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스푸트니크Спутник, 라는 이름은 별명. 본명은 권사찬權史撰. 거창한 이름이라고는 본인도 생각한다.
◆나이: 마지막 편지 기준, 28세의 겨울을 보내는 중. 생일은 9월 7일, 백로白露. 처녀자리. 만으로 센다면 현재 27세.
◆외모:
흑발흑안, 동양인. 꽤 훤칠해서, 180은 넘을 듯. 체중은 평균 정도. 말라보이진 않는다. 여행을 계속 하는 탓일까, 머리카락은 꽤 길어져서 목가에 머무른다. 앞머리도 어느새 길어져, 눈가를 덮는다. 당장은 불편을 못 느끼지만, 가끔 묶기도 하는 듯. 가벼운 근시가 있어 예전에는 안경을 쓰기도 했다. 논문이나 아티클을 읽는 대신 평원으로 나온 지금에는 거의 의미가 없어졌지만, 일단 들고는 다닌다.
옷의 경우에는 거의 단벌. 예전에는 랩가운을 입고 연구실에 있었겠지만, 지금은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옷을 겹겹히 껴입고 터벅터벅 걷고 있다. 옷을 얌전하게 잘 관리해가며 입는 편이라, 인상은 단정하다.
눈가 아래에 눈물점이 있지만, 딱히 눈물과는 인연이 없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미형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표정에 드러나는 감정이 적어서 좀체 먼저 말을 걸게 되진 않는다.
◆성격:
조용하고 조곤조곤해서 담담하게 거리감 있고 어쩐지 우울한 사람으로, 말수도 표정도 적어 어쩐지 풍경 속으로 녹아버릴 것 같은 인상이지만 가끔 상냥하게 웃는다… 는 평을 들었던 시절도 있었다. 옛날에는 그랬다. 어딘가의 선배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린 녀석이 인생 다 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고. 이제와서 말하자면 그 당시의 차분함은 관조랄까 방관이었고, 다정함이기 전에 무관심이었다. 어딘가 일상을 멀게 느끼고 있었다고 해야하나. 허나 길을 떠나온 지금에 와서는, 차분하면서도 안정감과 여유가 있는 인상이다.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기는 여전히 힘들지만, 좋은 사람. 본인의 표현에 따르자면 사람에게서 멀어지고 나서야, 사람을 좋아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말수가 극단적으로 적다. 하루종일 아무말 없이 걷기만 해도 불만은 없을 타입. 실제로 여행 중에는 며칠 이상 입 한 번 떼지 않는 일도. 그러나 문자 언어로 넘어가면, 의외로 살가운 성격인 것을 알 수 있다. 종종 농담도 하고, 실없는 소리도 하고. 결국에는 이야기를 나누는 걸 싫어하는 게 아니라, 음성언어를 선호하지 않는 쪽에 가까운 듯. 덕분에 텍스트와 현실의 분위기 갭이 꽤 있는 편.
◆기타:
걷는 것, 아포칼립스 이전의 인류학, 중앙아시아 지역, 생명공학 및 의학 등에 관심이 있다.
사진을 찍는 것 역시 좋아한다. 인물사진보다는 풍경 위주. 이는 인류학적 지리학적 흥미에서 기인하지만, 구성적으로 완성도 있는 화면을 담아내는 일 자체에도 애정을 가지고 있다. 찍은 사진은 출력해서 노트에 붙이거나 하고, 간단히 일어난 사건을 적거나, 감상을 적거나 하며 들고다니다가, 다 쓰면 국제우편으로 본가에 보내놓는 모양. 이 시대의 우편은 느려서, 노트들은 주인과 같이 여행길에 올라있다.
3년 정도 전에 학교를 뛰쳐나오기 이전에는, 의생명학부 전공이었고, 꽤 평가가 높았다. 아포칼립스 이후의 전문인력 부족현상 때문에 사실상 의학부 쪽이긴 했지만, 실제 흥미는 생명공학에 가있었던 듯. 그래도 의학 역시 좋아했었고, 일단 의료 면허만은 있다. 합격하고서 거의 바로 뛰쳐나왔지만. 여행자금이 궁하지 않은 것은 아포칼립스 이후 전문인력의 봉급이 높아진 영향. 세계정부가 관리하는 계좌에 안치해놓은 예금에서 여행비를 융통해가며 쓰고있다. (이자율이 매우매우 낮지만 고향 도시 밖에서도 안정적인 세계은행, 이라는 느낌.)
여행할 때는 보통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묵묵하게 걷는 편. 원체 익숙하다보니, 하루에도 몇십km씩 꾸준하게 이동한다. 성인의 평균 걷는 속도가 시속 5km인 점을 생각하면 그리 빠른 것은 아니지만, 정말 매일매일 이동하는 도보여행자라는 점에서 쉽지는 않은 여정이다… 본인은 아직 젊어서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도보여행이 기본인만큼 개인짐은 극단적으로 적다. 본인도 그다지 물욕이 없는 편이며, 폐허에서 흥미 가는 물건을 집어들어도, 이내 다음 여행지에서 남에게 줘버리거나 한다.
보통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매년 들리는 곳이라던가, 현지의 지인이라던가도 생긴 듯. 소통은 보통 영어나 러시아어를 이용하지만, 카자흐어나 우즈벡어, 몽골어, 터키어도 몇마디 쯤은 할 줄 안다. 따로 배웠다기 보다는 여행하며 자연스레 익히게 된 쪽. (사실 그쪽 지역에서는 영어는 잘 안 통하기는 한다.) 스스로 먼저 말하진 않는 편이지만 그래봬도 의료인력이라, 작은 마을에서는 가끔 처방을 내어주기도… 그런 곳은 보통 진료 자체보다도 약품의 수급이 문제가 되지만.
◇ 이름 : 천해월. 소년의 형은 하늘에 해와 달이 있다는 뜻이라고 주장하지만, 천天과 월月은 한자이고 해만 아닌 걸 봐서는 글쎄. 아폴로Apollo라는 별명이 있다.
◇ 나이 : 1월 4일생, 19세. 갓 성인이 되었다. 아직은 소년과 청년 사이의 경계에 서 있을 나이.
◇ 외모 :
엷은 갈색 머리와 검은 눈. 동양인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색소가 옅다는 느낌이지만, 국경의 의미가 사라진 지금에 와서는 다른 피가 섞였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뒷목을 덮는 머리카락은 부드러워서 촉감이 좋다. 검은 눈은 늘 어딘가를 멍하게 응시하고 있다. 키는 170에 조금 못 미치지만, 아직 다 자라지 않았으니 앞으로 바뀔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하지 않을까 싶다. 평균보다 마른 체형이지만, 혼자 여행하면서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을 정도면 의외로 강단이 있는 듯하다.
주로 무채색 내지는 단색의 상의에 청바지를 입고 다닌다. 딱 붙는 옷은 갑갑해서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화려하지 않고 단정한 옷을 선호한다는 것 외에는 특별히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 편은 아니다.
◇ 성격 :
조용하고 말수가 적다. 아직은 어림에도 나이에 비해 조숙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성실하다, 라기보다는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목소리가 작아서 말할 때도 주의를 기울여 들어야 한다.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눈을 마주하지 않고 아래로 내리까는 버릇이 있다. 얼굴에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다. 그보다는 행동으로, 그리고 말로 자신의 생각을 내보이는 걸 선호한다. 그런 소년의 방식에 익숙해지고 나면, 사실은 소년이 생각 이상으로 솔직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 기타 :
학교 성적은 전반적으로 상위권이었다. 특히 문학과 언어학 부문에 두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주목받는 걸 꺼리는 본인의 성격 때문에 조용한 학교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학교를 졸업한 뒤 그대로 고등 교육 기관에 입학할 수도 있었겠지만, 대신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 기차에 몸을 실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과 단둘이 살았다. 형제 사이는 죽고 못 살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나름 돈독했던 모양. 여행 자금도 상당수 형에게서 지원받았다. 여행을 결심했을 때 형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주기로 했다고 한다. 지금도 형과는 이메일로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취미는 독서. 아포칼립스 이전의 문학 작품에 관심이 많다. 남아 있는 장서는 극소수이고, 그마저도 대부분은 접근이 쉽지 않지만, 그래도 지금껏 읽은 책이 제법 된다. 책을 읽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지만,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읽는 편이다. 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동 보육기관(유치원+초등학교) / 청소년 교육기관(중학교+고등학교) / 전문 고등교육(대학+대학원) 정도로 나누면 되지 않을까요? 현실이랑은 꽤 다를 것 같기는 해요! 사찬이도 3년 전 뛰쳐나왔다 > 그 이전에도 연구실에는 있었다, 면 늦어도 25살에 의학교육 마치고 전문의 땄다는 이야기인데 본래는 서른 넘어서나 전문의 따니까, 고등교육의 가치나 전문성이나 밀도가 더 높은 세계가 아닐지…
나도 사실 마지막 편지 쓰면서 더 이을 방법이 없나 고민하다가 이렇게 편지의 형태로는 무리인 것 같아서 눈물을 머금고 마지막 편지라고 썼어요ㅠ∇ㅠ… 일대일까지 올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쓰고나니 더 생각나서 하는 말이지만 사찬이랑 해월이 첫만남도 궁금하고…! 일상으로 바로 돌리기엔 시간적으로 너무 먼 이야기라서, 설정적으로 짚고 넘어갈 수 있으면 좋겠네요.
형/선배를 중간에 끼고 청소년 교육기관에서 만난 걸지, 아니면 어차피 인구 수가 적기 때문에 같은 지역에서 자란 이상 자연스레 더 예전부터 알고있었다던지, 지역 별 인원이 그렇게 적은 건 아니지만 사찬이가 선배랑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교육기관이 다른 나이에도 알게되었다던지…
좋다좋다! 그럼 해월이는 청소년 교육기관을 졸업한 상태인 거고, 사찬이는 고등교육기관에 다니다 중간에 나온 셈이 되는 거려나?
ㅋㅋㅋㅋㅋㅋ나이가 더 많은 형은 형이라고 하는데 정작 아직 20대인 사찬이는 아저씨라고 부르는 해월이.. 아 혹시 형이랑 사찬이가 정확히 언제부터 친분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정해둔 게 있어? 개인적으로는 꽤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면 해월이가 어릴 때부터 봐왔을 테니까 아저씨라는 호칭이 어느 정도 납득이 가기도 하고🙃
확실히 5살한테 14살은 다 큰 어른으로 느껴지니까XD 좋아좋아 일상 좀 돌리고 나서 프리퀄도 돌려 보자! 아직 앳된 사찬이.. 생각만 해도 좋다^p^ 부모님 설정.. 사실 아직 고민중이야😢 형 설정 생각하자마자 머리에 딱 둘만 같이 사는 게 생각나서 바로 차용하긴 했는데 모종의 이유로 따로 산다고 해야 할까.. 해외에 나가 있다거나?🤔 그냥 죽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부부가 아이만 남겨놓고 죽는 게 드물지 않은 상황인지도 확실하지 않고, 필요 이상의 과거사는 분위기를 해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8_8 사찬이는 혹시 가족 관련해서 설정이 있을까?
사찬이 쪽은 1. 부모님 두 분 다 전문의셔서 해외까지 전문직으로 의료봉사 나가기도 하시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따로 살고 있다 2. 그렇지만 부모님이 계신데… 이렇게 자유로울 성격일까 사찬이가… 연고자가 없는 것 아닐까… << 이렇게 되어서 처음부터 없었다는 쪽으로 마음이… 돌아가신 건지, 잃어버린 건지는 사찬이도 모르겠지만요:3…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기가 아주 쉬울 것 같은 세계관은 아니지만, 인구가 적어서 인당 돌아갈 자원이 비교적 풍부해진 덕에 국가측에서 아동을 거두는 시스템이 발달해있지 않을까~ 하고 있기도 해요. 포스트 아포칼립스지만 자원이 풍부하고 주요기술은 남아있고, 사람 하나하나의 인적 자원으로서의 가치가 올라간 덕에 정작 주민들 전체적으로 한가한 분위기의 세계로 생각해서… (다만 이런저런 복구가 한창 바쁘다)
음음 그렇군! 그쪽으로 시스템이 발달해 있다면 해월이는 원래 형이랑 고아원에서 살다가 형이 고등부 입학하고 독립했다는 쪽으로 가도 될 것 같고? 너무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건 아닐지 고민은 되지만 또 생각해 보면 나이상 해월이는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아예 없을 테니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
그래도 될 것 같아요! 정작 사찬이랑 해월이는 둘 다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없어서 별로 신경 안 쓸 것 같고… 애초에 현대보단 고아인 아이들이 흔해서, 그다지 둘 다 의미 안 둘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만 본인도 어린데 12살 차이나는 동생을 챙기는 게 아주 쉬운 일은 아니었을텐데 선배가 대단해… 나이 상 선배는 부모님의 기억도 있을테니까요…
으음.. 나이 차이상 같이 동아리 활동을 하기엔 쪼끔 무리가 있을 것 같으니까 해월이가 부실로 놀러왔다는 설정 어때? 아무래도 유일한 보호자가 형이다 보니까 부실에서 형 수업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책도 읽고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그러면서 사찬이랑도 친해지는 그런 식으로🤗
말투는 언제든지 부담갖지 말고 편하게 바꿔도 괜찮아XD 그럼 시간이 늦었으니 난 이만 자러 들어가볼게! 사찬주도 굿밤해😄
말투는ㅋㅋㅠㅠ 아마 계속 까먹고 왔다갔다 할 것 같아요… 갑자기 존대랑 반말 섞어서 레스 단위로 왔다갔다해도 그러려니 해줘요()
아 나도 부활동 자체를 같이 했다기보다는 그냥 그 부실이라는 공간에 같이 있었다는 의미로 말한 거에요! 중간에 수정한다는 걸 잊었네요. 평일은 그렇다쳐도 주말엔 역시 봐줄 사람이 없으니, 있을 곳을 만들어놓은 느낌…? 사찬이는 엄청 살가운 타입은 아니니까 잘 놀아준다기보다는 그냥 같이 앉아서 책도 읽고 읽어주고 그러다가… 중간에 별명도 정하고… 약간 그런 식으로 어린 시절을 함께 한 기억이 남아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설정… 음… 그러고보니 일상 도입부는 어느쯤으로 할 건가요? 처음에는 바로 편지에 이어서 할까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둘 다 같이 다니기 시작한 후로 몇주 후, 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너무 늘어져도 곤란하니까.
그래서 말인데, 사찬이는 내심 해월이랑 계속 쭉 같이 다닐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왜냐하면 도보여행이라는 건 낭만적이기보다도 꽤 고생스러운 일이니까, 그리고 봄 이후에는 경로가 이미 정해져 있고 그냥 자유롭게 보고싶은 걸 보러 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으니까 해월이가 따라온다고 할지 확신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봄이 되기 전 이번 겨울에는 해월이랑 같이 다닐 목적으로 자동차 같은 이동수단을 구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만약 해월이가 같이 가겠다고 하면 이동속도를 늦출 생각도 있다… 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쓰다보니 구구절절해졌네요.
그러니까, 1. 일상의 도입시점을 어느정도 안정기로 할까요, 아니면 바로 이어서 할까요? 2. 겨울 동안은 편지에 썼던 것처럼 유빙이나, 마을들을 보거나, 어쩌면 다시 기차를 타면서 같이 여행할 것 같은데 사찬이에게 일정이 있는 봄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으음.. 난 일단 마지막 편지를 읽고 만나러 가는 걸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찬주 말을 듣고 보니 늘어질 위험도 있는것같고🤔 일단 난 바로 이어서 하는 거에 한 표! ٩( ᐛ )و 해월이는 아마 사찬이랑 같이 다니고 싶어할 것 같아. 애초부터 그러려고 만나자고 한 거기도 하고, 쉽지만은 않을 거라는 것도 이미 예상하고 있으니까. 해월이라면 아마 조금 고생스럽더라도 같이 다니는 쪽을 선택할 것 같네! 물론 중간에 부득이하게 갈라진다면 한동안은 다시 메일로 연락하는 방식을 취해도 좋고 말이야.
좋아요 좋아요! 그러면 첫일상은 편지 바로 이어서 카페에서 만나면서 시작하고, 모스크바 구경하다가 봄 이후 일정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확인한다- 는 흐름으로 가면 어떨까요? 좀 더 붙이면 이동수단 관련 내용까지 넣을 수 있을지도… 계획은 계획일 뿐이니까 중간에 방향성 틀고 싶으면 마음대로 틀어주세요^^v 중간에 잠시 갈라지는 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사찬이가 좀 돌아서 들러가야 할 마을이 있어서, 라던가… 해월이가 이유를 만들어도 좋고요!
봐두었던 카페는 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았고, 적당히 조용했다. 아니, 아직 오전이라서 그런 걸 수도 있지. 오후가 되면 사람들이 늘어날테니. 조금 이른 아침에 깨어나 미리 출력소에 들린 덕에, 종이봉투가 손 안에서 바스락거린다. 창가 자리가 나을 것이었다. 올 사람을 지켜보기엔. 광장 쪽에서 올까? 커피에 값을 지불하고, 자리에 앉는다. 따뜻한 커피를 한입 마시고, 잠시 창밖을 바라본다. 눈 쌓인 모스크바는 옅은 회색을 덮어씌운 것처럼 보인다. 그 풍경을 남기고 싶다는 충동에 잠시 사로잡혔다가, 카메라는 충전잭을 꽂은 채로 방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별 수 없지.
그 대신, 이라고 하기도 뭐하게 담담한 표정으로 손에 들린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테이블 위에 털어낸다. 두 모금 비어있는 커피는 저쪽으로 밀어놓고. 내용물은 여태까지 찍어온 사진들이다. 길 위에서 남기고 싶은 풍경을 찾아, 화면에 담는 일을 그는 좋아했다. 일종의 기록이었다. 자신이 가진 이름의 의미를 굳이 의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역시 자신은 그런 식으로 쌓여온 이야기들을 좋아하고, 스스로도 쌓고 싶어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한다. 문득 테이블 위의 사진들을 바라본다. 오랫동안 사진을 정리할 짬이 나지 않아서, 이번에는 양이 꽤 많다. 카스피 해, 페리 선박장, 볼가 강, 119번 도로. 그리고 더. 아무렇게나 쏟아낸 사진들을 찬찬히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며 들여다본다.
사진을 가지런히 두고, 늘 가지고 다니는 노트를 꺼낸다. 이미 앞 장에도 사진이 붙어 두터워져 있는 그것은 종이의 색과 질감, 크기마저 들쭉날쭉하다. 기성품이 아니라, 종이를 손으로 엮어만든 형태. 그러나 익숙하기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차라락 종잇장을 넘긴다. 넘어가는 페이지마다 여러 언어와 여러 문장으로, 또한 문자가 차있는 그만큼 다시 공백과 여백의 합으로 채워져있다. 띄어쓰기는 멋진 문명이지. 중얼거린 것은 중앙아시아 지역 중 중국어권을 지날 때마다 느끼는 당혹감을 잠시 회상했기 때문에. 짧은 단상을 넘기고, 정리를 시작한다. 빈 페이지에 사진을 붙이고, 써야할, 혹은 쓰고 싶었던 텍스트를 몇자 덧붙이고…… 간혹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는 만큼, 작업은 더뎌진다. 하지만 기다리기 위해 찾은 자리이다.
문득 노트를 다시 되넘겨 앞장을 펼친다. 내일은 다시 기차를 탈 거예요. 야생마는 아름답게 생겼어요? 저는 산보다는 바다를 조금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저씨도 감기 조심하세요. 저를 보러 와줘야 해요. 적어두었던 문장들이 순서도 없이 어지럽게 읽힌다. 그는 기다리는 일이 익숙했다. 그렇지만, 하고 생각한다. 아마도 자신은 역시, 기대하고 있는 거라고. 그러나 표정은 드러나지 않고, 노트의 페이지는 다시 순행하여 돌아온다. 작업은 계속된다. 커피를 한 잔 더 주문한다. 어쩌면 또 한 잔 더. 어쩌면 점심거리를. 또 작업을. 어쩌면…… 도어벨이 흔들린다. 창문가에 앉아있던 보람도 없이, 쨍그랑거리는 음색으로 벨이 울려 흠칫하고야 만다. 그리고 손을 들어올려 말한다.
광장으로 향하기 직전까지도, 소년은 메일을 읽고 또 읽었다. 방에는 컴퓨터가 없었기에 로비에서 확인한 뒤 직접 종이에 옮겨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투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딘가 독특한 면이 있어서, 글자 사이사이에서도 그 특색이 물씬 전해졌다. 마치 바로 옆에서 그가 직접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소년은 그래서 그와 메일로 교류하는 걸 좋아했다.
콤소몰스카야. 콤소몰스카야. 소년은 조용히 입속으로 두어 번 중얼거려 보았다. 러시아 어는 입 안에서 소리가 굴러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비록 아직은 더듬거리며 한두 마디 정도밖에 못 하는 실력이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무사히 방을 잡고 식사를 할 정도는 되었다. 소년은 문득 고개를 들고 멍한 눈으로 숙소를 둘러보았다. 작은 방이었다. 침대와 협탁,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다시피 했다. 구석에는 작은 가방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모스크바까지 여정을 함께한 가방이었다.
창 밖으로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아직은 진눈깨비에 가깝지만, 눈송이가 곧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커질 것이라는 걸 소년은 알고 있었다. 출발하려면 지금이었다. 이 이상 지체하면 광장까지 가지도 못 할지도 몰랐다. 메일이 도착한 지는 거의 한 시간이 다 되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콤소몰스카야 광장 근처의 카페에서.
