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이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치열한 전장에는 아무리 화력을 쏟아부어도 부족함이 있기 마련이다. 서포터는 바로 그 부족한 부분을 케어한다. 기본적으로 캐스터와 비슷한 마법적 성질을 띄지만 부수적인 면에서 그 궤를 달리한다. 이들이 부리는 마법에는 단순한 원소아츠를 제외하고도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어 적들의 발을 묶거나, 조금이나마 메딕의 자리를 대신해주는 등의 신통한 역할을 해준다. 경험있는 지휘관일수록 압도적인 전력보다는 서포터 포지션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묘한 양상을 띄는데에는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칼리의 질문을 들은 스카는 눈썹마저 옅게 찡그리며 고민을 거듭했다. 듣자마자 누군가라는 것은 파악하기 쉬웠지만, 그것을 묘사하라 한다면 정확히 답하기 어려웠다. 특유의 울림, 파동. 날카로운가 싶으면서도 낭창낭창 휘어지고, 따스한 기색이 존재하는 것을 뭐라 이야기하면 좋을까.
"겨울의 눈은 말이죠, 언뜻 날카로운 차가움만을 간직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 특유의 포근함이 있다고 생각해요. 말솜씨가 좋지 않아서 이 묘사가 잘 맞을지, 제대로 전달될지도 모르겠지만요...칼리는 눈을 닮았다고 생각해요."
사람마다 저마다의 파장이 존재했다. 목소리마다, 아무리 비슷하다 하더라도 모두가 달랐다. 스카는 그런 울림들을 기억하는 데 뛰어났다. 그리고 그 울림들이 끊어지는 순간을, 기억하는 것조차. 굳으려는 입매를 끌어올렸다. 과거는 과거일 뿐, 이다. 휩쓸릴 이유가 없었다.
"고마운 건 고마운 것이니까요. 보답이라도 해드리고 싶은 심정인 걸요, 정작 해드릴 수 있는 것도 얼마 없지만요."
그정도였다는 단호한 답에 스카는 작게 침음을 흘렸다.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자신의 상태가 그리 안 좋아보이냐 묻는다면, 아무리 자신이라도 그럴 것이라 답할 수 밖에 없다지만. 하지만 제가 어떻게 제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깊이 생각하는 대신, 스카는 웃으며 감사를 전했다.
"그, 발이 덧날지도 모르는 건 사실이지만...안아들기에는 무거울 텐데요..."
스카는 우물쭈물거리며 말 끝을 흐렸다. 강한 건 알았다. 물론 이곳의 사람들이야 강한 이들이 많았지만, 애초에 평소에도 손수건을 이용해 홀로 지혈하고 걸어가기도 했던 스카였다. 실례를 더 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 아닌 의문도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래서? 원하는게 뭔데?" "아는걸 전부 얘기해줘야겠어." 병동의 침실에 앉아있던 필라인 여성이 입을 열었다. 하룻밤 사이 판도라의 독은 물론이고 이런저런 치료를 받아 그 몸의 구석구석엔 붕대가 감겨있었다. 앞에는 소장이 앉아 헬멧에서 나오는 시린 빛으로 그녀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내려오는 푸른 머리칼을 계속해서 꼬았다. 거기서 반항적인 기색이 묻어났다. "싫다면?" "우리에겐 고문 기술자가 있지." 그 말을 들은 필라인 여성이 금새 고문이란 단어에 겁을 집어먹은듯 몸을 움찔였다. "-지만, 딱히 뭘 더 하진 않아. 내가 시간이 남아 도냐. 난 바쁜 몸이야. 너에게 할애하는 이 시간은 극히 일부라고." "그럼 그냥 꺼져버리지 그래?"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협조하면 대신 네겐 혜택이 있다." "혜택... 이라니? 너흰 그냥 용병 나부랭이들 아니었어?" "솔깃하지? 네가 어떻게 이런 의료서비스를 받게되는지는 알까 모르겠네. 뭐, 이건 더 말해줄 수 없어. 네 얘기를 듣는게 먼저야." 소장은 아리송한 말만을 꺼내놓았다. 헬멧에 떠오른 빛이 변한다. 이 다음부터는 본격적인 질문들이었다. "너흰 리유니온이 아니었어. 그렇지?" "...맞아." 도미닉이 불쑥 본론을 꺼내자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지만 "내가 알기론 리유니온은 자기들 나름 숭고한 목적으로 뭉친 단체야. 