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음 그렇군! 그쪽으로 시스템이 발달해 있다면 해월이는 원래 형이랑 고아원에서 살다가 형이 고등부 입학하고 독립했다는 쪽으로 가도 될 것 같고? 너무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건 아닐지 고민은 되지만 또 생각해 보면 나이상 해월이는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아예 없을 테니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
그래도 될 것 같아요! 정작 사찬이랑 해월이는 둘 다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없어서 별로 신경 안 쓸 것 같고… 애초에 현대보단 고아인 아이들이 흔해서, 그다지 둘 다 의미 안 둘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만 본인도 어린데 12살 차이나는 동생을 챙기는 게 아주 쉬운 일은 아니었을텐데 선배가 대단해… 나이 상 선배는 부모님의 기억도 있을테니까요…
으음.. 나이 차이상 같이 동아리 활동을 하기엔 쪼끔 무리가 있을 것 같으니까 해월이가 부실로 놀러왔다는 설정 어때? 아무래도 유일한 보호자가 형이다 보니까 부실에서 형 수업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책도 읽고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그러면서 사찬이랑도 친해지는 그런 식으로🤗
말투는 언제든지 부담갖지 말고 편하게 바꿔도 괜찮아XD 그럼 시간이 늦었으니 난 이만 자러 들어가볼게! 사찬주도 굿밤해😄
말투는ㅋㅋㅠㅠ 아마 계속 까먹고 왔다갔다 할 것 같아요… 갑자기 존대랑 반말 섞어서 레스 단위로 왔다갔다해도 그러려니 해줘요()
아 나도 부활동 자체를 같이 했다기보다는 그냥 그 부실이라는 공간에 같이 있었다는 의미로 말한 거에요! 중간에 수정한다는 걸 잊었네요. 평일은 그렇다쳐도 주말엔 역시 봐줄 사람이 없으니, 있을 곳을 만들어놓은 느낌…? 사찬이는 엄청 살가운 타입은 아니니까 잘 놀아준다기보다는 그냥 같이 앉아서 책도 읽고 읽어주고 그러다가… 중간에 별명도 정하고… 약간 그런 식으로 어린 시절을 함께 한 기억이 남아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설정… 음… 그러고보니 일상 도입부는 어느쯤으로 할 건가요? 처음에는 바로 편지에 이어서 할까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둘 다 같이 다니기 시작한 후로 몇주 후, 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너무 늘어져도 곤란하니까.
그래서 말인데, 사찬이는 내심 해월이랑 계속 쭉 같이 다닐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왜냐하면 도보여행이라는 건 낭만적이기보다도 꽤 고생스러운 일이니까, 그리고 봄 이후에는 경로가 이미 정해져 있고 그냥 자유롭게 보고싶은 걸 보러 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으니까 해월이가 따라온다고 할지 확신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봄이 되기 전 이번 겨울에는 해월이랑 같이 다닐 목적으로 자동차 같은 이동수단을 구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만약 해월이가 같이 가겠다고 하면 이동속도를 늦출 생각도 있다… 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쓰다보니 구구절절해졌네요.
그러니까, 1. 일상의 도입시점을 어느정도 안정기로 할까요, 아니면 바로 이어서 할까요? 2. 겨울 동안은 편지에 썼던 것처럼 유빙이나, 마을들을 보거나, 어쩌면 다시 기차를 타면서 같이 여행할 것 같은데 사찬이에게 일정이 있는 봄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으음.. 난 일단 마지막 편지를 읽고 만나러 가는 걸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찬주 말을 듣고 보니 늘어질 위험도 있는것같고🤔 일단 난 바로 이어서 하는 거에 한 표! ٩( ᐛ )و 해월이는 아마 사찬이랑 같이 다니고 싶어할 것 같아. 애초부터 그러려고 만나자고 한 거기도 하고, 쉽지만은 않을 거라는 것도 이미 예상하고 있으니까. 해월이라면 아마 조금 고생스럽더라도 같이 다니는 쪽을 선택할 것 같네! 물론 중간에 부득이하게 갈라진다면 한동안은 다시 메일로 연락하는 방식을 취해도 좋고 말이야.
