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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호가 사는 저택에 도착하자 보이는 곳은 수많은 신들이 모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곳으로 오지 않은 신들도 있는지 모든 신들의 모습이 그곳에 있는 것은 또 아니었다. 저택의 입구에서 가온이 정말 빠르게 손을 흔들면서 신들이 저택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돕고 있었다. 가온 뿐만이 아니었다. 누리와 백호 역시 상당히 심각한 분위기로 가온을 도와 신들을 유도하고 있었다.
"자! 빨리! 빨리 들어오십시오!!"
"어서! 어서 들어와!!"
"거기 리스도 어서 이쪽으로!"
수많은 신들을 부르면서 안으로 유도하는 가운데, 결계는 더욱 더 금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순식간에 커다란 쨍그랑 소리를 내면서 깨져버렸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 풍겨오던 살기는 더욱 안으로 퍼져오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검붉은 번개가 몰아치기 시작했고 수많은 신들에게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 번개를 바라보며 백호는 순간적으로 꼬리를 바짝 세우고 하늘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절연(絶緣)의 고위신. 흑호..."
뒤이어 하늘의 번개가 땅으로 몰아쳤고 그것은 아주 강렬한 섬광이 되어 주변을 집어삼켰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섬광이 천천히 사라지자 보이는 것은, 제법 나이가 있어보이지만, 그 위엄과 카리스마가 상당히 매서운 검은 여우 수인 신의 모습이었다. 수염이 길지만 그 눈빛이 보통 살벌한 것이 아니었고, 그 신에게서 느껴지는 신력은 은호보다 더욱 강력해보였고 더욱 차갑고, 더욱 매서워보였다.
"........"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온은 크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곧 바람이 그곳에 불어닥쳤고, 은호가 모두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서지 말지어다. 가온. 너희가 상대할 수 있는 이가 아니니라. 아직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어서 들어가도록 하라. 그곳엔 내가 결계를 쳐뒀으니 쉽게 깨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그곳도 언제나 안전할 수는 없는 법이니.. 일단 대기하도록 하라."
하늘은 검게 물들었고 혼란에 빠진 신들은 부랴부랴 은호님의 저택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무엇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살기가 공기를 가득 채워 숨쉬는 것 조차 힘들었지만 그래, 이런 상황이라면 아바마마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니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공주님!! 어서 가셔야합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갈거야, 샬롯."
시끄럽게 떠드는 샬롯의 목소리, 바람이 불었다. 슬픔과 고통이 섞인 것 같은 것들이 나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저 바람에 불과했으나 마치 그것에 베이기라도 해버릴듯 하여 조금 소름이 끼쳤다. 이길 수 있는걸까. 여차하면 안에 있는 이들을 모두 아틀란티스로 도피시키는 계획도 생각해 두었지만 그곳은 심해의 저편. 이곳에 익숙해져 있는 이들에게는 금새 머리가 터질정도로 아파올지도 모른다.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걸까.
은호 님의 저택에 도착하자 보이는 것은 수많은 신 님들의 모습이었다. 가온 님, 누리 님, 백호 님. 모든 '신' 님들의 모습을 확인하며 금방이라도 추락할 듯, 위태로운 모습으로 저택 안으로 날아서 들어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깨져버린 결계.
"흐윽...!!"
엄청난 살기가 들어오자 작게 비명을 지르며 론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추락하듯 땅에 주저앉아 버렸다. 바들바들, 두 눈을 꽉 감고 작게 웅크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나 천천히, 흐린 눈동자를 들어올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검은 여우 수인 '신' 님의 모습.
"......흑호... 님..."
바들바들. 목소리마저 떨려오는 가운데, 은호 님께서 나타나시자 놀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으, 은호 님...?"
목숨이... 끊어지신다구요...? 바들바들, 온 몸이 떨려오는 와중에도 그 말을 듣고는 비틀비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외쳤다.
리스의 말에 은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하게 고개를 살짝 돌려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전혀 겁이 나지 않는다는 듯, 정말로 여유로운 미소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흑호는 피식 웃어보였다. 그것은 냉소 이상을 뛰어넘은 커다란 비웃음이었다. 정말로 웃고 웃고 또 웃고 나서야 흑호의 말이 조용히 들리기 시작했다.
