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젤은 조각품 위에 쌓인 나무조각을 불어서 털어내다가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오늘따라 영 집중이 되지 않는다. 이럴 때 힘들여 조각을 해봤자 잘못 깎아내거나 제 손만 베이기 일쑤다. 조금 밖에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는 게 좋을까. 작업복을 교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후드집업을 한 겹 더 껴입고 후드를 깊숙히 눌러쓴 채로 상점가로 나갔다.
익숙한 얼굴보다 모르는 얼굴이 더 많이 보인다. 아마, 1학년들일까. 나이젤은 자기 1학년 때를 떠올리며 칙칙한 추억에 젖었다. 자신도 저렇게 활기찬 모습으로 길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지만. 나이젤은 칩 기능을 몰라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몇 명의 학생들을 도와주면서 무작정 길을 돌아다녔다. 조금 뒤, 몸이 지칠 일은 없었지만 피곤하고 목도 말라왔기에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근처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으려고 했다. 그래서, 바로 옆에서 먼저 일어나 자판기 앞에 선 소우의 뒤쪽에 설 수 있었다.
"...!"
그 순간 눈에 보인 것은 가벼운 태도로 '그것'을 뽑으려는 소우였다. 아니, 왜 하필 골라도 그걸? 알고도 마시려는 거든, 모르고 마시려는 거든 말려야 한다! 멋모르고 1학년 때 호기심으로 '그것'을 뽑았던 기억이 추억을 깨부수고 떠오른 나이젤은 피곤함과 겹쳐 순간 이성이 마비되어 버렸다.
"그게 뭔지 알고 마시려는 거야...?!"
평소 입에 달고 살았던 예의조차 잃은 나이젤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소우를 말리려 이쪽 좀 돌아보란 뜻으로 어깨를 건드렸지만... 나이젤은 소우의 뒤쪽에 있고, 소우는 버튼을 누르려고 하고 있었다. 즉, 까딱하면 버튼이 눌려서 '그것'이 나와버릴 상황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지훈은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방파제에 부딪히는 파도소리, 그리고 바다에서 풍겨오는 짠 냄새. 그리운 감각이었지. 고향에서는 바닷가나 파도를 자주 구경하면서 놀았으니까. 다들 지금쯤이면 뭐 하고 지내려나, 라고 생각하기도 잠시, 그는 원래 이곳에 온 목적대로 항구에서 유명한 음식점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고향에서 함께 놀던 또래중에 기억에 남는 친구도 있었던가. 부모님의 명성도 명성도 명성이었지만, 그 성격 때문에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분명 이름이...
" ...아. "
벌러덩 누워있는 소녀를 발견한 지훈은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말없이 누워있는 소녀에게 점점 다가오던 지훈은 소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그제서야 무언가 제대로 된 말을 꺼냈다.
자리에 앉자마자 물을 한 컵 부어 마셨다. 사실 누가 앉아 있다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제 앉는 것이 우선이던 소년에게 제대로 들어올리가, 뒤늦게서야 인사를 건넨 것도 나름 이 아카데미에서 무언가를 배운 덕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말 없이 앉아서 말 없이 먹다가 말 없이 일어서서 훅 가버렸겠지. 실은 그 편이 편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대뜸 꺼낸 인사여서 그랬던지 별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저 묵묵하게 밥을 먹고 있던 소녀를 내려보던 소년이 저도 식기를 집어 크게 한 술 떠 입에 밀어 넣기 시작한다. 이 섬에 들어와서 처음 제대로 실감을 한 것은 모든 시설이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좋다는 것 정도였을까. 그래서 가끔은 자고 일어나면 모두 꿈이 아닐까 싶은 상상을 할 정도였다. 근데 지금은 아니다, 지난 번 이사장실을 찾아갔을 때 살기 하나만으로 기절하는 충격적인 경험 이후에 그런 사소한 걱정을 하고 있을 틈이 없어졌으니. 그러고 보니 강해지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 의뢰? 혼자 가면 더 많은 것을 배우겠지만 돌아오지 못한다면 말짱 꽝이다. 그래서 친구를 사귀라고 했던건가? 아, 그렇다면야.
한참 식기가 식판에 부딪히는 옅은 쇠소리만 들리던 가운데에, 대뜸 소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야."
친구가 되기 위해서 이름부터 물어보는게 맞던가? 잠시 식기를 멈추고 당신을 빤히 바라본다.
보통, 자판기 버튼은 누르려는 시점에서 바꾸려면 늦는다. 안타깝게도 이 금발머리 앳된 소년이 그러했다. 이 자판기 안에 들어있던 음료 절반 이상이 그렇듯 정체모를 음료를, 소우는 갈색머리의 녹색 눈이라는, 초목과 부드러움이 연상되는 색체의 사람이 말리기 전에 뽑아 버렸다. 버튼이 기계 안쪽으로 눌리고, 곧 덜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나왔다. 그걸 꺼낼 생각도 못하고 소우는 그저 멍하게 자신의 어깨를 건드린 그를 바라보았다.
"어, 이거 뭔가 나쁜 건가요?"
누군진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보다 선배일 것 같다. 소우는 자신보다 정확히 17cm 더 큰 사람을 올려다보며 꽤나 예의바르게, 그러면서 너무 딱딱하지는 않게 물어보았다. 그러면서 조심조심 몸을 숙여 자판기 구멍에 있는 음료를 꺼내들었다. 적당하게 차가운 기운이 남아있어 손바닥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이 음료를 손에 들고 소우는 상대를 보았다.
"맛 없어요? 이거?"
화려하면 100중의 90 정도는 독이 있는 버섯과 다르게, 딱 봐도 알 수 없는 음료수 캔을 소우가 살짝 흔들었다. 독은 없지만, 맛도 없다.
