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점가 한 가운데에서 퍼져서 흘러내리는 듯한 모양새의 머리를 한 회색의 소녀가 서성인다. 옷차림으로 보아 학생일 것이지만, 알게모르게 성숙한 기운이 감도는 고교생이었다. 발걸음은 딱히 정처가 없고, 우울하게 처진 눈매는 상점가의 바닥과 구석구석을 훑는다. 가게의 주인에게 묻는다, 쓰레기통의 뒷면을 들여다본다, 버스킹에 눈길이 빼앗긴다. 그러다 고양이에게까지 묻는다. 이 거리의 실세라고도 할 수 있는, 등푸른생선처럼 줄이 그어진 털무늬를 한 고양이는 자신의 영역에 침범한 그녀가 퍽 위협적으로 보였는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영역에 함부로 발 들인 멀대같은 인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높게 '왜아옹' 소리를 내며 하악질하는 것으로 답을 마쳤다.
"그런가요..."
위협적으로 세운 꼬리를 흔들며 골목안으로 달음질치는 고양이 선생의 뒷모습을 보며, 소녀가 중얼거렸다.
"이곳엔 없는 모양이네요... 지갑씨."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노을진 구름이 떠다니고 있었다. 더 늦어지기 전에 파파에게,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까. 지갑이라곤 하지만, 별 대단한 것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1만엔짜리 지폐가 대 여섯 장― 그래, 그건 소녀에겐 그저 그뿐인 물건이었다. 그런 것은 차치해두고서라도 교통카드가 없으면 집에 돌아가는 것이 곤란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마저도 전화 한통이면 해결될 터이지만.
그렇다. 앞발이 맞다. 인형탈을 쓴 채 깨금발을 들고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거는, 의문의 중성적인 인물. 정장을 차려입은 인형옷, 인형탈이기에 그 속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그 겉의 3자 모양 입과 둥그런 눈만이 자리할 뿐이였다.
"혹시 저라도 괜찮다면,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어찌 이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려 하게 되었냐... 라고 한다면, 그것은 역시 가게 일을 도우며 조용히 있던 와중, 지갑을 찾으러 묻는 키가 큰 사람이 보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물론 우이로서는 조금 부끄럽지만, 그럼에도 이미 본 이상 자신의 집 근처에서 일어난 일이 있다는 것을 안 이상 움직여서 도와주지 않으면 잠을 편히 못잘 것이라고 이미 우이로서는 알기 때문에 시로우사씨의 얼굴을 빌려 나서게 된 것이다. 음, 이렇게 이야기하니 시로우사가 무슨 악마나 히어로 비스무르한 것처럼 느껴지고, 실로 그런 모습으로 저 이국적 소녀의 눈 앞에 있지만. 그저 인형탈일 뿐이고, 인형탈을 쓴 소녀일 뿐이니 돕는다고 한들 같이 찾아다녀보는 수밖에 없지만... 음, 그렇지 않은가.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곤란에 처한 레이디는 돕는것이 인지상정이기에, 시로우사, 도우러 왔답니다!"
그래도, 자신이 아닌 시로우사를 본다고 생각하기에 이렇게 활기차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것이다.
똑 또록똑 똑 또독 똑 처마 모양으로 커튼처럼 드리우는 빗방울 너머로 회색으로 드리운 쿠라하마, 그리고 피시 하우스 처마 아래 서 있는 조그맣고 하얀 아이 하나, 우산은 온데간데 없이 처마 아래에서 눈을 감고 있는 채로, 그 풍경을 채우는 옅은 비 냄새와, 물 떨어지는 소리
물방울이 철제 간판 끝에서 떨어지는 소리, 물웅덩이를 두드리는 부드러운 파열음, 멀리서 들리는 배수구를 타고 내려가는 물줄기의 흥얼거림, 그리고 그 위에 얹혀지는, 하얀 아이의 까닥까닥 흔들리는 고개, 끄트머리가 살짝 올라갔다 지면을 톡 두드리는 구두굽, 고갯짓 한 번은 스네어드럼처럼, 발짓 한 번은 킥드럼처럼
음악을 아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떤 소리를 낼 것인지 너무도 생생히 연상되는 아니 느껴지는 동작들이 하나의 별나고도 특이한 방식으로 짜인 채로, 흰색의 소녀는 빗소리와 이야기나누고 있었다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도, 그러려고 의식하고 있는 것도 아닌 채로, 소녀는 그저 철썩이며 깨지는 소리와 부드럽게 퍼지는 소리가 흘러가는 대로 함께 어울려서는 소리없이 지줄대고 있는 것이었다
굳이 드럼세트를 펼칠 필요는 없다 무대는 빗물에 덮인 피시하우스 처마 조명은 빗방울에 부스러지는 쿠라하마의 네온사인 관객은 텅 빈 길거리를 스쳐지나는 비거스렁이
그럼에도 그것은 하나의 연주였다 소박하고, 희한하고, 묘하게 어울리는 빗소리와 하얗고 조그만 움직임으로 이루어진 이상한 즉흥 합주
카나자와 준의 자택으로부터 라이브 하우스까지는 차로는 약 30분정도가 걸렸다. 그녀의 자택은 에도가와구에서도 나름 도쿄에 가까웠고 피쉬 하우스도 중심가의 변두리에 위치한 것은 마찬가지. 그럼에도 그녀가 먼 거리를 차로 이동해가면서까지 그 곳을 고집하는 이유는 도쿄의 그 무거운 공기가 부담되기 때문이었다.
