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저녁. YT 탐라에 0번에 가사 있는 노래가 뜨길래... 와. 지금 들으면 백퍼 울겠다. 죽을 생각만 한가득임 지금. 싶어서 재생할 엄두를 못 내다가. 근데 내용이 뭐였지? 유명한 곡이라 대충은 아는데 제대로는 모르네. 그러고보니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던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쳐서 호기심에 저항하지 않고 결국 들었는데 정말로 꺼이꺼이 울어버렸어.
A가 또 잘렸기 때문에... 갈 데가 없다. 이제는 진짜로. 이번에는 일년도 못 다녔다. 올봄에 쫓겨나서 이제 정말 갈 데가 없구나 싶었을 때 정말진짜 최종의최종 마지막의마지막으로 들어간 곳이었는데. 꽤 괜찮게 버틸 수 있을 거라고 희망을 걸었었는데.
사실 이걸 봐주면 안 되지. 어쩔 수 없죠. 저도 압니다.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거랑 그래도 속상한 거랑은 별개라고.
우리야 가족이니까 즉 기대하는 바가 있으니까 더 어렵고 속상하지만, 아예 남이면 오히려 좀더 편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해. 그러나 선을 넘어버리면, 가족은 그걸 봐줄 의리가 있지만 남은 없잖아. 어쩔 수 없지. 또 거기 돌볼 사람이 A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무엇 하러 방황을. 5년이나. 사오십대의 5년은 짧아. 그러나 청년의 5년은 길지. 제가 뭘 해야 행복할지 모르겠어요. 뭘 하고 싶은지, 그걸 위해서는 뭘 준비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딴 배부른 고민이나 할 게 아니었다. 무섭다고 미룰 게 아니라, 이게 맞는지 불안하다고 다시 접어둘 게 아니라, 정말로 뭐라도 했어야 했다.
뭘 하고 있는데 내가? 그냥 부모님 집에 얹혀 지내면서 자식으로서 모든 자유를 누리면서 [어른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되는 거냐? 이게 맞냐?
나는... 살림도 할 수 없어. 돈도 벌 수 없어. 그렇지만 무엇 하나라도 흉내라도 내야 해. 내가 뭘 할 수 있지? 내가 뭘 해야 하지? 내가 뭘 하고 싶지? 이 중에서 교집합이 얼마나 되지? 내가 해야 하기도 하고 할 수도 있고 하고도 싶은 일이 얼마나 되지? 겹치지 않는다면 뭘 먼저 택해야 하지?
B는 자꾸 A를 죽이면 해결되는 일 아니냐고 하는데. 저기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가족을 죽인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면 어떡해요...
누구는 A가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 안 하겠어? 누구는 일가족 동반자살 뉴스 보면서 와 나도 해볼까 하는 생각 안 하겠냐고. 참잖아. 당장 그냥 커다란 가방에 돈이랑 옷가지 좀 챙겨서 식구들 버리고 도망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 적이 없겠냐고. 생각만 해. 그냥 상상만 하고 그냥 나만의 작은 일기장에나 적어.
나는 아직 아빠가 필요해. 나는... 나도... 나도 아빠랑 놀 줄 아는데. 우리 아빠도 지금 카톡했으면 웃긴 어록 많이 만들었을 텐데. 우리 아빠도 다정하고 섬세한 사람이었는데. 우리 아빠도 똑똑하고 전문성 있는 사람이었는데. 나도 아빠한테 하소연할 줄 아는데. 나도 아빠한테 떼 쓸 줄 아는데. 왜 나만. 왜 나만!
물론 나만 불행한 거 아니지. 알아. 그렇지만 그냥 마음이 그렇다고. 느낌이 그렇다고. 이거 우울증 사고라는 것도 알아. 도움도 안 되고 합리적이지도 않은 쓰레기 사고라는 거 알아. 그냥... 그냥 잠깐만 우울해하고 비참에 잠겨있을래. 진짜 잠깐만. 자고 일어나면 내일은 다시 힘낼 테니까. 잠깐만... 딱 몇 시간만 서러워할게.