제가 물어본 지 얼마나 지났다고 다시금 식기에 손이 간다, 식사 예절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이 급하게 음식을 볼이 미어져라 밀어 넣던 소년이 문득 고개를 들어봤다. 안가르쳐줄거야? 묻는 듯 두 뺨은 음식으로 불룩하게 튀어 나온 주제에 한동안 바라보다 이어지는 대답에 잠깐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여봤다. 헌팅? 근데, 헌팅이 뭐지? 분명히 수업 시간에 헌터와 가디언의 차이는 배웠던 것 같은데. 왜 사냥을 한다고 생각을 하는거지? 나를 경계하고 있는건가? 이 섬에서도 이미 헌터가 침입한 전적이 있었던건가? 보안이 그렇게 허술한가? 기본적인 상식이 결여된 인간이 다른 전문적인 분야의 지식을 잘 알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몸소 보여주는 고민 끝에 소년이 음식을 꿀꺽 넘기며 물을 한 컵 들이켰다.
"헌터가 아니라 가디언 지망. 그래서 이름이?"
정말 안가르쳐 줄거야? 제가 독설을 들었다는 것도 인지를 못한 소년이 끈덕지게 재차 물어온다.
비록 시간이 많이 지나서 목소리도 변했고 키라던가 변한 것이 많지만, 사람의 감과 기억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잊혀질 리가 없었다. 지아는 본능적으로 말을 걸어온 누군가가 어릴 적에 헤어진 그리운 동향사람이라는 것은 본능적으로도 알만한 일이었다.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본 지아는, 잊을 리 없는 이름을 가진, 자기보다 머리 하나보다 더 커져버린 그를 불렀다.
"지훈오빠? 지훈오빠!"
잊을리가 없었다. 유년시절, 부모님이 출근하고 퇴근해서 돌아올 때 까지 거의 매일같이 따라다녔던, 가족이나 다름 없었던 사람을 잊을리가.
'꼬르르륵...' 뱃골이 밥을 넣으라고 신호를 보내온다. 교내 식당에서 밥을 아무리 많이 받아먹어도 육체 단련부 활동에서 소비하는 열량을 도저히 따라오지 못한다. 소년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근처의 식당가를 찾았다. 용돈도 점점 떨어져가는 마당에 식비가 부담스러워 값싸고 양이 푸짐한 음식점을 찾아야만 했다.
소년은 홀로 식당가를 거닐었다. 북적이는 식당가의 분위기는 소년이 혼자 식당에 들어가기 부담스럽게 만들었고,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것은 아직 어린 소년에게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같이 밥 먹을 친구라도 사귀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외로움과 아쉬움이 밀려온다.
'꼬르르륵...!' 다시 한번 뱃골이 크게 울린다. 소년은 누가 듣기라도 했을까 얼굴을 붉히곤 괜히 교복 자락을 털어내는 시늉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가...가디언 지망....이 아니라. 물론 사전적인 의미의 헌팅은 새나 짐승따위를 포획하는 일 따위를 말하긴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보통 처음 보는 사람에게 교제를 목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헌팅'이라 하지않던가? ..어찌됬든간에, 남성은 자신에게 헌팅을 목적으로 말을 건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가디언 지망이라는 것은 말하지않아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면 단순히 이름을 묻는 이유를 생각하자면...모르겠다. 어떠한 이유로 인해서 만난 것도 아닌데,
"이름을 물어본 쪽이 먼저 알려줘야 하는 건 아닐까요."
하는 수 없이 타다는 상식적으로 대응하기로 하였다. 이유를 찾는 것은 자신의 머리만 아파오는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덜커덩. 자판기에 동전을 넣어 값을 미리 지불한 다음 버튼을 눌러서 원하는 음료수를 주문하는 과정을 거친 후 들리는, 줄여서, 구매 완료를 나타내는 소리. 아, 안 돼...! 이미 뽑았잖아! 뽑기 전이라면 몰라도 이미 뽑아버린 후라면, 환불도 안 되는 거 그 맛없다는 음료수 맛이나 보자... 라는 마음으로 마시려고 하는 게 사람 마음. 그리고 대체 왜인지 몰라도 이 음료수가 무척 맛있다고 느끼는 소수의 입맛을 제외하고, 이 음료수의 맛은 이미 트라우마급이다. 그런 걸 왜 자판기에 넣어 놓은 건진 모르겠지만.
"어......"
나이젤은 이거 나쁘냐는 순수한 질문에 점을 여섯 개나 찍으며 말을 흐렸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죠. 도와줘요 문과뇌! 하지만 나이젤은 이과라서 실패했다. 공돌이의 폐해. 맛없으니까 먹지 말라는 말로는 설득력이 없을 거라는 것만 머릿속에 남았다. 그렇게 밖으로 나간 말은...
"그, 그건 폭탄이야!"
맛이 폭탄급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예민한 사람은 마신 다음에 속이 느글거리다가 폭발(?) 혹은 분출(?) 등의 부작용을 느낄 수 있으니 정말 틀린 말은 아니다. 급하게 오느라 벗겨진 후드를 다시 눌러써 수상해 보이는데다 뭔가 조급한 말투를 쓰고 있는 나이젤의 모습은 폭탄(?)이라는 거짓말에 조금, 조오오오 금... 설득력을 더해줄 만한 모습이기도 했고.
"그, 그러니까... 마시면 안 될지도..."
아니, 설득력이 떨어지는 말투가 되어버렸다.. 아무튼 나이젤은 선의의 거짓말을 완성하기 위해 자기보다 17cm 작은 소우의 손에 들린 음료수를 가져가려고 손을 뻗었다. 이대로는 뺏는 것 같아 보이니까 적어도 음료수값은 줘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 따윈 이미 머릿속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