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소리 너무 싫어 엉엉 바보 같은 목소리도 너무 싫어 저 얼빠진 멍청이가 내 아버지라는 사실이 싫어 아닌데 저거 내 아빠 아닌데 우리 아빠 훨씬 멋있고 잘생기고 똑똑한데 멍청하고 더럽고 냄새나고 무력하고 바보같고 암튼 싫어 너무 싫어 그 '싫은 것'을 목도하며 아니 그뿐만 아니라 바로 옆에 두고 심지어 직접 만지고 대처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점도 너무너무 싫어 짜증나 두렵고 힘들고 싫어 못할 거 같아 나 이거 못하는 일이야 도망칠 거야
안 그래도 자아효능감 박살났고. 집중력 이해력 끈기 전부 끝장났고. 정신적 신체적 컨디션 다 별로인데. 아무튼 다 별로별로개별로 끔찍 형편 없는 상태인데 안그래도! 근데 더불어 샤워한지 며칠 돼서 더 괴로워. 머리카락이 무겁고 두피가 찝찝하고 숨결이 고약하고 얼굴에도 뭐 낀 거 같고 전체적으로 찝찝하고 무겁고 답답하고 너무 싫어!!!!!!!!!
A의 뇌는 여러모로 퇴화했기 때문에... 어린아이와 다름이 없기 때문에... 아무튼 이해는 하지만 어이가 없는 건 어쩔 수가 중얼중얼
뭐 때문에 이러냐면... A의 드라마 취향에 대한 이야기. 일단 이쁜 아가씨가 나와야 함. 이쁜 아가씨 분량이 꽤 있어야 함. 로맨스코미디 장르 우대. 폭력이나 유혈, 욕설과 외침 및 각종 진상 빌런 짓 최대한 적어야 함. 없으면 좋고. 그외 뭔가 심각한 분위기나 어려운 이야기는 최대한 적어야 함. 없으면 좋고. 언어는 한국어.
그러니까 이를테면... 사ㄴH맞선, 김ㅂl서가오H이럴까, 뭐 이런 작품들.
만약 자막도 볼 수 있고 십덕모에체 화풍도 좋아했으면 걍 라노베원작 럽코 애니 틀어줬을 듯... 타카기상 같은 거...
그가 갑자기 쓰러졌고 중환자실에 있다는 소식을 엿들은 밤, 나는 아빠를 살려달라고 울면서 기도했다. 그래서는 안 됐다.
며칠인지 몇 주인지가 지난 후, 아빠가 의식이 찾았다는 소식이 왔다.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그렇게 멍청한 얼굴을 한 아빠는 처음 보았다. 목에 구멍을 내고 호스를 연결한 아빠도 처음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고 해야 할까. 그 맥없는 눈알이 이쪽을 향하자 나는 정체 모를 강렬한 감정에 무너져내렸다. 그 순간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고, 간호사 선생님(추정)은 여기서 울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병실을 뛰쳐나왔다. 울음을 참는 감각은 익숙했다. 울음을 참기를 실패하는 감각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상실한 감각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어린이는 소독약 냄새가 나는 길고 하얀 복도 벽에 기대어 눈이 얼얼해질만큼 울었다. 병원에서 시끄럽게 굴면 안 되는데. 어쩌면 그때 나는 엉엉 소리높여 울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거의 숨을 참다시피 하며 울음을 참았던 것 같다.
다정하고 사려깊고 현명하고 섬세하고 조곤조곤한 말투에 손재주가 좋고 항상 일찍 일어나고 요리는 서툴지만 플레이팅은 가지런히 하고 글씨가 예쁘고 암산이 빠르고 두꺼운 어려운 책을 읽고 훤칠해서 정장과 코트가 잘어울리는 아빠는 이제 볼 수 없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꿈에서도 볼 수 없다.
"아빠"의 모습과 목소리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른 뒤에 언급했던 사건의 줄거리나 사실의 극히 일부만이 조각조각 머리에 남아있다. 당시의 장면이나 소리 등은 정말정말 부분적이고 그마저도 희미하다.
물론 그도 그때를 기억못한다. 그의 뇌는 꽤 많이 롤백되어서, 몇십년 전, 결혼 이전의 기억이 더 또렷하다.
그래서 내가 유아~유년기일 때의, 아빠가 "아빠"일 적의 일들은 나에게도 그에게도 거의 없던 일이 되어있다.
섬세하고 다정하고 훤칠한 아빠 위에 멍청하고 참을성없고 구부정한 아버지가 덧칠해진다. 덕지덕지. 아빠의 목소리가, 말투가 기억나지 않는다. 머리가 검은 아빠의 표정이나 손짓이 기억나지 않는다. 나의 아빠는 오염되었다. 위에 얹어진 다른 무거운 정보 때문에 아래 깔린 기억을 꺼낼 수가 없다.
"아빠"가 보고 싶다. 그러나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꿈에서도 볼 수 없다. 꿈을 꿀 때마저도 예전의 그 모습이 아니라 지금의 모습 즉 내가 돌봐야 하는 대상으로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