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게 제가 어제 말씀드렸잖아요, 탐색임무 때 쪽지에 주소가 적혀져있으면 거기로 무턱대고 찾아가다가 뒷통수 얻어맞고 기절한다고요. 그리고 일어나면 의자에 묶여있고 눈 앞엔 묘하게 매드스러운 의사가..."
에헤이,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낭창하게 지껄이며 한모금 정도 남은 쮸쮸바를 꼴깍 마셨다. 그리곤 대문 앞까지 자박자박 걸어가 현관의 문고리를 톡톡 두드려봤다. 반쯤 헐겁게 열려있었기에, 금방이라도 끼이이익 하며 호러영화에서 자주 들리는 그 소리가 나며 활짝 열릴 것 같다.
"각오같은 거 안 한다만." 그리고 지상을 불태우고 하늘을 찢어발기려면 보험금이랑 피해보상액을 다 내놓은 다음 이야기를 할까요. 일단 지상의 가치인 나무 한 그루나 석탄이나 석유의 가치라던가. 오존층의 가치라던가.. 라는 극도의 자본주의 어택을 하네요(?) 별 소용은 없겠지만(?)
"뭐. 버그가 일어나서 나온 모양입니다." 간단한 일 아니겠습니까. 라고 농담을 하며 공략법 같은 거 있습니까? 라고 의뢰인에게 물어보려 합니다.
불은 뜨겁지 않았습니다. 음... 이건 기사님 말대로 홀로그램이네요! 지금 보니 루시퍼도 홀로그램 비슷한 것으로 모습을 유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자가 버린 쓰레기는 그대로 있습니다. 싸우려는 해리를 보던 루시퍼는 손짓으로 불을 치웁니다. 싸우려는 의도는 없다는 걸 보여주려나보네요. 덕분에 유자가 버린 쓰레기가 더 잘 보이게 되었습니다. 의뢰인은 그걸 집어들어 근처에 있는 쓰레기통에 집어넣습니다. 친구 집을 치워주려는 것 같습니다.
"흠, 버그가 맞긴 하지. 용사라면 외출중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가서 하도록 할까."
루시퍼는 거실로 여러분을 안내하다가, 중간에 보이는 주방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는 몸이라 다과는 꺼내줄 수 없지만 냉장고라면 저기 있으니 알아서 꺼내먹어라. 에 뭐시기 생수 뿐이지만 없는 것보단 나을 게다."
까만 냉장고에 생수 뿐이라니! 정말 끔찍하네요!
거실에는 네모난 탁자가 있고, 탁자의 각 변마다 검은 3인용 쇼파가 놓여 있습니다. 루시퍼는 북쪽 쇼파 중앙에 턱하니 앉습니다. 의뢰인은 반대편에 앉았네요. 여러분도 쇼파에 앉아서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살림의 정의는 두 사람이 한 가족이 되어서 가정을 꾸리는 거겠지? 나는 신에게 반항해서 지옥 밑바닥으로 떨어지긴 했지만 인간이 아니라 천사이니 그 정의에 맞지 않는다."
그런데 그 마실 것은 무슨 맛이지? 루시퍼가 덧붙이며 유자의 밀크티에 관심을 보입니다.
"이스터 에그... 였으면 좋았겠지만 말이다. 그보다 좀 복잡한 일이지."
현실로 튀어나온 루시퍼가 쇼파에 편하게 앉아서 자기가 아는 사람이랑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넋이 나간 의뢰인이 해리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립니다.
"그, 그래! 건빵이는 무사한가요!" "용사 '건빵천국'은 무사하다. 다만 지금은 손님 대접을 위해 상점에 갔기 때문에 여기 없을 뿐이다. 봤다시피 냉장고에 들어 있는 거라고는 물 뿐이지 않느냐."
잠시 여러분을 쳐다보던 루시퍼는 자세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나는 '헤븐즈 판타지아'의 최종보스로 만들어졌지. 지금껏 수많은 용사들과 싸워왔고, 그들을 모두 패퇴시켰다. 수없이 그런 일을 반복하다보니 이게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용사들을 물리친 다음에는 내 군대를 지옥에서 불러들이고자 했는데, 아무리 용사들을 물리쳐도 거기까지는 가지 못했던 것이다. 모두 물리치고 정신을 차려보면 또다른 용사 파티가 내 앞에 있었지. 마치 같은 순간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느낌이었다. 어떤 상황인지 알아보기 위해 그들과 대화하고자 했지만 내 말은 신경쓰지도 않더군. 그게 계속되자 이게 다 무슨 소용인지도 모르겠고, 아무것도 파괴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 시점에서 이미 루시퍼는 버그였습니다.
"그러던 중, 특이한 일이 생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앞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있었지. 그는 혼자였으나 나와 가장 오랜 시간을 싸웠다. 그러던 중, 무심코 말을 걸어버렸지. 나도 그가 대답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우린 무기를 내려놓고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내 이야기를 들은 그는 나를 '자아를 가진 프로그램'이라 불렀다. 용사는 나를 '게임'이라 불리는 세계에서 꺼내었고,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홀로그램으로 된 몸도 주었다. 흠, 이 집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지만. 어쨌든, 그렇게 된 것이다." "건빵이가 이과였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쪽 전공이었을 줄은 몰랐네요..."