약쟁이 양성으로 돈이나 벌자는 뒷골목식 몽키 비즈니스랑은 성격부터가 다르지. 하물며 걔들도 약에 오리지늄을 넣는 장난질은 하지 않아. 즉, 너희는 이 약으로 거리의 하류층들을 감염된 약쟁이로 만들고, 약 시장을 독점해 그들을 하나로 확보하려고 했다. 맞나?" "맞아." "그리고 너도 약을 했어. 이것도 맞나?" "그건 아니야!" "이건 아닌가." 도미닉이 머리를 갸웃거리며 팔짱을 끼고 자세를 편하게 고친다. 사뭇 진지하듯도, 가벼운듯도 한 당최 종잡을 수 없는 태도에 필라인 여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일고, 그 끝에서 그녀는 결심한듯 입을 연다. "테어다운... 그게 그들의 이름이야. 전신은 다른 나라에서 왔다고 했지만 지금은 암암리에 세력 확장중이라고 들었어.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조종할 수 있는 많은 감염자를 원하고있어. 솔직히 그런건 관심 없었어. 난 그저, 감염자도 일할 수 있다는 말에 들어간거고... 약을 제조하는 일이든, 그걸 파는 일이든, 누굴 감염시키는 일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어. 난 살기위해 뭐든 해야 했으니까... 여긴 그런 곳이잖아. 감염자는 사람취급도 받지 못하는 곳. 여긴 죽기 아니면 살기야. 하지만 그게 3일도 가지 못할거라는걸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도망의 연속. 이 필라인은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감염자가 되어 갈 곳을 잃은 그녀는 항상 조금이라도 더 숨통이 트이는 곳을 찾아갔고, 그 숨구멍이 닫히기 직전에 빠져나가 또 다시 다른 구멍을 찾는다. 테라에는 이런 감염자들이 아주 많았다. 악의 연쇄인 것이다. "하지만 컬럼비아의 시장을 너무 우습게 봤군. 여기 보기보다 만만치 않거든. 그게 전부야?" "착각하지마. 나도 말단중에 말단일 뿐이니까. 그 이상은 몰라." 필라인 여성이 도미닉을 노려본다. 그 눈매가 헬멧을 뚫어버릴듯 날카로웠다. 더 이상 캐묻는건 이제 의미없어 보였다. "좋아. 그럼 약속대로 상을 줘야겠지. 너, 갈 곳도 없다고 했지. 여기서 나가봤자 배신자니까 걔들에게 쫓길거고. 도망의 연속이로군." 어쨌든 필요한 정보는 얻었다. 그리고 그녀는 감염자다... 그것도 꽤 쓸만한 아츠능력을 가진 감염자. 감염자들이 평균보다 강한 아츠반응을 일으킨다고는 하지만, 바로 전의 작전에서 보여주었던 창고를 통째로 얼릴 정도의 능력은 솔직히 도미닉도 놀랄 정도였다. 그런 감염자를 보게되면 아르고의 소장이 하는 말은 하나였다. "그럴 바엔 그냥 내 밑에 들어와라." 소장의 말에 필라인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치켜뜬다. "날 폭탄으로 터트린 녀석들이랑 일하라고?! 당신 미쳤어?" "무슨 소리 하는거야. 찰리랑 녀석들이 진심으로 날려버릴 생각이었으면 넌 이 자리에 없었어. 우리 사무소 애들도 대부분은 그렇게 들어왔고. 그리고 이래봬도 나름 보호소 비슷한 간판도 달고 있거든. 잘 곳도 있고, 광석병도 케어해주고. 냉난방도 나름 완비. 뭐, 와이파이는 조금 느리지만. 넌 그냥 내 지시에 따라 싸워주기만 하면 돼." "입 발린 소리! 감염자를 데려와 쓴다고? 내가 그걸 어떻게 믿는데? 어차피 너희들도 나중되면 그 녀석들이랑 똑같이...!" "잡아 먹는 쪽이 되지 못하면, 잡아 먹힐 뿐이지." "..." "싫으면 그냥 나가면 돼. 거기서 이 대화는 종료다." 소장이 그렇게 말하며 자세를 또 바꾼다. 이번엔 아예 의자에 드러누울듯 등받이에 몸을 완전히 맡겼다. 필라인 여자는 그런 여유로운 태도가 밉상인지, 아니면 어딜 어떻게 믿어야 할 지 모르겠는지. 배째란 식의 태도에 머리가 지끈해져 오는듯 싶었다. 완전히 할많하않의 표정이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질 만큼. 하지만, 이대로 나가서도 도망쳐서 다시 임시 숨구멍을 살필 뿐이라면, "...하아. 뭘 하면 되는데?" 조금이나마 이곳에 머물러보는게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듯 그녀는 입을 그렇게 답을 내놓았고. 소장의 헬멧이 삐빅거리며 기계음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넌 앞으로 레인메이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