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고개를 작게 흔들어 보인다. 지금까지의 여행에서 행선지는 항상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소년이 그곳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의 경우에는 그들, 이 가고 있다고 해야 정확하겠지만.
소년은 고개를 살짝 틀어 포인세티아를 내려다본다. 불과 반 년 전까지만 해도 소년은 모스크바에서 그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맞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타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고, 소년은 한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크리스마스는 메일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년은 잠시 한국에 남은 형은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낼지 생각해 본다. 아마 형의 입장에서도 이번 크리스마스는 감회가 새로울 것이라고, 소년은 짐작한다.
"걷고 싶어요."
행선지 대신, 소년은 원하는 바를 밝힌다. 어디를 얼마나 걷는지는 상관없으니, 그저 그와 함께 크리스마스 이브를 걷고 싶다는 것이 소년의 희망이었다. 밖은 춥지만, 짧은 산책을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리라. 소년은 주머니 속에서 온기에 녹은 손끝을 꼼지락거리다 문득, 바스락거리는 포장지를 살짝 잡는다. 나름의 크리스마스 선물, 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지만.
걸어서 갈 만한 곳이 어디가 있더라. 그는 그리 생각했다가 금방 멈춘다. 이런 경우 걸어서 도착하게 될 목적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그도, 소년도 알고 있다. 어쩌면 ‘도착’하지 않을 수도 있고. 걷는 일에 박하지 않은 그는 그저 가벼운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하고는 말한다.
“……그럼 가자.”
옛 러시아의 거리는 그럭저럭 여전하다고 써도 될만한 풍경이었다. 대재앙도 이전 시대의 모습을 아예 거두어 가지는 못했다. 그 풍경에서 그는 문득, 이전에 읽었던 어떤 재앙 이전의 문학을 떠올린다. 아포칼립스 SF였던가. 아직 오지 않은 종말의 순간에 대해 써내려가던 작가의 그 상상력은 확실히 빛나는 종류의 것이었으나, 역시 현실과는 달랐다. 정작 찾아온 멸망은 충분히 갑작스러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절 뿐이었다. 그리하여 삶은 그대로라고는 할 수 없는, 그러나 여전한 모양으로, 이어진다.
또각, 또각, 워커의 두꺼운 밑창이 오래된 돌바닥과 부딪혀 소리를 낸다. 어제는 분명 두텁게 눈이 왔는데도. 그리 쌓인 눈이 이 날씨에 벌써 녹았을 리는 없으니, 이 걷기 편한 길 역시 사람의 손이 닿았으리라. 보이지 않아도 분명 인간에 의해 손질된 도시는 단정한 회색빛으로 고요하다. 반절의 종말. 고요하게 손질된. 그리 말 없이 걷다가, 그는 문득 곁의 소년을 돌아본다. 누군가와 보폭을 맞춰 걷는 길이 간만이라 새삼스럽기도 하였고, 소년의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시선 끝에 걸린 참이기도 했다.
옅은 색의 머리칼. 소년은 그가 익히 아는 남자와 닮은 듯, 또한 닮지 않았다. 말주변이 좋고, 사람과 대화하는 일 역시 즐기는 선배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한마디 한마디, 대화라기보다는 내면의 정리에 가까운 소년의 화법을 생각하면 가끔 신기할 정도라고, 그는 역시 별로 표정을 바꾸지 않고 생각한다. 그가 소년에게 시선을 둔 짧은 순간이 지나고, 넓은 광장의 가장자리를 따라가던 길이 끝나 다시 골목길의 초입이다. 갈래갈래 갈라진 길에서 그는 잠시 걸음을 늦춰 소년이 길을 선택하게 둔다.
#크리스마스도 벌써 다 지났네요 #그래도 연휴는 아직 남았으니 즐겁게 보내길! #늦어서 미안해요8ㅅ8
그는 소년보다 키가 크지만, 그와 나란히 걷는 일이 힘들었던 적은 없었다. 아마 그 쪽에서 보폭을 맞춰 주고 있는 것이리라. 군데군데 쌓여 있는 눈 무더기가, 아직 발자국이 남아 있는 보도 블럭이, 담쟁이 덩굴에 휘감긴 붉은 벽돌 벽이 살짝 내리깐 눈에 담긴다. 소년은 그 모든 장면을 기억 속에 갈무리한다. 다행히도, 소년은 이런 방면에서는 기억력이 좋은 편에 속했다.
골목길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 사이에 이렇다 할 만한 대화는 오가지 않는다. 하지만 소년은 그 침묵이 불편하지 않다. 그리고 소년은, 아마 그도 같으리라고 짐작한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관계보다도 더 값진 건 침묵을 나눌 수 있는 관계다. 소년은 그와 함께 있을 때 흐르는 침묵을 제법 좋아했다. 갈림길에서 잠시 고민하던 소년은 이윽고 한쪽을 택해 걸음을 옮긴다. 그 선택에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소년은 자신에게 선택권을 준 그에게 작은 고마움을 느낀다.
