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즈카는 오늘따라 편의점이 땡겼다. 딱히 야식을 먹고 싶은 것도 아니고, 사고 싶은 물건이 딱히 있지도 않았지만 간만에 돌아온 동네를 조금 더 돌아보고 싶었다. 할 일 없이 가만히 있으려니까 조금 심심하기도 했다. 나가는 이유가 뭐든 좋은 게 좋은 거다. 다녀오는 길에 동네라도 산책하면서 놀다가 뭐라도 사서 들어가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시즈카는 곳곳을 돌아다니며 밤산책을 기분좋게 즐겼다. 좋은 광경을 특히나 많이 볼 수 있었다. 걸어다니면서 걸터앉기 좋은 나뭇가지도 찾았고, 오랜만에 보는 이웃과 인사도 했고, 바깥에 잠시 내놓은 편의점 판매품의 비닐포장을 뜯으려는 고양이도 봤……
"와아아아악!!!!!!!! 야옹아 그건 아니야!!!!! 떽!!!!!!"
시즈카는 와악 소리를 지르며 헐레벌떡 달렸다. 통통한 고양이가 동그란 눈으로 시즈카를 보았다. 커다란 여자사람이 괴성을 지르며 펄떡거리는 모습을 보고서도 도망가지 않는 걸 보니, 사람에게 돌봄 받으며 괴롭힘 당한 적이 없는 고양이인 듯싶었다. 아, 여기 사람들 인심이 참 좋구나. 야옹아, 말썽부리지 말고 동네 사람들이랑 행복하게 살렴~! ……아, 이게 아니라! 고양이가 잘 지내면 좋은 거긴 한데! 거기서 비켜주면 안 될까!! 편의점 손해야 저와는 관계 없는 일이라지만 멀쩡한 상품을 망가뜨리는 걸 무시하고 지나갈 정도로 양심이 없진 않았다. 고양이를 떼어내기 위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자 야옹이가 발톱을 살벌하게 세웠다. 시즈카는 얌전히 손을 뗐다. 고양이가 다시 포장을 뜯으려 했다. 시즈카는 고양이를 뜯어말리려…… 또 발톱이 섰다. 이 과정이 열 번 쯤 반복되었다.
지루하게 반복되던 대전의 승자는 시즈카였다. 시끄럽고 커다란 여자사람의 방해를 이기지 못해 고양이가 결국 자리를 비켰다. 사실 처음부터 직원을 불렀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번거로워지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좀 늦게 들기도 했지만, 모로 가나 기어가나 결과는 같으니까 상관 없을 것이다. 휴, 알바생의 직장생활을 무사하게 지키는 데 성공했다. 뿌듯한 마음에 시즈카가 와하항, 하고 웃으려 했을 때.
저편에서 뭔가 끔찍하고 아무튼 이성 수치를 깎는 뭔가가 날아들고 있었다.
헙.
시즈카는 황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와, 나 방금 엄청 험한 말 할 뻔했어. 아니, 입 벌리고 있다가 벌레 먹겠네! 잠시동안 멍하게 그것들을 쳐다보던 시즈카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벌레가 날아오는 방향이…… 이쪽인 것 같기도 하고.
악명 높은 팅커벨급의 거대나방은 아니었지만 저기에서 날아오는 벌레들은 손톱만한 귀여운 나방보다는 훨씬 컸다! 놀란 나머지 왼쪽으로 움직일지 오른쪽으로 뛸지도 결정하지 못하고 어리벙벙하게 서 있던 시즈카는 일단은 제자리에 웅크려 몸을 숙였다. 아, 이럴 게 아니라 앵무새로 변해서 피할까? 작으니까 더 쉬울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던 도중에 갑자기 몸이 휙 들렸다. 엥, 이게 뭐야. 갑작스러운 상황의 연속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시즈카는 곧이어 들린 말에 앵무새로 변해 제 몸을 붙잡은 남자의 팔에 매달렸다. 앵무새 발톱으로 야무지게 옷자락을 쥐고선, 품에 매달려서 해리의 귓가에 왱알왱알 말하기 시작했다!