거리로 나가자마자 찬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소년은 코트를 여미며 걸음을 재촉했다. 거리에서 마주한 사람들도 전부 외투를 목까지 단단히 잠그고 바삐 갈 길을 가고 있었다. 이런 추위 속에서는 바깥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재앙 이전과는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지만, 겨울의 러시아는 여전히 혹독했다. 소년은 그 추위마저 좋아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광장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아직은 지리가 익숙하지 않아 길을 조금 헤메긴 했지만, 그가 말한 카페도 찾을 수 있었다. 시간은 아직 일렀고, 문을 연 카페는 얼마 없었다. 약간 뻑뻑한 문을 밀어 열자 경쾌한 소리를 내며 도어벨이 울렸다. 그러자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입을 꾹 다문 채로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버릇처럼 눈을 내리깐 채였다. 코트 끝자락을 타고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제야 소년은 제 어깨에 눈이 쌓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대수롭지 않은 손길로 옷을 두어 번 턴 뒤 소년은 고개를 살짝 들어 그를 살핀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머리가 길었다. 체격이 조금 더 단단해진 것 같기도. 3년이라는 간극은 생각보다 컸고, 또 생각보다 별 것 아니었다.
소년은 다시 테이블로 시선을 내렸다. 사진이 한구석에 가지런히 모여 있었다. 막 정리를 하는 도중이었던 듯했다. 메일로 받아본 사진. 처음 보는 사진. 텍스트를 통해 본 풍경. 처음 보는 풍경. 가장 위에 있는 사진을 한 장 집어들었다.
"이건 뭐예요?"
3년만에 만난 것치고는 퍽 묘한 인사였다. 그마저도 소년다웠지만. 소년이 그와 좋은 사이를 유지하는 건 어쩌면 그런 면들 때문일지도 모른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는 3년이라는 시간 앞에서도 여전했다. 엷은 색으로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머리칼도, 그다지 크지 않은 목소리도, 눈을 내리까는 버릇까지. 익숙했다. 그 익숙함이 차갑게 흘러들어오는 공기와 만나자, 기묘하게도 낯선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납득한다. 이건, 일탈의 기분이라고. 매일매일 달라지는 풍경이, 사람이…… 그리하여 여행이 그에게 일상이 된 것도, 이미 몇년씩이나 지난 일이다. 그러나 3년 전, 오랫동안 지내던 땅에 남았던 일상이 찾아오자, 그것은 일탈의 향기를 내고 있었다.
“차르박 호수.”
설명이 이어질 법도 한데, 소년의 질문에 대답한 그는, 그냥 입을 다문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할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었지만, 그보다도 골몰이었다. 결국 그 골몰 끝에 방금 전 내뱉었던 말의 가닥을 놓친다. 톈산 산맥의 만년설이 녹아 흘러내려오는 깨끗한 호수의 사진이야, 빙하가 녹은 물은 기묘하게도 선명한 청록색을 띄지. 그 호수는 아포칼립스 전 사람이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호수란다…… 입밖으로는 전혀 내지 못한 채 놓쳐버린 말의 가닥 사이에서, 묵묵한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본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설명을 못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어쩌면 너무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도. 어쩐지 가벼운 어조로 그렇게 이어나가다가, 문득 그는 소년과의 이메일 이외에는 한국어를 쓸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최근 입밖으로 한국어를 소리 내어 말할 일이라곤 정말이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래서야, 말을 하는 법을 잊기라도 한 것 같다.
“……키가 컸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어려워한 적은 없는 그일텐데, 결국 견디지 못했다는 듯 한 마디를 더 툭 내뱉고 만다. 그리 내뱉고 나서야 그렇구나, 하고 생각한다. 3년이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으나, 사실은 많은 게 달라진 시간. 그가 눈 앞의 소년과 만난 것은 소년이 소년이기도 이전, 앳되다 못해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을 무렵부터였다. 오후의 햇살이 비치던 낡은 과학준비실에서 오래된 책을 읽던 기억이, 창문 밖 이국의 풍경과 겹쳐 떠오른다. 이제 소년은 혼자서도 책을 읽고, 혼자서 기차를 타고, 혼자서 길을 찾는다. 많이 컸구나. 키뿐만이 아니더라도. 소년을 만나기 전 며칠 간의 기대가, 낯이 선 얼굴로 찾아온다. 그 낯섬이 반가워 그는 결국 입가에 미소를 띄운다. 웃어보는 것도 오랜만인데, 하고 생각한 것은 속으로만. 그리하여, 일탈의 얼굴을 하고 온 소년에게, 그는 말한다.
“오랜만이구나, 반갑다.”
꽤나 박자가 늦은 인사였다. 이래서야, 말을 이상하게 한다는 선배의 잔소리에 대답할 말이 없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다시 한 번 읽어보다가…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 이 부분 정말 은은하게 좋네요.
어린 시절과, 그에 따른 이런저런 배경지식을 공유하는 둘이고… 서로에게서 서로를 빼면 과거가 성립하지 않는 사이라는 점이 느껴진다고 해야하나… 그러면서도 의존적이지 않은 담담함으로 그래 맞아, 저 사람을 지우면 내 과거에는 꽤 빈자리가 생겨, 하고 인정할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소년은 청록색으로 빛나는 수면을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호수가 있다. 언뜻 보기에는 전부 비슷비슷할지 몰라도, 자세히 관찰하면 제각각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소년은 이제껏 여행하면서 지나온 호수를 떠올렸다. 얼어붙은 호수와, 잔잔히 물결치던 호수와, 바짝 말라붙은 호수를 떠올렸다. 소년은 불현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마치 무언가 질문을 들었고 거기에 대답하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길었어요."
물론, 주어는 소년이 아니었다. 달라진 점은 비단 머리뿐만이 아니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내는 익숙한 모습과 낯선 모습이 혼재했다. 그 이질감이 싫지 않았다. 그와 소년은 지난 몇 년간 떨어져 있었다. 그저 그뿐이다. 그들을 이루고 있는 본질적인 무언가는 바뀌지 않았다. 그 지점에서 소년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바뀌지 않았나? 단 한 부분도?
"오랜만이에요. ...반가워요."
뒤늦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시선은 테이블을 지나 무릎까지 내려왔다. 두 눈이 착용감 있는 청바지를 담았다. 무릎 부분이 약간 해졌다. 소년은 결국, 두 사람이 바뀌었더라도 나쁠 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나쁜 변화라는 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변화한 사람이 있을 뿐. 소년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별 의미는 없었다.
점원이 눈치껏 소년의 앞에 물을 내려놓았다. 소년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마시고 나서야 입 안이 말라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소년도 그 나름대로 긴장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년은 마치 뜨거운 코코아를 마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물을 조금씩 홀짝였다.
"어디서 머물고 있어요."
물음표는 붙지 않았지만 명백한 질문이었다. 그는 모스크바에 숙소를 잡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미 또 다른 곳으로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사실 같은 숙소에 묵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소년은 잔을 내려놓고 물기가 맺힌 손끝을 매만졌다. 손은 추위 때문인지 발갛게 부르터 있었다. 마치 신기한 장난감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년은 계속해서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주어와 의문문의 억양이 부재하는 소년의 화법은 그에게는 ‘익숙’한 부분이었다. 당황하지 않고, 라기보다도 처음부터 그에겐 이상할 것 하나 없었다. 그리하여 어긋날 일조차 없는 자연스러움으로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가볍게 역과 광장에서 멀지 않은 호텔의 이름을 댔을 뿐이다. 희미하던 미소는 다시 거두어들이고, 그의 시선이 언뜻언뜻 여러 곳을 스친다. 물방울 맺힌 물잔, 붉어진 손가락, 테이블 위로 떨어진 창백한 북구의 햇살, 높지만 온기 없는 창밖의 태양. 그리고 그 끝에, 그는 숨을 쉬듯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 다시 입을 연다.
“점심은?”
점심이라기엔 좀 이른가, 하고 스스로의 생각에 꼬리를 물고 단서를 달긴 했지만 소년의 답을 기다리는 그의 표정은 여느 때처럼 차분하다. 차분하달까, 없다고 써야했겠으나. 먹지 않았다고 하면 같이 식당에 가는 게 낫겠지. 그 다음에는 이메일에 썼듯이 관광…… 이라도, 다니고. 스스로가 생각해놓고도 ‘관광’이라는 단어가 어색해서 그는 잠시 멈칫한다. 그야, 겉으로는 처음부터 멈추어 있었으니 티가 날리야 없었겠지만. 그래, 이국의 풍경을 흥미를 가지고 보러다니는 일이니 분명 관광이지. 소년에게는 아마 모스크바가 처음일테니. 아니, 애초에 이전에 한반도를 나온 적이 없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있었던가?
그가 속으로 의문문을 떠올린 것도 잠시, 현실의 박자와 동떨어진 사고의 흐름은 금세 자리를 옮긴다. 일단 밥부터 먹고 하자. 귓가에 선배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어쩐지 여기 없는 사람의 목소리가 가장 크다. 상상이든 회상이든, 허상이겠으나, 현실에 실재하는 선배도 그다지 다르진 않을 것 같아서 그는 그냥 조금 그러려니 하기로 하였다. 소년이 먼저 식당을 고르지 않는다면, 러시아식 가정식을 하는 근처의 식당으로 가자고 할 생각이었다. 뭐, 먹고 왔으면 별 수 없고.
여러 단상이 스치고 지나갔으나 말그대로 단상. 테이블 위로 떨어져 내린 햇살의 모양에는 변함이 없다. 어쩐지, 라고 할 것도 없이 역시 그 자신은 텍스트에서나 말이 많아지지, 말주변은 없는 모양이다. 새삼스러운 확인이었다. 그러고보니 여행은 어땠느냐고 물어볼 걸 그랬나. 주고받은 이메일이 선명했으니 별 수 없었다 생각하며, 그는 소년의 붉은 손가락에 다시 한 번 시선을 둔다. 장갑도 하나 사야겠군.
결과부터 말하자면, 소년과 그가 같은 숙소에 머무는 우연은 일어나지 않았다. 언뜻 지나가면서 그가 말한 호텔의 간판을 본 것 같기도 했다. 아마 여기서 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소년은 손끝에 물방울을 묻혀 테이블 위에 작은 원을 그렸다. 이것 역시,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점심을 먹었냐는 질문에는 작게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소년은 대식가가 아니었다. 소년에게 식사는 그리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식사는 어디까지나 움직이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열량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식사 자체를 좋아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닌, 그 지역만이 지니고 있는 무언가를 직접 입속에 넣고 느껴보는 행위를 소년은 좋아했다. 그건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과는 또 다른 경험이었다.
소년은 문득 한국에 남은 형을 떠올린다. 소년의 형은 식사를 꼬박꼬박 챙겨야 한다고 으레 잔소리를 하곤 했다. 먹는 걸 제법 즐겼던 것 같기도 하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밥을 잘 먹어야 한다며 단단히 이르던 형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소년이 기억하는 한, 소년과 형이 이토록 길게 떨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마 그래서 더 걱정되는 점도 있었으리라.
"점심 먹었어요?"
소년은 그에게 질문을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어쩌면 그는 배가 고픈지도 모른다. 슬슬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눈발은 아까보다 굵어져 창밖이 온통 잿빛이었다. 광장은 이제 소수의 운 없는 사람을 제외하면 텅 비어 있었다. 소년은 또다시 문득 고개를 들고는 광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는 동안 소년은 눈에 제법 익숙해졌다. 소년은 시간의 흐름을 잊은 채 창 밖으로 눈이 내리는 풍경을 내다보는 것을 좋아했다. 일행이 없었더라면, 이번에도 그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소년은 혼자가 아니었고, 맞은편 테이블에는 그가 앉아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꽤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혼자서 할 수 있었던 일들을 못 하게 될지도 모른다. 혼자서는 못 하던 일들을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소년은 이 역시, 나쁠 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얍 저녁 갱신과 함께 답레를 들고 왔어:D 사찬주 저녁 맛있게 먹어! 에구 사찬주가 시험 때문에 고생이 많네;_; 빨리 끝나버리면 좋을 텐데 말이야!
점심 끼니를 걱정하는 소년의 목소리에 그는 흐르듯 커피 잔을 눈짓한다. 소년은 알지 못하겠지만, 그것이 두번째 잔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끼니를 대신하기엔 부족할 터지만, 그에겐 큰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엔 허기지지 않았다는 표현이었다. 빈약하다고 할 정도의 의사 표현. 그러나 소년이 의문스러워 하지 않고 알아들을 것이라고, 그는 안다. 그리 생각할만큼, 그들 사이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하여서. 그리하여 그렇게나 자연스럽게도 이어진다.
“……굶으면, 선배한테 혼날 거다.”
무던한 말투에 웃음기는 없었으나, 아마 농담의 범주에 들만한 말이다. 서로 허기 지지 않은 걸 알면서도, 일단 식사를 권유하게 되었으니, 선배의 가르침은 어떤 의미인가로는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홀로 있을 그 사람. 그들의 고향인 도시와 모스크바의 시차를 생각하면, 그곳은 저녁일테다. 그러니 그 사람은 혼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으려나, 하다가 연구실의 다른 인원들과 함께하겠거니 한다. 그리 교우가 좁은 사람은 아니었지, 그나 소년과는 다르게. 선배는 말주변도 좋고, 주변인을 잘 돌보는 사람이었다… 그래, 아마 언젠가의 그도, 선배에게 ‘돌봐진’ 것 같다.
그리고 눈 앞의 소년은 그 사람의 친동생이다. 그러나 그가 선배에 대한 부채감으로 소년을 돌보느냐고 하면, 그건 틀린 말이었다. 앞서 말했듯, 그들 사이에는 시간이 존재한다. 그것은 선배, 라는 존재 없이도 그들의 것이다. ……그렇다고 말그대로 선배가 없다면 시간에 빈자리가 생기겠지만, 그것은 셋 모두에게 같다. 균등하게 배분된 시간은 추억의 이름으로 남는다. 마침표를 찍듯 시선을 옮기다가, 창밖 광장의 풍경을 눈에 담는다. 어느새 눈발이 흩날린다. 선배에 대한 생각은,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그 연상작용 끝에 그는 말한다. 문득, 이라고 할만한 어조로.
“냉대 수림의 겨울은, 길어.”
그러니,
“봄까지는 같이 있을까?”
그 이후에 대해서는 모르기 때문에, 아니, 사실 봄 이전도 확신하지 못하여서,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는 않는다. 그의 길은 멀다. 도보여행이란 낭만적이기보다도 고생스러운 일이고, 봄 이후 그의 경로는 이미 도로도 마을도 적은 중앙아시아로 돌아가기로 정해져있다. 그러니 그는 소년이 그와 함께 그 고생스런 길을 가리라고는 딱히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겨울 정도는 함께 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추운 곳에서. 찬찬한 말투로, 그는 그 생각들을 설명한다. 드문드문하다고 해야할 말씨였으나, 공백을 공유하는 그들이기에 대화는 아마 성립될 것이다.
만약 소년이 겨울을 함께 나겠다고 말한다면, 그는 이동수단을 구할 생각이다. 그러나 ‘만약’의 일을 지레 앞서가고 싶지 않아서 그는 그 부분에 대한 말을 아낀다. 그리고, 잠시 침묵을 지킨다. 문득 시야 끝에 닿은 텅빈 광장은 무인의 잿빛. 카페에는 배경으로 이국의 말씨로 부르는 노래가 흐르고. 냉대의 커피는 고향에서 마시던 것보다 연하다. 잠시 말을 고른 후, 그는 언제나의 덤덤한 표정으로 덧붙인다.
“겨울을 같이 한다면, 기껍겠는데.”
말이 적은 것이 불편하지 않은 것은 어떤 말만큼은 꼭 해야할지 알기 때문이다. 소년의 답을 기다리며, 그는 반쯤 식은 커피잔에 다시 손을 댄다.
//>>32에서 말했던 부분을 좀 썼어요 //애들이 이대로 밥 먹으러 가면 늘어질 것 같아서! (음식 묘사하는 건 좋아하지만!) //좋은 저녁 되세요 해월주!
커피 한 잔. 어쩌면 한 잔 이상. 그의 식사는 그걸로 끝인 모양이었다. 소년은 크게 개의치 않았지만, 소년에게 끼니를 거르지 말라고 가르친 사람의 입장에서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을 터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의 목소리가 어쩐지 귓가에 쟁쟁했다. 해월아, 사람은 밥심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밥은 거르면 안 돼. 소년은 잠시, 혼자서 식사를 하는 소년의 형의 모습을 떠올린다. 둘 중 하나가 외출을 하지 않는 한 두 사람은 항상 같이 식사를 해 왔다. 소년이 떠나고 혼자 식탁에 앉아서 소년의 형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소년은 나중에 다시 만나면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마도 농담일 말에는, 다만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자신과 함께 식사하지 않을 생각인 걸까. 식당으로 가게 된다면 따로 주문하지 않고 앉아만 있을 요량인지도 모른다.
그의 물음에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느릿하게 잔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손끝에 물기가 묻어 나왔다. 겨울을 함께 보낸다고 하면, 그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아직 끝나지 않은 기찻길을 따라가는 걸까, 아니면 그에게는 또 다른 계획이 있는 걸까. 그리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고 나면? 그는 소년과 그 이후로도 함께할 생각은 없는지도 모른다. 소년은 시선을 더욱 아래로 내리깔았다. 대화할 때 상대방의 눈을 들여다보지 않는 건, 소년의 나쁘다면 나쁜 습관이었다.
"...같이 있고 싶어요."
결국 소년은 작게 대답한다. 그와 소년의 안에서 그 '같이 있다'의 정의는 다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봄이 오면 도로 갈라설 생각을 하고 있을 지도. 두 사람은 긴 시간을 공유해 왔고, 그만큼 서로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이루는 모든 부분이 동일해지지는 않는다. 천해월이 천해월이고 권사찬이 권사찬인 이상, 그 사실은 영원히 변치 않으리라.
"가능하면, 계속."
그래서 소년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좋은 건 나누고 싶어요. 아저씨에게 보여주고 싶고, 보고 싶어요― 편지에 적었던 대로였다. 봄이 오고, 계절이 지나고, 다시 겨울이 되더라도, 저는 그 시간을 아저씨와 함께 나누고 싶어요. 가능하다면. 소년이 그에게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어쨌거나, 소년은 아직 달리는 야생마 떼도 보지 못했고, 유빙의 울음소리도 듣지 못했으므로.
/에구 몸 상태가 영 메롱이라 글 쓰는 속도가 너무 안 나네8_8 사찬주 좋은 하루 보내고 있길 바라! :D
소년의 말소리를 묵묵히 듣고있다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봄의 경로는 이미 설명했다. 그럼에도 길을 함께 가겠다고, 소년은 말한다. 별로 즐겁지는 않을텐데, 하고 덧붙여볼까 하다가 그는 그냥 그만두기로 한다. 이미 말한 결정에 다시 단서를 붙여 되묻는 건, 너무 어린 취급이 아닐까 싶어서. 몇 년 만에야 다시 만난 소년은 이미 제 길을 걸을 줄 아는 개인이라, 그렇게까지 일일히 ‘돌보고’ 싶지는 않았다. 19살 무렵의 자신을 떠올리면 더 그랬다. 알 건 다 아는 나이지, 속으로 그렇게 덧붙인다. 간혹 가다가는 몰라야할 것도 아는 나이고.
커피잔을 들어 다시 한 모금 마시는 새에, 그는 봄의 경로를 어떻게 수정할까, 하고 생각한다. 소년은 이메일에서 경로의 수정에 대해 걱정했지만, 사실 그에게는 처음 정한 길이 그대로 이어지는 쪽이 드물었다. 길은 어디에든 있지만, 이 시대에서는 또한 어디에 있는 길이든 금방 망가지기 마련이다. 야생마가 도로를 점령해서, 한참을 돌아가야 한다던지…… 도보 여행이면 돌아가면 그만인데, 자동차는 그럴 때 불편하다. 음, 그러고보니 소년은 야생마를 보고싶어했었지.
“……점심 먹고, 장갑이나 사러가자.”
그리 말하고는 잠시 창밖을 바라본다. 정오의 하늘은 잿빛이고, 오래된 도시는 말이 없다. 눈이 더 굵어지기 전에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맞은 편 테이블에 앉은 소년은 쉽게 눈을 마주쳐주지 않는다. 그는 그에 대해 무어라 부연할 생각이 없었다. 말하고자한다면야 10년 전부터 기회는 많았으니 이제와서, 의 기분이다. 다만 그는 소년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것은 그의 버릇이기도 했다. 입밖으로 내는 말수가 적고 속생각이 많은 그는 찬찬히 들여다보는 일을 좋아한다.
그렇게 그는 소년의 시야를 가린 채 가볍게 흔들리는 밝은색 머리칼을, 잔을 쓸어내리는 몸짓을, 여전히 발갛게 부르튼 손끝을, 어딘가에 적어두듯 눈에 담는다. 유리를 깐 테이블과, 그 아래의 오래된 엽서들과, 차가운 유리 창 밖의 잿빛도 같이. 그리하여 그것은 사진이다. 그러니 그의 사진 취미는, 사실 이 버릇의 연장선상일지도 모른다. 달리는 야생마 떼도, 긴 울음을 우는 유빙도, 굳이 찍지 않은 것은 배터리 나간 카메라보다도, 사진 아닌 눈에 남기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홀로 새기고 지나간 풍경들이었다. 이메일을 쓸 때에는, 역시 찍어둘 걸 그랬나 싶기도 했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 글들을 받던 이가, 그와 동행하겠다고 말한다. 그즈음에서 그는 조금쯤 사진 찍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아직 보지 못한 것들, 그러니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이야말로 매혹적이라는 이야기에는, 어느정도 동의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일탈의 논리다. 그 풍경들을 이미 보았어도 소년이 그의 봄에 그저 발디뎌 주었을 것이라 믿는 일은, 그에게는 약간 쑥쓰러운 데가 있었다. 그랬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뭐, 봄이 되면 추위보다도 벌레가 문제가 될 거다만은.”
그러니 내뱉은 말은 맥락 없었다. 그 맥락은, 그의 속에나 존재한다. 아무리 시간을 공유하고 배경을 공유해도 소년이 독심술을 쓰는 건 아니니, 이 맥락까지 이해하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이해받기를 원하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야말로 그와 소년의 관계이다. 애초에, 속생각이 쑥쓰러워 문득 말을 돌려봤습니다, 하는 부분을 단번에 이해받아도 곤란하지만. 반쯤 설렁설렁한 태도로, 그러나 겉으로는 여느때와 같은 무표정으로 그리 생각하고, 그는 저번에 봐두었던 식당이나 떠올린다. 보르시도 좋고, 삼사도 괜찮았고, 당근 넣은 필라프도 좋지. 음.