발길 가는 대로 움직였으니 목적지가 정해져 있을 리도 없다. 그래서 소년은, 길이 끝났을 때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 딱 알맞은 폭의 골목 끝에 자리잡고 있는 건 작은 식당이다. 이 문에도 역시 작은 크리스마스 장식이 걸려 있다. 크리스마스의 화환이다. 그라면 이름을 알 수도 있겠다고, 소년은 생각한다.
"들어갈 거예요."
물음표가 붙지 않은 질문은, 소년에게는 이미 익숙한 화법이었다. 작게 열린 문 틈새로는 스튜의 냄새가 흘러 나온다. 창문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내부는 따스한 색의 조명이 채우고 있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작고, 조용한 곳이다. 소년은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설령 무언가를 먹게 되지 않더라도.
그는 반 박자 느리게, 소년에게서 시선을 떼어낸다. 그리고 답을 기다리는 대신, 그냥 문을 밀어 열었다. 어떤 의미인가로는 이미 답이 있었을 것이다. 목소리의 형태로 돌아오지 않는 답일 뿐. 작은 차임벨 소리와 함께 문틈이 벌어지자, 온기를 품은 공기가 훅 끼쳐 생각의 맥락을 끊어낸다. 문을 닫자 바람 소리가 멎어, 흔한 음악 하나 틀지 않은 실내는 고요하다. 거리를 걸을 때는 바람소리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도, 그 작은 변화가 새삼스럽다.
작달까, 폭이 좁은 실내는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한 눈에 들어와 앉을 자리를 찾는 일도 어렵지는 않았다. 문가에서 조금 떨어진 약간 어둡고 따스한 자리를 찾아, 앉는다. 자리에 앉아 다가온 사람은 점원, 아니면 주인일 것이었다. 고요의 첫인상은 틀리지 않았는지, 다가온 사람도 말 없이 메뉴판을 내려놓고 이내 돌아간다. 그는 메뉴판을 소년의 쪽으로 밀어주었다.
여행자를 위한 가게는 아닌 듯, 메뉴판은 러시아어로만 적혀있었다. 소년이 키릴 문자를 읽을 줄 알던가, 잠시 생각하며 그는 소년의 쪽을 쳐다본다. 소년은 이미 메뉴판을 읽고 있는 건지 가게의 노란 조명을 받은 머리카락만 흔들린다. 서있을 때뿐만 아니라 앉아있을 때도 그들은 키차이가 난다. 그리하여 평소 시선이 낮은 편인 소년의 눈동자를 보기란, 그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그게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가끔은 아쉽다고, 그는 턱을 괴고 생각한다.
/둘이 할 줄 아는 언어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못 찾겠어서 착각인가 했어요() /좋은 밤 되세요 해월주!
나도 뭔가 얘기했던 기억이 나는 것 같은데.. 신기하네<:3 아무래도 한두 마디 정도는 주워듣고 말할 수 있지 않으려나 싶은 생각이 드네:D 그래도 학교에서 체계적으로 배운 게 아닌지라 듣기랑 말하기보다는 읽기랑 쓰기에 좀 더 어려움을 느낄 것 같기도 하구XD 나중에 모르는 거 있으면 사찬이한테 가르쳐 달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٩(*•̀ᴗ•́*)و
소년은 눈을 내리까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뒤 그를 뒤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훈훈한 공기에 코끝이 또다시 발갛게 달아오르지만 소년은 알아채지 못한다. 자리에 앉아 외투를 벗은 뒤 소년은 내부를 한 바퀴 둘러본다. 좁다기보다는 아늑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공간이다.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사람도 없다. 소년은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소년은 메뉴판을 건네받아 펼쳐 본다. 그간의 여행을 통해 러시아어 한두 마디 정도는 더듬거리며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지만, 아직 키릴 자모에는 익숙하지 않다. 학교에서 정식으로 러시아어를 배운 적이 없으니 당연한 결과이리라. 한글과도, 알파벳과도 묘하게 다른 글자가 둥둥 떠다닌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년은 메뉴를 유심히 읽는다. 평소에는 항상 무심한 얼굴 위로 드물게 무언가에 골몰하는 표정이 떠오른다.
낯선 글자를 훑던 소년의 시선이 익숙한 이름 위에서 멈칫한다. 이전에 다른 곳에서 한 번 먹어본 적이 있는 메뉴였다. 아마 붉은 수프 요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소년은 그 이름을 어떻게 읽는지 알지 못한다. 지난번에 주문했을 때는 그저 손가락으로 메뉴판 위를 가리켰을 뿐이었다. 해서, 소년은 그에게 묻는다.
소년이 보인 메뉴판에 그의 시선이 잠시 머무르고, 이내 답한다. 보르시치라고 읽을 수도 있고. 지방에 따라 발음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덧붙이고 그는 다시 자세를 바로한다. 소고기와 붉은 비트, 그리고 사워크림이 들어간 북구의 가정식 수프는 그에게도 익숙한 맛이다. 아니, 사실 몇가지 향신료 외에는 한국의 요리와 유사한 구성이니 어떤 의미로는 익숙한 것도 당연하지만.
