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소녀의 상냥한 조언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삼촌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쉬엄쉬엄해라"라는 말보다 처음 보는 소녀의 진심 어린 충고가 더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이다. 소녀는 어쩜 그리도 말을 예쁘게 하는지, 부드러운 미소와 더불어 급급한 마음을 포근하게 다독여준다.
"네. 의욕만 앞섰어요. 조언 고맙습니다."
소년은 아직 진로도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은 새내기까지 일일이 챙김 받을 여유가 없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마음 둘 곳이 없어 더욱 자신을 몰아붙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주제넘었다뇨. 저도 이런 말을 해줄 사람이 하나쯤 있었으면 했어요."
낯간지러운 줄도 모르고 소녀의 말을 그대로 되돌려준 소년은 뒤늦게 뺨을 붉히며 소녀에게서 시선을 떼어놓았다. 혼을 빼고 있으면 잘도 이런 말을 할 수가 있구나 싶다.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빈말은 아니었음이다.
"저는 이번에 청월에 입학한 순무라고 해요."
소년은 좀 전에 괜한 말을 했지 싶어서 발끝으로 애먼 모래바닥을 툭툭 차며 다시금 소녀를 바라보았다. 개량된 수녀복 차림이 소녀가 성학교 학생인 것을 짐작게 만들었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 모습이 참 곱살스럽다.
그래. 인생이란 PC방으로 위장한 불법 도박장에서 벌이는 카드노름과도 같은 것이다. 이 세상은 거대한 노름판이요, 이 노름판에 목숨이라는 판돈을 걸고 수많은 사람들이 뛰어다닌다. 그리고 그 노름판에서 이기는 건 노름판에 돗자리 깔아주고 노름판 수수료 받아먹는 카지노 사장 내지는 도박장 물주듯... 세상은 그런 이들이 항상 이기고, 가끔 반짝하고 따가는 이들마저도 결국은 삼켜진다...
갑자기 강찬혁이 옛날 싸이월드에서도 안 먹혔을 감성글스러운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가 일상적으로 하던 도박이 크게 실패해 목숨이라는 판돈을 영원히 잃을 뻔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판돈을 보전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타격이 뼈아팠다. 아니, 뼈아픈 정도가 아니라 뼈가 부서졌다.... 그렇다. 강찬혁은 담을 넘다가 다리 한 쪽이 부서졌다. 그것도 하필 청월고교 선도부에게 걸려서 도망치다가 굴러떨어진 터라 빨리 일어나야 했다.
"아오, 이놈의 피자빵 때문에..."
강찬혁은 피자빵을 입에 물고,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야구방망이를 부러진 다리에 대고, 가죽 조끼를 벗어 묵었다. 그래도 부족하자, 강찬혁은 가디언의 힘으로 담 밑에 걸려있던 청월고교의 '최고 중의 최고만 뽑는 엘리트의 궁전 청월고등학교'라는 현수막을 찢어서 자신의 다리를 동여맸다. 무려 방망이를 부목 삼아 도망가던 강찬혁은, 채 50m도 뛰지 못하고 청월고교의 한 학생과 마주쳤다.
자신의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순무를 바라본다.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것에 있어 수긍을 하는 것만으로도 반 이상 성공했다고 봐도 좋을테니, 하루는 그 이상으로 순무에게 무어라 말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은 그저 주변을 돌아보게 할 뿐이라고. 이 이상은 순무가 알아서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 그렇게 좋게 받아들여주면 저도 기쁘네요. "
하루는 순무의 말에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어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무언가에 떠밀리듯 달려가는 사람은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기 마련이니까, 하루는 그저 주변을 둘러볼 구실을 순무에게 주고 싶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줄 수 있는 도움으로는 그것이 최선일테니까.
" 청월고... 요즘 들어 청월고 분들을 자주 뵙는 것 같네요. 저는 성학교의 하루라고 합니다. 순무 군보다는 1년 먼저 학원섬에 왔답니다. "
하루는 자신을 밝히는 순무의 소개에 입을 가리고 웃던 손을 살짝 내려선 두 손으로 수녀복을 살며시 잡아 예의바른 자세를 취하며 가볍게 인사를 해보인다. 누군가와 서로가 누구인지 밝히는 것은 좀 더 대화를 한결 편하게 만들어 줄테니까.
" 학원섬에 온 신입생 분들은 원래 처음에는 다들 무언가를 해내고 싶어서 애쓰곤 하죠. 저도 그랬었고, 다른 분들도 그랬고, 지금 이시간에도 다른 누군가가 그렇게 하고 있을거에요. 하지만.. 자기 자신을 재촉하고 닥달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이뤄지는 법은 아니니까요. 저희가 달려야 할 시간은 저희 생각보다도 한없이 긴데.. 눈 앞의 것을 위해 혹사하면 미래의 추진력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답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쉴 시간을 갖는 순무군이 잘 하고 있는거에요' 라고 하루는 덧붙여 말하며 방긋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강찬혁은 박살난 다리를 끌고 가기로 했다. 다행히도 강찬혁을 포위하려고 바깥으로 미리 나가있던 선도부원은 아닌 모양이다. 자꾸 현수막에 눈이 가는 모습이 좀 수상하긴 하지만, 진짜 선도부원이었다면 강찬혁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잡혀서 청월고로 끌려갔을테고, 그 곳에서 부러진 다리를 마취제도 없이 강제로 맞추고, 다리가 박살났으니 엉덩이 대신 상체로 몽둥이를 맞는 연습을 당했으리라. 하지만 그러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냥 평범한 청월고교 사람인 모양이었다. 지난번에 만났던 청월고교 사람도 그렇고, 요즘 들어 중요한 순간에 운이 좋은 모양이었다.
옆으로 슬쩍 비껴가려던 강찬혁은, 이 다리로는 몇 분도 못 가서 잡힐 것 같았다. 그래서 이곳 지리에 밝은 그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혹시 이 주변에 가까운 택시 정류장 없나요?"
택시를 탄다면 돈은 좀 깨지겠지만 선도부는 확실히 따돌릴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자전거를 타고 도망치려 한다면 그 자전거채로 박살내겠지만, 택시를 탄다면 그럴 수 없었다. 택시를 억지로 멈추려 하면 택시기사가 영업방해로 민원을 넣을 것이고, 만약에 택시를 박살낸다면 가디언이 기물파괴를 했다는 소문이 동네방네 퍼져 그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엘리트"의 길은 영원히 끝장날 테니까. 강찬혁은 간절하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