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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그보다 더욱 화려하게 꾸민 이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뱉었다. 가문의 존속을 위해 제 몸을 생사의 갈림길로 수차례 내던졌던 그녀였지만, 우습게도 그녀는 정작 이러한 자리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사교계의 다른 이름이 ' 보이지 않는 전쟁터 ' 였던가. 수많은 시선이 오고가며 제멋대로 서로를 저울질하고 값을 매긴다. 귀족 여식들의 쑥덕이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성가신 소리다. 그녀는 그들이 풍겨대는 향수와 시선에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이 상황 자체가 그녀에겐 필요치 않은 사치였다. 아. 사치가 아닌 가시방석이려나.
- 이런. 이 곳의 중앙에 피어나도 아깝지 않은 분이 벽에서 시들어가다니요.
" 죄송합니다, 백작. 춤을 그리 즐기지 못하는지라. "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한 백작이 춤을 청해온다. 늘 그렇듯 무감정한 어투로 예의를 차려 답한다. 지겹다. 이럴 시간에 차라리 영지 업무를 보는게 낫겠어. 내 병사들과 훈련이라도 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군. 시시콜콜한 대화에서는 더 이상 흥미를 찾을 수 없었다. 평소라면 이런 자리에는 오지 않았을텐데. 이리도 연회를 끔찍히 여기는 그녀가 이 자리에 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왕의 초대장. 왕이 손수 초대장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충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그녀를 움직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녀는 후작이기 전에 기사이기에. 그녀라는 기사는 자신이 충성을 맹세한 왕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파티는 즐거운 사치였다. 땅따먹기나 권력욕에 눈이 멀어 서로 근엄한 척, 이글거리는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다가 여자에게 음흉하게 다가가는 남자 귀족들이나, 누가 더 많은 귀금속을 둘렀는지 으스대다가 우아한 척, 돈 많고 잘생긴 남자에게 다가가는 여자 귀족들이 모이는 이러한 연회가 그에게는 즐거운 시간으로 다가왔다. 누군가가 그 이유가 여자 귀족들이 눈독들이는 상대가 자신이 된 데에서 나온 즐거움이 아니냐고, 결국 너도 여기 있는 -네가 혐오하는- 멍청한 귀족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는 당당히 아니라고 외칠 수 있다. 물론 옆에는 여자를 하나 끼고.
그는 그런 자기 모순조차 즐겼다. 여자의 들춰지는 치맛자락에 눈이 가는 건 더러운 늑대의 본능에 따르는게 당연하지 않은가?-슬쩍 자신 앞에 선 여인의 허리를 눈으로 재던 카인은 이내 가슴크기에 엑스표를 찍찍 그었다.
"저번에 보내주신 건 잘 받았어요, 로즈리안 경." "하하, 별말씀을요. 다음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방금 자신이 잔혹하게 엑스표를 그은 여인에게 살갑게 응대한 그는 뭇 여인들의 어지러운 향수를 맡으며 와인을 들이키고, 칭찬하고, 웃었다. 즐겁다고 할 때는 언제고 슬슬 이 반복이 지루해졌는지 '머리에 든 건 하나도 없는 더러운 암캐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머, 로즈리안경도 참, 그런 농담을." "아름다운 꽃에게 아름답다 한 것이 왜 농담이라는 거죠?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요." "후훗, 하긴 그렇네요. 저기 꽃인지도 모를 것은 모르겠지만."
한 공작부인이 말하자 이내 여자들 사이로 수군거림이 나아갔다. 그건 바로 청렴결백하시며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수수께끼라는, 이런 곳엔 얼굴을 안 내밀기로 유명한 루치아 폰 하인드리히에 관한 내용이었다. -아아, 그 멍청한 신자. 라고 속으로 소문의 루치아에게 시니컬하게 웃은 그는 한번 회장을 휙 둘러보더니 구석에서 동떨어진 듯 서 있는 긴 머리의 남자(여자)를 발견한다. -가서 인사라도 할까.
알게모르게 그런 욕구가 고개를 들자 더럽도록 지겨웠던 여자들을 공손히 버리고 구석으로 다가가 정중히 허리굽혀 인사한다.