"재앙의 여우였던 너도 꽤 사랑을 받는구나. 인간들은 그것을 신분 세탁이라고 하던가?"
"거 말이 많도다. 늙다리. 덤빌 거면 덤비도록 하라. 그렇게 쉽게 당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 흑호의 손에 거대한 검은색 에너지 덩어리가 생성되었다. 그 에너지 덩어리에선 검붉은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얼핏 봐도 정말로 위험해보이는 그 덩어리를 흑호는 있는 힘껏 은호를 향해 집어던졌다. 하지만 은호는 아주 가볍게 그것을 받아쳤고 그 덩어리는 곧 근처에 떨어지고 큰 폭발을 일으켰다. 그 폭발은 정말로 강렬해 후폭풍으로 인한 바람이 모두를 스쳐지나갔지만 저택 근처에 쳐져있는 결계가 깨지거나 하진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흑호는 다시 한 번 더 그 에너지 덩어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용없다는 듯 은호는 피식 웃어보였다.
"이런 것이 나에게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안 통하는 거 아까도 봤는데 나이를 많이 먹어서 눈이 나빠지기라도 한 것이더냐?"
"...어떻다고 생각하나?"
뒤이어 그곳에 싸늘한 바람이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은호를 향해서 나아갔고 그와 동시에 은호의 두 손은 갑자기 튀어나온 적호와 청호. 두 여우 신의 손에 의해서 붙들렸다.
".....!"
"언제 내가 혼자 왔다고 하였나? 말했을터다. 여기서 목숨이 끊어질 거라고..."
"엄마!!"
"은호 님!!"
이어 가온이 빠르게 결계 안으로 튀어나가려고 했지만 백호가 가온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백호는 모두를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했다.
"노. 노. 가온아. 네가 간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은 알잖아? 일단 내가 나갈게. 시간이 없으니까 짧게 이야기할게. 은호님이 이야기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정해둔 피난처 있지? 그곳으로 향해. 지금 당장. 다른 신들도 이쪽은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온이에게 붙어! 괜히 남아서 싸우니 뭐니 그런 소리 말고. 지금 너희가 덤벼도 저 절연의 여우는 이길 수가 없으니 말이야."
이어 백호는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동안에 가온은 수많은 신들을 한번에 옮기기 위해서 신통술을 모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조금은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그의 주변으로 강렬한 신의 힘이 모이기 시작했고, 그와는 별개로 백호는 결계밖으로 뛰쳐나가 단번에 적호에게 킥을 날렸고 적호는 갑작스런 그녀의 공격에 굴렀다.
"크어억!"
"적호 님?!"
순간적으로 적호가 굴러버리자 청호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고 은호는 재빠르게 청호를 밀쳐버리고 자신에게로 막 날아오는 구체도 다시 튕겨버렸다. 이어 은호는 백호를 바라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백호에게 이야기했다.
"굳이 도와줄 건 없었느니라. 하지만 그래도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니 고맙다고 하겠느니라."
"어머. 은호님.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잖아요? 은호님이 위험할 때 돕는 것은 저라는 거 잊지 않았겠죠? 괜히 은호님과 함께 다닌건 아니라는 거..기억하고 있지 않나요?"
"기억하고 있느니라. 언제나..."
이어 은호와 백호는 전투 태세에 들어갔고 적호와 청호, 흑호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정말로 치열한 싸움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한 쪽도 밀리지 않고, 어느 한 쪽도 일방적이지 않은 치열하고 치열한 전투. 하지만 역시 숫적으로 조금씩 밀리는 것일까. 은호와 백호 쪽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둘 다 근처의 벽에 제대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바라보며 누리는 달려가려고 했지만 가온이 그녀를 꼬옥 붙잡았다.
"놔! 놔! 엄마와 언니가..!!"
"안됩니다. 누리님! 일단 여기선 피신하셔야 합니다!! 리스 씨! 누리님을 같이 잡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가온은 계속해서 자신의 힘을 모으기 시작했고 눈앞의 광경은 계속해서 모두에게 이어지고 있었다. 한번 깨진 균형은 일방적으로 계속 밀리기 시작했고, 흑호는 정말로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를 생성했다. 그리고 그것을 씨익 웃으면서 은호에게 집어던졌다.