아무튼, 괜찮을 것이었다. 이 대지의 겨울은 길고, 봄은 조금 멀지만, 그건 그것 나름대로 괜찮았다. 겨울을 같이 보낼 사람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고. 약간 만족한 기색으로 그렇게 속생각을 덧붙이고, 그는 슬몃 웃었다.
장갑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소년은 새삼스레 부르튼 제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생전 처음 보는 신기한 무언가가 손목에 달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소년은 그 상태로 한동안 자신의 손을 관찰했다. 소년의 손은 작은 편이다. 손톱은 짧게 깎여 있다. 아직 굳은살이라고는 펜을 쥐면서 생긴 정도밖에 없지만, 앞으로 여정이 계속되면 어떻게 바뀔지 또 모르는 일이다.
소년은 문득, 걷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지금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잿빛 눈보라를 뚫고 정처없이 걷고 싶었다. 목적지는 필요없었다. 그저 지금, 소년이 걷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게 될 지도 모른다. 바이칼 호수로 되돌아가게 될지도 모르지. 정신을 차려 보면 한국에 도착할지도 몰라. 아니면, 어딘가에서 유빙이 우는 소리가 들려올 수도 있고.
하지만 소년은 곧 작게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 바깥은 곧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될 터였다. 시베리아의 설원도 아니고 모스크바 한가운데서 조난이라니, 안 될 일이었다. 게다가 소년에게는 이제 일행이 있었다. 말하자면 혼자가 아니게 된 셈이었다.
혼자가 아니다. 소년은 입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문장이지만, 어쩐지 그 울림이 마음에 들었다. 소년은 시선을 아주 약간 위로 올렸다. 그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손과는, 손가락이 다섯 개 달렸다는 걸 제외하고는 뭐 하나 비슷한 부분이 없는 손이다. 그럼에도 소년은 그들의 손이 어딘가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소년은 손을 티나지 않을 만큼만 앞으로 옮겼다.
그의 말을 듣고 소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벌레를 특별히 싫어하거나 무서워하는 건 아니었지만, 동시에 곤란할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완벽하게 곤란하거나 완벽하게 곤란하지 않은 건 세상에 없어. 소년은 생각했다. 그런 것이다. 바이칼 호수도 누군가에게는 곤란한 상황을 부여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벌레 덕분에 곤란함에서 벗어날 수도 있는 법이다.
소년은 마지막으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잔에는 물이 반 정도 남아 있었다. 소년은 오래된 책에서 본 내용을 떠올린다. 물이 반밖에 안 남았는지, 아니면 반이나 남았는지를 결정하는 건 관찰자 자신이다. 소년은 이 역시, 크게 신경쓸 일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반밖에 안 남았어도, 반이나 남았어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이 물이, 콤소몰스카야 광장 근처의 카페에서, 그의 맞은편에 앉아 마신 물이라는 사실이었다.
"가요."
주어와 목적어를 모두 빼먹은 문장은 물론, 식사를 하러 가자는 말이었다. 소년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알아들었을 것이라고 의심치 않으며. 그게 그들 사이의 관계였다. 다른 말로 하자면, 소년은 타인이 보기에 퍽 묘한 방식으로, 그를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잘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호텔에 선예약기간이 있으니, 바로 옮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헤어지니 아쉬운 마음이 든다. 오늘은 즐거웠다. 점심을 먹고도 눈이 그치지 않아서 차까지 마셨지만, 그래도 해가 지기 전에 날이 개어서 다행이었지.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야로슬라브스키역에서 지하철을 타면 중심지까지는 금방이라, 생각보다 이것저것 구경할 수 있었다. 하늘이 개어서 붉은 광장의 중앙에 서니, 성 바실리 성당과 구 러시아 국립역사박물관, 니콜스카야탑까지 볼 수 있었지. 비록 인구가 줄었다고 해도, 모스크바는 모스크바더구나.
너도 같이 본 걸 길게 써봤자 의미가 없겠지. 그래도 숙소에 들어와 씻고 나니 이메일이 보내고 싶어져서 말이다. 네가 언제 확인할지는 모르겠지만 짧게나마 보내본다. 그리고 사진도 한 장 첨부할게. 오늘 바실리 성당 앞에서 널 찍었거든. 셔터를 누를 때까지 돌아보지 않아서, 알아챘는지는 모르겠지만.
북미… 당장 가는 건 무리일 것 같네~ 하다가 생각난 건데, 북미는 사찬이 발이 닿은 적이 없는 곳이니까, 사찬이랑 해월이가 이번 해를 같이 보내고(어쩌면 그러고도 조금 더 지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영원히 같이 다닐 순 없으니 헤어지고 > 중앙아시아 돌아다니는 동안은 사찬이가 경로를 정한 편이었으니 스스로 마음 가는 곳으로 여행을 시작한 해월이가 북미로 넘어가고, 이번에는 사찬이가 해월이를 찾아가는… 전개도 재밌을 것 같아요! 그러려면 시간이 좀 지난 이후의 미래편이 되겠지만요… (해월이 성장버전도 좀 궁금해서 슬쩍 들이밀어보는 설정)
그리고 이건 설정 제안인데.... 현재 시점… 이라기보다도 지금 돌린 일상 기준, 작중 년도의 뒷자리를 '20'으로 해도 될까요? 실제로 3020년인지 2220년인지는 불명이지만 뒷자리는 20인 걸로요…! 전개 정리할 때 연표처럼 슥슥 쓰는 편인데, 연도가 없으니 곤란해서… 이왕 정하는 거 현실이랑 비슷하면 계산도 편하니까요… 정하지 않고 두고 싶으면 그것도 괜찮고, 앞에 자리수까지 정하고 싶으면 그것도 괜찮아요!
Tmi 겸 잡설정 :
사찬이 이메일 주소가 schkwon1957@knist.ac.kr < 인데 knist.ac.kr은 대학 이메일이고, Korea National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 의 약자라고 생각하고 썼어요. 국립한국과학기술원(?)인 셈인데 사실 도시국가 단위로 바뀌었으니 K라는 문자로 시작하는 도시 이름으로 바꾸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니면 sist, 로 수정해서 서울과학기술원도 괜찮고… (아무래도 전 수도니까)
그러면 XX20년일지 XXX20년일지는 몰라도 20년 겨울부터 21년… 까지는 해월이랑 사찬이 둘이서 다니는 것으로! 사실 일년 딱 같이 다니고 21년 겨울, 거의 같은 날에 헤어지는 이야기도 재밌을 것 같기는 하죠 어차피 가는 길 갈라져도 계속 연락은 할테고(?) 그치만 북미 루트 타면 해월이는 자동으로 정착은 안 하게 되려나요? 쭉 중앙아시아에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가서 형 보고 태평양 건너 북미 가도 괜찮을 것 같고, 아니면 중앙아시아에서 유럽 쪽으로 가서 대서양 건너 북미 가도 괜찮을 것 같은…! 일단은 미래의 이야기지만요XD
30대의 사찬이는… 재미없을 정도로 똑같을 것 같기도 해요🤔 겉으로 보기엔 그다지 안 바뀌었을지도…!
해월이 이메일은… 해월주도 모른다… (메모) 사찬이 이메일은 그냥 schkwon1957@sist.ac.kr 로 해둘게요! (새삼 스스로가 중요치도 않은 설정 디테일에 집착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고…)
오 딱 일 년 같이 다니고 겨울에 다시 헤어지는 것도 좋은데?🤔 정착은 지금으로선 아직 열린 문이야! 오너는 나지만 선택은 해월이가 하는지라 (?) 아마 시기상으로는 북미로 떠나기 전에 한 번쯤은 형을 만나러 갈 것 같네. 이 부분은 나중에 독백으로 처리해야겠지? 아 근데 대서양 건너가는 코스도 끌리고.. 으악ㅇㅁㅇ (머리싸맴
헉 맞아 사찬이는 뭔가 세월 안 타는 이미지야! (?) 나이 먹어도 얼굴 별로 안 바뀔 것 같은 그런..? 왠지 나이 가늠하기 힘들단 얘기도 들어봤을 것 같고:D (아님
일단 그럼 일년 계획 세우고(?) 다음 일상을 쓰다보면(??) 태평양 루트가 나올지 대서양 루트가 나올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갈땐 한국 들러서 태평양 루트인데 사찬이랑 북미에서 만나서, 올 땐 대서양으로 오는 것도 가능^^)9
형 간만에 만나서 여행에서 본 것들 이야기해주고 다시 여행 떠날 거라고 말하는 해월이도… 좋네요… 정착은 언젠가 이곳으로 돌아오겠다, 고 생각하고 여행 계속하는 흐름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요. 여행은 젊을 때 하는 것이다…! (?)
사찬이는 어쩐지ㅋㅋㅋ 고등학생 때나 지금이나 인상도 체격도 전체적으로 비슷할 것 같고 그래요ㅋㅋㅋ (???: 어린 녀석이 인생 다 산 듯한 표정을 짓고 다니니까 그렇지!)
그럼 지금이든 나중이든 일상으로 풀어볼만한 주제는 이 정도려나요!
1. 20년 겨울~21년 겨울 둘이서 중앙아시아 여행: 아마 겨울 동안은 걷기 힘든 계절이니 이동수단 구해서 유빙 보고 이것저것 같이 보러 다니고 봄철에 사찬이 원래 일정 맞춘 뒤에 여름 가을 겨울은 경로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흐름 아닐지! 개인적으로는 가을에 몽골 쪽에 가서… 축제에 한번쯤 참여했으면 싶지만요…
2. 약간 미래편? 2부 느낌? 2n년 북미 버전… 이 부분 시점 같은 건 해월이 설정이랑 맞물릴 것 같아서 해월주가 정해주면 좋겠어요! 사찬이는 그때까지 어차피 별 다를 거 없이 그즈음에 있을 것 같아서() 미래편 나이는 해월주에게 맡깁니다…☆
3. 과거편! 한국에 있을 때의 둘(셋?) 이야기를 해볼 수가 있겠네요. 첫만남도 좋고, 아니면 둘 다 우당탕탕 캠퍼스 라이프(?) 하고 있을 때도 좋고… 이쪽으로 가면 자연풍경보다 세계관 속 사회 묘사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것도 재밌을 것 같기는 해요. 선배 분량이 늘겠군요(?)
4. 이건 일상 소재는 아니고 일단 독백 소재 정리: 북미로 넘어가기 전 형이랑 만나는 해월이 / 중앙아시아로 훌쩍 떠나기 전에 자퇴서 내면서 선배한테 좀 혼나는(?) 사찬이 등등등!
으음 일단 중앙아시아 부근에서 갈라지게 된다면 혼자 도보여행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을 테니 한국까지는 다시 기차를 역방향으로 타고 돌아가는 식이 되려나🤔 아니면 그 근방에서 다른 이동수단을 찾는 걸로 설정을 보강해도 괜찮고? 대서양 루트로 가려면 아예 유럽까지 같이 간 다음에 헤어지..는 게 경로상 가능하려나? (고민
아마 한국에 잠깐 들른 거라고만 하면 형은 좀 서운해하지 않을까 싶네😁 꼬박꼬박 메일도 주고받지만 한참 어린 동생이 아직 많이 걱정될 것 같단 말이지:)
뭔가 30대 사찬이도 딱 사찬이답다는 생각이 드네! 해월이 성장버젼.. 그것은 해월주도 모르는 비밀의 시크릿.. 미스터리.. (?
음 일단 지금까지 나온 건 그 정도가 아닐까 싶어! 새삼 아직 돌릴 거리가 한참 남았다 싶네🙃 소재가 무궁무진해서 더 기대되는걸! 앞으로도 잘 부탁해 사찬주:D
유럽까지 가는 것 자체는 문제 없을 것 같아요. 어차피 우체통에 편지 넣을 때까지만 해도 예정 경로는 타슈켄트 → 구레프 → 앙카라 → 이스탄불 → 아테네였으므로(?) 만약 한국 쪽으로 돌아가는 경로라고 하면… 음 1년 후 다시 모스크바에서 헤어지는 방법이 있네요. 수미상관적 의미로는 좋다고 생각해요! 거기서 다시 기차를 타고 돌아가는 것도 가능한 흐름이기도 하고, 가는 도중에 다시 반가운 얼굴이나 풍경을 달라진 감상으로 보게 될지도 모르는 거고요☺️✨
선배… 정말 키워놨더니 애들이 다 집을 나가네요…(?) 사찬이는 정말 계속 바깥으로 나돌테고, 해월이도 잘하면 여행라이프 살 것 같아서ㅋㅋㅋ… 그치만 왠지 형은 여행… 안 오실 것 같단 말이죠, 나까지 연구실에서 빠지면 어쩌냐고 하실 것 같단 말이죠🙄
ㅋㅋㅋ그래도 사실 사찬이는 정기적으로 선배에게도 (자주는 아니더라도) 이메일도 보낼 것 같고 사진도 보낼 것 같고 그렇기는 해요(?) 해월이랑 만났다는 이야기도 이미 하지 않았을까? (선배는 이메일 답장으로 여느때처럼 좀 불평했을지도 모르지만) 원래 적당히 크면 독립도 하고 그러는 거죠(?)
ㅋㅋㅋㅋㅋㅋㅋ아마 원래 크면 다 독립도 하고 그러는 거란 얘기를 들으면 형은 ༼;´༎ຶ ༎ຶ`༽ <-또 이 상태가 되지 않을까.. 아무래도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 없이 어린 해월이를 키웠다 보니 형제 말고도 부모 같은 느낌도 있을 거구! 해월이도 사찬이랑 만났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을까 싶네:D
근데 정말 부모님 같은 느낌이긴 했을 것 같아요. 띠동갑이니까 사실 나이차 많이 나는 형뻘~나이차 적게 나는 삼촌뻘? 정도지만… 해월이가 혼자 산다고 하면, 그것도 외국에서 혼자 산다고 하면 독립해서 날아가는 아기새 보는 기분이려나요ㅋㅋㅋㅋ (물론 이쪽은 통신이 가능하지만)
둘이 만났다는 이메일이 거의 비슷한 시점에 나란히 메일함에 들어와 있어서, 또 새삼 왜 나랑 해월이는 그렇다쳐도 쟤네들끼리 닮은 거지? 하는 선배도 생각나고 그러네요ㅋㅋㅋ
으아아 이럴수가 시험공부 하다가 14일은 아예 못들어와버렸네요88 그래도 이것저것 일 마무리도 요번주 중으로 끝날 거라, 다음 일상 돌리는 건 무리 없을 거에요!
선배 안경…! (아주 좋은 생각이라는 의견) 호남형인 것도 좋은 것 같아요…! 해월이랑 친형제인데 색소는 엷을까요? 개인적으로는 좀 더 색이 진해도 좋고, 아니면 색이 엷은데 인상의 선은 좀 더 굵어서 이국적으로 보이는 외모~ 같은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좀 북방형 외모(?) 해월이가 정말 정착하면 연구실에 장기휴가 몰아서 내고 와서 봐도 좋겠네요ㅋㅋㅋㅋ 셋이서 간만에 모였는데 외국이라던가?
에구 사찬주가 시험공부때문에 고생이 많네;^; 너무 무리하지 말고 몸 챙겨 가면서 하기야! 요즘 안그래도 날씨도 추운데;^; 일상은 여유롭게 돌려도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구:>
으음.. 뭔가 형은 해월이랑 다르게 한국적인 유전자가 좀 더 진하다는 내 안의 뇌피셜이 있다! 머리 색도 해월이보다는 짙을 것 같구:3 헉 근데 듣고 보니 이국적인 외모도 끌리고..? 으악 왜째서 내게 이런 시련을ㅇ<-< (기절 헉 셋이서 하는 여행은 또 다른 느낌이겠다ㅇㅁㅇ! 형 한 사람 낀 거 가지고도 분위기가 180도 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드네◝(⁰▿⁰)◜
어므으어아악 사찬이가!! 사찬이가 머리가 짧아요!!!! 리즈사찬이야!!!!!! ༼;´༎ຶ ༎ຶ`༽ 애기 해월이도 만들어보고 싶어서 픽크루를 열심히 뒤지고 있다는 건 안 비밀이지롱:3
저녁 10시에 잠들어서 새벽 내내 깨다가 자다가 여덟시에 기상해서 다시 졸다가 깨다가 멍하니 있다보니 오후네요(❁´∇ `❁)💦
선배가 해월이랑 겉보기에 외모가 많이 다르다면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외모가 닮는 거랑 별개로 인상은 확실히 다를 것 같고요XD 셋이서 여행하면 별로 조용하지 않을 것 같긴 하네요ㅋㅋㅋ 걷기보단 자동차 여행이 어울릴 것 같은 인상이에요 선배는… 이 시대에도 국제운전면허의 개념이 있으려나요? 없겠죠…? 왠지 선배가 운전할 것 같아서(??) 핫 선배가 운전하면 조수석은 사찬이일까요 해월이일까요? 한국에서는 어땠을 지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애기 해월이…! (헉) 후후 두근거리고 있을게요💕 사실 픽크루를 좀 더 가져오고 싶은데 이미지에 맞는 걸 찾기가 힘드네요… 혹시 더 만들게 되면 또 가져올게요!
시험이 끝나면 할게 많았던 것 같은데 전-혀 기억이 안나요🤔 일단은 점심을 먹으러 나가야 하지만요! 해월주도 맛점하세요!
헉 나도 이것저것 하다 보니 벌써 오후네ㅇㅁㅇ 사찬주도 시험 보느라 고생 많았고 당분간은 푹 쉬기야:D
일단 나도 픽크루를 들고 왔..는데... 너무 어린가? (동공강진) 초딩으로 보기에 무리가 있다면 대충 5살 정도라고 봐주면 되지 않으려..나..ㅇ<-< 맞아 요즘은 픽크루 찾기가 또 은근 힘들더라;^; 얼마전에 괜찮은 픽크루 주소를 모아둔 걸 또 날려먹어서..8v8
뭔가 셋이서 자동차 여행을 한다고 하면 선배-운전석 사찬-조수석 해월-뒷좌석 이렇게가 어울릴 것 같아XD 해월이는 뒤에서 타고 가다가 중간에 조금 졸기도 할 것 같구>:3 국제면허.. 라기보다 그냥 면허가 국제면허가 되지 않으려나? 애초에 국경의 의미가 별로 없댔으니 (흠티콘) 한국에서도 형이 운전하면 해월이는 주로 뒷좌석에 탔을 것 같네!
셋이서 같이 있으면 대체로 조용하려나요! 하긴, 둘만 있을 때 보다는 좀 나을 것 같기는 해요. 둘 다 말수가 적긴 하지만 말 걸면 곧잘 대답하는 편이니까(말의 앞뒤를 끊어먹긴 해도) 국경의 의미도 면허의 의미도 사실 이젠 거의 없지 않을지ㅋㅋㅋ… 도시 국가 내에서는 면허 발급 여전히 해주지만 초원 같은 인구가 밀집하지 않은 지역은 무법지대(?)겠죠…
그래도 치안이 유지된다는 설정을 넣고 싶어서 자원은 풍부하고 인력은 귀하다 < 라는 설정을 넣은 거지만… 일단 포스트 아포칼립스니까 어딘가는 정말 범법지대일지도요🤔 있다고는 해도 당장은 그런 쪽 이야기를 할일은 없겠지만요 (분위기랑도 안 맞고!)
않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큐 사찬주 맞으면 안돼ㅋㅋㅋㅋㅋㅋㅋㅋ 저때는 아직 볼이 말랑찹쌀떡이었을 시기지.. 지금도 볼살이 쪼끔은 남아있을 것 같긴 하지만XD 응응 나도 좋은 저녁 보내고 있었지😊 오늘은 무려 고기를 구워 먹었다구!!
뭔가 대화의 주도는 거의 대부분 형이 할 것 같은 이미지니까! 말주변도 좋은데 이것저것 잡다한 지식도 많아서 대화 되게 잘 할 것 같구.. 사찬이가 간간히 맞장구 쳐주고 해월이는 말없이 듣기만 할 거라는 내 뇌피셜이 있다^ㅅ^ (사찬주: ? 그러게.. 분명 어딘가는 범법지대가 있지 않을까😱 어디까지나 목표는 재앙 이후 두 사람의 평화로운 여행 이야기니 아마 범법지대를 지나게 될 일은 없겠지만 대화에서 잠깐 언급만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맞아 뭔가 이전에도 우범지역이었던 곳(남미라던가)이 그렇게 되었으려나 아니면 아예 새로운 곳이 범법지대가 되었으려나? 🤔 강도단도 분명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
헉 크리스마스ㅇㅁㅇ!!! 으음 개인적으로 해월이는 둘 다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아마 카메라를 선물받으면 사진 찍는 걸 알려달라고 할지도? 🙃 책은 뭐 원래 좋아하니까 또 계속 곱씹으면서 읽을 거구! 어느 쪽이든 좋아할 테니까 사찬주가 끌리는 대로 주면 될 것 같아XD 그러고 보니 난 사찬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뭘 줘야 하지..? (머리싸맴
12월 24일. 흔히들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부르는 날이다. 이전에는 오히려 성탄절보다도 전야인 이날을 더 떠들썩하게 축하했다고는 하나, 인구수가 확연히 줄은 지금에 와서는 그것도 전부 옛말이다. 다만 붉은색과 녹색 전구에 감겨 빛나는 커다란 나무를, 소년은 책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선물을 교환하는 풍습은 아직도 얼마간 남아 있었지만, 화려한 장식과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는 제법 큰 도시인 모스크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나마 간간히 보이는 문간을 장식한 붉은 꽃이—소년은 그 꽃의 이름이 포인세티아이며, 꽃처럼 보이지만 실은 꽃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빛바랜 기념일의 흔적을 간신히 드러내고 있었다.