좋아요 좋아요! 그러면 첫일상은 편지 바로 이어서 카페에서 만나면서 시작하고, 모스크바 구경하다가 봄 이후 일정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확인한다- 는 흐름으로 가면 어떨까요? 좀 더 붙이면 이동수단 관련 내용까지 넣을 수 있을지도… 계획은 계획일 뿐이니까 중간에 방향성 틀고 싶으면 마음대로 틀어주세요^^v 중간에 잠시 갈라지는 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사찬이가 좀 돌아서 들러가야 할 마을이 있어서, 라던가… 해월이가 이유를 만들어도 좋고요!
봐두었던 카페는 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았고, 적당히 조용했다. 아니, 아직 오전이라서 그런 걸 수도 있지. 오후가 되면 사람들이 늘어날테니. 조금 이른 아침에 깨어나 미리 출력소에 들린 덕에, 종이봉투가 손 안에서 바스락거린다. 창가 자리가 나을 것이었다. 올 사람을 지켜보기엔. 광장 쪽에서 올까? 커피에 값을 지불하고, 자리에 앉는다. 따뜻한 커피를 한입 마시고, 잠시 창밖을 바라본다. 눈 쌓인 모스크바는 옅은 회색을 덮어씌운 것처럼 보인다. 그 풍경을 남기고 싶다는 충동에 잠시 사로잡혔다가, 카메라는 충전잭을 꽂은 채로 방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별 수 없지.
그 대신, 이라고 하기도 뭐하게 담담한 표정으로 손에 들린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테이블 위에 털어낸다. 두 모금 비어있는 커피는 저쪽으로 밀어놓고. 내용물은 여태까지 찍어온 사진들이다. 길 위에서 남기고 싶은 풍경을 찾아, 화면에 담는 일을 그는 좋아했다. 일종의 기록이었다. 자신이 가진 이름의 의미를 굳이 의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역시 자신은 그런 식으로 쌓여온 이야기들을 좋아하고, 스스로도 쌓고 싶어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한다. 문득 테이블 위의 사진들을 바라본다. 오랫동안 사진을 정리할 짬이 나지 않아서, 이번에는 양이 꽤 많다. 카스피 해, 페리 선박장, 볼가 강, 119번 도로. 그리고 더. 아무렇게나 쏟아낸 사진들을 찬찬히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며 들여다본다.
사진을 가지런히 두고, 늘 가지고 다니는 노트를 꺼낸다. 이미 앞 장에도 사진이 붙어 두터워져 있는 그것은 종이의 색과 질감, 크기마저 들쭉날쭉하다. 기성품이 아니라, 종이를 손으로 엮어만든 형태. 그러나 익숙하기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차라락 종잇장을 넘긴다. 넘어가는 페이지마다 여러 언어와 여러 문장으로, 또한 문자가 차있는 그만큼 다시 공백과 여백의 합으로 채워져있다. 띄어쓰기는 멋진 문명이지. 중얼거린 것은 중앙아시아 지역 중 중국어권을 지날 때마다 느끼는 당혹감을 잠시 회상했기 때문에. 짧은 단상을 넘기고, 정리를 시작한다. 빈 페이지에 사진을 붙이고, 써야할, 혹은 쓰고 싶었던 텍스트를 몇자 덧붙이고…… 간혹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는 만큼, 작업은 더뎌진다. 하지만 기다리기 위해 찾은 자리이다.
문득 노트를 다시 되넘겨 앞장을 펼친다. 내일은 다시 기차를 탈 거예요. 야생마는 아름답게 생겼어요? 저는 산보다는 바다를 조금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저씨도 감기 조심하세요. 저를 보러 와줘야 해요. 적어두었던 문장들이 순서도 없이 어지럽게 읽힌다. 그는 기다리는 일이 익숙했다. 그렇지만, 하고 생각한다. 아마도 자신은 역시, 기대하고 있는 거라고. 그러나 표정은 드러나지 않고, 노트의 페이지는 다시 순행하여 돌아온다. 작업은 계속된다. 커피를 한 잔 더 주문한다. 어쩌면 또 한 잔 더. 어쩌면 점심거리를. 또 작업을. 어쩌면…… 도어벨이 흔들린다. 창문가에 앉아있던 보람도 없이, 쨍그랑거리는 음색으로 벨이 울려 흠칫하고야 만다. 그리고 손을 들어올려 말한다.