"자.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끝이다. 은호..."
"큭...!"
"........!"
에너지 덩어리가 방출이 되었고 그것은 은호를 집어삼킬 것처럼 날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간, 백호가 비틀거리면서 일어섰고...그대로 에너지 덩어리 앞으로 나아갔고 몸을 펼쳤다.
"....백호..?"
"백호 언...니..?"
"죄송합니다. 은호 님. 누리 님. 떠나가는 저를 용서해주세요."
강한 폭발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순간... 가온의 힘이 모두 모였고..그대로 모두는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어딘가로...어딘가로....
이어 모두가 도착한 곳.. 그 곳은 다름 아닌 어떤 동굴 속이었다. 그곳에 온 이들은 그곳이 곧 어디인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곳은 한 때, 누리가 오로라를 펼치기 위해서 왔었던 바로 그 곳이었다. 상당히 많은 신들이 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널널한지 안의 공간은 충분할 정도로 넘쳤다. 주변에는 마실 수 있는 물도 있었기에 당장 목을 축이거나 하기에는 충분한 일이었다.
"......."
폭발소리와 그때 있었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는지 누리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가온은 이를 빠드득 갈면서 괴로운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누리님..."
"...엄마...언니..."
정말로 제대로 충격을 먹기라도 했는지 누리의 눈동자에는 전혀 기운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그곳에 바람이 곧 불어닥쳤다. 그리고 모두의 앞에, 온 몸이 만신창이인 은호가 그대로 바닥에 툭 떨어졌다.
"...은호님?!"
"엄마?!"
"......."
숨을 강하게 내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은호는 분명히 살아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몸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겨우 고개를 들어 모두를 바라보면서 이야기했다.
멍.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한 멍한 표정으로 그저 누리 님을 붙잡다가 그대로 스르륵 풀려 아래로 털썩 주저앉는다. 멍한 눈빛은 지금 이 곳이 동굴인지, 아닌지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듯 했다. 그러나... 소리만은 확실히 들려와, 천천히 누리 님과 가온 님 쪽을 돌아보았다.
"......"
누리 님과 가온 님께서... 괴로워하고 계세요. 제가... 제가... 위로... 해드려야 하는데... 그러나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목소리는 나오지 못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바람이 불어오며 바닥에 툭 떨어지는 은호 님...?!
"......!!"
그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서는 급하게 은호 님 쪽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숨은 쉬고 계시지만 온 몸에 상처가 가득했다. 그것을 본 순간, 머리보다도 손이 먼저 움직였다. 두 손을 은호 님께 가까이 대며 신통력을 발휘하려 은호 님을 치료해드리려 했다. 제가 어떻게 이 힘을 쓸 수 있는지 따위는 지금 생각할 가치도 없었다. 지금 그것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
은호 님의 물음에 그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끄덕여 대답했다. 얼굴은 이미 울먹이고 있었지만. 하지만... '신' 님께서 다치셨다는 건...
마음 속으로 자신의 '신' 님께 간절히, 처절하게 기도를 올렸다. 제발... 제발... 저의 '신' 님... 모두를 지켜주세요...
자신을 치료해주는 리스를 바라보면서 은호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조심스럽게 그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려는 듯 손을 올렸다. 그녀가 거부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조심스럽게,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을 것이다. 그 모습을 가온은 조용히 바라보았고 누리는 두리번거리면서 은호를 바라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엄마...괜찮아...? 백호 언니는...?"
"백호는.....백호는...절연되었느니라.."
"....?!"
절연. 말 그대로 연을 자르다라는 의미였다. 대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 모든 것을 궁금해하는 누리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은호는 비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본디 흑호는, 인연을 자르는 재앙을 부르는 여우니라. 그것은 신도 인간도, 구분이 없느니라. 말 그대로 그 자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인연을 절단하는 것이 바로 흑호의 힘. 백호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 몸을 던졌고 그대로 쓰러졌느니라. 그리고..흑호에 의해서 나와의 인연, 그리고 너희들과의 인연이 절단되어..이제는... 그 인연이 처음부터 없던 것이 되어...너희를 기억하지 못하느니라."