그래도... 다행?인 건가? 곧 울어야 하겠다고, 슬슬 꺼이꺼이 울지 않으면 폭발할 때가 오고 있다고 생각은 했었거든. 폭발을 했네. 나는 좀 후련해졌고 어느 정도 위로도 얻었는데. 오밤중에 시끄럽게 굴어서 약간 미안하긴 하다. 그렇지만. 나를 사랑한다는 건 이런 것이다. 견뎌. 항상 감사합니다.
난 정말 엄마가 있어서 다행이야. 000(엄마이름) 씨가 내 엄마라서 다행이야. 자주 생각하는데, 오늘은 더욱 크게 생각한다.
- A는 네 책임이 아니다. - B 또한 네 책임이 아니다. - 우선순위를 똑바로 세우기. 네 문제에 먼저 집중하고, 할 만 하면 A에 관한 문제에 도움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A는 네 문제가 아니다. A를 돌보느라 네 인생이 멈춰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평생 돌볼 셈? A가 죽을 때까지? 우선 네 인생을 살아. - 조금 멀리 보기. 지금 여기 물론 중요하지만, 당장의 문제를 어떻게 해보느라 미래에 대한 대책이 없지 않니. 네 인생을 꾸려라. - 엄마는 네 생각보다 나약하지 않다. 엄마는 유능하고 강인하다. 엄마 힘들까봐 걱정 물론 해주면 고맙지만, 그 걱정 때문에 전전긍긍하느라 네 인생이 망가진다면 슬픈 일. 다른 가족도 마찬가지. A나 B가 사망 내지 살인할 위험은 네 생각보다 현저히 낮다. 네가 힘들고 아프고 어려운 일이 있다면, 먼저 가족에게 도움을 요청해라. 가족에게서 도망치지 마. 집에서 울어도 돼.
비닐 많이 쓰기 싫고 웬만하면 좀 줄이고 싶으니까, 1회씩 소포장 말고 벌크포장으로 줄 수 있냐 약국에 요청 드렸거든. 근데 진료실 쪽으로 연락이 간 거야. 맘대로 약을 먹으면 안 되나 봐. 정신과 약은 그렇대. 내가 플라스틱 비닐 소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어서 그런다니까 선생님이 어차피 큰 포장도 비닐 아니냐는 거야. 그러니까 아주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은 거라니까요. 아니 이것도 플라스틱인데요. 이거 세 번 함. 원내 말고 밖에 약국에서는 그렇게 해줬다 했더니, 거기서는 그 비닐 값 아끼려고 그냥 해준 거래. 정신질환자는 약 포장도 맘대로 못해? 일주일치 소분해서 알람 맞춰서 먹는다니까. 원내 약국 소포장 해도 하나하나 날짜 써주는 것도 아니면서.
암튼 다음부터는 그냥 큰 포장에다 주신대. 오늘은 이미 기계 들어간 다음에 내가 요청 드려가지고 어쩔수없고.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건강하지도 못하면서 이런 데까지 신경쓰면 안 되는 건가 봐. 무슨 정의의 사도라도 된 것마냥 환경보호가 아무리 좋은 가치라 해도 부르짖고 강요해서는 안 되는 건가 봐. 나는 자격이 없나 봐.
근본적인 문제는 그게 아니니까. 사회를 극심히 두려워하고 모험을 극도로 기피하며 거의 모든 일의 원흉을 본인으로 돌리고 너무나 쉽게 자포자기하고 체념하며 열정과 노력과 성실이 없는 것에 가까우며 부정적인 메세지만 크게 받아들이고 자학하고 스스로 도태되기로 선택하는, 나 자신의 기질이나 성격 및 태도와 행위 때문이니까.
A 돌봄에 지쳤어. 물론 내가 전담은 아니지만 그래도 피곤하단 말야. 누구 말마따나, 한 달에 한 번이나 그보다 더 가끔 만나면 오히려 애틋해질 텐데. 매일 만나고 몇 시간씩 돌보니까 힘들기만 한가 봐. 그래. 가끔 만나는 할머니는 갑자기 쇠약해지시니까 확 애틋하게 여기게 됐잖아.
그리고 변화 없는 일상에 지쳤어. 뭔 말도 안 되는 모순적인 말이지만... 도전이 무섭지만 변화가 너무 없으니까 지루해. 그리고 몇년째 무섭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안 하니까 오히려 더 불안하고 초조해. 권태감으로 인한 불안이라는 것도 생각보다 일반적인 감정이라더라.