광장으로 향하기 직전까지도, 소년은 메일을 읽고 또 읽었다. 방에는 컴퓨터가 없었기에 로비에서 확인한 뒤 직접 종이에 옮겨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투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딘가 독특한 면이 있어서, 글자 사이사이에서도 그 특색이 물씬 전해졌다. 마치 바로 옆에서 그가 직접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소년은 그래서 그와 메일로 교류하는 걸 좋아했다.
콤소몰스카야. 콤소몰스카야. 소년은 조용히 입속으로 두어 번 중얼거려 보았다. 러시아 어는 입 안에서 소리가 굴러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비록 아직은 더듬거리며 한두 마디 정도밖에 못 하는 실력이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무사히 방을 잡고 식사를 할 정도는 되었다. 소년은 문득 고개를 들고 멍한 눈으로 숙소를 둘러보았다. 작은 방이었다. 침대와 협탁,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다시피 했다. 구석에는 작은 가방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모스크바까지 여정을 함께한 가방이었다.
창 밖으로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아직은 진눈깨비에 가깝지만, 눈송이가 곧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커질 것이라는 걸 소년은 알고 있었다. 출발하려면 지금이었다. 이 이상 지체하면 광장까지 가지도 못 할지도 몰랐다. 메일이 도착한 지는 거의 한 시간이 다 되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콤소몰스카야 광장 근처의 카페에서.
거리로 나가자마자 찬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소년은 코트를 여미며 걸음을 재촉했다. 거리에서 마주한 사람들도 전부 외투를 목까지 단단히 잠그고 바삐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이런 추위 속에서는 바깥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재앙 이전과는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지만, 겨울의 러시아는 여전히 혹독했다. 소년은 그 추위마저 좋아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광장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아직은 지리가 익숙하지 않아 길을 조금 헤메긴 했지만, 그가 말한 카페도 찾을 수 있었다. 시간은 아직 일렀고, 문을 연 카페는 얼마 없었다. 약간 뻑뻑한 문을 밀어 열자 경쾌한 소리를 내며 도어벨이 울렸다. 그러자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입을 꾹 다문 채로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버릇처럼 눈을 내리깐 채였다. 코트 끝자락을 타고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제야 소년은 제 어깨에 눈이 쌓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대수롭지 않은 손길로 옷을 두어 번 턴 뒤 소년은 고개를 살짝 들어 그를 살핀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머리가 길었다. 체격이 조금 더 단단해진 것 같기도. 3년이라는 간극은 생각보다 컸고, 또 생각보다 별 것 아니었다.
소년은 다시 테이블로 시선을 내렸다. 사진이 한구석에 가지런히 모여 있었다. 막 정리를 하는 도중이었던 듯했다. 메일로 받아본 사진. 처음 보는 사진. 텍스트를 통해 본 풍경. 처음 보는 풍경. 가장 위에 있는 사진을 한 장 집어들었다.
"이건 뭐예요?"
3년만에 만난 것치고는 퍽 묘한 인사였다. 그마저도 소년다웠지만. 소년이 그와 좋은 사이를 유지하는 건 어쩌면 그런 면들 때문일지도 모른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는 3년이라는 시간 앞에서도 여전했다. 엷은 색으로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머리칼도, 그다지 크지 않은 목소리도, 눈을 내리까는 버릇까지. 익숙했다. 그 익숙함이 차갑게 흘러들어오는 공기와 만나자, 기묘하게도 낯선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납득한다. 이건, 일탈의 기분이라고. 매일매일 달라지는 풍경이, 사람이…… 그리하여 여행이 그에게 일상이 된 것도, 이미 몇년씩이나 지난 일이다. 그러나 3년 전, 오랫동안 지내던 땅에 남았던 일상이 찾아오자, 그것은 일탈의 향기를 내고 있었다.
“차르박 호수.”