소년이 향하는 곳은 그가 머물고 있는 숙소였다. 역 근처의 작은 호텔. 다행히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덕분에 소년이 추위를 뚫고 먼 걸음을 해야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낡은 목조 건물과 그 위에 달린 놋 간판까지 한 번 올려다본 뒤, 소년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맞이하는 훈훈한 공기에 붉게 달아오른 코끝이 조금 아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역시 작지만 난잡하지 않은 로비에는 커다란 괘종시계를 제외하면 주목할 만한 점은 없었다. 그를 만나기로 하고 이곳에 왔지만,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조금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소년은 그 시간을 로비에서 기다리며 보내기로 결정한다. 조용한 공간을 채우는 초침 소리를 들으며 소년은 벽에 기대어 섰다. 이제 곧 저 시계가 정각을 알리면 그가 내려오리라. 물론 그보다 빠를 수도, 혹은 늦을 수도 있다. 소년은 가만히 눈을 감고 귀기울이며 숫자를 세었다. 45초, 70초, 100초. 내친김에 자신의 심박도 세어 보았다. 소년의 심장은 저 시계의 톱니바퀴보다는 느리게 뛰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내려오는 발소리에 소년은 비로소 눈을 떴다. 얼굴을 보지 않더라도 그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아직 시계는 정각을 알리지 않았다. 그는 으레 약속에 늦곤 하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다. 잠시 대화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고민하다, 소년은 이내 할 말은 한 가지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답하는 말투는 무겁지 않다. 일찍 왔구나, 하고 건네는 말도. 로비의 오래된 의자에 걸터앉아 그를 기다리던 소년의 눈동자가 잠시 시야에 든다. 사람의 안구를 유리구슬 같다고 표현하는 건 재앙 시대 이전이 아니더라도 흔한 비유인데도, 그는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고만다. 빛이 비치면 간혹 투명하게 까지 느껴지는 그 밝은 색. 그러나 그것도 잠시이고, 이내 소년의 시선은 다시 아래쪽을 향한다. 그 대신 시야에 든 것은 붉어진 뺨, 코끝, 그리고 귓가이다. 실내에 들어와있던 덕인지 발그레 혈색이 돌기 시작했지만, 얼어붙을 듯한 추위는 그래도 흔적을 남긴다.
눈을 한번 깜빡이며, 시선의 끝에 걸린 포인세티아의 붉은 잎을 스쳐보낸다. 성탄 전야, 라고 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 준비해두었던 것은 주머니 속에서 바스락 거리지만…… 장갑만으로는 안되려나. 하긴 방한구는 많은 편이 좋았지, 하고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무심코 그러고 나서야 소년이 앞에 있었지, 하고 떠올리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고개를 끄덕이는 몸짓은 사실상 타인에게는 의미불명의 행동이겠으나, 소년은 크게 신경쓰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몇년간 혼자였던 버릇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점심은 먹었느냐고 물으려다, 그는 잠시 멈춘다. 비슷한 말을 했던 기억이 있어서. 매 끼니를 챙기는 일 역시, 요 몇년간 그에게 익숙한 일은 아니었다. 홀로 걷는 먼 길에서, 식사의 형식을 따지기란 지난한 일이다. 허나 소년을 앞에 두고서, 그는 어떠한 형태의 ‘버릇’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끼니를 챙기고, 식사의 형식을 고민하던 것은 길을 떠나기 전, 무언가를 배우며 머무르던 시절의 버릇이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의. 실상 그 자신의 버릇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애매한 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주입됐다고 하는 쪽이 낫지 않나, 그는 조금 눈을 굴리는 투로 생각한다. 결국에는 ‘선배’의 영향이다.
“……가고 싶은 곳 있나?”
한숨을 내쉬는 대신, 그는 소년의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보며 질문한다. 방한구든, 선물이든, 점심식사든, 천천히 하나씩 하면 되겠지.
소년은 고개를 작게 흔들어 보인다. 지금까지의 여행에서 행선지는 항상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소년이 그곳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의 경우에는 그들, 이 가고 있다고 해야 정확하겠지만.
소년은 고개를 살짝 틀어 포인세티아를 내려다본다. 불과 반 년 전까지만 해도 소년은 모스크바에서 그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맞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타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고, 소년은 한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크리스마스는 메일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년은 잠시 한국에 남은 형은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낼지 생각해 본다. 아마 형의 입장에서도 이번 크리스마스는 감회가 새로울 것이라고, 소년은 짐작한다.
"걷고 싶어요."
행선지 대신, 소년은 원하는 바를 밝힌다. 어디를 얼마나 걷는지는 상관없으니, 그저 그와 함께 크리스마스 이브를 걷고 싶다는 것이 소년의 희망이었다. 밖은 춥지만, 짧은 산책을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리라. 소년은 주머니 속에서 온기에 녹은 손끝을 꼼지락거리다 문득, 바스락거리는 포장지를 살짝 잡는다. 나름의 크리스마스 선물, 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지만.
걸어서 갈 만한 곳이 어디가 있더라. 그는 그리 생각했다가 금방 멈춘다. 이런 경우 걸어서 도착하게 될 목적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그도, 소년도 알고 있다. 어쩌면 ‘도착’하지 않을 수도 있고. 걷는 일에 박하지 않은 그는 그저 가벼운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하고는 말한다.
“……그럼 가자.”
옛 러시아의 거리는 그럭저럭 여전하다고 써도 될만한 풍경이었다. 대재앙도 이전 시대의 모습을 아예 거두어 가지는 못했다. 그 풍경에서 그는 문득, 이전에 읽었던 어떤 재앙 이전의 문학을 떠올린다. 아포칼립스 SF였던가. 아직 오지 않은 종말의 순간에 대해 써내려가던 작가의 그 상상력은 확실히 빛나는 종류의 것이었으나, 역시 현실과는 달랐다. 정작 찾아온 멸망은 충분히 갑작스러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절 뿐이었다. 그리하여 삶은 그대로라고는 할 수 없는, 그러나 여전한 모양으로, 이어진다.
또각, 또각, 워커의 두꺼운 밑창이 오래된 돌바닥과 부딪혀 소리를 낸다. 어제는 분명 두텁게 눈이 왔는데도. 그리 쌓인 눈이 이 날씨에 벌써 녹았을 리는 없으니, 이 걷기 편한 길 역시 사람의 손이 닿았으리라. 보이지 않아도 분명 인간에 의해 손질된 도시는 단정한 회색빛으로 고요하다. 반절의 종말. 고요하게 손질된. 그리 말 없이 걷다가, 그는 문득 곁의 소년을 돌아본다. 누군가와 보폭을 맞춰 걷는 길이 간만이라 새삼스럽기도 하였고, 소년의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시선 끝에 걸린 참이기도 했다.
옅은 색의 머리칼. 소년은 그가 익히 아는 남자와 닮은 듯, 또한 닮지 않았다. 말주변이 좋고, 사람과 대화하는 일 역시 즐기는 선배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한마디 한마디, 대화라기보다는 내면의 정리에 가까운 소년의 화법을 생각하면 가끔 신기할 정도라고, 그는 역시 별로 표정을 바꾸지 않고 생각한다. 그가 소년에게 시선을 둔 짧은 순간이 지나고, 넓은 광장의 가장자리를 따라가던 길이 끝나 다시 골목길의 초입이다. 갈래갈래 갈라진 길에서 그는 잠시 걸음을 늦춰 소년이 길을 선택하게 둔다.
#크리스마스도 벌써 다 지났네요 #그래도 연휴는 아직 남았으니 즐겁게 보내길! #늦어서 미안해요8ㅅ8
그는 소년보다 키가 크지만, 그와 나란히 걷는 일이 힘들었던 적은 없었다. 아마 그 쪽에서 보폭을 맞춰 주고 있는 것이리라. 군데군데 쌓여 있는 눈 무더기가, 아직 발자국이 남아 있는 보도 블럭이, 담쟁이 덩굴에 휘감긴 붉은 벽돌 벽이 살짝 내리깐 눈에 담긴다. 소년은 그 모든 장면을 기억 속에 갈무리한다. 다행히도, 소년은 이런 방면에서는 기억력이 좋은 편에 속했다.
골목길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 사이에 이렇다 할 만한 대화는 오가지 않는다. 하지만 소년은 그 침묵이 불편하지 않다. 그리고 소년은, 아마 그도 같으리라고 짐작한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관계보다도 더 값진 건 침묵을 나눌 수 있는 관계다. 소년은 그와 함께 있을 때 흐르는 침묵을 제법 좋아했다. 갈림길에서 잠시 고민하던 소년은 이윽고 한쪽을 택해 걸음을 옮긴다. 그 선택에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소년은 자신에게 선택권을 준 그에게 작은 고마움을 느낀다.
발길 가는 대로 움직였으니 목적지가 정해져 있을 리도 없다. 그래서 소년은, 길이 끝났을 때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 딱 알맞은 폭의 골목 끝에 자리잡고 있는 건 작은 식당이다. 이 문에도 역시 작은 크리스마스 장식이 걸려 있다. 크리스마스의 화환이다. 그라면 이름을 알 수도 있겠다고, 소년은 생각한다.
"들어갈 거예요."
물음표가 붙지 않은 질문은, 소년에게는 이미 익숙한 화법이었다. 작게 열린 문 틈새로는 스튜의 냄새가 흘러 나온다. 창문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내부는 따스한 색의 조명이 채우고 있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작고, 조용한 곳이다. 소년은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설령 무언가를 먹게 되지 않더라도.
그는 반 박자 느리게, 소년에게서 시선을 떼어낸다. 그리고 답을 기다리는 대신, 그냥 문을 밀어 열었다. 어떤 의미인가로는 이미 답이 있었을 것이다. 목소리의 형태로 돌아오지 않는 답일 뿐. 작은 차임벨 소리와 함께 문틈이 벌어지자, 온기를 품은 공기가 훅 끼쳐 생각의 맥락을 끊어낸다. 문을 닫자 바람 소리가 멎어, 흔한 음악 하나 틀지 않은 실내는 고요하다. 거리를 걸을 때는 바람소리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도, 그 작은 변화가 새삼스럽다.
작달까, 폭이 좁은 실내는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한 눈에 들어와 앉을 자리를 찾는 일도 어렵지는 않았다. 문가에서 조금 떨어진 약간 어둡고 따스한 자리를 찾아, 앉는다. 자리에 앉아 다가온 사람은 점원, 아니면 주인일 것이었다. 고요의 첫인상은 틀리지 않았는지, 다가온 사람도 말 없이 메뉴판을 내려놓고 이내 돌아간다. 그는 메뉴판을 소년의 쪽으로 밀어주었다.
여행자를 위한 가게는 아닌 듯, 메뉴판은 러시아어로만 적혀있었다. 소년이 키릴 문자를 읽을 줄 알던가, 잠시 생각하며 그는 소년의 쪽을 쳐다본다. 소년은 이미 메뉴판을 읽고 있는 건지 가게의 노란 조명을 받은 머리카락만 흔들린다. 서있을 때뿐만 아니라 앉아있을 때도 그들은 키차이가 난다. 그리하여 평소 시선이 낮은 편인 소년의 눈동자를 보기란, 그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그게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가끔은 아쉽다고, 그는 턱을 괴고 생각한다.
/둘이 할 줄 아는 언어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못 찾겠어서 착각인가 했어요() /좋은 밤 되세요 해월주!
나도 뭔가 얘기했던 기억이 나는 것 같은데.. 신기하네<:3 아무래도 한두 마디 정도는 주워듣고 말할 수 있지 않으려나 싶은 생각이 드네:D 그래도 학교에서 체계적으로 배운 게 아닌지라 듣기랑 말하기보다는 읽기랑 쓰기에 좀 더 어려움을 느낄 것 같기도 하구XD 나중에 모르는 거 있으면 사찬이한테 가르쳐 달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٩(*•̀ᴗ•́*)و
소년은 눈을 내리까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뒤 그를 뒤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훈훈한 공기에 코끝이 또다시 발갛게 달아오르지만 소년은 알아채지 못한다. 자리에 앉아 외투를 벗은 뒤 소년은 내부를 한 바퀴 둘러본다. 좁다기보다는 아늑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공간이다.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사람도 없다. 소년은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소년은 메뉴판을 건네받아 펼쳐 본다. 그간의 여행을 통해 러시아어 한두 마디 정도는 더듬거리며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지만, 아직 키릴 자모에는 익숙하지 않다. 학교에서 정식으로 러시아어를 배운 적이 없으니 당연한 결과이리라. 한글과도, 알파벳과도 묘하게 다른 글자가 둥둥 떠다닌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년은 메뉴를 유심히 읽는다. 평소에는 항상 무심한 얼굴 위로 드물게 무언가에 골몰하는 표정이 떠오른다.
낯선 글자를 훑던 소년의 시선이 익숙한 이름 위에서 멈칫한다. 이전에 다른 곳에서 한 번 먹어본 적이 있는 메뉴였다. 아마 붉은 수프 요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소년은 그 이름을 어떻게 읽는지 알지 못한다. 지난번에 주문했을 때는 그저 손가락으로 메뉴판 위를 가리켰을 뿐이었다. 해서, 소년은 그에게 묻는다.
소년이 보인 메뉴판에 그의 시선이 잠시 머무르고, 이내 답한다. 보르시치라고 읽을 수도 있고. 지방에 따라 발음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덧붙이고 그는 다시 자세를 바로한다. 소고기와 붉은 비트, 그리고 사워크림이 들어간 북구의 가정식 수프는 그에게도 익숙한 맛이다. 아니, 사실 몇가지 향신료 외에는 한국의 요리와 유사한 구성이니 어떤 의미로는 익숙한 것도 당연하지만.
그는 소년에게 먹고 싶은 게 따로 있냐고 물으려 했지만, 그런다고 해도 소년에게서 명확한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느쪽이든, 생각해보면 그것도 익숙한 일이었다. 그 본인 스스로도 먹는 일에는 어지간히도 무던하여, 식당에 둘러앉아 메뉴를 고를 때도 그다지 확실한 답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저것 다 좋아서 고민한다기 보다는 선호도의 차이가 적어서 다 비슷비슷하다보니 생기는 문제였다.
"……먹고싶은 건?"
결국 질문을 던지고서도, 그는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한다. 한국에서도 그는 편하다는 이유로 학식을 선호했고, 혼자 놔두면 구내식당에서만 끼니를 떼우는 그를 선배가 소년과 같이 식당으로 데려가곤 했었다…… 잠시 이전 어느 순간의 풍경을 떠올리다가, 그는 옛 생각이 많아졌다는 것을 느낀다. 아저씨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아직 과거를 그리워할 정도로 늙었다고 하기는 힘든 나이일텐데.
열없이 생각을 이어나가던 그는 시선이 문득 소년에게 닿고 나서야 깨닫는다. 회상은 그의 앞에 앉아있는 소년 덕일 것이다. 먼 땅에서 홀로 지내던 몇년간의 시간을 뛰어넘어, 이 먼 북쪽까지 도달한. 납득한 그는 조금 즐거워진다. 어떠한 사건을 이해하게 되는 일은 그에게는 재미있다고 할 종류의 일이었다. 정합성을 조립하는 일. 그러고보면 편지에서도 계속 기대를 표현했던 그이다. 소년과의 재회 이후로, 그는 계속 들떠있는 상태라고 할수도 있겠다. 알아채기 힘든 방식으로.
보르시, 보르시. 소년은 입속으로 조용히 그를 따라 중얼거려 본다. 이걸로 읽을 수 있는 러시아어가 하나 더 는 셈이다. 고요한 눈이 키릴 문자를 담아 새긴다. 여행을 시작한 순간부터 늘 그랬듯이, 언제 어디서 새로운 걸 배울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소년은 이 러시아 수프, 또는 보르시를 깜짝 선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름을 아는 것과 주문하는 것은 별개다. 익숙한 것을 선택할지, 아니면 새로운 것에 도전할지. 소년은 고민의 순간마저도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소년은 이런 소소한 선택의 기로에서 생각에 잠기는 것을 좋아한다. 한참을 말없이 메뉴판을 들여다보던 소년은 마침내 손가락으로 한 지점을 가리킨다.
"이건 뭐예요?"
소년이 고른 메뉴는 비네그렛винегрет이라고 발음하지만, 소년은 아직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비네그렛이 보르시와 상당히 유사한 색감의 샐러드 요리라는 것도, 소년은 알지 못한다. 다만 마음이 가는 대로 선택했을 뿐이다. 소년이 이 식당을 발견했듯이. 소년은 버릇처럼 눈을 내리깔고 침묵한다. 사실 그가 대답해주지 않아도 크게 상관은 없다. 하지만 소년은 그가 또 하나의 낯선 단어를 알려줄 것이라고 믿는다.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는 퍽 기묘한 방식이긴 했지만, 소년은 가끔 이런 식으로 그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곤 한다.
/사찬주는 보르시치를 먹어 본 적이 있구나:3 난 직접 먹어 본 적이 없어서 언젠가는 꼭 시도해보고 싶어:D 다소 늦긴 했지만 오늘 하루도 즐겁게 보내길 바라구XD
그리고 그는 낮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뒤집어진 N과 같아 보이는 문자는 ‘이’ 라고 부르고 그런 발음이 난다던가, 영어의 H와 같아 보이는 문자가 외려 ‘엔’의 발음이 난다던가 하는 이야기를 덧붙인다. 그리스 문자의 영향을 받은 키릴 문자는 영어의 알파벳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있어 오히려 헷갈리는 경우가 많았다. 필기체만 아니면 아주 못 읽을 건 아니었지만…… 솔직히는, 그도 러시아어의 필기체에서는 곤경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무튼 간에, 비네거라는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새콤한 맛이 나는 샐러드 요리라는 설명까지 덧붙이고 나서, 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다시 조용해진 공기 속에서, 그는 생각에 잠긴 소년의 얼굴을 보는 일이 생각보다 질리지 않는다고 깨닫는다. 조금 웃음기가 있는 이야기였다. 한 사람의 얼굴을 한 사람이 들여다보는 일이, 질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소년이 무얼 고르고, 무엇을 묻는 간에, 그는 매번 키릴 문자를 설명하고, 아는 만큼의 지식을 덧붙일 것이다. 질리지도 않고, 매번.
“……오는 길에 메도빅은 먹어봤어?”
침묵을 지키다가 문득, 그는 물음을 던졌다. 여느때처럼 한가한 말투로 던져진 질문에는 맥락이 부족했지만, 글쎄, 식당에서 메뉴를 보고 있을 때가 아니면 또 언제 물어봐야 맥락이 있는 질문일까. 그러나 그는 역시, 겉으로 드러난 맥락이야 어쨌든, 그리 말이 되는 문맥 속에 던져진 질문은 아니라고 생각하고야 만다. 그야, 그가 그 말을 꺼낸 건 단순히 소년의 흔들리는 갈색 머리칼이, 꿀 케이크의 갈색을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으니까.
꿀과 크림을 겹겹이 쌓아 만든, 그리 달지 않은 케이크를 떠올리며, 그는 이번에는 정말로 훗, 소리내어 웃어버린다. 별로 달지 않다고는 해도, 소년을 표현하기엔 역시 무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 부드러운 연갈색만큼은 정말 닮아있었다. 턱을 괴고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그는 대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려본다.
/ 감기였었나봐요~ 오늘은 괜찮더라구요 ʕ•ᴥ•ʔ✧ / 동대문 근처에 러시아 음식을 파는 곳이 있어서 이 시국 전에는 자주 갔었어요~
소년은 그의 설명을 주의 깊게 듣고 받아들인다. 마치 음식을 천천히 씹어 삼키는 것과도 같은 과정이다. 새콤한 샐러드, 영어처럼 보이지만 영어가 아닌 글자들. 그가 말을 끝마치고도 소년은 잠시간 더 고민한다. 식당 안에 사람이 많았더라면 곤란했겠지만, 다행히도 지금 이곳에 손님은 둘뿐이다. 주인인지 점원인지 모를 사람도 딱히 재촉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이걸로 할래요."
결정은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이루어진다. 소년은 비네그렛이라고 쓰여 있는 글자 위를 손가락으로 짚는다. 배가 크게 고프지는 않은 데다 오늘은 어딘가 먼 곳으로 갈 예정도 없으니, 샐러드 정도면 한 끼 식사로 충분하리라. 고민을 마친 소년은 그의 선택을 잠자코 기다린다. 누누이 말하듯이, 급할 건 없다.
소년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다행히도, 소년은 메도빅이 무엇인지 안다. 먹어본 적도 있다. 한 조각을 다 먹은 것은 아니었지만. 하바롭스크에서 식사를 할 때 있었던 일이었다.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이 자신의 몫으로 나온 디저트를 나누어 주었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러시안은 확실히 아니었다. 동생이 생각난다고도 했다. 그 말을 듣고 소년은 한국에 남은 형을, 그리고 기차에서 만난 카야를 떠올렸다.
어찌 되었건, 케이크는 맛있었다. 소년은 단 음식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에 속한다. 소년은 언젠가 먹었던 꿀과 크림의 맛을 혀끝에 되새긴다. 그리고 형과 카야와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과 층진 작은 케이크를 떠올린다. 그 모든 것은 연장선에 있는 셈이다. 어떻게 보면.
/괜찮아졌다니 다행이야XD 헉 그런 데가 있었구나.. 나중에 코로나가 좀 괜찮아지면 가보고 싶네:D
케이크를 이미 먹어보았다 답하고서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건지 시선을 다시 내리깔던 소년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고개를 끄덕인 그는 자신의 몫으로는 보르시치와 약간의 빵을 주문한다. 손님은 그들뿐이어서, 음식이 나오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따뜻한 수프와, 새콤한 샐러드가 테이블 위에 놓이기까지의 잠시간. 샐러드 뿐으로 괜찮으려나, 싶기는 했지만 생각해보면 그와 달리 소년은 적게 먹는 편이었던 것도 같다. 그들은 닮은 점이 많았지만, 다른 점도 꽤나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야, 결국 타인인만큼 당연한 이야기였다. 따뜻한 수프에 빵을 적시며, 그는 잠시 앞을 본다. 식기를 쓰는 모습을 그렇게 표현하면 안될텐데, 소년이 식사를 하는 모습은 어쩐지 ‘조리있게’라는 표현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 많이 먹지는 않았지만, 소년은 부지런하게 먹는 편이었다. 선배도 그랬었지. 어쩌면 가정교육, 같은 단어를 주워섬겨야 할 것 같은 기분도 들지만…… 그는 빵을 한 입 더 먹고, 그냥 입을 다문다.
