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친구랑 오랫동안 친구하고싶다 근데 그 친구는 왜 나한테 몸을 맡긴걸까 ㅡ,ㅡ 그냥 술에 꼴아서 그런걸까 하이튼 그 사람의 비언어적 행동보다는 그 사람의 말에 집중하면 성범죄는 일어나지 않는다 알았냐? 어차피 걔랑 사귀고싶지는 않다 내가 보기에 미숙한 지점들이 아직도 걔한텐 많이 보이고 걔도 나를 마음에 차게 생각하진 않을것임 그렇다고 육체적 교류만 하고싶지도 않다 사실 나는 그게 잘 안될거같고.
근데 왜 자꾸 나 재밌다고 하고 나 좋게 보냐? 어째서 '왜 나한테 잘해줘?' 라고 물었냐? 왜 나랑 말이 잘 통한다고, 얘기하고 있으면 즐겁다고 그러냐? 왜 내가 니 남친 바에 데려다 줄때마다 조금만 있다 가라고 그러냐? ㅡ,ㅡ 혹시 내가 자길 좋아해줬으면 하는 마음인가? 그런데 본인이 받아줄 생각은 없고? 전에 얘기했던거처럼, 사람들이 자길 좋아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나한테도 해당되는건가?
그 친구랑 또 봤는데 영 맘에 안든다. 그 친구는 나한테 자기가 원하는 것, 또는 원치않는 것을 가감없이 말할 수 있는데 난 그러지 못해서 박탈감도 들고요. 약간 억울하기도 하지만 내 천성이 그런 걸 어떡해. 그냥 내 팔자인가봅니다. 요즘 식사량도 조절중인데 저녁도 너무 많이 먹어버렸고.
공부하는데 먼저 전화와서 머하냐하길래 서울 카페에서 공부중이라캤더니 글로온다길래 그러라고 했는데 갑자기 와서 방탈출 하자고 난리 그러다가 갑자기 인형뽑기를 하고, 이따 남친이랑 식사한다 했으면서 갑자기 밥을 먹자 그러고 근데 내 행동 중 뭐가 싫네 뭐가 별로네 이런 얘기는 가감없이 하고 당췌 뭘 원하는건지 모르겠네. 난 그냥 조용히 카페에서 공부나 하고 싶었는데... 재미없는 거 못참는 친구인건 알고 있었지만 자꾸 원하는대로 다 들어주다보면 내가 페이스에 휘말릴거같다.
처음엔 좀 괜찮은 친구인줄 알았는데 점점 알면 알수록 실망하게 되는 지점이 있어. 사람은 자기가 원하던 것이 얼마나 초라한지 알게된 순간, 즉 가지게 된 순간 그것을 더 이상 갈망하지 않게 되는구나. 이미 가진 것을 헌신짝처럼 여기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구나.
그리고 지금 동수 씨에게 남은 것은 51장의 덱, 넝마같은 점프수트 한 벌, 그리고 털 뿐이었다. 후드도 있었지만, 굳이 쓰고 싶진 않았다. 그는 짐승을 싫어한다. 특히 원숭이는 더욱. 점프수트에는 검은 털이 있었다. 다리부터, 등까지. 후드에도 있었다. 동수 씨는 그 감각이 싫었다. 지금 느껴지는 이 감각이. 털이 살결을 부드럽게 간질였지만, 그런 식으로는 어루만져지고 싶지 않았다. 동수 씨는 티 파티를 생각했다. 티 파티에서 만난 마샤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지금 여기 없다는 것도. 그 감각은 형언하기 어려웠다. 허전함인지? 혹은 답답함인지? 그것이 너무도 싫어서 그러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손에 쥔 덱이 꾸깃해졌다. 그리고 손에서 벗어난다. 하트의 퀸. 그것은 인파에 밟히고, 오물에 뒤덮힌다.
결국 동수 씨는 무언가 결심한다. 동수 씨는 일어나 거리를 다시 걷는다. 그리고 어느 가게로 들어간다.
조립식의 기둥과 서까래, 기와가 얹어진 주택이다. 왁스 발린 마루를 딛고, 종이가 발린 미서기 창을 열면 다다미가 깔린 너른 방이 나왔다.
"안녕하세요." 동수 씨가 먼저 인사했다. 관장은 그곳에서 검은 벨트를 찬 채 서있었다. 벨트에 양 손을 얹은 채. "반갑습니다." 관장이 화답했다. 동수 씨는 고개를 떨궜다.
"등록을 좀 하려고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관장은 빈 서판 위에 두루마리를 올려놓고 만년필로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동수요." "동수 씨이시고… 등록은 언제부터?" "지금부터요." "지금부터요?" "네. 제가 좀 당한 게 많아서요."
동수 씨는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자 눈 앞에는 가훈처럼 걸린 명판이 뵌다. 명판에는 무언가 쓰여있었다. 한지 위에, 페인트 브러쉬로. ```[ P A Y B A C K D O J O ]```
"좋습니다. 그러면… 마침 잘 됐군요. 마지막 한 자리가 남았는데, 바로 신청 가능하십니다." "잘 됐군요." "그러면 그렇게 하시고… 도복은…" "필요 없습니다." "필요 없으시다고요?" "예." 동수 씨는 단호하게 말했다.