설명이 이어질 법도 한데, 소년의 질문에 대답한 그는, 그냥 입을 다문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할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었지만, 그보다도 골몰이었다. 결국 그 골몰 끝에 방금 전 내뱉었던 말의 가닥을 놓친다. 톈산 산맥의 만년설이 녹아 흘러내려오는 깨끗한 호수의 사진이야, 빙하가 녹은 물은 기묘하게도 선명한 청록색을 띄지. 그 호수는 아포칼립스 전 사람이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호수란다…… 입밖으로는 전혀 내지 못한 채 놓쳐버린 말의 가닥 사이에서, 묵묵한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본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설명을 못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어쩌면 너무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도. 어쩐지 가벼운 어조로 그렇게 이어나가다가, 문득 그는 소년과의 이메일 이외에는 한국어를 쓸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최근 입밖으로 한국어를 소리 내어 말할 일이라곤 정말이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래서야, 말을 하는 법을 잊기라도 한 것 같다.
“……키가 컸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어려워한 적은 없는 그일텐데, 결국 견디지 못했다는 듯 한 마디를 더 툭 내뱉고 만다. 그리 내뱉고 나서야 그렇구나, 하고 생각한다. 3년이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으나, 사실은 많은 게 달라진 시간. 그가 눈 앞의 소년과 만난 것은 소년이 소년이기도 이전, 앳되다 못해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을 무렵부터였다. 오후의 햇살이 비치던 낡은 과학준비실에서 오래된 책을 읽던 기억이, 창문 밖 이국의 풍경과 겹쳐 떠오른다. 이제 소년은 혼자서도 책을 읽고, 혼자서 기차를 타고, 혼자서 길을 찾는다. 많이 컸구나. 키뿐만이 아니더라도. 소년을 만나기 전 며칠 간의 기대가, 낯이 선 얼굴로 찾아온다. 그 낯섬이 반가워 그는 결국 입가에 미소를 띄운다. 웃어보는 것도 오랜만인데, 하고 생각한 것은 속으로만. 그리하여, 일탈의 얼굴을 하고 온 소년에게, 그는 말한다.
“오랜만이구나, 반갑다.”
꽤나 박자가 늦은 인사였다. 이래서야, 말을 이상하게 한다는 선배의 잔소리에 대답할 말이 없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다시 한 번 읽어보다가…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 이 부분 정말 은은하게 좋네요.
어린 시절과, 그에 따른 이런저런 배경지식을 공유하는 둘이고… 서로에게서 서로를 빼면 과거가 성립하지 않는 사이라는 점이 느껴진다고 해야하나… 그러면서도 의존적이지 않은 담담함으로 그래 맞아, 저 사람을 지우면 내 과거에는 꽤 빈자리가 생겨, 하고 인정할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소년은 청록색으로 빛나는 수면을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호수가 있다. 언뜻 보기에는 전부 비슷비슷할지 몰라도, 자세히 관찰하면 제각각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소년은 이제껏 여행하면서 지나온 호수를 떠올렸다. 얼어붙은 호수와, 잔잔히 물결치던 호수와, 바짝 말라붙은 호수를 떠올렸다. 소년은 불현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마치 무언가 질문을 들었고 거기에 대답하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길었어요."
물론, 주어는 소년이 아니었다. 달라진 점은 비단 머리뿐만이 아니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내는 익숙한 모습과 낯선 모습이 혼재했다. 그 이질감이 싫지 않았다. 그와 소년은 지난 몇 년간 떨어져 있었다. 그저 그뿐이다. 그들을 이루고 있는 본질적인 무언가는 바뀌지 않았다. 그 지점에서 소년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바뀌지 않았나? 단 한 부분도?
"오랜만이에요. ...반가워요."
뒤늦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시선은 테이블을 지나 무릎까지 내려왔다. 두 눈이 착용감 있는 청바지를 담았다. 무릎 부분이 약간 해졌다. 소년은 결국, 두 사람이 바뀌었더라도 나쁠 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나쁜 변화라는 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변화한 사람이 있을 뿐. 소년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별 의미는 없었다.
점원이 눈치껏 소년의 앞에 물을 내려놓았다. 소년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마시고 나서야 입 안이 말라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소년도 그 나름대로 긴장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년은 마치 뜨거운 코코아를 마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물을 조금씩 홀짝였다.
