안 쫓아온 것을 보니 흥미를 잃고 도망간 모양이니, 뭔가 말할 시간은 충분했다.
"아니, 그렇게 생겼으면 다들 사람 죽이는 총이라 생각하지 누가 사람 살리는 총이라 생각하겠냐고. 진짜로 오해받기 싫었으면 저기 철공소 가서 돈 몇만원 주고 흰색 페인트 다시 칠해달라 그러고 거기서 빨간색 적십자 마크 달면 얼마나 좋아! 아오..."
강찬혁은 그 힐건에 호기심이 생겼다. 직접 보는건 처음인데, 뭐, 그건 됐고 한번 써보고 싶어서 물었다.
"그거... 한번 줘볼 수 있나? 책에서만 봤는데, 무게는 어떤지, 어떻게 쏘는 건지 궁금해가지고."
손과 손이 접촉한 순간, 호마레는 책에 정신이 팔려 인지하지 못했던 옆 사람의 모습을 확인한다. 처음 보는 얼굴인걸로 보아, 검술부는 아닌 검도부의 부원일 수도 있겠다고 유추하였다. 아마 검에 대한 지식을 좀 더 익히기위해서겠지. 검도부와 검술부의 그 근간은 검을 다루는 것에 있다. 어쨌든, 그가 자신처럼 이 책을 읽겠다는 목적을 가진 것은 확실했다. 타다는 남을 신경쓸 만큼 배려가 깊은 것도 아니였지만, 그렇다고 남을 매몰차게 대할만큼 이기적인 것도 아니였다. 그렇기에 그냥 책을 양보할까, 혹은 책을 먼저 읽도록 할까...
"...같이 읽을까요."
타다는 그저 아무렇지않게, 보통은 처음 만난 사람끼리는 제안하지않는 사항을 말하였다. 자신의 시간은 중요하고, 또한 상대방의 시간도 중요할테니, 생각난 수단이였다. 또 다시 생각한걸 바로 입밖으로 꺼내는 버릇이 작용한 것도 있지만...
하루는 오늘의 일과를 마무리 하고 숙소로 향하고 있었다. 이따가 학교 밖에 나가서 가벼운 산책이라도 즐길까 하는 가벼운 생각을 하고 있던 하루는 이내 어디선가 땅을 힘차게 내딛는 발소리가 들리는 것을 알아차리곤 눈이 조금 커진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 발소리. 그 발소리를 들은 하루는 천천히 뒤돌아선다. 역시나 하루의 금색 눈동자에는 맹렬히 달려오는 카사가 보였고, 하루는 방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 카사양. "
상냥하기 그지 없는 목소리로 하울링처럼 자신의 이름을 외치며 달려오는 카사를 바라본 하루는 부드럽게 이름을 부르더니 천천히 한손을 뻗는다. 새하얗고 자그마한 하루의 손바닥이 카사의 정면에 보일 즈음, 하루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간다.
" 착한 카사라면 제 말을 들어주겠죠? 자, 제 앞에서 멈추도록 해줄래요, 카사 양? 안 그러면 카사양을 쓰다듬어줄 수 없어요. "
약간은 곤란하다는 듯, 그러면서도 반갑다는 듯 미안함을 담은 듯한 목소리로 맹렬히 다가오는 카사에게 말을 던지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는 하루였다. 한없이 자애로운 듯 하면서, 어딘가 말을 어겨서는 안될 것 같은 분위기라는 점은 미묘했지만.
"힐 건이라... 그런데 이상하네? 내가 배우기로는, 힐 건 같이 의념을 이용해서 사용하는 무기는, 장전 같은 건 필요없다고 들었는데?"
이거 제대로 된 거 맞아? 강찬혁은 의심했다. 그가 알기로 힐 건이건 뭐건, 투사체를 발사하는 "총기" 형태의 무기는 장전이 필요없다고 들었다. 분명히 그럴 텐데, 생각보다 묵직하기도 했다. 강찬혁은 에릭과 힐 건을 번갈아보다가, 자신의 무릎에 대보았다. 뭐, 어차피 강찬혁은 서포터가 아니라 워리어니까 소용이 없을 테지만 한번 궁금해서 쏴보고는 싶었다. 하지만 강찬혁의 의심이 미처 닿지 못한 곳이 있었으니... 어쩌면 그 총이 실총일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탕!
