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호칭에 지훈은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지아를 내려다보았다. 이젠 키차이가 꽤나 난다 싶었던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특별한 일은 없었는지 등등 물어보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막상 질문하려고 하니 말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무슨 말을 건네지. 한참이나 -사실 몇초 지나지도 않았지만- 고민한 끝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 때보다 키는 조금 더 작아진 걸지도 모르겠네. "
반가운 마음에 괜히 놀리듯 중얼거렸다. 옛날에도 자주 이런 식으로 장난쳤었지. 그땐 지아가 어떻게 반응했더라? 너무 오래된 기억인지 잘 떠오르지 않았던가. 곧 지아가 보일 반응으로 떠올렸겠지만.
식당가. 그리고 카사. 이 둘은 떼어낼랴 떼어낼수 없는 조합. 원래 야생의 짐승, 아니, 집에서 키우는 것들을 봐도 그렇다. 배를 채우고 채우고 밥을 이미 먹어도 하루종일 굷은 양 주인에게 떼쓰는 존재! 카사도 그런 숭고한 본능을 이어 받을 수 뿐.
꼬르륵...
그러니까 이건 카사의 잘못이 없었다.
식당가 의 한 구석. 북적이는 거리와 다르게 인파는 한 곳에게 적절선을 무시하며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 한거리의 동그라미 중심에는 카사, 그리고 카사가 쨕 달라붙은 한 식당의 표지판이 있었다.
[무한리필 고기 뷔페 - 배터질 만큼 먹자! 2인용 특별 세트!]
가지고 있는 GP는 부족하다. 일인용 뷔페로 쓰기에는 부족하다! 저 2인용 세트를 따~악 반으로 나누면 될텐데! 표지판 뒤에는 이미 맛있게 고기로 배를 채우는 사람들이 보여, 억울함에 매운 눈물이 날꺼 같다. 딱 한명, 같이 먹을 딱 한명이라도 더 있었다면! 처철하게 물기어린 눈과 더욱 더 물기어린(?) 입에 그 생각은 주위 모두에게 드러났다. 여기서 나쁜 소식. 신입생으로서 카사의 가디언 칩 연락부는 텅텅 빈것이나 다름없다. 지원요청은 없. 허나 여기서 좋은 소식! 수미터 떨어진 곳에서 같은 목적으로 걸어가는 학생이 한명있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기적, 운명의 공동체라 불릴 만한 기적!
이미 늦었고, 뽑은 당사자는 이 음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사람에게 트라우마를 줄 정도라는 위험성을 모른 채 소우는 자신의 앞에서 제대로 대답은 못하고 말을 흐리는 이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뭐지? 하는 생각으로 제 뒷머리를 긁적이던 소우는 일단 뽑은 건 뽑은 거니까 마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묘하게 수상해보이는 모습의 사내가 말을 덧붙이기 전에 캔을 땄다. 틱! 하는 캔음료 특유의 소리가 경쾌했다. 이 음료는 폭탄이라는 말이 들린 건 그 후였다.
네? 폭탄이요? 빨간 눈을 깜빡이며 사내를 보며 되물은 소우는 손에 들려있는 음료를 가만히 보았다. 일단 딸 때 폭팔하지 않았고, 애초에 이 학원도에 폭탄 테러를 할 만큼 간 큰 바보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무엇보다.. 자판기 속 음료수가 폭탄이라니. 의념기 같은 거라면 모를까.. ..생각해보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 소우는 꽤 고심했다. 거기다 그 말을 한 사람의 모습이 꽤 수상했다. 5초 정도는.
"...흐으으응." 하고, 묘하게 웃은 소우는 사내가 손을 뻗기 전에 캔을 입가에 가져갔다. 그리고 음료수를 입에 한 모금 머금고, 꿀꺽 삼켰다. 말리기엔 이미 늦은 이 행동의 결과는 곧 소우의 격한 기침과 기침과 기침으로 나타났다.
"케헥 크 콜록! 아 뭐야이ㄱ, 커허.."
그리고 제 입가를 쓱 문지른 소우는 곧 살짝 눈물이 맷힌 얼굴로 웃었다.
"아 뭐야, 이래서 말린 거였어요? 누구신진 모르겠지만 형은 좋은 사람인가봐요! 아 근데 진짜 맛 없다 이거."
무척이나 맛 없는, 이 학원도에서 지뢰 음료수로 유명한 것을 마시고도 소우는 꽤 쾌활한 웃음을 짓고, 경쾌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맛있어 하는 건 아니었지만, 재밌어하고 있었다.
한 꼬마가 나에게 물었다. 지독하리만큼 순수한 미소로 당신은 최고의 마법사가 맞냐고 물었다.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꼬마의 말들은 그만큼 우스운 이야기였다. 예를 들어 게이트에서 돌이 튀어나왔단 일을 게이트가 열리며 토룡의 숨이라도 내뱉어진 것처럼 말하곤 했다. 그러다가도 들키면 제 편한 미소를 지으며 헤실거리는 것이 영락없는 버릇 나쁜 꼬맹이었다. 하루는 그러던 녀석이 나에게 와서 얘길 했다. 왜. 세상은 이럴까요? 하고 저딴에 어울리지 않는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꼬마에게 물었다. 왜? 하는 짧은 단어였다. 꼬마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부모가 게이트 사건에 휘말려 돌아가셨단 사실. 자신의 할아버지는 가라앉은 일본에서 돌아가셨단 사실. 그리고 자신은 가족 없는 고아하는 사실까지도. 그 말들을 들었을 때 문득 분노가 치밀었다. 이런 어린 꼬마가 그리워하는 것마저 할 수 없는 사람이 무엇이 최고의 마법사냐고 말야.