"동수 씨, 잘 아실거라 생각했는데… 의복은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마음가짐의 기본이에요. 적절한 의복을 입음으로써 스스로 결의를 다질 수 있으니까요." "예에…" 관장은 설교하는 목사처럼 얘기했다. 동수 씨는 마지못해 수긍했다. "동수 씨도 환불을 받고 싶어서 오신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렇다면 단호해야지요.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단호해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 그런가요?" "물론이지요." 관장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어… 카드로." "현금으로 하시는 게 나을텐데요?" 관장은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동수 씨는 갑자기 땀을 흘렸다. "네, 에? 웨… 에, 왜요?" "10% 할인이 있거든요. 계좌 이체 하셔도 됩니다." 동수 씨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것은 털 뿐이었다. "저어, 지갑을 잃어버려서…" "…" 관장은 다시 은은한 미소를 보이면서, 코팅된 A4 종이를 가져왔다. 거기에는 이렇게 써있었다.
```[ 새마을금고 486-1010235-0242 연인사 ]```
"음… 저, 그런데 스마트폰도 잃어버렸는데요." "이렇게 하시죠. 자, 이게 당신 것 아닙니까?" 관장은 이번에는 해맑게 웃으면서 검은 폴리카보네이트제 네모 상자를 꺼냈다. "에? 그, 그걸 어떻게." "열어보세요." 동수 씨는 손을 떨면서 네모 상자를 엄지로 슥 문질렀다. 떠오르는 화면은 과연 동수 씨가 익히 보던 것이었다. "자, 이제 된 것 아닙니까?" 관장은 이를 보이고 웃었다. 귀에 걸릴 것만 같았다.
"…미안해요. 아니, 감사합니다." "아니, 저, 죄송하지만, 아니, 감사하지만, 다음에 오겠습니다." 동수 씨는 어깨를 움츠리고 뒤로 돌아 종종걸음을 걸었다.
동수 씨가 미서기 창을 반쯤 열었을 때, 뒤에서 일갈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어딜 도망치시는 겁니까!" 관장은 우렁차게 호통쳤다. 불호령이 떨어지자, 그 목소리는 도장 전체를 에워쌌다. 동수 씨는 돌아선 채 움찔거렸다. 얼어붙었다. 굳어있다. 아무 것도 못 했다. 차가운 오이가 엉덩이에 닿은 듯한 느낌이었다. 관장은 어느새 동수 씨의 뒤로 다가왔다. 아무 소리도 없이. "자아, 저와 함께 하시는겁니다. 동수 씨. 세계는 당신 거에요. 당신은 손만 뻗으면 됩니다." 관장은 동수 씨의 어깨를 붙잡고, 동수 씨의 뒷목에 입김을 불듯 속삭였다. 동수 씨는 목 뒤의 털이 간지럽혀지는 감각에 더욱 움찔거렸다. "그, 그만…!" "동수 씨에게는 재능이 있어요. 지금 보여주시는 단호함, 좋아요. 아주 좋아요. 하지만 약간의 터치가 필요합니다." "동수 씨는 또 다 잃고나서야 깨달을 셈입니까?"
동수 씨는 그 말을 듣고 마샤를 떠올렸다. 위스콘신으로 돌아가버린 그녀를. 그리고 대치동에 홀로 남겨진 자신을 생각했다. 다다미 넉 장 반짜리 고시원에서 살고 있는 자신을. "…좋아요. 하겠습니다. 바로 이체해드리겠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끝마친 동수 씨는 곧바로 네모 상자를 꺼내어 양 엄지를 이용해 능숙하게 화면을 두드렸다. 관장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금액은…" "오십 칠만 팔천 이백원 되시겠습니다." "…" 동수 씨는 자신이 입고 있는 점프수트를 내려다보았다. 이 털달린 수트를 사는 데에도 자그마치 백일만 이백 삼십 오원이 들었다. 거기에 더해서 오십 칠만 팔천 이백원을 더하면… 동수 씨는 계산기를 꺼내려다가 뒤늦게 점프수트에 주머니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건 당신 인생입니다, 동수 씨. 그리고 당신 인생은 당신이 주도적으로 사는거에요." 관장은 천연덕스럽게 입바른 소리를 해댔다. 동수 씨는 반박하지 못했다. "흠, 그리고 아울러서… 부가… 음? 어디서… 뭔가 새는… 아무튼, 그건 별론으로 하지요." 관장이 이상한 소리를 했지만, 동수 씨는 공상에 잠겨있었다. 그 날이 떠올랐다. 마샤가 떠날 때도 그랬다. 그녀가 위스콘신으로 돌아가 학교를 다시 다니겠다고 했을 때, 동수 씨는 아무 것도 하지 못 했다. 하다못해 그녀가 마도공학을 공부할 필요가 있기는 하냐고 질문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는 그대로 항구에서 쓸쓸한 작별을 맞이했다. 소쩍새가 울었지만, 파도가 바위에 부서지는 소리에 묻혀 지나갔다. 해안 만의 포말이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다. 바다의 파문에 꺼져가며. "…알겠습니다. 이체해드릴게요."
동수 씨는 확인 단추를 눌렀다. 약간의 결심이 필요했지만, 일단 결심이 들자 행동에 옮기는 것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보냈습니다. 확인해주세요." 동수 씨는 결연하게 말했다. "…어디보자, 음?" 관장은 그것을 보더니 갑자기 의문을 표했다.
"왜요? 뭐 문제 있나요?" "아니, 동수 씨. 부가세를 안 주시면 어떡해요." "네? 그게 무슨…" "제가 부가세 별도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관장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동수 씨는 몸을 비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