".....!"
그 말에 누리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크게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엄마. 거짓말 하지 마. 그렇게 부정하는 목소리를 내며 그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은호는 거짓말이라고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곧 모든 것을 진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가까웠다.
ㅡ아무래도 재앙의 여우가 날뛰는 모양이로군.
그리고 곧 들려오는 것은 일전에도 들려오는 동굴 속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가온은 물론이고 누리도, 그리고 다른 신들도 깜짝 놀라 목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지만 거기엔 아무 것도 없었다.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저 들려오는 것은 고요한 목소리 뿐이었다.
"....그렇다. 절연을 부르는 재앙을 일으키는 여우가 라온하제를 삼키고 있느니라. 황룡."
ㅡ골치가 아프게 되었구나. 축복의 여우여.
황룡. 그것은 보물을 찾은 이라면 아마 알 수 있을지도 모르는 단어였다.
은호가 이 땅에 와서 땅을 지배하기 전, 이 땅을 지배하고 있었던...수호신의 이름이었다.
울먹이면서도 은호 님의 말씀에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은호 님의 쓰다듬은 조용히 받았지만, 은호 님을 치료하려 신통술을 발휘하는 두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흔들리지 못했다. 지금은 그저, 은호 님의 상처를 치료해드려야 한다는 생각 뿐.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곧 이어지는 백호 님의 이야기에 멈춰버렸다.
"......!"
다시 또 충격을 받았는지 멍한 표정. 잃어버린 목소리는 다시 나올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은호 님을 치료해드리던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려오는 것에서 얼마나 강한 충격을 받았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옆에 떨어진 론 마저도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지켜보았다.
......저의 '신' 님...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마음 속으로 불러보았다. 지금은 누구에게든 기대고 싶었다. 저의 '신' 님께 기대고 싶었다. 이러한 괴로움은... 고통은... 아직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존재하지 않았다. 마음이 부서져가고 있었다. "......?"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들려오는 고요한 목소리. 예전에도 들은 적 있던 그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보았고, 이어진 은호 님의 말씀에 그 정체를 알게 되었다.
"......"
...황룡 님.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저... 멍하니, 죽어버린 눈빛으로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볼 뿐.
리스의 표정을 바라보던 가온이 정말로 걱정스럽다는 듯이 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도 곧 리스에게 말을 조용히 걸어왔다. 그것은 꽤 자비로운 듯한,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ㅡ이전에도 이곳으로 온 적이 있는 홍학이여. 너는 괜찮은 것이냐? 하얀 여우를 걱정하는 것이라면 걱정하지 말지어다. 안 그런가? 축복의 여우여.
"......."
이어 은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에 가온은 물론이고 누리 역시 고개를 갸웃하면서 은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은호는 그 궁금증에 대답하겠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백호와의 인연은 확실히 끊어졌느니라. 하지만...그 끊어진 인연이 사라지기 전에 내가 먼저 신통술을 써서 그 인연의 기억들을 라온하제의 전역에 뿌려뒀느니라. 정확히는... 다솜의 명소, 아라의 명소, 가리의 명소, 그리고..미리내의 명소. 청룡, 주작, 백호, 현무. 이렇게 4명이 잠들어있는 곳에 뿌려뒀느니라."
"그러면 그것을 되찾으면...!!"
ㅡ애석하게도 그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바깥은 그 재앙의 여우의 힘에 물들어가고 있느니라. 생명의 힘이 점점 사라지고 있고, 축복 또한 점점 사라져가고 있지. 그들의 힘이 약하지 않으니...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흑호와 적호, 청호는 분명히 밖에 있을 것이고..만약 눈에 띄기라도 하면 이번에는 어떻게 공격해올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이곳은 안전해보였지만... 그래도 그거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었기에...
ㅡ그래도 녀석들의 힘을 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사신. 즉 청룡과 주작, 백호, 현무. 그렇게 4명을 다시 깨워 그들의 힘을 빌린다면, 적어도 그들의 사악한 힘 정도는 억누를 수 있을 것이고 이 땅도 그들의 손에서 다시 되찾을 수 있게 되겠지. 하지만...그 정도 각오와 용기가 있느냐?