그는 소년에게 먹고 싶은 게 따로 있냐고 물으려 했지만, 그런다고 해도 소년에게서 명확한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느쪽이든, 생각해보면 그것도 익숙한 일이었다. 그 본인 스스로도 먹는 일에는 어지간히도 무던하여, 식당에 둘러앉아 메뉴를 고를 때도 그다지 확실한 답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저것 다 좋아서 고민한다기 보다는 선호도의 차이가 적어서 다 비슷비슷하다보니 생기는 문제였다.
"……먹고싶은 건?"
결국 질문을 던지고서도, 그는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한다. 한국에서도 그는 편하다는 이유로 학식을 선호했고, 혼자 놔두면 구내식당에서만 끼니를 떼우는 그를 선배가 소년과 같이 식당으로 데려가곤 했었다…… 잠시 이전 어느 순간의 풍경을 떠올리다가, 그는 옛 생각이 많아졌다는 것을 느낀다. 아저씨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아직 과거를 그리워할 정도로 늙었다고 하기는 힘든 나이일텐데.
열없이 생각을 이어나가던 그는 시선이 문득 소년에게 닿고 나서야 깨닫는다. 회상은 그의 앞에 앉아있는 소년 덕일 것이다. 먼 땅에서 홀로 지내던 몇년간의 시간을 뛰어넘어, 이 먼 북쪽까지 도달한. 납득한 그는 조금 즐거워진다. 어떠한 사건을 이해하게 되는 일은 그에게는 재미있다고 할 종류의 일이었다. 정합성을 조립하는 일. 그러고보면 편지에서도 계속 기대를 표현했던 그이다. 소년과의 재회 이후로, 그는 계속 들떠있는 상태라고 할수도 있겠다. 알아채기 힘든 방식으로.
보르시, 보르시. 소년은 입속으로 조용히 그를 따라 중얼거려 본다. 이걸로 읽을 수 있는 러시아어가 하나 더 는 셈이다. 고요한 눈이 키릴 문자를 담아 새긴다. 여행을 시작한 순간부터 늘 그랬듯이, 언제 어디서 새로운 걸 배울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소년은 이 러시아 수프, 또는 보르시를 깜짝 선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름을 아는 것과 주문하는 것은 별개다. 익숙한 것을 선택할지, 아니면 새로운 것에 도전할지. 소년은 고민의 순간마저도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소년은 이런 소소한 선택의 기로에서 생각에 잠기는 것을 좋아한다. 한참을 말없이 메뉴판을 들여다보던 소년은 마침내 손가락으로 한 지점을 가리킨다.
"이건 뭐예요?"
소년이 고른 메뉴는 비네그렛винегрет이라고 발음하지만, 소년은 아직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비네그렛이 보르시와 상당히 유사한 색감의 샐러드 요리라는 것도, 소년은 알지 못한다. 다만 마음이 가는 대로 선택했을 뿐이다. 소년이 이 식당을 발견했듯이. 소년은 버릇처럼 눈을 내리깔고 침묵한다. 사실 그가 대답해주지 않아도 크게 상관은 없다. 하지만 소년은 그가 또 하나의 낯선 단어를 알려줄 것이라고 믿는다.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는 퍽 기묘한 방식이긴 했지만, 소년은 가끔 이런 식으로 그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곤 한다.
/사찬주는 보르시치를 먹어 본 적이 있구나:3 난 직접 먹어 본 적이 없어서 언젠가는 꼭 시도해보고 싶어:D 다소 늦긴 했지만 오늘 하루도 즐겁게 보내길 바라구XD
그리고 그는 낮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뒤집어진 N과 같아 보이는 문자는 ‘이’ 라고 부르고 그런 발음이 난다던가, 영어의 H와 같아 보이는 문자가 외려 ‘엔’의 발음이 난다던가 하는 이야기를 덧붙인다. 그리스 문자의 영향을 받은 키릴 문자는 영어의 알파벳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있어 오히려 헷갈리는 경우가 많았다. 필기체만 아니면 아주 못 읽을 건 아니었지만…… 솔직히는, 그도 러시아어의 필기체에서는 곤경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무튼 간에, 비네거라는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새콤한 맛이 나는 샐러드 요리라는 설명까지 덧붙이고 나서, 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다시 조용해진 공기 속에서, 그는 생각에 잠긴 소년의 얼굴을 보는 일이 생각보다 질리지 않는다고 깨닫는다. 조금 웃음기가 있는 이야기였다. 한 사람의 얼굴을 한 사람이 들여다보는 일이, 질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소년이 무얼 고르고, 무엇을 묻는 간에, 그는 매번 키릴 문자를 설명하고, 아는 만큼의 지식을 덧붙일 것이다. 질리지도 않고, 매번.
“……오는 길에 메도빅은 먹어봤어?”