아무리 그래도 사람인데 그리고 가족인데 너무 물화하는 거 아니냐고 하면 딱히 타당한 해명을 할 수 없지만. 나의 A가 A로서의 기능(혹은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데 A 대우를 해주기는 나는 너무 힘이 들어. 이렇게까지 말하기는 나도 싫지만 내 인생에(적어도 지금 상황의 일상생활에) A가 짐이 아니라고는 하기 어렵지.
차라리... 내가 태어날 즈음부터 이미 망가져있었거나 아니면 내가 어른이 된 이후의 타이밍에 망가졌다면. 그랬으면 조금 낫지 않았을까. 전자의 경우라면 내가 아는 A는 이러지 않다며 기억과 현실의 괴리에 고통받지는 않았을 것이고. 후자의 경우라면 그래도 A의 덕은 다 본 다음이니까 이 지점에서 억울하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일어나지 않은 그리고 않을 일이니까. 이걸로 망상하며 아쉬워하기에는 기력도 시간도 아깝지.
남을 탓하기 ->내가 괴로움. 남을 괴롭게 할 수도 있음. 남을 해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함. 최대한 적절하게 문제 제기하려면 에너지가 꽤 많이 소모됨. 힘을 내서 문제를 제기해도 공감과 동의 한쪽 혹은 둘 다 얻지 못할 가능성. 사회적으로 쫌생이겁쟁이예민충 될 가능성. 남에게 공격 당할 가능성. 나를 탓하기 ->내가 조금많이 괴로움. 이 건으로는 남에게 공격 당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움.
차라리 걍... 여기가 어디죠 이름이 뭐죠 당신은 누구죠 오늘이 무슨 요일이죠 점심은 뭘 먹나요 여기가 어디죠 내가 누구죠 이름이 뭐죠 ㅇㅇ씨는 왜이렇게 예쁘죠 오늘이 무슨 요일이죠 여기는 어디죠 당신은 누구죠 ㅇㅇ씨가 누구죠 ㅇㅇ씨는 왜이렇게 예쁘죠 지금 계절이 어떻게 되나요 이딴 것만 말했으면 좋겠다. 물론 이것만도 너무 힘들긴 한데. 그래도 그렇게까지 정신나갈 것 같지는 않아.
전근대 성차별 마초 꼰대 발언 제발 좀 그만...
결혼 안 보낸다는 말 그만. 제발. 애인 있냐고도 그만. 당신 때문에 연애 못하니까. 물론 복합적인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 당신도 매우 크니까 그만 좀 해 제발...
하하 재밌다. 이게 재밌어? 웃겨? 치매가 장난이야? 치매가 개그냐고. 너희는 안 당할 것 같아?
똑같은 소리 반복하고 하루에도 수십번씩 누구냐고 물어보고 몇달씩 하루에도 몇번씩 말하고 가르치고 학습시킨 거 다 까먹고 계속 실수하고 질질 흘리고 힘은 더럽게 세고 고집도 더럽게 세서 이제 나이 들어서 세 시간만 이 안 닦아도 입냄새 나는데 말을 진짜 어떻게 이렇게 안 들어 이도 안 닦는대 세수도 안 하겠대 와중에 비틀대니까 걸으려면 잡아줘야 돼 근데 또 계속 말은 걸어야 돼 그러면 뭐가 예쁘다고 그 커다란 냄새나는 얼굴을 30에서 40 cm 반경에서 마주하고 있어야 돼 그러면서 계속 똑같은 말 똑같은 말 하하 진짜
치매가 웃을 일이야? 치매가 웃겨 너네는? 뇌손상이 얼마나 끔찍한지 몰라서 그래. 원래 자상하고 사랑스러운 인간이었는데 그깟 전두엽 좀 망가졌다고 인격이 일그러지는 꼴을 고장난 카세트처럼 똑같은 말 똑같은 말 똑같은 말!!!!!!!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꼴을 이걸 과연 견딜 수 있어?