"어디서 머물고 있어요."
물음표는 붙지 않았지만 명백한 질문이었다. 그는 모스크바에 숙소를 잡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미 또 다른 곳으로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사실 같은 숙소에 묵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소년은 잔을 내려놓고 물기가 맺힌 손끝을 매만졌다. 손은 추위 때문인지 발갛게 부르터 있었다. 마치 신기한 장난감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년은 계속해서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주어와 의문문의 억양이 부재하는 소년의 화법은 그에게는 ‘익숙’한 부분이었다. 당황하지 않고, 라기보다도 처음부터 그에겐 이상할 것 하나 없었다. 그리하여 어긋날 일조차 없는 자연스러움으로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가볍게 역과 광장에서 멀지 않은 호텔의 이름을 댔을 뿐이다. 희미하던 미소는 다시 거두어들이고, 그의 시선이 언뜻언뜻 여러 곳을 스친다. 물방울 맺힌 물잔, 붉어진 손가락, 테이블 위로 떨어진 창백한 북구의 햇살, 높지만 온기 없는 창밖의 태양. 그리고 그 끝에, 그는 숨을 쉬듯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 다시 입을 연다.
“점심은?”
점심이라기엔 좀 이른가, 하고 스스로의 생각에 꼬리를 물고 단서를 달긴 했지만 소년의 답을 기다리는 그의 표정은 여느 때처럼 차분하다. 차분하달까, 없다고 써야했겠으나. 먹지 않았다고 하면 같이 식당에 가는 게 낫겠지. 그 다음에는 이메일에 썼듯이 관광…… 이라도, 다니고. 스스로가 생각해놓고도 ‘관광’이라는 단어가 어색해서 그는 잠시 멈칫한다. 그야, 겉으로는 처음부터 멈추어 있었으니 티가 날리야 없었겠지만. 그래, 이국의 풍경을 흥미를 가지고 보러다니는 일이니 분명 관광이지. 소년에게는 아마 모스크바가 처음일테니. 아니, 애초에 이전에 한반도를 나온 적이 없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있었던가?
그가 속으로 의문문을 떠올린 것도 잠시, 현실의 박자와 동떨어진 사고의 흐름은 금세 자리를 옮긴다. 일단 밥부터 먹고 하자. 귓가에 선배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어쩐지 여기 없는 사람의 목소리가 가장 크다. 상상이든 회상이든, 허상이겠으나, 현실에 실재하는 선배도 그다지 다르진 않을 것 같아서 그는 그냥 조금 그러려니 하기로 하였다. 소년이 먼저 식당을 고르지 않는다면, 러시아식 가정식을 하는 근처의 식당으로 가자고 할 생각이었다. 뭐, 먹고 왔으면 별 수 없고.
여러 단상이 스치고 지나갔으나 말그대로 단상. 테이블 위로 떨어져 내린 햇살의 모양에는 변함이 없다. 어쩐지, 라고 할 것도 없이 역시 그 자신은 텍스트에서나 말이 많아지지, 말주변은 없는 모양이다. 새삼스러운 확인이었다. 그러고보니 여행은 어땠느냐고 물어볼 걸 그랬나. 주고받은 이메일이 선명했으니 별 수 없었다 생각하며, 그는 소년의 붉은 손가락에 다시 한 번 시선을 둔다. 장갑도 하나 사야겠군.
결과부터 말하자면, 소년과 그가 같은 숙소에 머무는 우연은 일어나지 않았다. 언뜻 지나가면서 그가 말한 호텔의 간판을 본 것 같기도 했다. 아마 여기서 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소년은 손끝에 물방울을 묻혀 테이블 위에 작은 원을 그렸다. 이것 역시,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점심을 먹었냐는 질문에는 작게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소년은 대식가가 아니었다. 소년에게 식사는 그리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식사는 어디까지나 움직이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열량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식사 자체를 좋아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닌, 그 지역만이 지니고 있는 무언가를 직접 입속에 넣고 느껴보는 행위를 소년은 좋아했다. 그건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과는 또 다른 경험이었다.