침묵을 지키다가 문득, 그는 물음을 던졌다. 여느때처럼 한가한 말투로 던져진 질문에는 맥락이 부족했지만, 글쎄, 식당에서 메뉴를 보고 있을 때가 아니면 또 언제 물어봐야 맥락이 있는 질문일까. 그러나 그는 역시, 겉으로 드러난 맥락이야 어쨌든, 그리 말이 되는 문맥 속에 던져진 질문은 아니라고 생각하고야 만다. 그야, 그가 그 말을 꺼낸 건 단순히 소년의 흔들리는 갈색 머리칼이, 꿀 케이크의 갈색을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으니까.
꿀과 크림을 겹겹이 쌓아 만든, 그리 달지 않은 케이크를 떠올리며, 그는 이번에는 정말로 훗, 소리내어 웃어버린다. 별로 달지 않다고는 해도, 소년을 표현하기엔 역시 무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 부드러운 연갈색만큼은 정말 닮아있었다. 턱을 괴고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그는 대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려본다.
/ 감기였었나봐요~ 오늘은 괜찮더라구요 ʕ•ᴥ•ʔ✧ / 동대문 근처에 러시아 음식을 파는 곳이 있어서 이 시국 전에는 자주 갔었어요~
소년은 그의 설명을 주의 깊게 듣고 받아들인다. 마치 음식을 천천히 씹어 삼키는 것과도 같은 과정이다. 새콤한 샐러드, 영어처럼 보이지만 영어가 아닌 글자들. 그가 말을 끝마치고도 소년은 잠시간 더 고민한다. 식당 안에 사람이 많았더라면 곤란했겠지만, 다행히도 지금 이곳에 손님은 둘뿐이다. 주인인지 점원인지 모를 사람도 딱히 재촉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이걸로 할래요."
결정은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이루어진다. 소년은 비네그렛이라고 쓰여 있는 글자 위를 손가락으로 짚는다. 배가 크게 고프지는 않은 데다 오늘은 어딘가 먼 곳으로 갈 예정도 없으니, 샐러드 정도면 한 끼 식사로 충분하리라. 고민을 마친 소년은 그의 선택을 잠자코 기다린다. 누누이 말하듯이, 급할 건 없다.
소년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다행히도, 소년은 메도빅이 무엇인지 안다. 먹어본 적도 있다. 한 조각을 다 먹은 것은 아니었지만. 하바롭스크에서 식사를 할 때 있었던 일이었다.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이 자신의 몫으로 나온 디저트를 나누어 주었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러시안은 확실히 아니었다. 동생이 생각난다고도 했다. 그 말을 듣고 소년은 한국에 남은 형을, 그리고 기차에서 만난 카야를 떠올렸다.
어찌 되었건, 케이크는 맛있었다. 소년은 단 음식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에 속한다. 소년은 언젠가 먹었던 꿀과 크림의 맛을 혀끝에 되새긴다. 그리고 형과 카야와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과 층진 작은 케이크를 떠올린다. 그 모든 것은 연장선에 있는 셈이다. 어떻게 보면.
/괜찮아졌다니 다행이야XD 헉 그런 데가 있었구나.. 나중에 코로나가 좀 괜찮아지면 가보고 싶네:D
케이크를 이미 먹어보았다 답하고서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건지 시선을 다시 내리깔던 소년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고개를 끄덕인 그는 자신의 몫으로는 보르시치와 약간의 빵을 주문한다. 손님은 그들뿐이어서, 음식이 나오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따뜻한 수프와, 새콤한 샐러드가 테이블 위에 놓이기까지의 잠시간. 샐러드 뿐으로 괜찮으려나, 싶기는 했지만 생각해보면 그와 달리 소년은 적게 먹는 편이었던 것도 같다. 그들은 닮은 점이 많았지만, 다른 점도 꽤나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야, 결국 타인인만큼 당연한 이야기였다. 따뜻한 수프에 빵을 적시며, 그는 잠시 앞을 본다. 식기를 쓰는 모습을 그렇게 표현하면 안될텐데, 소년이 식사를 하는 모습은 어쩐지 ‘조리있게’라는 표현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 많이 먹지는 않았지만, 소년은 부지런하게 먹는 편이었다. 선배도 그랬었지. 어쩌면 가정교육, 같은 단어를 주워섬겨야 할 것 같은 기분도 들지만…… 그는 빵을 한 입 더 먹고, 그냥 입을 다문다.
소년이 하는 모습은 늘상 그랬던 것도 같다. 조금 천천히, 신중하게, 급할 것 없이, 조리있게, 그리고 성실하게, 잠자코. 밝고 목소리가 큰 소년의 형, 그의 선배와는 다른 결이었지만, 그래서 선배보다도 그와 닮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고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 둘이 닮았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성실하고, 신중하고.
그런 그들을, 그는 좋아한다.