소년이 하는 모습은 늘상 그랬던 것도 같다. 조금 천천히, 신중하게, 급할 것 없이, 조리있게, 그리고 성실하게, 잠자코. 밝고 목소리가 큰 소년의 형, 그의 선배와는 다른 결이었지만, 그래서 선배보다도 그와 닮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고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 둘이 닮았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성실하고, 신중하고.
그런 그들을, 그는 좋아한다.
천천히 식사를 마치고, 그는 다시 주머니 속의 물건에 신경을 쓴다. 저번의 외출에서 장갑을 샀었지만 여전히 날씨는 춥다. 조금 더 따뜻한 것으로 할까, 도 생각했었지만 이번에 준비한 건 다른 것이다. 주머니에도 들어가는 작은 카메라. 요즘 들어선 필름이나 폴라로이드보다도 구하기 쉬운, 가벼운 디지털 카메라였다. 사진을 찍는 일은 그의 취미이니, 덕분에 어떻게 생각하면 본인의 취향을 소년에게 권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독서를 즐기는 소년을 위해, 처음에는 책을 선물할 생각도 있었다. 어느쪽이든, 소년은 기뻐해주었겠지만. 그러니 반 이상은 그의 욕심이다. 그러나 소년은 그의 사진들에도 흥미가 있어보였고, 앞으로 걸어나갈 길에서 좀 더 많은 풍경을 남길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는 그런 생각을 한다. 본인이 그러하였듯이.
/ 늦었지요 정말 미안해요88 / 다음부터는 이렇게까지 텀 벌리지는 않을게요 주말 내내 일정이 겹쳤는데 설마 화요일까지 밀릴 줄은 / 으악 지금보니 수요일이네요 흑흑
음식이 나오자 소년은 샐러드를 작게 잘라서 조금씩 먹기 시작한다. 과연, 새콤한 샐러드는 입에 잘 맞는다. 천천히, 하지만 집중하면서. 소년이 음식을 대하는 태도였다. 먹을 때는 테이블에 놓인 음식에 집중하라는 것은 소년의 형의 가르침이다. 소년의 형은 예전부터 유달리 식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소년은 양배추를 포크로 찍어 먹으면서 다시금 형을 떠올린다.
원래부터 양이 많지 않았던 샐러드는 금세 바닥을 보인다. 소년이 포크를 내려놓고 입가를 냅킨으로 닦을 때쯤에는 그도 식사를 마친 기세다. 자연히 소년의 신경은 주머니에 든 선물로 쏠린다. 처음에는 여행하면서 유용할 만한 무언가를 선물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는 이미 웬만한 것은 전부 갖추고 있을 게 자명했다. 거기다 굳이 선물을 보태어 짐을 늘리는 건 오히려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고른 게 지금의 선물이었다.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 불편하지도 않으면서, 언제나 들고 다닐 수 있는. 소년은 냅킨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정리하고는 주머니에서 선물을 꺼낸다. 기름종이로 포장된 선물은 소년의 작은 손에 쏙 들어가는 크기다.
"선물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소년은 그에게 꾸러미를 건넨다. 만약 그가 안을 풀어 본다면, 가죽 끈으로 된 목걸이를 발견할 수 있을 터다. 목걸이의 끝에는 작은 펜던트가 달려 있다. 삼각형 모양의 펜던트는, 단순히 푸른색이라고 칭하기에는 여러 가지 색이 묘하게 섞여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가 악세사리를 즐겨 하는 편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면 활동하는 데 크게 지장은 없으리라. 아니면 굳이 직접 차지 않고 가방에 넣어 두더라도 공간을 많이 잡아먹지는 않을 테고. 소년은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그의 반응을 기다린다.
/나도 늦었다;ㅁ; 미안해! 그리고 현생이 바쁘면 답레는 느긋하게 줘도 괜찮아:D 해월이가 준 펜던트에 달린 보석은 크리소콜라야. 해월이 탄생석이기도 해서 그걸로 골랐는데, 괜찮으려나? :D
언제 선물을 내어놓을까, 잔잔한 낯으로 생각하던 그는 결국 별 수 없이 조금 놀란 표정을 띄운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소년이 생각해내지 못한다고 하면, 역시 그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소년의 선물을 눈 앞에 두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는 주머니에서 자신이 준비한 것을 꺼내어놓는다.
“……여기.”
그리고 별다른 고민없이, 그는 지금 당장 소년의 선물을 끌러보기로 한다. 기름종이로 된 포장을 열고, 꾸러미를 끌러, 조금 투박한 손짓에 툭 떨어진 것은 가죽끈의 목걸이. 잠시 푸른 펜던트를 들여다보다가, 그는 문득 시선을 들어올린다. 시선을 아래로한 소년은 여전하게도 알아보기 힘든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다. 이런 건 어느새 준비한 건지, 소년을 만나고나서야 카메라를 사려는데에 생각이 미쳐, 결국 늦은 저녁이나 이른 아침에 거리로 나섰던 그는 조금 궁금해진다.
그러나 그는 별다른 말을 하기보다도, 긴 가죽끈을 목에 거는 쪽을 택한다. 날씨가 추워진 이후로 늘상 입고다니는 목폴라 위로 가죽으로 된 질긴 끈이, 그리고 펜던트가 드리운다. 제 가슴께에서 반짝이는 빛에 조금 더 시선을 두었다가, 그는 소년을 바라본다. 제가 준비한 것이 마음에 들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별 다르지 않아도 해야할 말은 있었으니까. 옅게 웃으며, 그는 말한다.
에고에고 1월은 내내 정신 없네요… 텀을 줄여보려고 했는데 한동안은 안될 것 같아요 무안하게도() 2월이나 3월 쯤 되면 좀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그리고 펜던트 부분 묘사 읽으면서 너무너무 궁금해하고 있었던 거 있죠(?) 원석 펜던트려나~ 하면서 래브라도라이트려나~ 하다가 삼각형이라는 소리에 레인보우 오라 코팅 카이언나이트 펜던트도 떠올리고(??) 레진도 예쁘고 도자기도 있고 유리도 있고(???) 어떤 걸 상상하셨는지 얘기해주시면 기쁠 거에요✨
소년은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꾸러미를 신기하다는 눈길로 관찰한다. 마치 선물이라는 걸 생전 처음 받아본 것처럼. 하기사, 본래 크리스마스라는 것은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그 전통이라 들은 바 있었다. 대재앙 이전에는 밤사이 아이들에게 선물을 준다는 환상 속의 존재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붉은 옷과 흰 수염을 단 노인은 인류의 대부분과 함께 사라졌다. 결국 크리스마스를 즐긴다는 것 또한 함께할 사람이 있을 때 성립한다는 소리다. 그래서 소년은 그와 함께 맞는 크리스마스가 더욱 기껍다.
소년은 엄지와 검지를 들어 조심스럽게 포장을 푼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작은 카메라다. 이제껏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을 때마다 소년은 타인의 카메라를 빌려야 했다. 하지만 이게 있으면 앞으로는 원하는 만큼 눈앞에 펼쳐진 전경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을 터다. 소년은 이제껏 그가 찍은 사진들을 떠올린다. 내륙의 파도를, 텅 빈 도로를, 청록색으로 빛나는 인공 호수를. 그리고 소년은,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그와 중요한 무언가를 공유하게 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떻게 보면 소년이 그의 안으로 들어간다고 할 수도 있다.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고마워요."
그가 목걸이를 거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소년은 불쑥 말한다. 시선은 평소보다 조금 위로 올라가 있지만, 여전히 그의 눈에는 미치지 못하는 채다. 소년의 형은 그 버릇을 고쳐야 한다고 누누이 말하곤 했다. 대화의 시작은 상대방과 시선을 맞추는 일이라고 하면서.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눈을 바라보지 않아도 그 이상의 무언가가 전해졌다는 것을 소년은 안다. 그래서 소년은 드물게도, 아직 젖살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두 볼에 홍조를 띄우고 작게 미소짓는다. 그 순간만큼은 소년도 영락없는 그 나잇대 아이로 보인다.
"사진, 가르쳐줄 수 있어요?"
여기서 가르쳐달라고 함은 물론 찍는 방법이다. 초점을 맞추고 셔터를 누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겠지만, 소년이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다. 소년은 그와 더 많은 것을 나누기를 바란다. 그의 눈으로 보는 세상을 공유하기를 바란다. 이 작은 디지털 카메라를 통해서.
소년은 반짝인다. 강렬하지 않아도 그건 분명 반짝임이라서, 그는 어렵지 않게 달빛을 떠올린다. 소년의 형이 밝은 태양 같은 사람이라면, 소년은 밤하늘에 떠오르는 미색의 달 같았다. 낯간지러운 문장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건 그의 진심이어서, 아주 예전부터 내내 그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서, 그는 덤덤하다. 그 달빛은 밤을 밝히지 못하니 분명 그만큼 약하다는 것일텐데도, 그 옛날부터 가끔씩 그는 달빛에 눈이 부셨었다. 그리고 그건 아마 저 옅은 색의 달이 소년을 닮았기 때문인 거라고, 그는 소년의 한발짝 뒤에서 시려오는 눈을 감으며 혼자 고요히 납득하고 고개를 주억거려 보던 순간들을 그는 기억한다.
지금보다도 한참이나 어렸던 소년이 기억할런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참으로 많은 순간들이 있었다. 그때는 그도 어렸지. 동아리실의 작은 유리창을 통해 비치던 햇살과, 햇살 속을 가볍게도 부유하던 먼지들. 재앙 이전과 이후의 책이 가득히 꽂혀 오래된 책장들. 조용한 목소리로 앞뒤가 부족한 말들을 속삭이다가, 눈을 마주치지 않고서도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결국은 옅은 빛으로 웃는다. 그러니, 달을 닮은 소년을 Apollo라고 부르는 일도, 그에게는 참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소년은 잔물결 이는 넓은 호수에 비친 달처럼, 잔잔하게 반짝인다. 눈부시게.
“어렵지 않을 거야.”
그래서 결국 그는 또다시 그냥 웃는다. 그에게 여행이란 언제나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 내면의 무언가를 걸어놓고 오는 일이었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어느 하나의 장소에 있지 않고, 그 자신의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이었으니까. 처음 보았지만 그리운 풍경들에서, 사랑하는 것을 발견해나가며,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에 가기 위해 길을 걷는 일. 그의 여행. 그런 그에게 형태를 가진 그리움이 있다면 그건 아마 그 형제들일 거라고도, 그는 생각한다. 그가 사랑하게 된 풍경들의 가장 처음에 있는 이들. 처음으로 그의 카메라를 가지게 되었을 때, 가장 처음으로 남기고 싶었던 풍경.
“시간은 많으니까.”
스스로 처음 사진을 찍었던 순간을 떠올리며, 그는 답한다. 그 카메라는 한국에 두고왔다. 그가 요즘 쓰는 것과는 달리 참 작은 카메라였고, 언젠가 생각이 나서 켜보았을 때는 초점이 흔들려 실루엣만 남아버린 순간이, 노출을 잘못 잡아 하얗게 떠버린 순간이, 그리고 또 어둠 속으로 가라앉아 녹색을 띄게 된 순간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어, 그는 소년이 남에게 빌린 것이 아닌, 정말 소년의 것인 카메라로 처음 찍게 될 풍경이 무엇인지 조금 궁금해한다. 혹은 기대한다고 쓸 수도 있고. 담담한 어조로 덧붙이듯 생각하고, 불현듯 그는 그게 참 기쁜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소년에게 그는 스푸트니크 그 자체다. 단순히 별명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가 하늘을 향해 쏘아올린 작은 공. 광활한 우주에서 홀로 지구 주변을 도는 고독한 인공위성. 기억하지 못할 만큼 아주 먼 옛날, 스푸트니크 이후로 역사상 유례없는 발전이 이루어졌더랬다. 소년의 시간 역시 그를 만나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낡았지만 아늑한 방에서 오래된 책을 펼쳐 두고 나란히 읽던 그 시절의 경험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소년에게 생각보다 큰 영향을 주었다.
소년은 진지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들에게는 시간이 많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다. 여행길에 오른 사람은 이제 혼자가 아니고, 하나와 하나가 만나 둘이 되었다. 그러니 차근차근 배우면 되리라. 초점을 잡는 법도, 각도를 조절하는 법도, 그리고 내면의 한 조각을 어딘가에 걸어놓고 오는 법도.
소년은 카메라의 서늘한 표면을 손끝으로 훑는다. 버튼 하나하나를 천천히 쓰담으면서, 소년은 앞으로 이 카메라가 어떤 순간들을 담게 될지 잠시 상상에 잠긴다. 여행 가방은 그리 크지 않지만, 다행히 소년 또한 짐을 많이 들고 다니는 편은 아니다. 설령 가방이 꽉 차 놓을 자리가 없다 하더라도, 목에 걸고 다니면 그만이다. 예전에 책에서 읽은 배낭여행자들처럼. 물론 지금에 와서는 배낭여행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그 이전에 여행 자체가 드문 일이 되어 버렸지만, 그럼에도 소년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차를 탔다. 그러니 종말 이후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의외로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지도 모른다. 항상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이다.
소년은 컵에 남은 마지막 물 한 모금을 여러 차례에 걸쳐 조금씩 나누어 마신다. 컵을 내려놓은 뒤에는 연이어 냅킨으로 입가를 닦는다. 마지막으로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는 것으로 일련의 행위는 끝을 고한다. 다 먹었나요, 라던가 이제 그만 나갈까요, 따위와 같은 질문은 구태여 하지 않는다. 그저 기다리는 것이다. 조용히, 그리고 고요하게.
그는 식대를 계산하고 팁을 더해 영수증에 끼워 놔둔다. 소년이 컵에서 입을 떼었을 때 쯤에는 그 역시 계산을 끝내고, 다시 턱을 괴고 앉아 있는 참이었다. 냅킨으로 입가를 훔치고, 가지런히 손을 무릎 위에 올리는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는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낸다.
“갈까.”
방금의 반짝이던 순간을 잊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이면서도, 다시 흘러나온 목소리는 여느 때와 같이 평이하다. 어디로, 라던가 하는 질문은 덧붙이지 않는다. 함께 크리스마스 이브를 걷고, 처음 보는 식당에 들어와 같이 끼니를 하고…… 그렇게 보내는 순간순간들을 소중하다 생각하는 건 아마 그뿐만은 아닐거라고도, 그는 생각한다. 그러니 평이한 목소리는 그저 만족감의 표현에 대한 변주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함께하는 다정한 삶에 대한.
그들은 거의 동시에 일어서고, 식당의 주인장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다시 거리로 나온다. 해가 짧은 북쪽의 땅이지만, 점심 무렵의 햇살은 여전히 찬란하다. 조명이 어두웠던 식당에서 거리로 나서면, 조금은 눈이 부셔올 정도로. 잠시 눈을 깜빡여보고, 그는 소년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3시 차였던가.”
드넓은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는 열차에 대해서라면, 그에게는 간접적인 지식 정도 밖에는 없다. 유스호스텔에서 마주친 또다른 여행자들이 때로 두서없이, 때로 차근차근 이야기하던 경험담들 뿐. 그러나 인상 깊었던 것은 대재앙 이후에도 건재한 그 열차 안에서의 시간은 바깥과는 다르다고, 푸른 눈동자로 이야기하던 어느 여행자였다. 그 내용보다도, 그리 말하는 이가 그 시간을 그리워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뚜렷하게 묻어나서, 그래서 기억에 남겼다.
그리고는 조금 다르게 실질적인 이야기도.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약 1만 킬로미터에 이르는 그 길에선 모두 모스크바의 시간을 쓴다고. 모스크바보다 7시간이 빠른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같은 시간을 쓴다고. 그래서 때로는 열차의 시간을 헷갈릴 때가 있다고. 열차 안에 걸린 시계 모두가, 그 열차가 달리는 땅과는 다른 시간을 가리킨다는 사실이 그에겐 흥미롭게 들렸었다. 결국 그 열차를 정말로 타게 되었을 때는, 그 시간이 일치하는 단 한 곳에서 시작하게 되었지만.
그러니 오늘 그들의 오후 세 시는 어디까지나 오후 세 시였다. 점심식사를 막 끝내고 난 후인터라 아직 시간이 넉넉하긴 하였으나, 여행 길에서는 부지런하여 나쁠 일이 없다는 것을, 그도 소년도 이미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목길을 돌아서, 다시 광장으로 나서는 걸음은 느적느적 여유롭다. 조급해질 필요까지는 없었으므로.
“그럼 조금 있다가,”
어제도 오전에도 지나쳤던 광장의 가장자리에 서서, 그는 말을 맺으려다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그만둔다. 말을 하는 일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여행을 떠난 이후 그는 딱히 말을 아끼지도 않았다. 먼 곳에서, 처음 만나는 이들의 사이에서, 말마저 없이 걸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긴 길을 건너 온 소년은 여전히 말이 적었고, 이제는 그마저 점점 소리가 적어지니, 어쩌면 소년의 침묵을 닮아가는지도 모르겠다. 닮아가는 걸까, 돌아가는 걸까. 어느쪽이든, 그에게는 편안했다. 소년의 형이 보았다면 너희들은 너무 말수가 적다고, 또다시 투덜거리는 체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소년이 먼저 걸음을 옮기기를 기다리다가, 돌아서서 호텔로 걸음을 옮긴다. 오후 세 시, 다시 길 위에 오르기 위해서.
소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가 주인장에게 인사를 건네는 동안 소년은 한 발짝 뒤에서 시선을 내리깔고 가만히 서 있는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소년은 그를 따라 거리로 나선다. 실내에 얼마나 있었다고 쌓인 눈에 반사된 햇빛이 그새 눈부시다.
소년은 또다시 말없이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다. 소년은 이제는 익숙해진 열차에 몸을 싣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향해 떠날 예정이다. 하지만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소년은 잠시, 그와 함께하는 열차 여행에 대해 상상해 본다. 해박한 지식을 지닌 그라면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 대해서도 설명해 줄지도 모른다. 열차를 배경으로 한 또다른 종말 이전의 문학을 소개해줄 지도 모른다. 사실 그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두 사람이 함께라는 사실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리고 그 다음 목적지는 어디가 될지, 소년은 아직 알지 못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경쓰지 않는다. 시작부터 계획되지 않았던 여행이다. 그저 바람처럼, 유빙의 울음소리처럼, 혹은 초원을 내달리는 야생마 떼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그를 동경해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여행의 목적은커녕 종착지조차 정하지 않았다. 그저 선로를 따라 이동하다가, 마음에 드는 정착지에서 하루 묵기도 하고, 혹은 더 길게 머물기도 하고, 얼어붙은 바이칼 호를 보러 가기도 하고. 그런 여행이었다.
선로의 끝자락에서 그를 만나리라는 것 또한, 처음부터 상정한 일은 물론 아니었다. 만나기를 바랐고, 같은 경험을 공유하기를 바랐지만, 바라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와의 재회는 소년에게는 선물과도 같았다. 콤소몰스카야의 작은 카페가, 보르시치와 비네그렛을 파는 이름 모를 식당이, 소년에게는 전부 선물이다. 목에 걸려 달랑거리는 작은 카메라와도 같이.
"나중에 봐요."
작별이 아닌,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인사. 잠시 뒤면 두 사람은 각자의 짐을 들고 역에서 다시 모일 것이다.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혹은 중앙아시아로, 그도 아니면 발을 딛어본 적 없는 미지의 곳으로 떠날 것이다. 소년은 마지막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몇 발짝 걸어간 뒤, 멈춘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다. 멀어지는 그의 등이 소년의 눈에 들어온다. 소년은 그 순간, 이 작은 카메라의 첫 번째 피사체로 무엇이 가장 완벽하게 어울리는지 깨닫는다. 그리고 카메라를 들어올린다.
소년은 첫 사진을 그에게 보여줄지, 아니면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할 지 아직 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이 사진은 언제까지나 소년과 함께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소년은 곧, 그거면 되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등을 돌려 숙소를 향해 마저 걸어가기 시작한다.
/막레 느낌으로 들고 왔어😆 그리고 다음 일상 말인데, 번외편 느낌으로 한국에 있었을 때의 사찬이와 해월이에 대해 돌려 보면 어떨까? 첫 만남이라던가😊
그러면 5살+14살으로 가야할까요, 아니면 첫만남 이후의 8살+17살이 좋을까요? 어느쪽이든 둘 다 지금이랑 비슷비슷한 느낌일 것 같기는 하지만요… 8-17 시점이면 별명 지어주는 것도 가능할 것 같고… 아니면 8-17에서 액자 구조로 5-14 첫만남 회상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고요!