제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굽히는 이는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오만방자함이 하늘 끝에 달한다는 애송이. 돈이면 무엇이든 되는 줄로 아는 건방진 애송이가 여기까지는 무슨 일일까. 웃으며 간을 볼 작정인가. 귀찮은 짓거리라면 사양인데 말이지. 그는 평소 그녀의 관심거리가 아니었기에 앞으로의 대화는 다소 지루할거라 예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그의 인삿말에 입을 연 것은, 단지 한심하도록 지루한 이 시간의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
" 루치아 폰 하인드리히입니다. "
엷은 웃음을 띄우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올린다. 웃음에는 웃음으로 대하는 것이 예의이겠지. 솔직히 말해서 예의를 차리고 싶지도 않은 인간이긴 하다만. 그가 버리고 온 여자들의 시선이 날아와 꽂힌다. 상당히 귀찮군. 차라리 전장이 낫겠어.
" 그나저나, 연회는 더 즐기지 않으십니까? 모처럼의 개국연이잖습니까. "
연회와 같은 사교계 모임을 꽤나 즐긴다고 들었는데. 그가 구태여 자신을 찾아올 이유는 그리 명확히 존재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도 제 입맛에 맞는 여자들 사이에 있었으니 뭐. 말 다 했지. 많은 눈을 나에게로 돌리려는 의도인가. 단순한 호기심일지도 모르지. 무엇이 되었던 시간을 빠르게 흐르는데에는 특효약이겠지. 영양가 없는 소문은 늘어나겠지만. 애시당초 그따위 소문은 관심에도 없으니 상관은 없지. 귀족이랍시고 사치와 향락에 찌든 인간들은 버러지일 뿐이다. 나라를 갉아먹는 버러지.
....하도 보기 힘든 얼굴이라길래 어디한번 그 귀한 얼굴 좀 볼까, 했더니 결국은 이거다. 가슴을 칭칭 동여맨건지, 아님 단순히 남자나 입을 법한 옷을 입어서인지, 그 어디 하나 특별히 봐 줄 것 없는 여자나 감상하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바지와 부츠가 만들어내는 다리라인에 저건 나쁘지 않네. 라고 채점한 남자는 곧 평가를 그만 둔다. 가끔 이렇게 몸을 내미시는 귀한 몸께는 감히 채점이나 하는 농땡이를 피울 수 없다. 그냥 얼굴이나 보고 아주 황송합니다, 싶은 기분을 맛보는 것뿐이지. 하긴, 그러고보면 자신의 앞에 있는, 방금 자신이 인사했고 그 인사에 아주 엹은 웃음으로 응답한 이 여자는, 거의 유물급이다 싶을 정도로 청렴결백하고 곧은 인물이었다. -이런 걸보고 뭐라고 표현하더라. 융통성이 없다고 하던가?-뻔히 아는 단어를 뜸 들여 생각하고는, -아니. 그냥 멍청한 거지. 라며 음미한다. 그렇다. 이 연회장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멍청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신에게 울며불며 기도하면 이루어질 줄 아는 사람. -멍청하기 이를데 없다. …선머슴이고.
그녀는 그가 가식적으로 공손히 내미는 잔을 받아들었다. 연회에 와서 딱 한 가지 좋은 것이 있다면 질 좋은 와인을 가져다 놓는다는 것이겠지. 그마저도 보통은 입에 잘 대지 않았지만.
" 괜찮습니다. 어찌나 화려하게들 꾸미고 오셨는지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우니까요 "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조소와 미소 사이의 알 수 없는 그것. 그 웃음이 뜻하는 바는 네가 판단하기 나름이겠지. 오만한 애송이. 잔을 살짝 돌려 향을 음미하다가 한 모금을 목으로 넘겼을 무렵, 왕의 여시종이 자신을 찾아왔다. 또 무슨 일로 부르시는건지. 사실 이유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모처럼의 참석에 옷차림이 그게 무어냐, 라고 꾸중하실테지. 그건 그래도 연회 도중에 불러내시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인데. 막 흥미가 동하려던 찰나였는데. 안타깝군.