소년은 문득 한국에 남은 형을 떠올린다. 소년의 형은 식사를 꼬박꼬박 챙겨야 한다고 으레 잔소리를 하곤 했다. 먹는 걸 제법 즐겼던 것 같기도 하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밥을 잘 먹어야 한다며 단단히 이르던 형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소년이 기억하는 한, 소년과 형이 이토록 길게 떨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마 그래서 더 걱정되는 점도 있었으리라.
"점심 먹었어요?"
소년은 그에게 질문을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어쩌면 그는 배가 고픈지도 모른다. 슬슬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눈발은 아까보다 굵어져 창밖이 온통 잿빛이었다. 광장은 이제 소수의 운 없는 사람을 제외하면 텅 비어 있었다. 소년은 또다시 문득 고개를 들고는 광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는 동안 소년은 눈에 제법 익숙해졌다. 소년은 시간의 흐름을 잊은 채 창 밖으로 눈이 내리는 풍경을 내다보는 것을 좋아했다. 일행이 없었더라면, 이번에도 그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소년은 혼자가 아니었고, 맞은편 테이블에는 그가 앉아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꽤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혼자서 할 수 있었던 일들을 못 하게 될지도 모른다. 혼자서는 못 하던 일들을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소년은 이 역시, 나쁠 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얍 저녁 갱신과 함께 답레를 들고 왔어:D 사찬주 저녁 맛있게 먹어! 에구 사찬주가 시험 때문에 고생이 많네;_; 빨리 끝나버리면 좋을 텐데 말이야!
점심 끼니를 걱정하는 소년의 목소리에 그는 흐르듯 커피 잔을 눈짓한다. 소년은 알지 못하겠지만, 그것이 두번째 잔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끼니를 대신하기엔 부족할 터지만, 그에겐 큰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엔 허기지지 않았다는 표현이었다. 빈약하다고 할 정도의 의사 표현. 그러나 소년이 의문스러워 하지 않고 알아들을 것이라고, 그는 안다. 그리 생각할만큼, 그들 사이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하여서. 그리하여 그렇게나 자연스럽게도 이어진다.
“……굶으면, 선배한테 혼날 거다.”
무던한 말투에 웃음기는 없었으나, 아마 농담의 범주에 들만한 말이다. 서로 허기 지지 않은 걸 알면서도, 일단 식사를 권유하게 되었으니, 선배의 가르침은 어떤 의미인가로는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홀로 있을 그 사람. 그들의 고향인 도시와 모스크바의 시차를 생각하면, 그곳은 저녁일테다. 그러니 그 사람은 혼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으려나, 하다가 연구실의 다른 인원들과 함께하겠거니 한다. 그리 교우가 좁은 사람은 아니었지, 그나 소년과는 다르게. 선배는 말주변도 좋고, 주변인을 잘 돌보는 사람이었다… 그래, 아마 언젠가의 그도, 선배에게 ‘돌봐진’ 것 같다.
그리고 눈 앞의 소년은 그 사람의 친동생이다. 그러나 그가 선배에 대한 부채감으로 소년을 돌보느냐고 하면, 그건 틀린 말이었다. 앞서 말했듯, 그들 사이에는 시간이 존재한다. 그것은 선배, 라는 존재 없이도 그들의 것이다. ……그렇다고 말그대로 선배가 없다면 시간에 빈자리가 생기겠지만, 그것은 셋 모두에게 같다. 균등하게 배분된 시간은 추억의 이름으로 남는다. 마침표를 찍듯 시선을 옮기다가, 창밖 광장의 풍경을 눈에 담는다. 어느새 눈발이 흩날린다. 선배에 대한 생각은,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그 연상작용 끝에 그는 말한다. 문득, 이라고 할만한 어조로.
“냉대 수림의 겨울은, 길어.”
그러니,
“봄까지는 같이 있을까?”