"엥! 그게 그러니까요 지금이 몇 시였지???? 제가 9시쯤에 밤산책을 좀 나와서 돌아다니다가 고양이를 만났는데요? 아니 그 귀-여운 고양이가 편의점 물품을 뜯으려고 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거기서 일하는 건 아니지만 직장생활동지로서 막을 수 있는 피해를 막으려고 했죠! 그래서 제가 고양이한테 안 된다고 말렸다가 고양이가 할퀼까봐 쫄았다가 말렸다가 쫄았다가 그러다가 겨우겨우 쫓아냈거든요??? 너-무 뿌듯하고 기분이 좋아서 '신난다!!!!!'하고 외치려고 했는데 갑자기 저쪽에서 붕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벌레 떼가 이쪽으로 날아오는 거예요!!!! 그래서 결론은 말이죠!!!! 나방이 나온 게 방금 전이라고요 어우 진짜 깜짝이야 간떨어지고 심장도 떨어질 뻔했다니까요??? 아니 무슨 나방 아포칼립스도 아니고 기근의 재앙도 아닐텐데 갑자기 저게 뭐야???"
"그나저나 이렇게 가는 길에 하기는 좀 뭐한 소리긴 한데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잠-깐! 누군지 몰라서 당황했었는데 이렇게 보니까 알겠네!!! 얼마 전에 들어오신 분 맞죠??? 얘기는 조금 들었어요~ 이렇게 인사 하는 건 처음 맞죠???? 제가 거의 한 달 동안 휴가를 다녀왔었거든요~ 그래서 새 얼굴을 이렇게 보니까 더 반갑네요?!!!! 이름이 뭐예요?? 저는 시즈카라고 하는데 편하게 이름으로 부르셔도 된답니다~~~!!"
정신없이 달리는 도중에도 시즈카는 막히는 데 없이 술술 말했다. 본인이 뛰는 게 아니라서 그런지 앵무새 모습이라 혀를 깨물지 않아선지 둘 모두가 이유인지, 어쨌거나 시즈카는 한창 달리고 있는 해리의 정신을 열성적으로 공격했다!
다급하게 달리는 와중에도 자신에게 속사포처럼 이야기를 하는 앵무새라는 요소까지 겹친 해리는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을 이었다.
"사실 저도 우연히 나방 떼가 어디론가 향하는 걸 쫓다가 선배를 만났거든요? 한 달 내내 휴가를 다녀오시다니 참 부럽습니다!"
그러던 해리는 나방 떼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곤 마치 목적지를 찾아 헤매듯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몇몇 나방이 땅으로 떨어지고 다른 나방들은 모조리 어디론가로 날아가는 걸 보더니 조심스럽게 땅에 떨어진 나방에 다가갔다. 나방은 얼핏 평범하게 보이는 자연산 나방처럼 보였지만 날개나 더듬이가 의도적으로 이곳저곳 잘려 있고 철심 같은 뭔가가 박혀있었다.
"아하~ 해리라고 하시는구나!! 그럼 해리 씨라고 부를게요!! 아~ 네네 맞아요 오랜만에 집에 가니까 너어무 좋더라구요~! 천익 아니었음 이런 장기 휴가는 꿈도 못 꾸는데! 오랫동안 못 본 사람들 얼굴도 보고 집밥도 먹으니까 향수도 좀 덜어지는 것 같고~ 아!!! 이런 얘기 할 때가 아니었지!!!! 제가 꽤 오래 여기에 없었어서 요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는데요!!!! 지금 이 난리가 벌어진지 얼마나 됐나요??? 꽤 된 일인가요???? 제가 아직 뉴스를 안 봐서요~"
제법 편안한 자세로 안겨서 왱알거리던 시즈카가 문득 생각했다. 어, 그런데 해리 씨는 왜 쫓아가는 거지? 의뢰라도 들어왔나? 아님 나방한테 원한이라도 있는 건가? 아님 그냥 나방이 우르르 날아다니는 게 정말정말정말 싫어서 개인적으로 해결하려고? 잠시 생각에 잠긴 틈에 쉴새없이 왱알거리던 입이 다물어졌다.
나방이 갑작스레 경로를 바꾸고, 몇 마리가 낙오되었다. 정신없는 추격전도 동시에 끝이 났다. 시즈카는 해리의 팔에서 슬금슬금 올라가 어깨 위에 앉았다-"아, 잠시 실례할게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진 나방을 보자니…… 오, 새의 눈으로 보니 그러잖아도 상대적으로 몸집이 작아지며 크게 느껴지는 벌레가 더 선명하게 보였다. 눈 버렸다.