" 죄송하지만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
여시종이 이끄는 대로 연회장을 빠져나가 바로 옆 별실에 들어서니, 제 예상이 맞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여러벌의 드레스가 고이 개켜져 탁자 위에 놓여있었다. 꾸중은 익숙하지만 이런 직접적인 방법은 처음인 듯 한데.
" 이게 다 무엇이냐. " - 전하의 명입니다. 옷을 갈아입지 않으신다면 당분간 알현은 받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망할. 이번엔 단단히 수를 쓰셨군. 한숨을 뱉었다. 연회장 안에서의 무표정한 가면을 벗어던진 것이다. 이대로 안 가겠다 버티면 화를 내실테지. 아아. 영지가 그리울 따름이다.
아, 어련하시겠어. 남자는 조소어린 미소에 속으로 시니컬하게 혀를 찼다. 여기 불쾌한 동족이 있다. 물론 그를 혐오한다는 쪽에서의 동족이지, 그 외엔 닮은 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동족이다. 아니, 이런 건 동족이라 부르기도 애매하지. -아까 전만 해도 장난스럽게 여자를 채점하고 '바보에 청렴결백하고 고귀한'이라고 미사여구를 붙였던 남자는 이제 가벼운 흥미로 접근했던 상대에게 정나미가 확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우선, 계급이 더 높다고 으스대는 건진 몰라도 아주 자연스럽게 콧대를 높이는 그 태도하며- 둘째로, 자신도 결국 사치 위에 세워진 성에 있으면서 이토록 친절한 자신을 되도 못한 구더기라도 보는 것마냥 하찮게 봤다는 것. 이유는 그 두가지로 충분했다.
"얼마든지요."
별로 마음에도 없는 말을 선선한 미소와 약간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로 전한 뒤, 여자가 떠나가자 잠시 웃음을 한 구석에 치워둔다.
"하....빌어먹을." 한쪽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는 그 모습을, 아까 어울리던 귀족 여성들이 봤다면 당장에 물러났을 것이다.
여시종의 도움으로 홀터넥 스타일의 붉은 드레스를 완벽히 차려입은 그녀는 작은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쯤 이를 갈고 있겠지. 부러 콧대를 높이며 흘렸던 그 조소를 곱씹으면서. 기사들은 생각보다 말이 많다. 왕궁 내 기사던, 영지 내의 사병이던. 그리고 그들 사이에 도는 소문은 꽤 들을만 하지. 그녀는 그의 가식적인 웃음을 떠올리며 여시종이 제 머리 매무새를 정돈하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머리칼에는 굳이 장식을 꽂지 않아도 된다 말해두면서.
" 이 옷과 붕대는 잘 챙겨두어라. 연회가 끝나면 바로 갈아입을테니. "
셔츠와 바지, 그리고 부츠를 여시종에게 건네며 싱글 웃었다. 생각보다 즐겁군. 그 애송이의 머리속, 상상할만한 가치가 있겠어. 세간에 알려진 사실과 알려지지 못한 사실이 있다. 알려진 것은 그녀가 검의 극한에 달했다는 것과, 그녀가 청렴결백하다는 것. 그리고 알려지지 못한 것은 그녀가 상당히 뛰어난 지략가라는 것이다. 검을 들기 전부터 익혀온 전술과 지략. 그녀는 지금 일종의 놀이를 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이를 드러내려 하는 강아지를 구경하면서. 그럼 이제 슬슬 강아지를 다시 구경하러 가 볼까. 이 정도의 즐거움이라면 드레스와 구두의 불편함 정도는 감수할 수 있겠군.
"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전하께서 제 옷차림에 트집을 잡으신터라.. 하루이틀도 아닌 일인데 말이죠. "
여자가 불려나간 이유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여자의 몸으로, 그것도 귀족의 일원으로서 연회에 참석하는 이상 기본적으로 갖춰 입고 와야 할 옷을 입은 적이 없었으니. 보통은 그 옷차림을 고수한다던데, 이번엔 어떨까.