"......"
ㅡ대답해라. 축복의 여우의 여식이여. ...축복의 여우는 그 힘이 많이 떨어져 움직이기 힘들 것이다. 결국 움직일 수 있는 고위신은 너 하나 뿐. 네가 그것을 할 수 있겠느냐.
"......"
자신에게 묻는 그 물음에 누리는 꼬리를 내리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건...마치 겁을 먹은 모습과 비슷했다.
자신의 손을 두 손으로 꼬옥 잡는 그녀의 모습에 누리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망울로 리스를 꼬옥 끌어안았다. 그 마음이 전달 된 것일까. 아니면 그저 지금은 누군가에게 안기고 싶은 것일까. 그것은 오로지 누리만이 알 수 있었다. 희미한 미소를 짓는 리스를 바라보면서 누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와 같이 가줄 거야? 나와 같이 할 수 있어?"
"아니..리스 씨만이 아닙니다. 저도 함께 동행하겠습니다! 저는 누리님을 지키는 신! 그러니까 누리님 혼자서만 보낼 수는 없습니다!"
"......."
"겁 먹지 말지어다. 확실히 그들은 위험한 존재니라. 하지만..모두가 힘을 합치면 반드시,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니라. 그것이 인연의 힘이니라. 그리고 넌 내 딸이지 않느냐. 하지만..너무 무리하지 마라. 위험하면 도망치는 것도 절대로 잊지 마라. 알겠느냐?"
이어 은호가 누리를 격려하듯이 이야기를 했고 손을 뻗어 리스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웃으면서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표정을 보면 너조차도 무서워하는 것은 분명하나... 그렇게 나서는 것으로 보아, 용기가 있는 이로다. ...너도 다치지 말고..반드시 무사하도록 하라. 알겠느냐?"
ㅡ결정이 된 모양이군.
이어 저 하늘 위에서 4개의 구슬이 천천히 떨어졌고 그것은 곧 누리의 품 안에 안기었다. 각각 분홍색, 녹색, 주황색, 파란색. 각각 다솜, 아라, 가리, 미리내를 상징하는 색이었다.
ㅡ그 구슬을 각 지역에 있는 신들이 잠들어있는 곳으로 가도록 하라. 너희가 말하는 명소가 바로 그곳이니라. 자. 움직여라. 용기 있는 이들이여. 라온하제의 운명은 너희들에게 달려있다.
"......."
이어 누리는 리스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함께 해줄 수 있냐는 무언의 물음을 그녀는 조심스럽게 날리고 있었다.
//오늘자 진행은 여기까지입니다! 반응레스를 부탁할게요!! 그리고 내일부터..시작되는 각 지역 탐방 레이드..! 라는 겁니다..!
누리 님께서 자신을 끌어안자 잠시 멍하니 누리 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천천히 자신 역시도 두 팔로 누리 님을 꼬옥 끌어안았다. ...괜찮아요. 다 괜찮을 거예요, 누리 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론 끊임 없이 누리 님께 말을 걸며.
그리고 이어지는 누리 님의 물음에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저는 이미 결심했고, 그것은 자신 뿐만이 아니었으니. 가온 님의 목소리가 들려 희미하게 웃어보이다가 은호 님께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자 한 박자 늦게 멍한 눈빛으로 은호 님을 올려다보았다.
"......"
...다치지 말고, 반드시 무사하게.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 아파왔다. 자신이 과연 저 말을 들을 수나 있었을까. 들을만한 가치가 있던 존재였을까. 그러나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고개를 가만히 숙인 채 고개를 끄덕끄덕이는 것 뿐이었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으니.
이어서 라온하제의 각 지역을 상징하는 색깔을 띠는 구슬 4개가 천천히 떨어져 누리 님의 품에 안겼다. 그것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자연스럽게 누리 님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리고...
"......"
희미하게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 대신 전하는 대답. 자신은 이미 준비가 되었다. 어차피 언제나 살기 위해 발버둥치던 삶이었다. 지금 한 번 더 발버둥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