시즈카는 어깨에서 폴짝 뛰어내리며 사람으로 돌아왔다.
"왐마야…… 이거 그거 아니예요?? 왜 그! 있잖아요! 바퀴벌레한테 칩을 심어서 조종하는 기술 같은 거??? 아님 박제실에서 탈출한 나방???! ……은 아닐테고!! 그런데 이거 얘만 그런 거예요? 다른 나방도 이런가? 으~ 보고 있으려니까 징그럽네요~ 그나저나 한 마리 한 마리마다 이렇게 해놓은 거라면 보통 정성이 아닌데요??? 나방 조종 장인 아닐까요??? 이 정도면 벌레닌자 아닌지??"
"대략 3~4일쯤 됐을 겁니다. 저도 며칠 전에 이놈들에게 쫓긴 적이 있었거든요. 그 전엔 곰젤리 습격 사건이더니 이번엔 나방이라니, 이젠 서울에서 뜬금없이 뭔일이 터져도 이상할 게 없을 거 같습니다."
그러는 자기도 평범한 놈은 아니라고 자조하던 해리는 시즈카가 사람으로 돌아오고 나서 열심히 말하는 걸 묵묵히 듣다가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인위적으로 나방을 조종하려 하다니... 시간은 남아돌고 할 줄 아는 게 없는 잉여들이나 할 짓입니다. 그리고 이런 인위적인 처리를 하면서까지 나방을 조종하는 걸 보면 아니마는 아닌 거 같군요. 아니마면 손짓 하나로 조종했을테니까요. 이놈들은 아마 남은 생명이 다해서 자연사한 것 같구요. 아니 그나저나 이런짓은 왜 하는 거지...? 내가 처음으로 맡은 의뢰가 이런 거라니 믿을 수가 없구만."
투덜거리던 해리는 나방 떼가 날아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즈카에게 물었다.
"저는 이대로 나방 떼를 쫓아갈 생각입니다. 이렇게 죽은 나방들이 분명 남아있을테니 그 흔적만 쫓아가면 범인을 잡을 수 있을테니까요. 선배는 어쩔겁니까?"
어제 막 대청소를 해서 기억 속의 그 어떤 모습보다도 깨끗할 사무소에 의뢰인이 들어옵니다.
"안녕하세요, 의뢰를 하려고 하는데요... 어... 그... 실종된 사람 찾는 일도 하시나요?"
의뢰인은 게임 로고가 들어간 검은 에코백을 하고 있습니다. 저 게임은 '마스터 오브 드래고니카'네요! 가상현실 게임으로, 알에서 태어난 새끼 용을 파트너로 삼아 여기저기 여행하고 강해지는 게임입니다. 아기용을 다양하게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어서 많은 장인들이 멋진 용을 만들어내곤 했지요. 이 게임도 헤븐즈 판타지아 못지 않게 오래된 게임입니다. 어쩌면 여러분도 해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먼저. 실종된 사람을 찾는 의뢰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종 기간과 위험도에 따라 기본급이 다르며, 기간이 길고 위험도가 높은 경우 추가의 수당이나 추가적인 정보요청이 잦을 수도 있습니다." 일단 찾고자 한 인물의 정확한 정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라고 천천히 말하려 하네요.
의뢰인은 여러분에게 인사를 합니다. 어정쩡한 모습이 커뮤니케이션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네요. 앉아서 시원한 녹차를 마시며 사장님의 말을 듣습니다.
"그럼 일단 들어주세요. 어, 실종 기간은... 짐작 가는 날짜가 있긴 한데 솔직히 정확하겐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한 달일수도 있고, 일주일일수도 있고 며칠일수도 있고... 현실에서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라서요. 주로 가상 현실에서 만났죠. 제가 찾고자 하는 인물은 '헤븐즈 판타지아'라는 게임의 랭킹 1위 유저인 '건빵천국'이에요. 저는 편하게 '건빵이'라고 불렀죠."
...가상 현실에서 실종된 걸까요? 의뢰인은 말을 잇습니다.