아 그러게요 사찬이… 여행 떠난 게 3년 전이니 25 / 16일 때겠는 걸요. 해월이라면 이별의 순간에도 덤덤했을 거라고는 생각하고 우리 우체통 때 생각하면 그후로도 이메일 연락은 계속 했을 것 같지만요… 정말로 사찬이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커리어 두고 여행자가 되겠다고 했을 때 해월이는 어떤 반응이었을까요? (개인적으로 선배는 좀 화냈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
첫만남 계절도 좀 궁금해졌어요 부활동이면 역시 신학기일까요, 아니면 1학년 2학기일까요? 신학기 나름의 두근거림도 있지만요! 선배랑 사찬이는 부활동으로 만났다기보단 이전에 아는 사이였을 것 같기도 하고…
해월이는 아마 겉으로는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은 채로 다만 마지막 순간까지 배웅하러 나갔을 것 같아. 하지만 그 이후에 사찬이랑 메일을 주고받으면서도 종종 어딘가 허전한 느낌을 받았을 거고, 결국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을 것 같네. 무덤덤해 보여도 사찬이가 여행을 떠난 게 해월이에게는 제법 큰 영향을 미쳤으니까:D 사찬주 말대로 선배는 처음엔 화내다가 결국은 사찬이 선택을 존중했을 것 같아. 그래도 마지막 순간까지 잔소리하면서 보내주지 않았을까? 😄
으음.. 개인적으로는 어떤 계절이어도 다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해! 지금 배경이 계속 겨울이었으니까 이번에는 다른 계절로 돌려 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마음에 드는 계절로 골라도 무방하지 않을까? 😄
자꾸 밥 챙기라고 잔소리하는 선배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ㅋㅋㅋ 해월이가 간다고 했을 때 선배는 어쩌면 좀 예감했을지도 모르겠어요… 동생들 둘 다 자꾸 둥지 떠나 날아가는군요… (??)
그러면… 음 사실 나도 둘 다 좋은데, 그러면 아예 정반대 계절로 여름방학 끝난 후 아직 어수선한 2학기 초 8월은 어떨까요? 1학기 때도 선배랑 사찬이는 아는 사이였는데, 2학기 들어서 선배가 부를 만들게 되면서 사찬이가 끌려온건지, 인원수맞추기인지, 함께하게 된 걸로!
8월의 방과후는 한적했다. 굳이 말하자면 8월이라서기보다는, 새로운 학기가 시작된 첫주 특유의 어수선한 분위기 탓에 학생들이 급히 학교를 떠나버려서 그렇겠지만. 애초에 그가 재학하는 청소년 교육기관에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기는 했다. 선생이든, 학생이든. 아니, 세계정부에서까지 나서서 고아들을 거둬 키우고 있으니 차라리 아이들은 그럭저럭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이 시대에서 부족한 것은 언제나, 전문인력의 존재였다.
그러니, 이 교육기관의 분위기도 자연히 그런 쪽으로 흐른다. 대재앙 전의 열네살은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사실 지금의 그는 아직, 잘 모른다. 그러나 남아있는 ‘이전’의 자료들—텍스트, 이미지, 때때로는 영상—에서 보이는 ‘학교’는 그의 ‘청소년 교육기관’과는 분명 다른 장소이다. 그리고 열네살의 그는 본 적도 없는 것을 그리워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아직은.
그가 그리워하게 될 풍경은 적어도 거기에 있지 않았다. 그리고 희게 지었으나 약간 바래어 한적한 건물도, 토지보다 사람이 부족하여 넓으나 높지 않은 이곳의 풍경도, 그는 그럭저럭 좋아하는 편이었다.그러니까, 역시, 그럭저럭. 아직 ‘소년’이라 불려야할 나이치고는 묘하게도 차분한 말투로 생각하며, 그는 걸음을 옮긴다. 긴 흰색의 복도를 걸어, 구석진 회색빛 계단을 몇개인가 오르고, 큰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을 힘을 주어 밀면서.
문이 열리고, 옥상의 바람이 훅 불어왔다. 높이 제한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실용적인 목적일까, 그만그만한 높이의 건물들뿐인 풍경이었지만, 가장 높은 곳에 서있는 기분은 나쁘지 않다고, 그는 잠시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마음에 든 것은 풍경이 아니라 바람이었는지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늦여름, 그는 가만히 서서 잠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다. 하지만 그의 목적은 옥상 자체에 있지는 않았으므로, 그는 다시 걸음을 뗀다.
그가 향하는 것은 옥상 한켠의, 어쩌면 관리실 같은 작은 건물이다. 건물이랄까, 옛날의 자료에서는 ‘옥탑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겠지만, 그는 아직 그 단어를 제대로 알지는 못하여 쉽게 떠올리지 못한다. 다만 그가 아는 것은, 이 작은 옥상 위의 방이 그에게 주어진 새로운 부실이라는 것이었다. ……굳이 정정하자면, 그가 아니라 그의 ‘선배’에게 주어진 것이겠으나.
천체를 관측해야하는 천문부라면 인공적인 조명에서 자유롭고, 하늘이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해야할테니, 이전에는 창고로나 쓰이던 옥상의 이 방을 부실로 받게 된 것도 그럴듯하다. 그야 그의 선배에게 ‘천문부’가 먼저였는지 ‘옥상의 빈 창고’가 먼저였는지, 그는 굳이 따지지 않을테니 더욱. 천문부라니. 그 사람답다면 다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고문 선생님이 어떻고, 청소년 교육기관에서 시도하는 자기주도적인 직업흥미 교육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다가, 갑자기 내밀어진 입부신청서에 이름을 적어서 내준 것은, 사실 그답지는 않았다.
기본적으로는 인원 수 채우기였으나, 어느정도의 흥미도 있었다고, 그는 선선히 인정한다. 그리고 신학기가 시작된 후 벌써 5일째, 지난 이틀 간, 그는 부실에 앉아서 책을 읽는 일에 조금 익숙해져가는 중이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오래된 책걸상이라던가, 바닥매트라던가, 상자를 쌓아만든 책장이라던가. 그런 것들에도. 그러니 그는 오늘도 절반은 선배의 넉살 좋은 수완이랄까, 하는 것에 나름대로 감탄하고 나머지 절반은 적당히 남의 일처럼 부실에 앉아 책을 읽을 예정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부실에, 낯선 아이가 앉아있는 걸 보게되기 전까지는. 오랫동안 창고로 쓰이던 작은 방의 작은 유리창을 통해 비치는 늦여름의 농익은 햇살과, 그 햇살 속을 가볍게도 부유하던 먼지들. 재앙 이전과 이후의 책이 가득히 꽂혀 오래된 책장들. 낡은 먼지의 냄새와 오래된 책의 냄새와 두꺼운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던 농익은 여름해의 냄새가 나는. 어딘가 갑갑하고, 덥고, 시큼하고, 이글거리고, 푹 익어버린듯한, 그런 여름이 머무르는 곳에, 옅은 색을 띈 아이가 있었다.
호화롭기는커녕, 빈말로도 크다고는 할 수 없는 방이었다. 낡은 책상은 흔들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커튼은 빛이 바래 있었다. 어째서 옥상의 작은 방에 커튼까지 달려 있는지, 소년은 알지 못했다. 어쩌면 오래 전 이 방을 쓰던 다른 사람이 달아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창가에는 한때 흰색이었을 커튼이 달려 있었고, 가끔 창문을 열어 두면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것으로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
중고등부에서는 이 방을 전문 용어로 부실이라고 불렀겠지만, 소년은 아직 그 용어를 알지 못했다. 소년에게 이곳은 그저 방이었다. 소년의 형은 수업이 끝날 때까지 이 방에서 기다리라고 일렀고, 소년은 그 말에 따라 초등부 수업이 끝나고 옥상으로 향한 참이었다. 부실 안은, 당연한 말이지만, 비어 있었다. 아직 고학년 수업이 끝나려면 시간이 한참 남았다. 소년의 형도 아마 그 비는 시간 동안 소년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염려되어 이 방의 존재를 가르쳐준 것이리라. 기실 소년이 사고를 치고 다닐 성격은 아니었으며, 혼자서 집을 찾아가지 못할 만큼 어린 나이도 아니었으나, 소년의 형은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었다. 보다 직설적으로는, 종종 사서 걱정을 하는 사람이었다.
기묘하리만치 선명한 녹색을 띤 매트 위에 앉자 먼지가 풀썩 일어났다. 소년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 아래 먼지가 천천히 부유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대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형이 올까. 소년은 그러나 그 의문을 굳이 입밖으로 내지는 않는다. 어차피 말한다고 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을뿐더러, 소년은 기다림을 지루하게 여기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었다. 정 심심하면 계속해서 먼지를 구경하면 될 노릇이었다. 먼지 알레르기가 없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낡고 좁으며 어딘가 엉성한 부실은, 그러나 찬찬히 뜯어보면 놀랍게도 갖출 만한 것은 다 갖추고 있었다. 소년은 책장에서 책을 하나 꺼내볼까 하다가 곧 단념했다. 소년은 다섯 살이었지만 이미 글을 읽을 줄 알았고, 또 읽는 것을 제법 즐기는 편이었다. 하지만 형의 책은 아직 소년에게는 어려웠다. 게다가 마음대로 책을 건드리는 걸 형이 원치 않을 수도 있었다. 사실 소년의 형은 소년이 형의 물건을 건드린다고 화를 낸 적은 없었지만ㅡ물론 위험한 물건이었다면 얘기가 달랐겠지만,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소년은 말썽이 잦은 편은 아니었다ㅡ또 모르는 일이었다. 소년은 어렸지만 책을 소중하게 다뤄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소년의 독서는 주로, 모르는 단어를 볼 때마다 어떤 뜻을 담고 있을지, 혹은 복잡한 문장을 읽을 때마다 어떤 이야기를 말하는 것일지 상상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독서讀書의 사전적 의미와 완벽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고, 어떨 때는 원 내용과 상당히 동떨어질 때도 있었으나, 어찌 되었건 소년은 나름대로 글자를 음미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었다.
허나 소년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소년은 곧, 혼자서가 아닌 함께 읽는 독서의 즐거움을 배우게 될 것이다. 말수도 적고 과묵한 편이지만,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해 줄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소년은 알지 못했다. 제가 나중에 아폴로Apollo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고, 또 누군가에게 스푸트니크Спутник라는 별명을 지어주게 될 것임을. 학교를 졸업하고 미지의 곳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싣게 될 것임을.
소년의 물음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잠시 침묵한다. 1초, 내지는 2초 정도의 적막. 그러나 그가 느끼고 있는 것은 의외로 당황스러움은 아니다. 그러기에 그는 소년의 정체라고나 할까, 어째서 소년이 여기에 있는지에 대해 그럭저럭 납득할만한 이유를 이미 하나 쯤 알고있었다. 그러니, 1초 반의 고요 속에서 그가 생각한 것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저 어린 소년, 아니, 소년이라기보다도 유년(幼年)에 가까울 저 아이가 불안해하지 않고 받아들일까, 하는 점이었다.
그리고 1초, 하고도 절반 쯤 지났을 때, 그는 애초에 저 소년의 정체가 짐작대로라면 굳이 답을 미뤄서 침묵의 시간을 연장 시킬 필요가 있나, 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만약 그의 짐작이 틀리더라도, 이 낯선 공기가 이어지는 게 소년에게 딱히 덜 불안한 상황일 것 같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이젠 아무말이든 하는 게 덜 수상해보이겠다고. 그리하여 침묵이 2초 이어지고, 그는 입을 뗀다.
“……형 친구.”
친구랄까, 3년 후배지만. 동시에 그는 이전에 ‘선배’가 이야기 해주었던 여러 순간들을 빠르게 검토해본다. ‘어른스러운 아이야.’ ‘초등부에 다니고 있어.’ ‘책 읽는 걸 좋아하더라고—’ ‘5살,’ 애정어린 목소리로 웃으며 말하던 선배의 얼굴이 몇가지 머릿속을 지나가고, 그는 마침내 바라던 것을 찾아낸다. ‘해월이는,’ 소년의 이름이었다. 지금까지 딱히 불러본 적은 없었지만, 선배와 같은 성을 쓸테니, 성과 이름을 붙여쓴다면 천해월이 될 것이다. 이름을 대뜸 불러도 되는 걸까, 싶기는 했지만 이미 형의 친구라고 말해둔 상황에 이름이라도 부르는 게 설득력 있겠지.
“네가, 천해월이구나.”
말하고보니 의문문도 평서문도 아닌, 애매한 어조가 되었지만 그는 그러려니 하기로 한다. 그보다 신경쓰이는 것이 있어서, 그는 그냥 별 말 없이 소년 쪽으로 몇 걸음을 내딛는다. 움직이고 나서야 소년이 신경쓰려나 싶었지만, 뭐 어쩌겠는지.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하고 팔을 뻗어, 소년의 옆에 있는 창문을 드르륵, 연다. 혼자, 혹은 선배와 있을 때는 생각도 않던 두터운 먼지의 냄새가 문득 신경쓰이기도 했고, 여름날의 햇살에 달궈진 방의 공기가 갑갑하지 않을까 싶은 참이기도 했다.
소년 옆의 창문을 열고, 그는 바로 돌아서서 뒤쪽의 창문도 연다. 그다지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등 뒤에 시선이 있다고 생각하니 약간 신경이 쓰이는 것도 같다. 낯가리는 건가, 나. 5살도 아니고. 소년 쪽은 어떨까 싶었지만, 맞바람에 순간 휘날린 커튼을 잡아채 동여매어 두느라 그는 소년에게 다시 말을 거는 대신 침묵을 조금 더 연장한다. 이래서야, 정말로 낯이라도 가리는 건지.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 다섯살짜리 아이라는 건…… 낯선 존재기는 했다. 아니, 그야, 9년 전의 그 역시도 다섯살의 아이였겠으나.
커튼을 얌전히 묶어두고, 그는 그제야 몸을 돌려 다시 소년의 쪽을 바라본다. 어째서 여기있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그야 고등부 수업과 초등부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차이가 있으니 당연하겠지 싶어 그만둔다. 그와 세 살 차이인 선배는 지금 고등부의 1학년이었다. 대재앙 이전에는 그리하여 3년의 고등부 수업 이후에 ‘대학’에 진학했다는 것 같은데, 이제는 대학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고 분야별로 ‘전문 고등교육 기관’이 존재할 뿐이다. 사실상의 직업 교육기관이었다.
“……아직 한시간 정도 남았을거다, 고등부 수업은.”
중등부는 오늘 단축수업이라, 하고 덧붙이고 그는 잠시 소년이 내용을 이해해주려나, 생각한다. 이미 지난 어린 시기의 발달 정도를 파악하기란 지난한 일이다. 너무 어리게 보다 반감을 사거나, 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하다가 아니라는 걸 깨닫거나…… 다섯살 무렵의 자신은 어땠었지…… 떠올려보려고 해도 기억나는 건 정말이지 단편적인 장면들 뿐이라, 그는 그냥 빠르게 포기하기로 한다. 그 대신, 창문 밖의 방수 페인트를 바른 옥상 풍경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적당한 의자를 집어 앉는다.
붙임성이 없는 그로서는, 그냥 선배가 해주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면서 어린 소년을 대하는 정도 밖에는 할 수 없었다. 어린 아이를 다루는 법 같은 건 모르기도 하고. 그리하여 그는 소년이 책을 좋아한다던 선배의 말을 떠올리며, 기다리기 심심하다면 책장에 있는 책들 중 아무거나 꺼내어 보면 될 것이라고 말해둔다. 정작 말하고보니 그 본인에게도 해당하는 내용이라 조금 어이가 없어졌지만…… 그는 그냥 가벼운 한숨과 함께, 이전에 읽다만 채 적당히 뒤집어 부실 아무데나 두었던 소설책을 들어올린다.
아이를 다루는 법은 모르는 열네살 권사찬… 이네요ㅋㅋㅋㅋ 그렇지만 그래서 해월이를 너무 어린 취급하지 않는 점이 어쩌면 마음에 들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아무튼 여전히 표정은 없고 말씨는 조곤조곤 조용하지만 나름 어린 아이를 대하는데 노력하고 있는 중학생이었습니다…
쓰면서 생각한 건데 열네살인데 벌써 아저씨 말투더라구요 사찬이~ 아마 선배도 꽤나 어이없어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ㅋㅋㅋ 그치만 키가 원체 큰 편이어서 나이보단 더 많게 보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해월이도 아저씨라고 불러버린 거겠죠)
눈앞에 있는 사람이 형의 친구라는 소식을 소년은 아무 말도 않은 채, 그저 조용히 받아들인다. 소년의 형은 이곳에서 기다리라고만 했지 그 사이에 누가 찾아올 것이라고는 말해준 바 없었다. 그러니 소년이 모르는 형의 친구가 온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일은 아니리라. 애초에, 소년은 형의 친구들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했다. 다만 어린 마음에도 형 같은 성격이라면 교우 관계가 좁지는 않으리라고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처음 만난 사람이 제 형제 관계는 물론 이름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 역시 소년을 흔들어놓지는 못한다. 애초에 자신이 누군지 몰랐더라면 제 형이 누구인지 알 방법도 없었을 테니. 게다가 소년은 아직 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다. 다섯 살이란 세상의 모든 이상한 것들을 이상하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다. 어쩌면 소년뿐만이 아닌 다른 또래 아이들에게도, 생면부지의 타인이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상황은 특이한 축에 속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물론 범죄에 노출될 위험이 있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었지만.
소년은 그가 창문을 열고 커튼을 정리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없이 관찰한다. 그는 열네 살이고, 아직 다 컸다고 하기에는 조금 이른 나이지만, 소년이 그 사실을 알 방법은 없다. 소년의 눈에 그는 학교 선생님이나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과 같은 성인으로 비추어진다. 다섯 살에게 열네 살은 범접할 수 없는 나이나 마찬가지이다. 열한 살의 간극은 소년에게 성큼 다가온다. 어찌 되었건, 그는 나쁜 사람 같지는 않다.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면 감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지만,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소년은 이상하리만치 그 사실을 확신한다.
그의 말에도 소년은 입을 열지 않고 다만 짧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다시 그를 관찰하는 일로 돌아간다. 계속해서 쳐다보면 기분 나빠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와닿기에 소년은 아직 어리다. 그런 점에서는, 상대가 그라서 다행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책을 봐도 된다는 말에는, 잠시 책장에 눈길을 준 뒤 다시 고개를 돌린다. 소년의 관심사는 약간 먼지가 쌓인 책장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
"그건 무슨 책이에요?"
소년은 묻는다. 온전히 책에 대한 관심이라고 하기에는, 베일에 싸인 형의 친구에 대한 호기심 또한 얼마간 섞여 있다. 게다가, 이 사람이라면 소년이 모르는 것을 물어봐도 화내지 않고 차근차근 설명해줄지도 모른다. 소년은 발을 앞뒤로 살짝씩 흔들며 그의 대답을 기다린다.
/답레가 생각보다 많이 늦었네;^;
헉 사찬이 픽크루 너무 귀여워😍😍😍 맞아 확실히 픽크루에는 더벅머리 파츠가 별로 없는 것 같더라구..😂
소년의 물음에, 그는 반쯤 무의식적으로 책을 뒤집어본다. 그야 스스로가 읽고 있는 책이므로 그 내용이라던가 제목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꽤나 갑작스런 질문 앞에 자연스레 나온 행동이었다. 뒤집어본 책의 표지에는 미색의 바탕에 하나의 뿔을 가진 말이 그려져있다. 다시 말해 흔히 일각수라고 부르는 종류, 그러니까 상상의 동물이다. 그렇지만 표지와 달리, 책의 내용이라는 건 한 문장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종류의 정보값이다.
그 책은 대재앙 이전의 소설이었다. 지금은 없는 나라에서 쓰여진. 거기까지 생각하고, 그는 잠시 속으로 한숨을 내쉰다. 현 시대에 국경은 사라졌지만, 글쎄, 그것이 문학에서까지 통용되는 이야기일지는 애매하다. 조금 더 확장해서 말하자면 문화라고 해야할테고. 결국에는 그런 이야기였다. 그는 여전히, 그 옛날 한 나라의 수도였던 도시에서, 여전히 그 옛 나라의 언어를 쓰고 있다는…… 그런 이야기. 많은 것이 달라졌음에도, 여전한 부분도 있기 마련이다.
그야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 않은가? 결국 인류는 멸망하지 않았고, 살아남은 이들이 세상을 재건하였다. ‘살아남은’ 이들이. 그러니 딱히 제로에서부터 시작하지는 않은 것이다. 인프라의 복구를 위해 국경을 지우고 세계정부를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예술과 문화의 분야에서의 정체성으로 가자면…… 언어와 지역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옛날에 비해 퇴색 되었다고는 덧붙여둬야 진실이 되겠지만.
“……소설책.”
그리하여, 그 긴 잡념의 끝에 나온 대답은, 결국 세 글자였다. 길다고 해봤자 생각이라, 실제로는 딱히 침묵이 길어지는 일조차 없었지만. 14년 후의 그였다면 그 답 이후로도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거나 했겠지만, 지금의 그에게 그런 ‘요령’은 없다. 14살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소년의 반응을 기다리며, 소설의 첫문장을 다시 떠올려보는 정도이다. 사실 14년이 지난 후의 그에게도 요령이 있다, 고 말한다면 웃어버릴 사람이 있겠지만, 아무튼 간에.
발을 흔들며 그를 살피는 소년의 시선에 신경을 할애하고 마는 것 역시, 아직 요령이 없기 때문인 걸까? 그러나 이 묘한 긴장감이 실상 단순한 낯가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는 그도 동의하는 바가 없지 않았다. 다섯살의 어린 아이든, 동급생이든, 성인이든, 낯선 이에게 목소리를 내어 말을 거는 것이 그에게는 마냥 쉬운 일은 아니었다. 차라리 글로 써서 제출하는 레포트라면 괜찮을텐데, 소년에게 소설을 읽고 난 독후감을 쥐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숨을 내쉬려다, 눈앞의 소년을 보고 되삼킨다.
사실 중학생 나잇대의 사찬이는 완전 반에서 아싸였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었는데(물론 지금도 아웃사이더지만) 쓰다보니 왜 그랬을지도 짐작이 가네요ㅋㅋㅋ 속생각이 깊어서 현실의 말을 할 타이밍을 잘 잡질 못하니까… 그랬겠죠… 호기심 많을 나이의 해월이가 좀 더 말문 터주기를 바라보며(네?)… 일단 마무리 지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권사찬도 사실 말재주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지만, 이제는 해월이가 스스로의 말투에 익숙해졌을 거라는 생각도 할테고, 아무래도 저 이후로 14년 간 사회생활이든 여행이든 하면서 더 여유가 생겼겠거니 해요~ 이제는 처음보는 사람이랑도 적당히 잡담할 수 있는… 요령 붙은 권사찬(??) 물론 사찬이한테 '요령 있다'는 표현을 하면 선배가 웃을 거라고도 생각합니다ㅋㅋㅋㅋ (걔한테 요령이?)