천천히 식사를 마치고, 그는 다시 주머니 속의 물건에 신경을 쓴다. 저번의 외출에서 장갑을 샀었지만 여전히 날씨는 춥다. 조금 더 따뜻한 것으로 할까, 도 생각했었지만 이번에 준비한 건 다른 것이다. 주머니에도 들어가는 작은 카메라. 요즘 들어선 필름이나 폴라로이드보다도 구하기 쉬운, 가벼운 디지털 카메라였다. 사진을 찍는 일은 그의 취미이니, 덕분에 어떻게 생각하면 본인의 취향을 소년에게 권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독서를 즐기는 소년을 위해, 처음에는 책을 선물할 생각도 있었다. 어느쪽이든, 소년은 기뻐해주었겠지만. 그러니 반 이상은 그의 욕심이다. 그러나 소년은 그의 사진들에도 흥미가 있어보였고, 앞으로 걸어나갈 길에서 좀 더 많은 풍경을 남길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는 그런 생각을 한다. 본인이 그러하였듯이.
/ 늦었지요 정말 미안해요88 / 다음부터는 이렇게까지 텀 벌리지는 않을게요 주말 내내 일정이 겹쳤는데 설마 화요일까지 밀릴 줄은 / 으악 지금보니 수요일이네요 흑흑
음식이 나오자 소년은 샐러드를 작게 잘라서 조금씩 먹기 시작한다. 과연, 새콤한 샐러드는 입에 잘 맞는다. 천천히, 하지만 집중하면서. 소년이 음식을 대하는 태도였다. 먹을 때는 테이블에 놓인 음식에 집중하라는 것은 소년의 형의 가르침이다. 소년의 형은 예전부터 유달리 식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소년은 양배추를 포크로 찍어 먹으면서 다시금 형을 떠올린다.
원래부터 양이 많지 않았던 샐러드는 금세 바닥을 보인다. 소년이 포크를 내려놓고 입가를 냅킨으로 닦을 때쯤에는 그도 식사를 마친 기세다. 자연히 소년의 신경은 주머니에 든 선물로 쏠린다. 처음에는 여행하면서 유용할 만한 무언가를 선물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는 이미 웬만한 것은 전부 갖추고 있을 게 자명했다. 거기다 굳이 선물을 보태어 짐을 늘리는 건 오히려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고른 게 지금의 선물이었다.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 불편하지도 않으면서, 언제나 들고 다닐 수 있는. 소년은 냅킨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정리하고는 주머니에서 선물을 꺼낸다. 기름종이로 포장된 선물은 소년의 작은 손에 쏙 들어가는 크기다.
"선물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소년은 그에게 꾸러미를 건넨다. 만약 그가 안을 풀어 본다면, 가죽 끈으로 된 목걸이를 발견할 수 있을 터다. 목걸이의 끝에는 작은 펜던트가 달려 있다. 삼각형 모양의 펜던트는, 단순히 푸른색이라고 칭하기에는 여러 가지 색이 묘하게 섞여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가 악세사리를 즐겨 하는 편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면 활동하는 데 크게 지장은 없으리라. 아니면 굳이 직접 차지 않고 가방에 넣어 두더라도 공간을 많이 잡아먹지는 않을 테고. 소년은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그의 반응을 기다린다.
/나도 늦었다;ㅁ; 미안해! 그리고 현생이 바쁘면 답레는 느긋하게 줘도 괜찮아:D 해월이가 준 펜던트에 달린 보석은 크리소콜라야. 해월이 탄생석이기도 해서 그걸로 골랐는데, 괜찮으려나? :D
언제 선물을 내어놓을까, 잔잔한 낯으로 생각하던 그는 결국 별 수 없이 조금 놀란 표정을 띄운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소년이 생각해내지 못한다고 하면, 역시 그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소년의 선물을 눈 앞에 두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는 주머니에서 자신이 준비한 것을 꺼내어놓는다.
“……여기.”
그리고 별다른 고민없이, 그는 지금 당장 소년의 선물을 끌러보기로 한다. 기름종이로 된 포장을 열고, 꾸러미를 끌러, 조금 투박한 손짓에 툭 떨어진 것은 가죽끈의 목걸이. 잠시 푸른 펜던트를 들여다보다가, 그는 문득 시선을 들어올린다. 시선을 아래로한 소년은 여전하게도 알아보기 힘든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다. 이런 건 어느새 준비한 건지, 소년을 만나고나서야 카메라를 사려는데에 생각이 미쳐, 결국 늦은 저녁이나 이른 아침에 거리로 나섰던 그는 조금 궁금해진다.
그러나 그는 별다른 말을 하기보다도, 긴 가죽끈을 목에 거는 쪽을 택한다. 날씨가 추워진 이후로 늘상 입고다니는 목폴라 위로 가죽으로 된 질긴 끈이, 그리고 펜던트가 드리운다. 제 가슴께에서 반짝이는 빛에 조금 더 시선을 두었다가, 그는 소년을 바라본다. 제가 준비한 것이 마음에 들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도, 별 다르지 않아도 해야할 말은 있었으니까. 옅게 웃으며, 그는 말한다.