어른 되고 사회생활하면서 배운 예의 같은 건 다 까먹고 다 롤백 돼서 유년기 때 그 형편없는 부친한테 배운 것만 중얼중얼 조잘조잘... 원래 안 그랬잖아. 원래 안 그랬는데. 내가 아는 아빠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근데 원래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었대 이런 집안에서 자랐대 나만 몰랐던 거야 나만 속았던 거야 차라리 평생 속이고 살지 원래 사람은 남을 속이면서 살아 그게 예의라는 거고 체면이라는 건데 뇌가 특히 앞쪽이 손상되면 이제 충동조절이 안 되고 감정을 스스로 컨트롤을 못해요 이게 무슨 소리냐면 예의는 모르겠고 욕구만 남는다고요 염치라는 게 소실되어버린다고 저거 분명 아빠의 껍질인데 어떻게 지능과 충동억제가 없어졌다고 다른 사람이 되냐고 진짜로 영혼이 바뀐 것만 같아
아버지어머니 생일은 아는데 아내 생일은 몰라 당연히 딸 생일도 몰라 최근 기억은 다 날아가고 오래된 기억만 남아있어 이끼처럼. 오래된 곰팡이처럼. 오래된 기억만. 꾸역꾸역. 나는 누가 내 생일 기억 못한다고 이렇게까지 서운할 줄 몰랐어. 분명 우리 아빠 머리도 좋고 자상한 아빠인데 어린이날에 나 갖고 싶어한 거 사주겠다고 야근하고도 굳이 멀리까지 가서 할인도 하나도 안 먹이고 사왔었는데 내 말 하나에 그렇게까지 해줬었는데 그날도 다 까먹고 어떻게 그럴수가 있어 어떻게 나와의 추억을 다까먹을 수가 있냐고. 나빴어. 나빴어진짜 너무 나빠. 진짜 미워. 이럴 거면 남편도 하지 말고 아빠도 하지 말지 그랬어. 잘해주다가 갑자기 죽어버리는 게 어딨냐고. 차라리 처음부터 없지 그랬어. 처음부터 애초에 아빠 같은 거 없었으면 이렇게까지 빼앗긴 기분은 아니지 않았을까
안 당해봤으니까 너는 안 당해봤으니까 안 겪어봤으니까 그냥 웃는 거야 뭐가 웃기다고 그래 우는 것보단 웃는 게 낫지 근데 난 못 웃는데 어떡해 난 못 웃는데 어떻게 하냐고 나는 어떻게 하면 되냐고
B는 본인이 견디기 힘들면 진작 도망치지, 왜 버티고 버티다가 겁자기 공격을 한 거람. 의중을 알 수가 없네.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파악할 수가 없어. 왜 이러는지 모르니까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아무튼간 고마워. 이렇게 네가 내 트라우마를 하나 더 적립했네. 이제 정말로 못 버티겠어. 네가 나가든지 아니면 내가 나가는 거야. 살면서 사람 때리는 장면을 그렇게 목격한 적이 없었는데. 네 덕에 이번에 두번째야. 내가 "괜찮겠지" 하고 잠시 긴장을 놓았다가 B가 A를 폭행한 거. 이번이 두번째라고.
A를 요양원에 집어넣지 않고 집에서 데리고 있는 게 엄마 욕심이라고? 엄마 일상 망가질 뿐만 아니라 자식들 인생이 망가지니까? A는 하나지만 가족들은 여럿이니까? A 하나만 죽으면 된다고?
하지만 거기 들어가면. 요양원에 들어가면 갑자기 사람이 온순해지고 말을 잘 들을까요? 오히려 센터에서보다 더 난리치겠지. 가족들이 저를 버렸다고 생각해서.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물리적으로 꽁꽁 묶어놓거나. 아니면 진정제 등을 잔뜩 먹여서 반송장으로 만들겠지. 그게 사는 건가?
이왕 죽다 살아났는데, 사는 것처럼 살면 좀 안 돼? 이게 그렇게 욕심이야? 이왕 목숨 붙어있는 거 사람답게 살자고. 행복하게 살자고. 이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사람이라면 양심이 있다면 바라서는 안 될 지독한 욕심이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 나한테서 아빠도 빼앗고 가족도 빼앗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끔찍안 욕심을 가졌나요? 나따위는 감히 바라서도 안 되는 사치인가요? 대답해주새요. 제발. 고아 같이 버려두지 않으신다면서요. 이대로라면 고아가 되어버린다고요. 난 아직 다 자라지 못했는데 이 지붕 아래가 너무 힘들다고요.