"끄아아아아악!!!!"
다행히도 대충 조준하고 쐈던지라 총탄은 강찬혁의 무릎을 스쳐갔다. 하지만 스치기만 해도 바지와 살갗이 찢어진 것을 보고 강찬혁은 알 수 있었다. 이건 실탄총이었다. 강찬혁은 벌벌 떨면서 에릭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맹렬한 사자후(?)에 뒤돌아 보는 하루의 모습을 발견한 카사는 활짝 웃는다. 하루다! 하루! 카사는 하루가 좋았다! 상냥하고, 예쁘고, 친절하고, 예쁘고, 많은 것을 안다! 그리고 예쁘다! 하루는 이 온통 새하얀 소녀가 좋았다! 그 좋아함을 온몸으로 표출하려 하루에게 파운싱을 하려하지만...
끼이익.
멈추는 소리가 요란하지만 완벽히 하루의 코앞에 착지한다.
나보고 착하다고 했어! 카사는 웃어주는 하루가 좋았다. 하루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고 싶었다! 주섬주섬, 네발로 착지한 상태에서 일어난다. 일어나도 하루보다는 머리 하나 더 작았으니까. 그러는 도중에 흙이 묻어 더러워진 양 손바닥을 바라보다 머쓱하게 옷에 쓱쓱 문질러 닦고, 의기양양하게 하루를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본다. 꼬리가 있다면 반가움에 맹렬히 흔드는 것이 보일테다. 쓰다듬기 쉽게, 약간 고개를 아래로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하루는 순무의 말에 좋은 생각이라는 듯 좀 더 밝아진 미소를 지어보인다. 자신이 애정하는 주에게 기도를 올릴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을 하루가 마다할 리 없었다. 좀 더 이세상의 사람들이 주의 애정을 알 수 있다면 좋을텐데, 하는 것은 언제나의 바램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루는 순무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는지 천천히 새하얀 손목을 내민다.
그 손목은 한없이 가늘어서 그녀가 꽤나 가냘픈 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
" 학교에 출입하는 것이 가능한지는 제가 금방 알아봐드릴게요. "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하루는 그렇게 말하며 상냥한 눈웃음을 더한다. 자신과 기도를 함께 올릴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신도 기뻐하실 것이다. 게다가 그로 인해 순무의 삶에 행복함이 솟아난다면 더욱 더 마다할 리 없는 하루였다.
자신의 말을 듣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멈춰서는 카사를 금빛 눈동자가 따스하게 바라본다. 코 앞에 착지한 카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흙먼지가 묻은 손을 옷에 문질러 닦는 것을 지켜보던 하루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신을 향해 맹렬하게 쓰다듬어달라는 시선을 보내고 있는 카사를 바라보던 하루의 분홍빛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 카사 양, 그렇게 옷에 손을 닦으면 옷이 더러워져요. 카사양처럼 예쁜 사람이 더러워진 옷을 입고 다니면 안되잖아요? "
'미모가 아까워져요' 하고 상냥하게 말을 건낸 하루는 주머니에서 새하얀 손수건을 꺼낸다. 머리를 쓰다듬는 것은 조금 있다가 해주겠다는 듯, 능숙한 손놀림으로 손수건이 더러워지는 것도 신경쓰지 않고 살살 카사의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준다. 옷이 깔끔해졌을 때엔 상냥하게 카사의 손도 감싸서 흙먼지를 닦아내주고 나서야 하루는 부드럽게 카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기 시작한다.
" 좋은 하루 보냈어요, 카사? 오늘은 학교에서 못 본 것 같은데.. 날이 좋은 것을 보니 햇살이 좋은 곳에서 잠이라도 잤을까요? "
하루는 카사의 하루가 궁금하다는 듯 차분한 목소리였다. 처음에는 정수리 부근을 매만져주던 손길은 천천히 카사의 머리카락을 타고 옆머리로 향하다, 가볍게 카사의 뺨에 내려앉는다.
"아, 제대로 인사도 안 했었네요. 카사양, 안녕하세요, 그리고 보고 싶었답니다. "
카사의 눈동자에 화사하게 밝은 미소를 짓는 하루의 얼굴이 가려짐 없이 온전히 새겨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