에고에고 1월은 내내 정신 없네요… 텀을 줄여보려고 했는데 한동안은 안될 것 같아요 무안하게도() 2월이나 3월 쯤 되면 좀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그리고 펜던트 부분 묘사 읽으면서 너무너무 궁금해하고 있었던 거 있죠(?) 원석 펜던트려나~ 하면서 래브라도라이트려나~ 하다가 삼각형이라는 소리에 레인보우 오라 코팅 카이언나이트 펜던트도 떠올리고(??) 레진도 예쁘고 도자기도 있고 유리도 있고(???) 어떤 걸 상상하셨는지 얘기해주시면 기쁠 거에요✨
소년은 자신의 앞에 내밀어진 꾸러미를 신기하다는 눈길로 관찰한다. 마치 선물이라는 걸 생전 처음 받아본 것처럼. 하기사, 본래 크리스마스라는 것은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그 전통이라 들은 바 있었다. 대재앙 이전에는 밤사이 아이들에게 선물을 준다는 환상 속의 존재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붉은 옷과 흰 수염을 단 노인은 인류의 대부분과 함께 사라졌다. 결국 크리스마스를 즐긴다는 것 또한 함께할 사람이 있을 때 성립한다는 소리다. 그래서 소년은 그와 함께 맞는 크리스마스가 더욱 기껍다.
소년은 엄지와 검지를 들어 조심스럽게 포장을 푼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작은 카메라다. 이제껏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을 때마다 소년은 타인의 카메라를 빌려야 했다. 하지만 이게 있으면 앞으로는 원하는 만큼 눈앞에 펼쳐진 전경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을 터다. 소년은 이제껏 그가 찍은 사진들을 떠올린다. 내륙의 파도를, 텅 빈 도로를, 청록색으로 빛나는 인공 호수를. 그리고 소년은,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그와 중요한 무언가를 공유하게 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떻게 보면 소년이 그의 안으로 들어간다고 할 수도 있다.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고마워요."
그가 목걸이를 거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소년은 불쑥 말한다. 시선은 평소보다 조금 위로 올라가 있지만, 여전히 그의 눈에는 미치지 못하는 채다. 소년의 형은 그 버릇을 고쳐야 한다고 누누이 말하곤 했다. 대화의 시작은 상대방과 시선을 맞추는 일이라고 하면서.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눈을 바라보지 않아도 그 이상의 무언가가 전해졌다는 것을 소년은 안다. 그래서 소년은 드물게도, 아직 젖살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두 볼에 홍조를 띄우고 작게 미소짓는다. 그 순간만큼은 소년도 영락없는 그 나잇대 아이로 보인다.
"사진, 가르쳐줄 수 있어요?"
여기서 가르쳐달라고 함은 물론 찍는 방법이다. 초점을 맞추고 셔터를 누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겠지만, 소년이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다. 소년은 그와 더 많은 것을 나누기를 바란다. 그의 눈으로 보는 세상을 공유하기를 바란다. 이 작은 디지털 카메라를 통해서.
소년은 반짝인다. 강렬하지 않아도 그건 분명 반짝임이라서, 그는 어렵지 않게 달빛을 떠올린다. 소년의 형이 밝은 태양 같은 사람이라면, 소년은 밤하늘에 떠오르는 미색의 달 같았다. 낯간지러운 문장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건 그의 진심이어서, 아주 예전부터 내내 그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서, 그는 덤덤하다. 그 달빛은 밤을 밝히지 못하니 분명 그만큼 약하다는 것일텐데도, 그 옛날부터 가끔씩 그는 달빛에 눈이 부셨었다. 그리고 그건 아마 저 옅은 색의 달이 소년을 닮았기 때문인 거라고, 그는 소년의 한발짝 뒤에서 시려오는 눈을 감으며 혼자 고요히 납득하고 고개를 주억거려 보던 순간들을 그는 기억한다.
지금보다도 한참이나 어렸던 소년이 기억할런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참으로 많은 순간들이 있었다. 그때는 그도 어렸지. 동아리실의 작은 유리창을 통해 비치던 햇살과, 햇살 속을 가볍게도 부유하던 먼지들. 재앙 이전과 이후의 책이 가득히 꽂혀 오래된 책장들. 조용한 목소리로 앞뒤가 부족한 말들을 속삭이다가, 눈을 마주치지 않고서도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결국은 옅은 빛으로 웃는다. 그러니, 달을 닮은 소년을 Apollo라고 부르는 일도, 그에게는 참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소년은 잔물결 이는 넓은 호수에 비친 달처럼, 잔잔하게 반짝인다. 눈부시게.
“어렵지 않을 거야.”
그래서 결국 그는 또다시 그냥 웃는다. 그에게 여행이란 언제나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 내면의 무언가를 걸어놓고 오는 일이었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어느 하나의 장소에 있지 않고, 그 자신의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이었으니까. 처음 보았지만 그리운 풍경들에서, 사랑하는 것을 발견해나가며,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에 가기 위해 길을 걷는 일. 그의 여행. 그런 그에게 형태를 가진 그리움이 있다면 그건 아마 그 형제들일 거라고도, 그는 생각한다. 그가 사랑하게 된 풍경들의 가장 처음에 있는 이들. 처음으로 그의 카메라를 가지게 되었을 때, 가장 처음으로 남기고 싶었던 풍경.