A와 B 사이에 말다툼이 생겼어. 이때 A는 안경을 쓴 채로 앉아있었어 평소처럼. B가 주먹으로 A의 옆얼굴을 세게 쳤어. 안경이 날아갔고. 쨍그랑. A의 몸은 그대로 옆으로 넘어졌어. 쿠당탕. 넘어지면서 A는 아마도 반사적으로 B의 손을 붙잡았는데, 내가 둘 사이에 끼면서 A의 손을 떼어놓으면서 B를 똑바로 보고 소리쳤어. 너 미쳤어?
주저앉은 A의 얼굴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어. 주르륵. 줄줄. 두 눈을 뜨고 있으므로 실명은 아니니 불행 중 다행이지만, 피가 너무 많이 났어. 왼쪽 눈 아래, 아이홀과 코뼈가 만나는 부분, 즉 안경 코받침이 닿는 부분이 찍히고 찢어졌어. 아마도 안경 알이 깨지면서 찍히고 테가 벗겨지면서 찢겼겠지. 피가 광대와 턱을 지나 목을 타고 줄줄 흘러서 윗도리 넥라인에 고였어. A는 목에 호흡기를 달았던 구멍 흉터가 있는데, 이 흉터를 손으로 만지는 건 처음이었던 거 같아. A는 계속 소리치며 삿대질하며 B를 저주했고 아프다고 엉엉 울었어. 나는 울면 더 아프다고 말하며 그를 진정시키려 애썼어. 휴지와 화장솜으로 상처를 틀어막고 물티슈로 흘린 피를 닦았어. 피가 좀처럼 멎지를 않아서,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어.
상처는 아직 낫지 않았어. 당연함. 꽤 깊음. 근데 병원은 싫대. 병원 가서 꿰메면 훨씬 빨리 아물 텐데. 눈과 아주 가까운 곳에 피멍 등 상처가 진하고 크게 있어서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어. 안 그래도 A와 눈마주치는 게 마음이 쉽지 않은데, 더 어려워졌네.
와중에 엄마는 드레싱을 갈 때마다 상처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고 있어. 나는 피 보는 거 싫단 말이야. 상처도 싫고 단면도 싫어. 핏줄도 싫어. 징그러워. 힘들어. 하지만 엄마도 속상하니까. 그리고 공유하고 싶으니까. 열심히 관찰하고 비교해서 그래도 어제보다 낫다, 메디폼 이렇게 붙이길 잘했다 등 뭐라도 이거에 관해서 말해주고 있어.
아무튼 겉모습은 멀쩡한 편인데 뇌가 제 나이만큼 기능을 못한다는 점이 같잖아. 그리고 나아질 가망이 없다는 점도.
갓태어난 아기는 지능도 떨어지고 충동 조절도 못하고 고등정신기능을 수행하지 못해. 당연함. 아기임. 그런데도 왜 아기를 예뻐해주고 용인해줄 수 있는가. 물론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앞으로 성장하고 나아질 예정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오늘 미성숙하게 행동해도 내일은 나아질 수 있잖아. 올해 한글 못 뗐지만 공부하면 내년이나 내후년 즈음엔 한글 뗄 거라고. 하지만 절대 나아지지 않는다면? 절대 성장하지 않는다면? 개선 및 향상의 가능성이 한없이 제로에 가깝다면?
화장실 소리 너무 싫어 엉엉 바보 같은 목소리도 너무 싫어 저 얼빠진 멍청이가 내 아버지라는 사실이 싫어 아닌데 저거 내 아빠 아닌데 우리 아빠 훨씬 멋있고 잘생기고 똑똑한데 멍청하고 더럽고 냄새나고 무력하고 바보같고 암튼 싫어 너무 싫어 그 '싫은 것'을 목도하며 아니 그뿐만 아니라 바로 옆에 두고 심지어 직접 만지고 대처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점도 너무너무 싫어 짜증나 두렵고 힘들고 싫어 못할 거 같아 나 이거 못하는 일이야 도망칠 거야
안 그래도 자아효능감 박살났고. 집중력 이해력 끈기 전부 끝장났고. 정신적 신체적 컨디션 다 별로인데. 아무튼 다 별로별로개별로 끔찍 형편 없는 상태인데 안그래도! 근데 더불어 샤워한지 며칠 돼서 더 괴로워. 머리카락이 무겁고 두피가 찝찝하고 숨결이 고약하고 얼굴에도 뭐 낀 거 같고 전체적으로 찝찝하고 무겁고 답답하고 너무 싫어!!!!!!!!!