그 이후에 대해서는 모르기 때문에, 아니, 사실 봄 이전도 확신하지 못하여서,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는 않는다. 그의 길은 멀다. 도보여행이란 낭만적이기보다도 고생스러운 일이고, 봄 이후 그의 경로는 이미 도로도 마을도 적은 중앙아시아로 돌아가기로 정해져있다. 그러니 그는 소년이 그와 함께 그 고생스런 길을 가리라고는 딱히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겨울 정도는 함께 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추운 곳에서. 찬찬한 말투로, 그는 그 생각들을 설명한다. 드문드문하다고 해야할 말씨였으나, 공백을 공유하는 그들이기에 대화는 아마 성립될 것이다.
만약 소년이 겨울을 함께 나겠다고 말한다면, 그는 이동수단을 구할 생각이다. 그러나 ‘만약’의 일을 지레 앞서가고 싶지 않아서 그는 그 부분에 대한 말을 아낀다. 그리고, 잠시 침묵을 지킨다. 문득 시야 끝에 닿은 텅빈 광장은 무인의 잿빛. 카페에는 배경으로 이국의 말씨로 부르는 노래가 흐르고. 냉대의 커피는 고향에서 마시던 것보다 연하다. 잠시 말을 고른 후, 그는 언제나의 덤덤한 표정으로 덧붙인다.
“겨울을 같이 한다면, 기껍겠는데.”
말이 적은 것이 불편하지 않은 것은 어떤 말만큼은 꼭 해야할지 알기 때문이다. 소년의 답을 기다리며, 그는 반쯤 식은 커피잔에 다시 손을 댄다.
//>>32에서 말했던 부분을 좀 썼어요 //애들이 이대로 밥 먹으러 가면 늘어질 것 같아서! (음식 묘사하는 건 좋아하지만!) //좋은 저녁 되세요 해월주!
커피 한 잔. 어쩌면 한 잔 이상. 그의 식사는 그걸로 끝인 모양이었다. 소년은 크게 개의치 않았지만, 소년에게 끼니를 거르지 말라고 가르친 사람의 입장에서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을 터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의 목소리가 어쩐지 귓가에 쟁쟁했다. 해월아, 사람은 밥심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밥은 거르면 안 돼. 소년은 잠시, 혼자서 식사를 하는 소년의 형의 모습을 떠올린다. 둘 중 하나가 외출을 하지 않는 한 두 사람은 항상 같이 식사를 해 왔다. 소년이 떠나고 혼자 식탁에 앉아서 소년의 형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소년은 나중에 다시 만나면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마도 농담일 말에는, 다만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자신과 함께 식사하지 않을 생각인 걸까. 식당으로 가게 된다면 따로 주문하지 않고 앉아만 있을 요량인지도 모른다.
그의 물음에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느릿하게 잔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손끝에 물기가 묻어 나왔다. 겨울을 함께 보낸다고 하면, 그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아직 끝나지 않은 기찻길을 따라가는 걸까, 아니면 그에게는 또 다른 계획이 있는 걸까. 그리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고 나면? 그는 소년과 그 이후로도 함께할 생각은 없는지도 모른다. 소년은 시선을 더욱 아래로 내리깔았다. 대화할 때 상대방의 눈을 들여다보지 않는 건, 소년의 나쁘다면 나쁜 습관이었다.
"...같이 있고 싶어요."
결국 소년은 작게 대답한다. 그와 소년의 안에서 그 '같이 있다'의 정의는 다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봄이 오면 도로 갈라설 생각을 하고 있을 지도. 두 사람은 긴 시간을 공유해 왔고, 그만큼 서로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이루는 모든 부분이 동일해지지는 않는다. 천해월이 천해월이고 권사찬이 권사찬인 이상, 그 사실은 영원히 변치 않으리라.
"가능하면, 계속."
그래서 소년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좋은 건 나누고 싶어요. 아저씨에게 보여주고 싶고, 보고 싶어요― 편지에 적었던 대로였다. 봄이 오고, 계절이 지나고, 다시 겨울이 되더라도, 저는 그 시간을 아저씨와 함께 나누고 싶어요. 가능하다면. 소년이 그에게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어쨌거나, 소년은 아직 달리는 야생마 떼도 보지 못했고, 유빙의 울음소리도 듣지 못했으므로.
/에구 몸 상태가 영 메롱이라 글 쓰는 속도가 너무 안 나네8_8 사찬주 좋은 하루 보내고 있길 바라!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