“시간은 많으니까.”
스스로 처음 사진을 찍었던 순간을 떠올리며, 그는 답한다. 그 카메라는 한국에 두고왔다. 그가 요즘 쓰는 것과는 달리 참 작은 카메라였고, 언젠가 생각이 나서 켜보았을 때는 초점이 흔들려 실루엣만 남아버린 순간이, 노출을 잘못 잡아 하얗게 떠버린 순간이, 그리고 또 어둠 속으로 가라앉아 녹색을 띄게 된 순간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어, 그는 소년이 남에게 빌린 것이 아닌, 정말 소년의 것인 카메라로 처음 찍게 될 풍경이 무엇인지 조금 궁금해한다. 혹은 기대한다고 쓸 수도 있고. 담담한 어조로 덧붙이듯 생각하고, 불현듯 그는 그게 참 기쁜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소년에게 그는 스푸트니크 그 자체다. 단순히 별명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가 하늘을 향해 쏘아올린 작은 공. 광활한 우주에서 홀로 지구 주변을 도는 고독한 인공위성. 기억하지 못할 만큼 아주 먼 옛날, 스푸트니크 이후로 역사상 유례없는 발전이 이루어졌더랬다. 소년의 시간 역시 그를 만나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낡았지만 아늑한 방에서 오래된 책을 펼쳐 두고 나란히 읽던 그 시절의 경험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소년에게 생각보다 큰 영향을 주었다.
소년은 진지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들에게는 시간이 많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다. 여행길에 오른 사람은 이제 혼자가 아니고, 하나와 하나가 만나 둘이 되었다. 그러니 차근차근 배우면 되리라. 초점을 잡는 법도, 각도를 조절하는 법도, 그리고 내면의 한 조각을 어딘가에 걸어놓고 오는 법도.
소년은 카메라의 서늘한 표면을 손끝으로 훑는다. 버튼 하나하나를 천천히 쓰담으면서, 소년은 앞으로 이 카메라가 어떤 순간들을 담게 될지 잠시 상상에 잠긴다. 여행 가방은 그리 크지 않지만, 다행히 소년 또한 짐을 많이 들고 다니는 편은 아니다. 설령 가방이 꽉 차 놓을 자리가 없다 하더라도, 목에 걸고 다니면 그만이다. 예전에 책에서 읽은 배낭여행자들처럼. 물론 지금에 와서는 배낭여행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그 이전에 여행 자체가 드문 일이 되어 버렸지만, 그럼에도 소년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차를 탔다. 그러니 종말 이후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의외로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지도 모른다. 항상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이다.
소년은 컵에 남은 마지막 물 한 모금을 여러 차례에 걸쳐 조금씩 나누어 마신다. 컵을 내려놓은 뒤에는 연이어 냅킨으로 입가를 닦는다. 마지막으로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는 것으로 일련의 행위는 끝을 고한다. 다 먹었나요, 라던가 이제 그만 나갈까요, 따위와 같은 질문은 구태여 하지 않는다. 그저 기다리는 것이다. 조용히, 그리고 고요하게.
그는 식대를 계산하고 팁을 더해 영수증에 끼워 놔둔다. 소년이 컵에서 입을 떼었을 때 쯤에는 그 역시 계산을 끝내고, 다시 턱을 괴고 앉아 있는 참이었다. 냅킨으로 입가를 훔치고, 가지런히 손을 무릎 위에 올리는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는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낸다.
“갈까.”
방금의 반짝이던 순간을 잊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이면서도, 다시 흘러나온 목소리는 여느 때와 같이 평이하다. 어디로, 라던가 하는 질문은 덧붙이지 않는다. 함께 크리스마스 이브를 걷고, 처음 보는 식당에 들어와 같이 끼니를 하고…… 그렇게 보내는 순간순간들을 소중하다 생각하는 건 아마 그뿐만은 아닐거라고도, 그는 생각한다. 그러니 평이한 목소리는 그저 만족감의 표현에 대한 변주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함께하는 다정한 삶에 대한.
그들은 거의 동시에 일어서고, 식당의 주인장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다시 거리로 나온다. 해가 짧은 북쪽의 땅이지만, 점심 무렵의 햇살은 여전히 찬란하다. 조명이 어두웠던 식당에서 거리로 나서면, 조금은 눈이 부셔올 정도로. 잠시 눈을 깜빡여보고, 그는 소년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3시 차였던가.”
드넓은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는 열차에 대해서라면, 그에게는 간접적인 지식 정도 밖에는 없다. 유스호스텔에서 마주친 또다른 여행자들이 때로 두서없이, 때로 차근차근 이야기하던 경험담들 뿐. 그러나 인상 깊었던 것은 대재앙 이후에도 건재한 그 열차 안에서의 시간은 바깥과는 다르다고, 푸른 눈동자로 이야기하던 어느 여행자였다. 그 내용보다도, 그리 말하는 이가 그 시간을 그리워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뚜렷하게 묻어나서, 그래서 기억에 남겼다.