A의 뇌는 여러모로 퇴화했기 때문에... 어린아이와 다름이 없기 때문에... 아무튼 이해는 하지만 어이가 없는 건 어쩔 수가 중얼중얼
뭐 때문에 이러냐면... A의 드라마 취향에 대한 이야기. 일단 이쁜 아가씨가 나와야 함. 이쁜 아가씨 분량이 꽤 있어야 함. 로맨스코미디 장르 우대. 폭력이나 유혈, 욕설과 외침 및 각종 진상 빌런 짓 최대한 적어야 함. 없으면 좋고. 그외 뭔가 심각한 분위기나 어려운 이야기는 최대한 적어야 함. 없으면 좋고. 언어는 한국어.
그러니까 이를테면... 사ㄴH맞선, 김ㅂl서가오H이럴까, 뭐 이런 작품들.
만약 자막도 볼 수 있고 십덕모에체 화풍도 좋아했으면 걍 라노베원작 럽코 애니 틀어줬을 듯... 타카기상 같은 거...
그가 갑자기 쓰러졌고 중환자실에 있다는 소식을 엿들은 밤, 나는 아빠를 살려달라고 울면서 기도했다. 그래서는 안 됐다.
며칠인지 몇 주인지가 지난 후, 아빠가 의식이 찾았다는 소식이 왔다.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그렇게 멍청한 얼굴을 한 아빠는 처음 보았다. 목에 구멍을 내고 호스를 연결한 아빠도 처음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고 해야 할까. 그 맥없는 눈알이 이쪽을 향하자 나는 정체 모를 강렬한 감정에 무너져내렸다. 그 순간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고, 간호사 선생님(추정)은 여기서 울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병실을 뛰쳐나왔다. 울음을 참는 감각은 익숙했다. 울음을 참기를 실패하는 감각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상실한 감각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어린이는 소독약 냄새가 나는 길고 하얀 복도 벽에 기대어 눈이 얼얼해질만큼 울었다. 병원에서 시끄럽게 굴면 안 되는데. 어쩌면 그때 나는 엉엉 소리높여 울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거의 숨을 참다시피 하며 울음을 참았던 것 같다.
다정하고 사려깊고 현명하고 섬세하고 조곤조곤한 말투에 손재주가 좋고 항상 일찍 일어나고 요리는 서툴지만 플레이팅은 가지런히 하고 글씨가 예쁘고 암산이 빠르고 두꺼운 어려운 책을 읽고 훤칠해서 정장과 코트가 잘어울리는 아빠는 이제 볼 수 없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꿈에서도 볼 수 없다.
"아빠"의 모습과 목소리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른 뒤에 언급했던 사건의 줄거리나 사실의 극히 일부만이 조각조각 머리에 남아있다. 당시의 장면이나 소리 등은 정말정말 부분적이고 그마저도 희미하다.
물론 그도 그때를 기억못한다. 그의 뇌는 꽤 많이 롤백되어서, 몇십년 전, 결혼 이전의 기억이 더 또렷하다.
그래서 내가 유아~유년기일 때의, 아빠가 "아빠"일 적의 일들은 나에게도 그에게도 거의 없던 일이 되어있다.
섬세하고 다정하고 훤칠한 아빠 위에 멍청하고 참을성없고 구부정한 아버지가 덧칠해진다. 덕지덕지. 아빠의 목소리가, 말투가 기억나지 않는다. 머리가 검은 아빠의 표정이나 손짓이 기억나지 않는다. 나의 아빠는 오염되었다. 위에 얹어진 다른 무거운 정보 때문에 아래 깔린 기억을 꺼낼 수가 없다.
"아빠"가 보고 싶다. 그러나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꿈에서도 볼 수 없다. 꿈을 꿀 때마저도 예전의 그 모습이 아니라 지금의 모습 즉 내가 돌봐야 하는 대상으로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