나도 잠깐 얼굴 비추고 갈게~~ 아무래도 이번 답레는 특히 시간이 오래 걸리네😢 어린 해월이를 최대한 끌어내고 싶어서 그런가봐. 사찬주도 좋은 주말 보내!
>>200 5살 해월이는 반대로 지금보다 오히려 낯을 덜 가리지 않았을까 싶네XD 사실 지금도 많이 가리는 건 아니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 먼저 다가가는 데 좀 더 스스럼없었을지도 모르겠고? 반 친구들이랑도 막 하루종일 놀러다니는 건 아니어도 의외로 평범하게 지내지 않았을까 싶어. 아마 지금 해월이의 모습은 중학교 즈음부터 시작되지 않았으려나😄
누워서 곰곰히 생각하다가 중학교 즈음부터~ 라고 한다면 5~6년쯤 전이겠구나 싶어졌어요! 해월이의 태도가 바뀐 이유도 궁금하고, 그때의 사찬이 반응도 궁금한데 역시 이유에 따라서 달라질 것 같긴 하네요☺️ 사실 나이를 먹으면서 세계관을 확립하고 별다른 이유없이 성격이 굳어지는 경우는 흔하잖이요~ 어떤 식이든 간에 지금의 사찬이 태도를 보면, 둘 다 크게 불편하지 않은 것 같고 서로에게 익숙한 것 같고요.
갱신이야:D 지금은 좀 여유가 생겨서 아마 오늘~내일 중으로 답레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싶네😄 기다려줘서 늘 고마워 사찬주!
뭔가 계기가 있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지 않았으려나 싶어? 특별히 사람이 싫어졌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형과 사찬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어쩌면 알게 모르게 사찬이에게 영향을 받은 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 대학원 나온 시기랑 겹친다면 사찬이가 여행을 떠난 것도 어느 정도는 성격 형성에 일조했을 수도 있겠고😊 어찌 됐든 결론은 딱히 특별한 원인이나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이거네:D
소설책. 소년은 머릿속으로 그 세 글자를 조용히 곱씹는다. 그의 짧은 대답애도 소년은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소년의 입장에서 그의 답변은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면서ㅡ물론 나이만 놓고 봤을때 소년은 엄연한 어린 아이가 맞다ㅡ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는 것보다 훨씬, 이른바 정상적인 답변이다. 책의 표지에는 이마에 뿔이 달린 말이 있다. 소년은 아직 그 말의 이름은 모르지만, 동화책에 자주 나오곤 하는 존재라는 사실만은 알고 있다. 소년은 몸을 조금 움직여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간다. 너무 많이는 아니고, 딱 적당할 만큼만.
"어떤 소설책이에요?"
소년은 다시금 묻는다. 소년은 아직 소설책 한 권을 끝까지 다 읽어본 적은 없다. 아직까지 소년에게 소설책이란, 손이 가는 대로 펼쳐 들고 그 장에 쓰여 있는 내용을 읽는 행위에 해당한다. 당연히, 그런 방식으로 소설의 전체 줄거리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형의 책장에 꽂혀 있는 다른 어려운 책들보다는 어렵지 않다. 제법 재미있기도 하다. 가끔은. 그럴 때마다 소년은 꼭 숨은 보석을 찾은 듯한 기분에 빠져든다. 바위 깊이 숨어 있던 진주 한 알을 찾은 잠수부의 심정처럼.
소년은 재촉하지 않고, 다만 참을성 있게 그가 답해주기를 기다린다. 누차 강조하지만, 소년은 기다림을 싫어하지 않는다. 게다가, 소년은 그가 답을 해 줄 것이라고 이상하리만치 확신하고 있다. 천천히, 그러나 성실하게,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소년은 벌써 기묘한 방식으로 그에게 신뢰를 주고 있다. 소년의 형이 본다면 의아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소년은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은 아니지만, 동시에 이 사람 저 사람 안 가리고 말을 걸고 다니는 성격 또한 아니기 때문이다.
열어둔 창문으로 기분 좋은 바람이 새어 들어온다. 소년은 정갈하게 묶인 커튼을 보면서, 어쩌면 커튼을 걷지 않는 편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창 밖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은 그것대로 아름다우니까. 하지만 사실, 먼지가 날릴 것을 생각하면 커튼을 걷은 그의 선택이 맞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가 말하기를 기다리는 소년의 작은 머리 안에서, 커튼은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흔들리고 있다. 살랑살랑, 살랑살랑.
/아마 중학교에 들어오고 성격이 바뀌기 시작함->사찬이가 떠남->성격이 완전히 자리잡음 이런 식이지 않았을까? 일단은 떠나기 전에도 근 10년을 알고 지냈으니 서로가 서로에게 이미 익숙했을 거라는 생각이네. 선배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식사 자리에도 자주 불러서 함께했을 것 같기도 하고XD
해월이도 성격이 바뀐다고 자기 자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는 바로 그 점을 알아서 자신의 성격 변화를 딱히 신경쓰지 않았을 것 같아. 해월이 입장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고 언젠가 거쳐가야 할 하나의 과정이었을 것 같네. 다만 선배는 해월이가 밖에 나가서 친구 좀 사귀어야 하지 않나.. 하고 조금 걱정했을 것 같기도 하고?
이번에는 답레가 좀 많이 늦었네. 그래도 이 둘의 답레는 쓰면서 항상 즐거워. 언제나 고마워 사찬주😊
해월이 픽크루 너무 귀여워요… 볼통통… 답레 내용 속에서도 귀여워요ㅠ 귀엽다는 말 밖에 못하는 사람 된 기분인데 그치만… 낯도 안 가리고… 너무 똑똑하고… 말랑~ 한 걸요…
ㅠㅠ요즘 현생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답레는 좀 걸릴 것 같아요. 대충 쓰고 싶지는 않아서, 흑흑… 어린 해월이랑 사찬이는 열심히 선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러고보니 해월이네 형제는 같이 살 당시에 요리는 누가 했을까요? 해월이 요리 할 줄 아려나요? 사찬이는 의외로… 대식가 설정 붙어있어서 아마 어느정도까지는 할 것 같아요ㅋㅋㅋ 곧잘 만들고 잘 먹지 않을까 싶은… 여행을 떠나고 나서부터는 딱히 요리를 제대로 할 기회는 없었겠지만요~
음식 취향 같은 것도 따로 있으려나요? 사찬이는… 음… 잘 안 가릴 것 같기는 하지만ㅋㅋ… 한식보다는 양식 잘 먹을 것 같고… 그러네요. 최근에는 역시 러시아-중앙아시아 음식이 익숙할테고요!
전체적으로 말랑말랑하던 시기의 해월이라구;D 지금은 말랑까지는 아니고 음.. 보들보들 정도려나? XD
늘 말하는 거지만 답레는 천천히 줘도 괜찮아! 해월이랑 사찬이도 아마 기다리면서 나름대로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을까😄
5성급 수준은 아니지만 해월이도 요리는 어느 정도 할 줄 알아! 지금 일상 돌리는 시점(5살)에서는 너무 어려서 아직은 선배가 했을 것 같고, 크면서 하나둘씩 배웠을 것 같네:D 선배가 대학원에 들어간 뒤에는 점점 집에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을 테니 아마 그때를 기점으로 해서 가사 분담이 서서히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해월이는 딱히 가리는 음식은 없을 것 같아. 일단은 한국을 떠난 게 이번이 처음이니까 기본적으로는 한식에 더 익숙하겠지만 양식을 딱히 싫어하거나 못 먹는 편도 아닐 것 같네! 의외로 새로운 음식을 시도해 보는 데 별다른 거리낌이 없기도 하고 말야:D
역질문이 돌아올 거라고는 그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야 빈약한 답변이었으니 별 수 없지.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2권짜리 소설의 내용을 요약하는 것은 꽤나 품이 드는 일이라, 이번에야말로 침묵이 길어진다. 사실 소년이 그렇게까지 자세한 내용이나 비평을 원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은 충분히 알고 있는데도, 고민이 길어지고야 마는 것은 결국 스스로의 말이 정리되지 않으면 바깥으로 내어놓지 못하는 그의 성격 탓이다. 속생각이 깊어, 표현이 늦는다.
“……암호를 취급하는 주인공이, 세계의 끝에 직면하는 이야기.”
대답하면서도, 대답이 되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해둔다. 애초에 소설의 구성 자체가 복잡하니 적어도 한두문장은 더 할애하지 않으면, 하고도. 그러면서도 동시에 기억에 남았던 문장을 되짚어 보고, 다시 머릿속의 한 구석에서는 그다지 좋아하는 작가는 아닌데, 하는 말도 중얼거린다. 생각해보면 문장을 더 기꺼워하는 버릇은, 그 본인이 듣는 것에 비해 읽는 것으로 정보를 얻는 속도 훨씬 빠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속독가이고, 다독가이고, 난독가이기 때문에. 칭찬 받기는 힘든 방식이겠으나.
“전혀 다르지는 않지만, 갈래가 다른 두 이야기가 갈마드는 내용이니까, 설명하기 조금 복잡한데.”
그리고 그는 소년의 눈길이 책의 표지에 잠시 머무른 것을 반박자 늦게 떠올린다. 순간순간 찾아오는 생각에, 이전에 본 것을 나중에야 되짚어 깨닫는 경우도 그에게는 흔한 일이었다. 생각이 빠른 그에게 현실은 간혹 느리게 찾아온다. 생각이 깊다는 일이 나쁜 일은 아니라고 말하는 건 쉽지만, 대답이 늦어 동급생들의 친절하게 곤란해하는 얼굴을 계속 보고있는 것도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다. 딱히 불화가 있는 것은 또 아니지만, 적어도 그 본인은 그런 부분을 단점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이다.
산만하다고나 할까. 그에게 산만하다는 표현을 사용한다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사람도 꽤나 있겠지만, 본인의 생각이 산산히 튀어나가는 방향성을 알고있는 그로서는 차라리 당연한 평가이다. 뭐, 선배라면 또 어린 녀석이 인생 다 산 듯한 표정을 짓는다고 하겠지. 애초에 그도 생각하는 것에 비해서는 사실 그렇게까지 신경 쓰고 있지는 않다. 누군가에게 지적 받는다고 해도 놀라지는 않겠지만, 나서서 유감스러워할 일도 아니다. 아무래도, 그냥 성격이니까.
“……표지의 동물은, 일각수야.”
보통은 유니콘이라고 하겠지만, 하고 덧붙이고 초판의 표지는 아마 이게 아니었을 거라고도 말해둔다. 옛 소설들을 읽다 보면 도서관의 오래된 책, 에 대한 언급도 흔하지만, 글쎄…… 대재앙 이전의 책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몇판이든 간에 이미 ‘오래된 책’이다. 책의 내용에 있어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문득, 바람이 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고개를 들자 소년의 뒷통수가 시야에 들어온다. 살랑살랑, 바람에 흔들리는 색이 옅은 머리칼도.
암호, 주인공, 세계의 끝. 소년은 천천히 단어의 나열을, 그 간격을 음미한다. 소년의 작고 동그란 머리는 벌써부터 소설의 내용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소년은 아직 직면이라는 단어의 뜻을 알지 못한다. 소년은 집에 돌아가서 사전을 찾아보리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사전의 뜻풀이라는 것이 그 나이의 어린이에게는 종종 원래의 단어보다도 더 어려운 터라, 소년이 직면의 명확한 뜻을 이해하게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모르겠다면 형에게 물어보면 알려주리라. 그리고 소년은 불현듯, 굳이 형이 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직면이 뭐예요?"
직면은 또 무엇이고, 갈래가 다른 두 이야기가 갈마든다는 것은 또 어떤 내용일까. 갈마든다는 말의 뜻을 모르는 것도 매한가지이지만, 그건 아직 조금 기다려도 될 것이다. 한 번에 하나씩, 천천히. 어쨌거나 고등부가 끝나려면 아직 한참 남은 모양이고, 그들에게는 시간이 많으니까. 어쩌면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생각이 여러 방향으로 튀는 것에 대해 얘기하자면, 소년 또한 그보다 더 나을 바는 없다. 꼭 소년만이 아니더라도, 원래 다섯 살의 머리는 그 누구보다도 바쁘게 돌아가는 법이다. 세상을 인식하고, 더 나아가 재구성하기 시작하는 나이. 소년의 생각은 어느새 이마에 뿔을 단 동물을 향해 나아간다. 일각수, 또는 유니콘. 보다 더 많이 쓰이는 쪽은 유니콘이겠으나, 소년은 일각수라는 말이 더 마음에 든다. 그 울림에는 묘하게 소년을 이끄는 부분이 있다.
지금의 표지와 예전의 표지가 다르다면ㅡ소년은 초판이라는 말의 뜻 역시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이번 경우는 적어도 짐작은 간다ㅡ전에 있던 표지는 어떻게 생겼을까. 그 표지에는 일각수, 또는 유니콘이 그려져 있지 않다는 걸까. 표지에 유니콘이 있다는 건 내용이 유니콘과 관련이 있다는 뜻일까. 질문거리는 자꾸 늘어나기만 한다. 하지만 소년은 개의치 않는다. 그럴 나이다.
소년은 팔을 뻗어 손끝으로 조심스레 책을 매만진다. 부드러운 책등은 세월의 흐름을 담고 있다. 오래된 책인 것 같다고, 소년은 짐작한다. 오래된 책에는 오래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리고 소년은 항상 이야기를 좋아했다. 결코 질리는 법이 없다. 하지만 그 이야기도 지금은 잠시 기다려야 한다. 우선은 처음 듣는 단어를 하나 배우는 게 먼저, 그 다음은 그 다음에. 하나하나, 차근차근.
갑작스레 돌아온 질문은 예상하지 못했던 종류의 것이라서, 그는 잠시 멈춰선다. 이미 알고있다고 생각했던 단어라고 해도, 타인에게 그 의미를 풀어 설명하는 것은 때때로 난해한 작업이다. 상대가 어린 아이라면 더더욱 그러하겠으나, 그에게는 아직 그 정도를 가늠할 정도의 지혜는 없다. 다섯살이라고 해도, 막연하게 어리구나- 할 뿐. 그건 그가 중학생에 지나지 않는 나이여서라기보다는, 실제로 다섯살의 아이를 오래 접할 정도의 경험을 가지지 못해서에 가깝다. 아무래도 그가 아는 다섯살이라는 건 역시 9년전의 그 본인 정도고, 그때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으라는 것도 무리이니까.
“글쎄…… 맞닥뜨린다, 고 하면 나을까.”
방금의 설명이 어려웠던 걸까 생각하며 그는 몇가지 단어를 조금 더 설명하다가, 나름 간단하다고 생각한 단어를 골라 이야기를 다시 풀어보지만, 소년에게 얼마나 통하였는지는 미지수다. 눈 앞의 소년은 고맙게도 낯을 가리지 않고 그에게 말을 걸어주고 있으나, 그로서는 사실 선배는 언제쯤 오는걸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릿속 한구석에서 이쪽도 중학생 밖에 안됐는데,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아니, 그야, 소년을 사실상 ‘돌보고’ 있는 선배도 미성년자인 건 마찬가지지만.
선배, 언제 옵니까. 속으로만 중얼거린 것은 잠시였고, 어느샌가 책을 만져보는 소년의 정수리를 보면서, 그는 소년이 점심을 먹었을까 생각해본다. 중등부는 단축수업이어서 점심시간 이전에 끝났지만, 딱히 열성적으로 끼니를 챙기는 편이 아닌 그는 식사를 챙기러 카페테리아나 매점으로 가는 대신, 바로 부실으로 올라왔다. 하지만 소년은? 초등부 수업은 끝난 것 같은데, 어쩌면 수업시간의 길이가 차이가 있으니만큼 이미 소년은 점심시간을 끝내고 온 걸지도 몰랐다.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가 무얼 해야할까. 이 부분에서 그는 결국 멈칫거리고, 조금 다른 문장으로 다시 한 번 되뇌인다. 만약 그렇다 해도, 그가 무얼 할 수 있을까. 무얼 해도 괜찮은 걸까. 오늘 처음 본 다섯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보호자의 동의도 없이 어딘가로 이동하는 건, 아무리 그래도 조금 이상하니까. 결국 그는 끼니에 대해 묻는 대신, 입을 다물고 소년의 하늘하늘한 머리칼을 잠시 눈으로 쫓는 정도에서 멈춘다.
결국 언젠가의 그는, 소년에게 자기 것이 아닌 버릇으로 끼니에 대해 묻고, 소년의 뒤를 따라 낯선 거리를 걷고, 한 번도 들어가본 적 없었던 문을 열고, 스스로의 산만하게 흘러가는 사고 흐름에 조금쯤 질려하면서도, 소년이 아직 모르는 단어들에 대해 설명하게 될테지만, 역시 지금의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이야기이다. 다만 현재의 그는 소년의 봉긋한 정수리에 비추는 햇빛에 시선을 두고, 약간 낯설어하면서도, 동시에 이유모를 안도감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언젠가는 분명 그 안도가, 아주 오래된 그리움에서 나온다는 걸 알게될 터이나.
단축수업 이야기 쓸 때부터 생각했지만 어쩐지 사찬이랑 해월이는 점심이라고 해야하나, 조금 늦은 오전이나 이른 오후가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해요. 둘 다 은근하게 부지런한 사람들이라 그런 걸까요? 약간 아침에 할 일 다 해두고 점심 되면 벌써 하루가 반이나 지났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그러고보니 둘은 취침시간이랑 기상시간 어떻게 되려나요! 사찬이는 전이나 지금이나 6시쯤이면 일어나고 자정쯤 되면 잠드는 사람이었을 것 같기는 하네요ㅋㅋㅋ 주말이어도 늦게 일어나는 경우가 별로 없는 사람 아니었을지…
맞닥뜨린다, 는 건 마주친다는 뜻이지. 소년은 다섯 살이 가질 수 있는 어휘력의 한계 내에서 비슷한 단어를 떠올려 본다. 한 줄짜리에 불과한 짧은 설명이었지만, 그래도 소년은 그 설명을 통해 직면한다는 단어의 뜻을 나름대로 이해한다. 세계의 끝과 마주친다는 건 어떤 일일까. 소년은 아직 학교에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배울 나이는 아니다. 그 이전에, 세계의 끝이라는 개념 자체는 소년에게 낯설게 다가온다. 이전까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탓이다. 세계의 끝을 '직면'한 주인공은 어떤 기분이었을지, 소년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럼 갈마드는 건 뭐예요?"
하지만 언제까지고 상념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다. 소년은 아직 다섯 살이고, 다섯 살은 한창 질문이 넘쳐날 나이다. 하나의 의문이 해소되면 곧바로 또다른 질문이 그 빈자리를 채운다. 소년에게 세계는 아직 그 끝을 감히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넓고, 모르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대답을 기다리면서 소년은 다시금 세계의 끝을 상상해 본다. 주인공은 세계의 끝에 어떻게 갔을까. 걸어갔을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타고 갔을까. 소년에게 세계의 끝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보다 물리적인 실체를 가진 무언가로 다가온다. 이 역시, 아직 다섯 살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쩌면 기차를 타고 갔을 수도 있다. 소년은 일전에 책에서 기차 그림을 본 적이 있다. 그 나이대의 어린이들 입맛에 맞게 데포르메된 아기자기한 기차였지만, 그럼에도 그 그림은 소년의 머릿속에 남았다. 소년의 형에게 책을 보여주며 나도 기차를 타고 싶다고 했더니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중에 소년이 크고 나면 타보자는 말도 했더랬다. 그 이야기가 미래에 이르러서는 조금 다른 형태로 실현될 것임을, 소년은 아직 모른다. 그 미래에서 소년의 곁에 형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함께할 것이라는 사실도 소션은 아직 모른다. 다만 소년은 다시금, 세계의 끝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오후의 햇살이 비쳐 들어오고 바람이 머리칼을 살짝 흔들어 놓는 작고 낡은 부실 안에서.
/이번 답레는 좀 늦었네;v;
나도 그 생각을 했어. 너무 덥지 않고 살짝 선선한 오후가 어울리는 것 같아. 뭔가 정적이면서도 너무 고독하지는 않은 느낌이랄까:D 둘 다 부지런한 편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XD 해월주는 오전에 팽팽 놀다 점심 지나면 다른 의미로 벌써 하루가 반이나 지났네?! 하는 편인데 말이야😂
해월이는 아직 어리니까 아침잠이 좀 더 있는 편 아니었을까? 수업이 9시부터 시작이니까 8시 정도에 형이 깨워서 비몽사몽한 채로 일어날 것 같네. 밤에는 9시쯤에 침대에 눕고. 아마 크면서 점점 일찍 일어나게 됐을 것 같아. 그래도 아침에 잠투정이 심한 편은 아니지 않았으려나XD
바로 이어지는 질문은 차라리 예상의 범위 내라고 해야했겠으나, 역시나, 대답하기는 난해했다. 정제되지 않은 대답을 바로 내뱉는 대신 글쎄, 하고 그는 잠시 말끝을 흐린다. 딱히 평소의 그 답지는 않은 말투였으니, 그것이 곧 고민의 흔적이었다. 그에게 독서라는 건, 조금 더 나아가서 문장이라는 건 일종의 세계였고, 그는 세계의 정합성을 찾는 일에 흥미와 적성을 두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로서는, 어쩌면 그 약간의 망설임이야말로 그 다운 것일지도 몰랐다. 주저라는 것은 조바심. 그리고 조바심이라는 것은, 대상의 완성도를 쫓는 일에서 나올테니.
다시 끝없이 꼬리를 무는 잡념의 동시에도, 그는 대답을 생각하고 있다. 허나 그의 잡념이 이전에 읽었던 책에서는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이 있던데, 하는 부분에 도달했을 때는 결국 조금 포기에 이른다. 가지고 있는 표현을 제한하여 이야기하는 일은 지난하다. 그러니 그가 뱉은 대답은 그의 기준에서는, 지리했다. “번갈아서…… 들어오는, 거지.” 그리고 이어 그는 덧붙인다. 들어온다, 고 하는 말의 의미에는 나타난다거나, 어떤 영역에 걸치게 된다거나, 하는 등의 뜻이 있으니, 갈마든다는 말은 결국 이것과 저것이 차례대로 반복하여 나타나는 일이라고.