그리고는 조금 다르게 실질적인 이야기도.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약 1만 킬로미터에 이르는 그 길에선 모두 모스크바의 시간을 쓴다고. 모스크바보다 7시간이 빠른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같은 시간을 쓴다고. 그래서 때로는 열차의 시간을 헷갈릴 때가 있다고. 열차 안에 걸린 시계 모두가, 그 열차가 달리는 땅과는 다른 시간을 가리킨다는 사실이 그에겐 흥미롭게 들렸었다. 결국 그 열차를 정말로 타게 되었을 때는, 그 시간이 일치하는 단 한 곳에서 시작하게 되었지만.
그러니 오늘 그들의 오후 세 시는 어디까지나 오후 세 시였다. 점심식사를 막 끝내고 난 후인터라 아직 시간이 넉넉하긴 하였으나, 여행 길에서는 부지런하여 나쁠 일이 없다는 것을, 그도 소년도 이미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목길을 돌아서, 다시 광장으로 나서는 걸음은 느적느적 여유롭다. 조급해질 필요까지는 없었으므로.
“그럼 조금 있다가,”
어제도 오전에도 지나쳤던 광장의 가장자리에 서서, 그는 말을 맺으려다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그만둔다. 말을 하는 일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여행을 떠난 이후 그는 딱히 말을 아끼지도 않았다. 먼 곳에서, 처음 만나는 이들의 사이에서, 말마저 없이 걸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긴 길을 건너 온 소년은 여전히 말이 적었고, 이제는 그마저 점점 소리가 적어지니, 어쩌면 소년의 침묵을 닮아가는지도 모르겠다. 닮아가는 걸까, 돌아가는 걸까. 어느쪽이든, 그에게는 편안했다. 소년의 형이 보았다면 너희들은 너무 말수가 적다고, 또다시 투덜거리는 체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소년이 먼저 걸음을 옮기기를 기다리다가, 돌아서서 호텔로 걸음을 옮긴다. 오후 세 시, 다시 길 위에 오르기 위해서.
소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가 주인장에게 인사를 건네는 동안 소년은 한 발짝 뒤에서 시선을 내리깔고 가만히 서 있는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소년은 그를 따라 거리로 나선다. 실내에 얼마나 있었다고 쌓인 눈에 반사된 햇빛이 그새 눈부시다.
소년은 또다시 말없이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다. 소년은 이제는 익숙해진 열차에 몸을 싣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향해 떠날 예정이다. 하지만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소년은 잠시, 그와 함께하는 열차 여행에 대해 상상해 본다. 해박한 지식을 지닌 그라면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 대해서도 설명해 줄지도 모른다. 열차를 배경으로 한 또다른 종말 이전의 문학을 소개해줄 지도 모른다. 사실 그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두 사람이 함께라는 사실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리고 그 다음 목적지는 어디가 될지, 소년은 아직 알지 못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경쓰지 않는다. 시작부터 계획되지 않았던 여행이다. 그저 바람처럼, 유빙의 울음소리처럼, 혹은 초원을 내달리는 야생마 떼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그를 동경해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여행의 목적은커녕 종착지조차 정하지 않았다. 그저 선로를 따라 이동하다가, 마음에 드는 정착지에서 하루 묵기도 하고, 혹은 더 길게 머물기도 하고, 얼어붙은 바이칼 호를 보러 가기도 하고. 그런 여행이었다.
선로의 끝자락에서 그를 만나리라는 것 또한, 처음부터 상정한 일은 물론 아니었다. 만나기를 바랐고, 같은 경험을 공유하기를 바랐지만, 바라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와의 재회는 소년에게는 선물과도 같았다. 콤소몰스카야의 작은 카페가, 보르시치와 비네그렛을 파는 이름 모를 식당이, 소년에게는 전부 선물이다. 목에 걸려 달랑거리는 작은 카메라와도 같이.
"나중에 봐요."
작별이 아닌,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인사. 잠시 뒤면 두 사람은 각자의 짐을 들고 역에서 다시 모일 것이다.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혹은 중앙아시아로, 그도 아니면 발을 딛어본 적 없는 미지의 곳으로 떠날 것이다. 소년은 마지막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몇 발짝 걸어간 뒤, 멈춘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다. 멀어지는 그의 등이 소년의 눈에 들어온다. 소년은 그 순간, 이 작은 카메라의 첫 번째 피사체로 무엇이 가장 완벽하게 어울리는지 깨닫는다. 그리고 카메라를 들어올린다.
소년은 첫 사진을 그에게 보여줄지, 아니면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할 지 아직 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이 사진은 언제까지나 소년과 함께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소년은 곧, 그거면 되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등을 돌려 숙소를 향해 마저 걸어가기 시작한다.
/막레 느낌으로 들고 왔어😆 그리고 다음 일상 말인데, 번외편 느낌으로 한국에 있었을 때의 사찬이와 해월이에 대해 돌려 보면 어떨까? 첫 만남이라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