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너무 의식하기 때문에 결국 타인을 의식하게 되는 겁니다. '내가 별 거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남이 나보고 뭐라고 하든 신경을 안 쓰게 돼요. 나를 열등하게 생각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들이란 원래 이런 말도 하고 저런 말도 하는 거예요. 누가 나에 대해서 뭐라고 하든 '내가 별 거 아니다'라고 생각하면, 그런 일은 별 일 아니에요.
사람들은 서로 잘생겼느니 못생겼느니 비교하는데 변소에 있는 구더기를 보면 어때요? 우리가 볼 땐 똑같잖아요. 그래도 구더기들이 자기들끼리 비교하면 길이가 다르고 몸무게가 다르고 주름살 개수가 다르겠죠. 누구는 미인 구더기고, 누구는 못생긴 구더기라고 평가할 겁니다. 자기들끼리는 그게 맞을지 몰라도 사람이 볼 때는 웃기잖아요. 이래도 구더기고 저래도 구더기니까요.
거울보고 ‘내가 별 거 아니다’ 이렇게 자각하는 연습을 해보세요. 내가 잘난 게 뭐가 있어요? 그렇다고 못난 것도 없어요. ‘그냥 나는 나일 뿐이다. 별 거 아니다.’ 이런 관점을 가져야 해요. 자기에게 집착하지 않아야 타인의 시선에도 집착하지 않고 신경을 안 쓰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건 나쁜 게 아니라 바보 같은 거예요. 자식이나 배우자가 죽거나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계속 울고 있다면 그건 바보예요. 운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오는 것도 아니고 운다고 나한테 뭔가 좋아지는 것도 아닌데 울잖아요. 남이 땅을 샀을 때 내가 배 아파한다고 해서 나한테 땅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상대의 땅이 줄어드는 것도 아닌데 배 아파한다면 나만 손해라는 거예요. 이처럼 내가 나에게 손해 끼치는 것을 바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리석다고 해요. 그래서 중생을 어리석다고 하지요.
질문자는 어리석은 정도가 좀 심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니까요.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는데 누가 뭐라 그러겠어요? 남을 괴롭히면 ‘너는 나쁜 놈이다’ 이러지만,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면 ‘어리석다’라고 합니다. 남을 죽이면 살인자지만, 자기가 자기를 죽이면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살인자라고 처벌을 하려고 해도 대상이 없어진 거예요. 죽이는 행위를 저지른 당사자가 죽어버렸으니까요. 남의 뺨을 때리면 나쁜 사람이지만, 자기가 자기 뺨을 때린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남의 재산을 훔치면 나쁜 사람이에요. 그러나 자기 돈을 자기가 갖다 버리면 그건 나쁜 사람이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런 것을 어리석다고 합니다. 그래서 범부중생(凡夫衆生)은 ‘어리석은 중생’이라는 뜻이에요. 자기가 자기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아이가 없으면 아이가 없다고 한탄하고, 있으면 아이가 있다고 한탄합니다. 시부모가 살아 있으면 시부모 때문에 못 살겠다고 하고, 시부모가 안 계시면 또 효도할 대상이 없어서 문제라고 합니다. 젊을 때는 내내 빨리 나이 들고 싶어 하고, 늙어서는 또 젊은 시절을 그리워해요. 이런 걸 경상도 사투리로 ‘디비쫀다’라고 해요. 젊을 땐 젊어서 좋고, 늙으면 늙어서 좋은 거예요. 이렇게 관점을 갖는 게 수행입니다.
이렇게 묻는 사람이 많은데, 스님이 되는 게 좋다거나 결혼하는 게 좋다는 것은 없어요. 문제는 자기가 어느 쪽에 만족하느냐는 거예요. 결혼해서 살면서 혼자 사는 스님을 부러워하면 그건 바보죠. 혼자 살면서 결혼한 사람을 부러워하면 그것도 바보고요. 모두 자기를 괴롭히고 있잖아요. 혼자 사는 사람은 혼자 사는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같이 사는 사람은 같이 사는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해요. 어리석은 자는 항상 혼자 살면 외로워서 힘들다고 한탄하고, 같이 살면 귀찮아서 못 살겠다고 합니다. 이게 바로 바보 같은 짓이에요. 이러면 아무 해결책이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세상 사람이 대부분 질문자 같은 마음으로 살아요. 그래서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게 피곤하다고 생각한다면 ‘아, 내가 나를 괴롭히는구나. 그 사람이 땅을 샀는데 내가 괴로워한다고 해서 나한테 이익되는 게 하나도 없지 않느냐’ 이렇게 내가 나에게 손해 끼치는 생각을 버리면 돼요. 인생은 어떤 게 잘 산다, 못 산다 할 수가 없어요. 자기가 선택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자기가 지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일까요? 손해 안 나게 하는 게 지혜로운 거예요. ‘남이 땅 사는데 어떻게 배가 안 아파요!’ 이렇게 말할 필요가 없어요. 그렇게 말하면 저도 ‘배 아파하세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런데 배 아파해봐야 결국 내 손해니까 ‘그 사람이 뭘 사든 지 말든지 그건 자기 일이고 나는 내 인생을 산다’ 이런 관점을 갖는 게 좋지 않을까 해요.
자기를 해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나를 해치는 것이니까 아무도 뭐라고 말할 사람은 없어요. 그러나 내가 돌아봤을 때 ‘내가 왜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하나’ 이런 생각이 든다면 그만 두면 돼요. 그냥 생긴 대로 사세요. 받아들이는 것도 수행이에요. 그런데 여러분은 못 받아들이기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자기가 해놓고 자기가 못 받아들이니까 괴롭죠. 손해를 봤으면 다음에는 안 하든지, 했으면 손해를 감수하면 되지 괴로워할 필요는 없어요. 둘 다 수행이에요. 돈을 빌렸으면 이자까지 쳐서 갚든지, 갚기 싫으면 아무리 궁해도 안 빌리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거예요. 둘이 사는 게 귀찮으면 혼자 살고, 외로운 게 힘들면 둘이 살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외롭다고 둘이 살다가, 귀찮다고 헤어져서 또 혼자 살다가, 또 외롭다고 둘이 사는 걸 반복해요. 이런 것을 ‘방황’이라고 합니다. 같이 살려면 서로 맞춰야 해요. 혼자 살려면 약간 외로움을 감수해야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