" 꼬마야. " " 응. 마법사 누나. " " 다섯 밤을 지내고 나서 어른들이 들려주는 라디오 소리를 들으러 가렴. 내가 너를 위한 선물을 준비해줄게. "
나는 날았다. 단지 영웅같은 허울 좋은 이름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단지 나는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강박감에 휩쓸렸다. 마법을 입에 올린다. 주문의 단어들이 혀를 지나고, 수많은 속성과 개념이 손끝에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세계가 울리고 있었다.
" 영웅이 되기로 했어. "
그 지독하리만치 오만한 대답에 정체 모를 누군가가 물었다.
" 왜? "
그 의문에 내가 답했다.
" 단지 내가 그러기로 결정했을 뿐이야. "
그 대답을 끝으로 긴 바다는 숨을 토해냈다. 일본. 한때 저 바다 아래로 사라진 섬은 기나긴 잠에서 깨어 지축을 흔들며, 긴 기지개를 폈다.
" 누군가가 나에 대해 묻거든 그렇게 답하도록 하라 하여라. 나는 모든 마도의 정점이자 모든 마법의 주인이니. 내 이름은 마왕 서유하. 새로운 영웅이다. " - 마왕 서유하.
가디언 지망이라는 말을 듣고도 별 다른 대답이 없는 상대를 준서는 다시금 음식들을 누가 쫓아오기라도 한다는 양 급하게 목구멍으로 넘기며 흘끔거렸다, 역시 아직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이건가? 하기야. 한번 깃든 의심을 푸는 일이 어렵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제가 잘 경험한 일이기도 했으니 굳이 채근은 하지 않으리라. 그렇다고는 해도 이름을 넘기고 친구가 되지 못하는 일은 없게 만들테지만, 준서는 슬슬 비어가는 식판을 한번 내려보다 문득 들려오는 대답에 잠깐 흐음. 짧게 소리를 내었다.
그 말이 지극히 옳은 말이기야 했으니, 상식적인 대응에 되려 말문이 막힌 모습으로 잠깐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입을 연다.
크게 배곯는 소리를 내고서 발그레하게 얼굴을 붉히며 머쓱하게 두리번거리던 소년은 한 식당 앞에 서있는 제 또래로 보이는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 소녀에게서 묘하게 동질감이 느껴져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심코 그녀 쪽으로 걸어가는 소년. 소녀 앞에는 [무한리필 고기 뷔페 - 배터질 만큼 먹자! 2인용 특별 세트!]라는 표지판이. 혼자라는 사실이 더욱 섧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무한리필...? 정말 고기를 끝없이 먹을 수 있는 거야?"
무한리필이라는 것이 생소한 소년은 무심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혼자 식당에 들어가는 것도 어려워하는 소년인데, 명백히 2인용이라는 표지가 소년을 더욱 절망으로 빠뜨렸다. 소년은 주린 배를 부여잡고 한 손으로 식당 벽을 짚으며 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수그렸다.
'꼬르륵...'
눈치 없는 뱃속은 또 밥을 달라고 신경질을 부린다. 소년은 그제서야 이 소녀가 식당 앞에 서있는 이유를 알아차렸고, 혹시 하는 생각으로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하기 전에 따버린 것도 모자라서 불길한 웃음까지. 아, 이거 늦었네요. 라고 생각할 때쯤 소우가 음료수를 마셔버렸다. 그리고 그 반응은 생각보다 약하긴 하지만, 아무튼 맛있다고 느끼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이런. 나이젤이 후드집업의 지퍼를 내리고 교복 안쪽 주머니에 넣어놓은 티슈를 꺼낸 다음 소우에게 건넸다. 그리고 소우가 진정할 동안 자판기에 가서 입가심이라도 시키게 무난하게 호불호 없는 음료수 버튼을 눌렀다.
"...저기, 당신은 1학년이죠?"
그래도 상태가 나빠 보이진 않아서 안심이다. 이거나 먹이고 돌려보내야지, 하고 생각하며 나이젤이 자판기 출구를 확인하자 똑같은 음료수가 두 개 나와 있었다. 자동결제를 설정해 놓으면 이런 게 문제라니까요... 라고 중얼거리며 하는수없이 소우에게 하나를 건네주고 하나는 나이젤이 마시기로 했다. 캔을 딴 나이젤은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꺼냈다.
"저는 아카데미 4학년, 나이젤 그람이라고 해요. 교복을 보다시피, 제노시아 교 소속이고요. 방금 마신 건... '이 섬 최대의 지뢰'로 불리는 악명 높은 음료수에요. 1학년이냐고 물은 것도, 이미 알고 있는 다른 학년들은 안 먹으니까에요."
평소에 표정이 거의 변하지 않는 나이젤이 말하면서 미미하게 표정을 흐트러트렸다.
"맛없었죠? 그나마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긴 하지만, 이거 마시고 트라우마 생긴 학생도 있었어요. 그렇다보니 후배가 이거 뽑으려고 하면 선배가 말리는 게 전통이라서... 딱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