오오 이과 오오. 하기야 이 세계는 판타지니까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용납할 수 있는 마법의 단어죠.
묘하게 나와 비슷했다. 순종적으로 아버지와 형의 말에 따르며 집안에 박혀살던 나와 인공지능으로써 게임의 시스템에 순종하던 녀석. 그나마 저 녀석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아를 깨우쳐 뛰쳐나오지 않았던가. 난 그저 혼자서라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걸 보여주겠다는 치기어린 마음으로 도망갔을 뿐인데. 묘한 패배감이 느껴져 후드자락을 만지작거렸다. 표정이 미묘하게 어두워졌다.
"그러면 건빵 씨는요? 실종신고가 됐었어요. 지인분께 아무런 말도, 연락도 안됐고. 그것도 의도됐었던 건가요? 그리고 제단의 그 주소 적어놓은 것도 당신?"
우선 그건 그거고. 의문점부터 하나씩 해결하고 봐야겠다며 하나하나 질문을 꺼냈다.
"또, 이런 태도를 보시면 저희가 올줄 알고있었던 건가요? 놀라시지도 않으셨고. 아, 하나 더. 저희가 들어왔을 때의 그 멘트는 혹시 당신 나름의 '어서오세요'란 뜻이었어요?"
"나도 적대할 이유는 없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건 농담...... 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일부러 들어오는 타이밍에 맞춰서 준비했는데... 농담을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되는 거였나...?"
여러모로 지식이 좀 부족합니다. 창세기부터 지금까지 지옥 밑바닥에 있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합니다.
"계속 여기 있으면 좋겠지만 '개발사'라는 녀석들이 그냥 두지 않을 거라는 모양이다. 그래서 일부러 저쪽 세계와 연결할 수 있는 기계가 있던 거처에서 나와 여기로 옮겼는데, 여기도 언제까지나 안전하진 않을 거라 하더군. 제단에 주소를 적어둔 건 용사다." "그럼 말 나왔던 것처럼 실종신고나 연락단절 건에 대해서는 아시는 거 없으세요?" "글쎄, 나도 잘은 모른다. 주변 사람들이 말려들지 못하게 하려고 했거나, 정보가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 정도는 해보겠다만." "...역시 사장님 말씀대로 건빵이가 돌아와야 하겠네요."
그리고 그때, 누군가가 급하게 들어와 문을 잠급니다. 사진으로 한 번 봤던 그 사람, 건빵천국입니다! 건빵천국은 과자나 음료수가 든 검은 비닐봉투를 탁자에 내려놓습니다.
"건빵아!" "개발사 사람들이 쳐들어왔어! 잠깐만, 사람이 많은데...?" "너 찾는 거 도와준 고마운 분들이야!" "감사합니다! 근데 지금부터 개발사랑 싸워야 할 것 같거든요! 뒷문으로 피하세요!"
창문 밖으로 사람들이 보입니다. 저 높은 담을 어떻게든 넘어서 들어오네요. 그들은 마당을 밟으며 거침없이 전진중입니다!
"어차피 찾는 건 우리니까 쫓지 않을 겁니다. 싸운다고 표현했지만 저녀석들 목표는 제압이랑 루시퍼 확보일거예요. 그리고 얜 장치만 옮기면 어떻게든 돼요! 물론 좀 무겁고, 다시 설치 할 때까진 못 나오겠지만요!" "...세계 하나를 파멸의 구렁텅이에 넣을 수 있던 내가, 지금은 그냥 짐덩이로군." "사진도 보셨습니까? 아니, 참, 실종 수색이면 당연하겠네요. 안녕하세요, 건빵천국입니다. 회수되면 아마 오류 수정해서 이것저것 건드린 다음 다시 게임에 넣겠죠? 이 녀석은 최종보스니까요. 없으면 안 되고, 새로 짜기엔 늦었어요. 녀석들은 이미 인터뷰로 1주일 안에 루시퍼를 다시 내보내겠다고 공언한 상황입니다."
그렇습니다. 도망쳐도 이쪽은 가장 심한 꼴이래봤자 제압 당하고 루시퍼를 뺏기는 것이 전부입니다. 해커짓을 먼저 한 건 이쪽이니 불법침입에 대한 죄는 물을 수 없겠죠.
전투에 들어가신다면 개발사 직원들을 제압해야 합니다. 도주하면 다음 진행 레스로 진행이 끝납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도주도 나쁜 선택은 아닐 거예요.
"도주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의뢰인이 의뢰하지 않았다면 딱히 엮일 일도 없었고. 라고 생각하고는 가져다 바친다는 말에
"가져다 바친다는 것을 앞에서 말하다니... 물론 상관은 없다만은." 고개를 끄덕입니다. 좋게 생각하자면 개발사에서 저 건빵천국을 특채로 스카웃해도 이상하진 않겠군. 이라고 느리게 말하며 애초에 섭종한다면 하나 빼내도 상관없지 않겠나. 사실 버그가 생겨서 자아가 생긴 프로그램은 꽤나 흥미로운 소재일 거지 않겠나. 라고 말하고는 나갈 거면 나가게나. 나도 나갈 거니. 라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