"헤븐즈 판타지아가 오래된 게임이니 혹시 모르실 수 있을 것 같아서 설명 먼저 할게요."
의뢰인은 잠시 설명합니다. 헤븐즈 판타지아는 세계를 창조한 신이 5대 천사와 함께 세계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중 첫 번째이자 가장 강한 천사인 루시퍼가 반란을 일으켜 신을 살해하고 대신 나머지 네 천사들에게 봉인당했다는 배경 설정이 있는 게임입니다. 유저들은 루시퍼의 봉인이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여러가지 퀘스트를 수행하게 되지요. 그리고 올해에 드디어 최종보스인 루시퍼와 싸울 수 있는 컨텐츠가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많은 유저들이 도전했지만, 루시퍼를 잡았다는 이야기는 어디서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건빵이는 혼자 레이드에 도전하려고 했어요. 랭킹 1위인데다 만렙만 참가 가능한 단체 레이드인 폭주한 사대천사 레이드도 혼자 돌았던 녀석이라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죠."
랭킹 1위의 위엄입니다!
"저는 최근에 바쁜 일이 이것저것 생겨서 게임에 잘 못 들어갔어요. 게시판도요. 그런데 그 일들이 끝나서 들어가보니까, 아니 글쎄, 건빵이가 사라졌다는 거예요.뭔 일인가 해서 알아봤더니 건빵이가 혼자 루시퍼 레이드 도전하고 나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거예요. 레이드가 끝나면 성공했든 실패했든 근처 마을로 보내지는데 하루종일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지 뭐예요. 근데 건빵이만 사라진 게 아니었어요. 그 레이드 이후 루시퍼도 소환 아이템을 제단에 올려놔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요. 지금은 운영진이 막아놔서 못 들어가지만 건빵이 이후에 도전한 세 팀이 똑같은 증언을 했어요."
기이한 일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직접 들으려고 건빵이네 집에 가니까 건빵이가 없었어요. 냉장고에 있는 신선식품들은 죄다 상해 있었으니 며칠동안 집에 들르지 않은 건 확실했죠. 곧 돌아오겠거니 해서 집에서 기다려봤는데 올 생각을 않더라고요. 전화도 안 받고, 채팅도 안 보고. 할 수 없이 마지막 수단으로 여기 왔어요."
"이름은 들어 보았습니다만. 실제로 한 적은 없군요" 그러나 일단 기본적 설명을 해주는 의뢰인의 말을 듣고는 랭킹 1위라는 것에 대단한가..? 라고 생각하네요.
"그렇다면 가상현실과 현실의 외양 둘 다가 필요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에 있는 가상현실기기 쪽은 조사해 보셨습니까? 라고 물어보려 하네요. 냉장고에 있는데 상할 정도면 셍각보다 오래 전일지도. 냉장고에서 길면 일주일 정도는 버티던데. 라고 생각하려 합니다.
의뢰인은 핸드폰으로 스크린샷과 사진을 보여줍니다. 스크린샷에 나온 캐릭터는 가벼운 갑옷과 망토를 걸친 검사로 보입니다. 사진은 의외로 평범하네요. 거리에서 지나치면 기억 못 할 정도로 평범합니다.
"문의는 해봤는데 '게임에서 오류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나 '개인 기록이므로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같은 대답만 보내줘서 아무런 쓸모가 없어요. 해킹을 할 수도 없고 정말... 개발사가 다 그렇죠, 뭐. 아, 솔플 날짜는 6월 24일 저녁 정도였을거예요."
솔플 날짜까지 알지만 개발사에서는 매크로같은 대답만 받는 모양입니다.
"오랫동안 게임을 해왔지만, 이런 일은 건빵이가 처음이에요. 그리고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네요."
하다못해 레이드 중간에 튕겼더라도 그게 현실 사람에게 영향이 가진 않았을 것입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군요.
"그냥 사라지진 않았을 거예요. 제단 근처를 조사하면 뭔가 나올 것 같은데, 제단 근처 필드도 모두 만렙 몬스터가 득시글대는 지역이라... 저는 랭커도 아니고 심지어는 힐러 겸 잡캐라 혼자서는 무리라서요. 실종자 수색의 일환으로서, 괜찮으시다면 게임 내에서의 조사에 동참해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