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실에 연세 많으신 분은 할머니가 되신 분도 있는데, 여섯살 먹은 손녀랑 같이 그림 그린다고 하시더라. 멋지지 않냐. 할머니랑 같은 취미 가질 수 있다니. 누군진 몰라도 그 꼬맹이 좀 부럽더라. 할머니가 지금도 학원에서 유화 배우고 계신다고 말하면 누구라도 부러워할 거임.
남을 차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나도 당연히 차별받을 수 있고 그런 게 좋으면 이런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겠지만), 차별하지 않는 걸 넘어서 그들을 존중하는 이유는 성 정체성으로 고민하든 장애로 고민하든 자기 삶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정상"이라거나 "평균"이라고 알고 아무런 고민 없이 편리하게 사는 사람들과는 삶의 밀도부터가 다른 것이지. 내가 남을 차별하는지 어쩐지도 모르고 자기가 입은 피해만 피해라고 생각하는 삶은 꿈꿔본 적도 없는, 삶의 모든 부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정직한 인생임. 여기에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못할망정 알지도 못하면서 손가락질을 하려면 손가락이 꺾여도 괜찮을 각오가 있어야 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살아온대로 앞으로도 살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이 모든 걸 망쳐왔잖아. 이성애자들의 결혼생활에서 벌어지는 많은 문제가 있었음에도 일체의 개선 없이 앞으로도 그렇게 하자는 말이 어떤 판단에 의한 것이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근거가 없는데 어떻게 판단을 해?
아니 그냥 고아들부터 보라고. 걔네들은 누가 버렸는데. 이성애자 부부 아냐? 동성애자 부부들이 눈물 흘리면서 애를 가지고 싶어할동안 이성애자 부부들은 지원금 받겠다고 애를 장난으로 낳아서 학대하다 죽이는데 왜 이성애를 끊임없이 고집하는 거야. 걍 하다보면 나아진다 이런 마인드냐고.
문득 든 생각인데 T가 생각하는 팩트와 F가 생각하는 팩트는 조금 다른 것 같음. F기준 팩트는 '진실한 내 감정'인 것 아닐까? 아무튼 내가 듣기엔 팩트가 아닌 것임. 흠... 물론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그정도는 찰떡같이 알아먹고 있지만 역시 좀 납득이 안 되는 거임.
내가 생각하는 사실이란 내 기분에 전혀 좌우되지 않는, 모로 보나 변하지 않는 것을 사실임. 가령 누군가 대회에서 입상했다면 그것이 아무리 더럽고 치사하거나 아니꼬울지라도 상을 탔다는 것만은 사실인 것임. 내가 잘못 이해한 건가 싶은 생각이 여전히 들지만 내가 여태까지 들은 바로 F가 말하는 팩트란 '내가 그것을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꼽게 "느꼈다"'라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해봅니다...
극F인 친구가 애인이랑 헤어지면서 '너 나한테 맨날 힘들다고만 하고 나한테 하나도 신경을 안써서 속상했다' 라고 했다는데 팩트로 두들겨팼다고 자기가 그랬거든. 제삼자인 걸 고려해도 내가 듣기엔 '맨날 힘들다고만 말했다'만 팩트라고 생각이 된단 말이지... 감정 코어를 제대로 돌리기엔 아직도 갈 길이 멀군...
근데 나름 괜찮은 기준 아니냐?? 구체적인 날짜나 장소 중 하나라도 없으면 예의상 하는 말로 들어도 되더라고. 어차피 목표만 있고 계획이 없다는 얘기잖아. 그럼 당장이 아니란 건데 예의상 하는 말이랑 크게 다를 바가 없음. 급한 약속이 아니니까 미뤄도 데미지 없는 거 아님? 구체적인 날짜랑 장소를 지정하면 목표랑 계획 둘 다 있다는 뜻이니까 그때는 일정을 조정하든지 해서 시간 맞추는 거고.
나는 그냥 어디 가자고만 말하면 흘려들음. 어 그래 그런걸 좋아하는구나~ 함. 아니면 뭐 나더러 알아서 플랜 짜오라는 말이란 얘긴데 좀 흘려들어도 괜찮지. 양심없는거 본인도 알잖아 ㅋ
오히려 내 성 지향성을 극복하고 가정을 꾸려서 나라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맞는 거 아니야? 그게 왜 부끄럽냐. 가정을 꾸리고도 여전히 내 정체성으로부터 원래의 생김새에 충실하기를 요구받지만 거기에 저항하고 있다는 건 생각 안하나? 동성애를 걍 문란한 것으로 치부하는 이 멍청함, 이걸 드라마 설정이니까 봐달라고 하는 이 나태함, 이대로 괜찮냐 이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