스스로의 대답에 그다지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그는 이럭저럭 설명을 끝마친다. 소년이 몇가지의 질문을 더 하더라도, 그는 아마 이리 잡념과 고심의 장고 끝에, 스스로만 알아챌 수 있는 마땅치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내어놓게 될 것이다. 그는 표정이 적고, 알고있는 단어가 많고,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답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의 성실성인 동시에, 미숙함이었다. 그것을 반쯤 알아채고 있기 때문일까, 그는 설명 설명 들의 사이에 옅은 한숨을 끼운다. 녹아들듯 가벼워서 딱히 신경 쓰이지 않는 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멋쩍음이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모르는 이가 알고있을 이에게 답을 구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사실 정도이다. 그 생각 하나만으로, 그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 하나하나에 차근차근 답을 달아나가는 중이다. 그것은 소설을 통해 세계의 풍경을 읽어내리는 데에 흥미를 둔, 그리하여 알아나가는 것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그이기에 체득한 태도이다. 조금 더 근사하게 말하자면, ‘가치관’이다. 그에게 있어 답을 구하는 자는, 답을 얻을 자격이 있다. 요컨대, 그 역시 ‘구하는 자’라는 뜻이다. 대답을 바라는 이이기에 그는 대답에 인색하지 않다. 언제까지 대답하기 위해서는 그도 또다른 어딘가에서는 계속해서 질문해야겠지만.
그의 선배가 이런 생각을 알았더라면, 중학생 답지 않은 어른스러운 사고가 정말로 중학생 같다는 평가라도 들었겠지만, 뭐, 아직이다. 그의 선배가, 그리하여 소년의 형이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려면, 아직은 시간이 조금 남았다. 자연스럽게 ‘돌아온다’는 표현을 쓰고, 그는 다시 조금 한숨을 쉴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가, 이내 다시 소년을 위해 입을 연다. 조금 남은 시간, 소년의 질문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표변이 적은 얼굴으로, 다만 답하기 위해 노력해본다.
번갈아서, 들어온다. 이번 설명은 전번보다 조금 더 난해하다. 번갈아서 들어오는 서로 다른 두 이야기. 보통 다섯 살배기를 위해 나온 책은 내용이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경우가 많았으므로, 두 이야기가 '갈마든다'는 개념 자체가 소년에게는 생소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소년은 그 생소함이 싫지 않다. 다만 고개를 한쪽으로 약간 기울이고 골똘히 생각에 잠길 뿐이다. 이전보다 조금 더 오래.
소년의 머리는 제 또래를 기준으로 배움이 빠른 편에 속하나, 갈마든다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는 역시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그 나이대의 아이란 으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결국 완전히 다른 곳에서 끝나곤 하는 법이다. 결국 소년은 갈마든다는 말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길 포기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떠나보낸 것은 아니다. 다만 잠자코 때를 기다릴 뿐이다. 언젠가 그 단어가, 이번에는 직접 소년에게 찾아와 마음에 와 닿기를.
"같이 읽어도 돼요?"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나, 질문에 대한 답은 어느 정도 얻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차례다. 물론 아직 어린 소년과, 소년의 기준으로는 다 큰 사람인 그의 독서 속도가 같을 리 없다. 소년은 그에게 민폐를 끼칠 생각은 없다. 비록 아직 민폐라는 단어의 뜻을 잘 모르더라도. 시간이 허락해주는 안에서 천천히 읽다가, 그가 페이지를 넘기면 이번에는 또 다음 장을 천천히 읽기 시작하면 된다. 굳이 한번에 내용을 전부 이해하려 들 필요는 없다. 서두르지 않아도 언젠가 기회는 다시 오게 되어 있다.
소년은 그의 옆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바투 붙어앉는다. 함께 읽으려면 차라리 소년이 그의 무릎에 앉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겠으나, 그러기에는 소년이 조금 무거울 터다. 물론 이것도 어디까지나 그가 같이 읽자는 제안을 승낙할 때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소년은 이번에도 역시, 이상하리만치 그가 승낙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자기중심적으로 구는 것도 아니요, 이기적으로 구는 것도 아니다. 그저 묘하게 확신이 들 뿐이다.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고, 믿을 만한 사람이며, 비록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이지만 소년의 제안을 딱 잘라 거절할 사람도 아닐 것이라고.
말을 하고 나서야, 그는 그 대답이 완곡한 거절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그야 소년과 그의 읽는 속도는 다를 것이었고, 그는 자신이 책을 읽는 습관을 익히 알았다. 속독가, 다독가, 난독가. 처음에는 보조를 맞추기로 마음 먹는다 해도, 분명 중간부터는 잊고서 멋대로 읽어내리기 시작하겠지. 그리고 애초에 이 책이 소년이 읽어도 괜찮을 내용인가 싶기도 했다. 사용된 단어나 문장의 어려움 때문이 아니라, 내용이…… 하기는, 그렇게 말한다면 그도 고작 14살이다. 14살이 읽을 책은 아니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그런가. 짧은 대답인지 무엇인지, 그리고 그 후에 다시 잠시간의 침묵 끝에, 그는 납득한다. 자신이 다섯살일 적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다섯살은 아니었다고 해도 역시 어릴 지나간 시절부터 소위 ‘나이에 맞지 않는’ 책을 읽고 싶어했던 기억은 있다. 그러니 그 부분은 아무래도 좋다. 애초에 읽고 있는 것이 두 권짜리 장편의 두번째 권이니 만큼 책의 내용은 중간부터 시작하겠지만, 때로는 그렇게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그는 생각한다. 중간중간 유실본이 존재하는 공공도서를 읽는 것에 익숙한 그에게는 신경쓰일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남은 것은 결국, 독서의 불편함이었다. 소년은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으나, 글쎄, 그와 소년은 눈 높이부터가 어지간히 다르다. 차라리 무릎에 앉는 게 나을지도. 소년의 키라면, 딱히 시야가 가릴 일도 없겠다. 그는 중학생 치고는 그래도 꽤 큰 편이었으니까. 그러나 그에게는 역시, 오늘 처음 만난 아이에게 무릎에 앉겠냐고 대뜸 물어볼 정도의 붙임성은 없는 모양이었다. 소년이 그러자고 하면 거절하지 않겠지만, 이 경우에 불편한 건 소년일테니까, 아무래도.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네가 불편하지 않다면, 괜찮고.”
그리하여 결국 그 잠시의 침묵 끝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딱 그 정도였다. 다른 권유나 제안은 없이, 그저 간접적인 응낙. 조금 천천히 읽는 게 낫겠지, 아무래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 그는 차례대로 소년에게, 다시 책의 지면에 시선을 두었다가, 소년의 대답을 기다리듯 침묵한다. 그리고 자신의 승낙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조금 궁금해한다. 그야 같이 책을 읽자고 한 상대가 평범한 급우였다면 거절했을테니까. 허나 소년에게 있어서는, 그는 딱히 고개를 저을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그건 급우라서, 는 아니었다. 제의한 게 선배였어도 그는 아마 거절했을 테다. 어쩌면 그냥 ‘싫어요.’하고 말해버렸을런지도 모르고. 소년에게 밥을 먹었냐던가, 무릎 위에 올라오겠느냐는 말을 하기는 어렵지만, 선배라면… 하고 생각해버리는 것은 그 나름대로 친할 걸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평소부터 책을 읽을 때는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기로 반에서 나름 유명한 그이다. 그럴 때엔 이야기를 해도 한귀로 듣고 흘리기 일쑤라, 이제는 딱히 말을 거는 사람도 없었다. 다른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나쁜 버릇이라고 알면서도 딱히 고쳐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은 그 스스로도 아는 그의 단점이다. 그래도 역시 고칠 생각까지는 들지않았으나.
답을 구하는 이에게 답이 주어진다는 일을 좋아하지만, 가끔은 눈 앞의 텍스트가 더 중요하기도 한 거지. 가끔보다는 조금 더 자주 그럴 수도 있는 거고. 흘러가는 사고의 조금 뻔뻔한 어조는 그의 것이라기보다는 언젠가 읽었던 글의 인용문에 가깝다. 입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않겠지. 그러니 여전히 생각에 비해서 말이 부족한 그임에도 불구하고, 소년에게만은 조금 더 말수가 많은 것은…… 글쎄, 그것을 친절이라고 부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단순히 소년의 맑고 색이 옅은 갈색 눈동자가 인상적이어서인지도 모른다. 뭐, 아니겠지만.
조금 더 장난스러워 생각이 몸짓으로 드러나는 성격이었다면 눈이라도 굴렸을 터이나, 그는 역시 무표정하다. 다만 그는 어쩐지 조금 유쾌한 기분으로 소년의 대답, 내지는 반응을 기다리며,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으로 책등을 쓸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는 그가 거절하더라도 굴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소년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읽는 속도의 차이, 내용의 어려움, 그 이전에 다 큰 성인 남성ㅡ물론 그의 신체는 아직 완전히 다 자랐다고 할 수는 없으나, 소년에게는 성인이나 다름없다ㅡ과 함께 책을 읽는다는 건, 어떻게 해도 완벽하게 편안한 자세는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소년은 개의치 않는다. 보다 정확히는, 당장의 사소한 불편함보다는 책을 읽는 그 행위 자체에 대한 갈망이 더 크다고 해야 하리라. 설령 그 책이 다섯 살이 이해하기에는 복잡한 언어로 이루어져 있더라도.
문자를 읽고, 음미하고, 종국에는 삼켜 천천히 소화하는 그 행위는, 일단 익숙해지고 나면 상당히 중독성을 일으킨다. 소년은 지금 그 독서의 재미를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에 있다. 이미 다른 또래 아이들에 비해서는 상당한 독서량을 자랑하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발을 담근 수준에 불과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면 처음에는 낯설지만, 이내 종아리와 무릎까지, 그리고 더 위까지 담그고 싶은 마음이 드는 법이다. 소년의 상태는 그와 같다. 독서라는 물에 발을 담갔고, 어느 정도 익숙해졌으니, 이제 더 알고 싶은 것이다.
마침내 떨어진 승낙의 말에 소년은 말없이 시선을 조금 내리깔고는 그의 옆으로 바투 다가앉는다. 오늘 들어 처음으로 보이는 부끄러워하는 모습, 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소년 나름대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것인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여전히 애늙은이처럼 보이는 무표정을 드러내고 있으나, 사실 소년은 그의 승낙이 내심 기껍다. 거절당할 여지도 얼마든지 존재했다는 사실을 소년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 나름대로 자비를 베푼 것일까, 라고 소년은 잠시 생각한다. 비록 아직 자비라는 단어의 뜻은 잘 모르지만.
자세는 그의 말마따나 차라리 무릎에 앉는 편이 더 나았을 뻔했지만, 어쨌거나 소년은 그의 옆에 자리를 잡는 데 성공한다. 상체를 약간 기울여 책을 들여다보며, 소년은 그가 독서를 시작하길 기다린다. 어떤 페이지가 펼쳐지고 어떤 내용이 나올지, 어떤 단어와 어떤 문장과 어떤 표현이 나올지, 그 모든 것에 대한 기대가 조금씩 부풀어오른다. 겉으로 태는 잘 안 나지만, 자세히 본다면 볼이 조금 상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소년은 신나하고 있다. 이 버릇은 십 년이 넘어서도 그대로 이어지지만, 거기까지는 아직 소년이 알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229 나름 텔레파시라면 텔레파시지XD 어쨌거나 둘 사이에 말이 없어도 의사가 통하는 게 어느 정도는 있다는 생각도 드니까🙃
식물이라.. 해월이는 아무래도 동물보다는 식물을 더 좋아하는 편일 것 같네. 동물을 싫어하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말없이 식물에 물 주고 보살피는 그런 평화로운 걸 좋아할 것 같은 느낌이야. 나름대로의 힐링이랄까XD 하지만 별개로 아무래도 이 세계관에서 가드닝이 그렇게 대중적인 취미는 아닐 것 같지? 이래저래 품이 많이 드는 취미니까 말야. 있다고 해도 아마 현재의 가드닝과는 조금 다른 형태가 되지 않으려나🤔
시선을 내리깐 소년의 모습을 보며, 그는 조금 묘한 표정을 짓는다. 이런 때에 웃는 것도, 혹은 모른 척 하는 것도 둘 다 나름의 재주가 될 텐데. 그리 생각하며 시선을 흘리는 그의 겉모습만큼은 분명 꽤나 그럴듯한 모른척이었지만, 속생각이 많은 그는 딱히 깨닫지 못한다. 그런 부분을 어리다고 표현하는 일은 쉽지만, 옳은 답은 아니다. 그야, 그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나 소년을 낯설어 하지 않게 된 이후에도, 다시 시간이 지나 서로에게 익숙해진 이후에도, 그리고 끝내 소년의 곁을 떠나게 되었을 때도, 소년과 재회하였을 때도, 비슷한 방식으로 시선을 흘리고, 속생각을 되뇌이게 될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나름의 웃음기가 스며들어 조금 넉넉해진 그 순간을 성장이라고 부르고 싶어한다해도, 그는 동의하지 않겠지.
그리하여 미래의 일 같은 건 알지도 딱히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지금의 그는 다만 미끄러진 시선을 흰 종이 위로 두며, 책을 들고 있던 각도를 조금 옮겨 소년의 시선에 들도록 하고는 페이지를 넘길 뿐이다. 이런저런 생각과 걱정으로 침묵을 늘이고 말을 줄인 것이 방금 전인데도, 지면을 앞에 둔 그의 집중력은 꽤나 쓸만한 편이었다. 처음에나 신경이 쓰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 그의 생각은 금세 글의 내용으로 옮겨간다. 글을 읽으며 장면을 상상하는 능력은, 그가 스스로 가진 것 중에 가장 요긴하게 쓰는 부분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 대부분이 그렇듯이, 라고 그는 제멋대로 생각한다. 제대로 된 근거도, 반론에 대한 대비도 없는 주장이었으므로 입밖으로는 내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렇게 소설 속 주인공이 세상, 혹은 개인, 더 나아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갈마드는 이야기의 중앙을 똑바로 가로지르며 나아가는 동안, 그와 소년은 산들산들 바람 부는 오래된 창고 안에 가만히 붙박혀 앉아, 그렇게 시간을 보내게 될 테고, 사실 그 둘은 어느정도 같은 일이라고 언젠가의 그는 깨닫게 될 터이다. 먼 길을 타박타박 걷다가 문득, 십년이 지나도 같은 버릇을 가진 소년의 여전히도 색이 옅은 뒷모습을, 그 옛날과 같은 묘한 표정을 하고 바라보게 되는 어느 순간에…… 약간의 웃음과 함께.
배경 상으로는 두번째 일상이랑 네번째 일상 사이에 건너뛴 부분이 있다고 해도 1월 초중순이지 싶으니까요ㅋㅋㅋ… 이제부터 다시 현재 쪽의 시간을 돌려봐야죠😊
그리고 과거 레스 복습하다 >>195 보고 생각한 흐름인데, 저번 일상 다음 부분에서 선배가 오고 그대로 헤어지고, 선배한테 사찬이를 설명하던 해월이가 아저씨 < 라고 불러 버리고 선배가 (웃기니까) 말리지 않는 바람에 다음 만남부터는 그렇게 정착하게 된 거 아닐까 싶었어요~ 처음에 팍! 하고 정착되지 않는 한 어려운 호칭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ㅋㅋㅋ
갑자기 서늘해졌다. 새벽녘 꿈의 종류가 바뀌어, 그는 그 사실을 알았다. 수면 위로 떠오른 의식을 깨달은 다음 순간, 그는 무거운 눈꺼풀을 띄웠다. 시야를 가득 채운 푸른색에, 느릿하게 두번 눈을 깜박인다. 시야의 확장에 의식의 각성이 잇따른다. 좁은 침상이 흔들리고, 이어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소음이 들려온다. 덜컹, 두번째로 진동이 느껴진 그제서야 그는 깨달았다. 여기는, 야간 열차의 객실이다.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키자, 건너편의 빈 객석이 시야에 든다. 탑승자가 적은 이 시대에는, 칸막이 없는 3등석의 객실도 그 나름대로 고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말로도 쾌적하다고는 못할 환경이었으나, 시간에 맞게 운행하는 표가 없었던 탓에. 허나 이미 몇년의 시간을 길 위에서 보내온 그로서는, 사실 불평할 생각도 들지않았다. 길 위에서 보내왔다는 건 어느 정도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이기도 했으니. 어찌되었든 길바닥에서 쪽잠을 자야했던 날보다는 낫다.
그래도 새삼 굴러떨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좁은 침상이다. 흰 시트 위로 떨어지는 그림자를 보다가, 문득 그리 생각한다. 아직 꿈결이 건너가지 않아 조금 멍하다. 그림자가 구분 되는 것을 보니 일출이 머지 않았다는 건 알겠지만, 몇시쯤 된 걸까. 간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손목시계를 들어, 창문 가까이에서 확인한다. 어두워도 빛은 빛이라, 간신히 시침이 5를 조금 지난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 보인다.
새벽 다섯시. 언젠가 그가 읽었던 오래된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시(寅時)에서 묘시(卯時) 쯤일까. 어느 쪽이든, 잠에서 깨기에 적당한 시간은 아니었다. 열차의 도착 시간은 적어도 6시 이후였고, 선로의 상태 때문에 연착이 잦은 겨울에는 더 늦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다시 잠드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하였으나, 다시 누울 생각은 들지 않아 그는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3등석의 좁은 침상, 작은 간이 테이블.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소년이 잠들어 있다.
어둠이라기에는 밝은, 하지만 아직 숨을 죽인 여명의 시간. 이 박명 속에서는 소년의 밝은색 머리칼도 검푸른빛으로 물들어있다. 잠이 깨면서 느낀 추위가 거짓은 아니었는지, 공기가 싸늘하다. 그는 큰 소리가 나지 않게 주의하며, 짐속에서 담요를 하나 더 꺼내 소년에게 덮어주었다. 승무원이 나누어주는 침구는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지만, 역시 시베리아의 추위 앞에서는 조금 얇았다. 본래 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그런대로 적응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와 소년에게는.
이윽고 그는 다시 자리에 누워, 눈을 감는다.
# 횡단열차 3등석 풍경이 너무 재밌어보여서 시작은 이렇게… 흐름 상 다음 장면은 해뜨고 난 다음이 좋을 것 같네요~ # 이번 일상도 잘 부탁해요!
눈을 뜨기에 앞서 소년은 냄새로 아침이 오고 있음을 안다. 코끝에 와닿아 고인 새벽의 향이 서늘하다. 소년은 새벽을 퍽 좋아한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어둡던 밤하늘이 점점 푸른 빛에 물들고, 또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밝아 오는 그 과정을 소년은 좋아한다. 그래서 소년은 잠시 동안 눈을 뜨지 않고 이 순간을 즐기기로 한다. 평소에 아침잠이 적은 편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소년치고는 답지 않은 어리광이다.
그제야 소년은 제 위에 한 겹 더 덮인 담요의 존재를 알아챈다. 서서히 올라가는 눈꺼풀 아래 드러난 소년의 시선이 건너편의 침상을 향한다. 비록 상대는 미동도 않은 채 눈을 감고 누워 있으나, 누가 이 담요를 덮어 두었는지는 자명하다. 소년은 손바닥으로 담요를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담요는 깨끗하지만 얇고, 또 조금은 거칠다. 오리털을 채워 넣은 호화로운 이불을 기대하기는 힘들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반쯤 무의식적으로 담요를 매만지면서 소년은 생각에 잠긴다. 시선은 여전히 건너편을 향한 채다. 겨울 해는 습관적으로 늑장을 부리고, 열차 안은 아직 어둑하다. 이번에는 소년의 시선이 손목시계로 향한다. 6시가 넘었음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지 않은 것을 보면, 아무래도 연착된 모양이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다. 소년은 그리 걱정하지 않는다. 급히 가야 할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에 맞춰 행해야 할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연착 또한 소년에게는 여행의 일부다. 그리고 그에게도.
그가 덮어준 담요를 어깨에 걸치고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는 간이 테이블에 앉는다.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소년은 그를 바라본다. 그리고 소년은, 그가 잠든 모습을 본 적이 얼마 없음을 깨닫는다. 아마 그는 지금 말고도 소년이 잠든 모습을 여럿 봤으리라.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소년은 고작 다섯 살이었으니, 그는 소년이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모습과 장면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문득, 소년은 카메라로 그의 모습을 찍어 남기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소년은 알고, 그는 알지 못하는 드문 시간을.
이윽고 그에게서 눈을 뗀 소년은 창 밖을 내다본다. 어스름한 새벽 하늘 아래 나무들이 스쳐 지나간다. 창문을 열까 싶기도 하지만 소년은 곧 단념한다. 지금도 공기게 이렇게 싸늘한데 창문을 열었다간 분명 추우리라. 소년이야 별 상관 없었으나, 그가 추위 때문에 잠에서 깰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년은 닫힌 창 너머로 검푸른 하늘과 눈 쌓인 나무와 아직 뜨지 않은 해를 구경한다. 작게 들려오는 손목시계의 초침 소리를 배경 삼아, 그가 잠에서 깨기를 기다리면서.
/>>253에서 다음 장면은 해 뜨고 난 뒤로 하자고 했지만.. 개인적으로 새벽 특유의 분위기를 정말 좋아해서 멋대로 시간을 잡아 버렸어. 미안해😂 나도 이번 일상도 잘 부탁해!
아니.. 병원이라니 무슨 일이야 사찬주..🥺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무리할 필요 전혀 없어😢 사찬주 건강이 괜찮아지면 그때 천천히 돌아와도 되고 만약에 더이상 이어가기가 힘들 것 같다고 해도 건강 때문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지. 정말로 무리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사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