남자는 무심히 여자의 인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왕의 승리였는지, 여자는 고분고분 빨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 드물고 보기 힘든, 아니 이번에 최초로 선보이는 그 아름다운 자태에 몇몇 귀족남성들의 눈이 돌아가고 귀족 여성들은 다시 소근거리기 시작했다. 좀 전이었다면 그도 그 모습을 한번 훑으며 점수를 매겼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몇 분전과 지금은 완전히 판도가 뒤바꼈다. 물론 눈이 있고 빛이 있는 이상 그 자태를 구경할 수밖에 없겠지만, 지금의 그는 말 그대로 '구경'만 하는 상황이었다.
"역시 다듬으시니 그 어떤 보석보다 빛나시는군요."
친절히 웃으면서 진심인 양 살가운 말을 늘어놓은 그는, "하지만 머리장식이 없어서 아쉽군요"라는 말과 함께, 꽃병에 꽂혀있던 탐스러운 장미를 풍성한 금발에 장식했다. 물론 실례한다는 정중한 태도와 인사도 빼 놓지 않은 채.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이렇게 훌륭하게 꽃꽂이를 할 수 있는 자신에게 감탄을 보내며, 카인은 웃었다. 자신이 모순덩어리인 것도 모르는 가식적인-정나미가 떨어진- 여자보다는, 차라리 머리가 텅빈 암캐한테 가는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그녀의 머리칼에 장미를 장식하는 그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옛 말에 행동은 속여도 눈은 속이지 못한다는 말이 있던가. 그 어구가 아직까지는 통하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찰나의 순간에 그의 눈에서 흐릿한 경멸감을 읽어낸 것을 보면.
" 감사합니다. "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여보이는 것으로 웃음을 대신했다. 옷차림이 무색하게도 얼굴 위로 떠오르는 것은 없었으니. 방금과 다른 의미로 쏟아지는 시선이 거슬렸다. 그들에게 직설을 가장한 폭언을 쏟아붓고 싶어졌으나, 안타깝게도 그런 것은 예의에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겉모습에 휘둘리는 꼴이라니. 참 안타까워. 이런 귀족의 이름 안에 갇혀있다는 것이. 옷차림에 막히고, 표정에 막혀버리는 그들의 시선은 그녀에게 바닥을 뒹구는 낙엽보다도 못한 것이었다. 신이시여. 이 무지한 자들에게 지혜를.
" 그리 애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만. "
그녀는 그저 웃었다. 지나가는 하인의 쟁반에서 화이트와인을 받아든 채로. 암사자는 오늘 꽤나 괜찮은 먹잇감을 찾은 듯 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연회가 이제 끝을 달려가고 있다는 것. 사치스러운 연회장, 그리고 그보다 더욱 사치스러운 인간들. 그녀는 아마 그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구역질나는 표정으로 연회장을 빠져나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 점에서는 감사를 표해야겠군.
하인드리히님이야말로 너무 겸손하시군요. 지금 저 곳에서 다들 찬사를 보내는 게 보이시지 않습니까? 라고 덧붙이며 여자를 보는 수많은 귀족들 쪽으로 팔을 벌린 그는 이제 슬슬 여자를 그들에게 데려가거나, 그들 중 누군가를 끌여들여 모두를 유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쨋든간에 연회의 마지막까지 이렇게 불쾌한 기분을 안고 있을 순 없으니까. -아, 물론 연회의 마지막 축배를 드는 걸 여자를 바로 앞에 두고 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아슬아슬, 무너질지 안 무너질지의 줄타기를 하는 이 나라의 안녕따위야 관심도 없지만-... 남자는 무리의 대표격으로 이쪽에 오는 듯한, 부채로 얼굴을 가린 화려한 옷차림의 중년 여인을 발견했다.
"아, 공작부인."
주제에 눈치는 있으시군요. 부인의 손을 잡아 존경의 표시로 손등에 살짝 키스한 후, 여자에게 소개한다. 사교계의 여왕이라 불리며 수많은 파티들을 여는 부인의 입담을 잘 알기에, 그녀가 여자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