도쿄에는 온갖 꿈들이 모인다. 미국 전역에 걸쳐서 펼쳐지는 아메리칸 드림이 있다면 일본인에게는 도쿄 드림이라고 해야할까. 아시아의 여느 나라가 그렇듯이 예능인이라면 수도로 보내야 한다는 것은 바보같을정도로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많은 꿈들이 모인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이 나라에서 가장 많은 꿈이 무너지는 곳. 만명에 한명인 재능따위로는 더 높은 곳 까지 가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렇게 올라가려는 이들을 노리고 이빨을 드러내는 벌레들은 그들의 배는 되었다.
결론, 그녀는 지쳐있었다. 기나긴 휴식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야할까. 반 년 정도는 인간의 악의와 마주하여 최악의 경험을 했고 피해자가 되어 내려온 이후에는 얄팍한 동정이 머리 위에 쏟아졌다. 그 무게를 버티지 못했기에 그녀는 여전히 도망치고 있었다.
“비…”
일기예보는 믿을 것이 못된다. 아침에는 구름 한점 없이 맑던 하늘이 교대하고 퇴근을 할 때쯤이 되니 하늘에서는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차를 태워 달라는 아르바이트 동료를 무시하고 천천히 차를 몰았다. 빗방울은 그칠 생각이 없는 듯 점점 더 세를 더해가고, 어두워진 하늘이 그 무게를 조금씩 더해갈 무렵 새하얀 무엇인가가 가게 앞을 막고 서있었다.
모르는 얼굴은 아니었다. 언제나 둘이서 같이 오던 그 노란 머리 꼬마와 같이 다니던… 초등학생정도 되는 녀석. 개인적으로 말을 섞어본 적은 없었지만. 혼자 있는 모습은 본 적이 드물었지만 오늘이 그런 날이었던 모양. 초등학생이 그렇게 혼자 다니는 걸 보면 아무래도 보호자가 오겠거니 싶었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
물론 걱정과는 다르게 딱히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고 지금 당장이라면 퇴근이 더 급하다. 조금만 더 늦어진다면 고속도로도 막히기 시작할게 분명했으니까. 조용히 앞을 바라보고 있는 녀석을 지나쳐 차를 몰아 몇 분이 지날 때쯤, 트랙이 바뀌고 틀어둔 베이스의 템포가 점점 더 격해질 때쯤. 눈에 밟힌 녀석을 향해 차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어찌어찌 가게까지 찾아온 아이가, 처마밑에서 저리도 처량하게 서있더라. 우연히도 자신에겐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있었으니. 카나자와 준은 어쩔 수 없는 쉬운여자였다.
그렇게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 어깨에 느껴지는 이질감에 천천히 몸을 돌린다. 처음 보인 것은 새하얀 털의 앞발. 그 다음은 시선의 조금 아래까지 올 정도로 드높게 솟은, 한 쌍의 길쭉한 형상.
'사람을 겉보기로 속단하지 말거라 알리나.' 눈을 지그시 감는다. 언젠가의 가르침이 소녀의 머릿속에 잠깐 머물다 갔다. 하지만 파파, 머리가 둘로 갈라진 인종이란 것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요. 그렇다면. 아, 사람의 머리라고 한다면 굉장히 특이한 형태인 것이구나. ...라고, 소녀는 그렇게 거의 믿을 뻔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미수에서 그치고.
"시로우사...?"
대신에 곧 목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조금 내린다. 그러자 그곳에는 진짜 머리가. 또한, 잠시나마 '머리'라고 착각했던 부위가 사실은 귀임을 뒤늦게나마 알아차린다. 유실물을 찾는 것에 심취해 토끼굴에 발을 들여버린 것일까. 지금 소녀의 앞에 있는 것은 고양이 이어서 이번엔 토끼― 그 정체를 확인한 소녀 알리나는 그저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사람 모습을 한 토끼, 혹은 그 반대의 격이 될 수도 있을, '시로우사'라며 자칭하는 자의 존재를 나름대로 받아들인다.
"시로우사...씨는 알고 계신가요? 저의 지갑이 있는 곳..."
시로우사에게 묻는다. 소녀의 나직스런 목소리가 일렁이며 시로우사의 귀에 닿는다. 거리의 잡음에 섞여 들릴듯 말듯, 마치 유령의 목소리. 그렇게 묻는 순간에도 소녀의 시선은 거리의 한 켠으로 향하여, 두리번거리며 계속해서 지갑의 행방을 애달프게 찾는다.
"고양이씨께도 여쭤봤지만 왜인지 야단 맞아서..."
또, 시로우사가 다가오기 전 앞선 선객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수확은 좋지 못했던 것 같다. 그 말과, 한층 더 우울하게 처진 눈매로 미루어보자면. 그러나 실세의 텃세에는 그 누구도 어찌할 도리없다는 듯이 그녀는 무력하게 자신의 팔뚝을 감싸쥔 채로 매만지며 서있을 뿐이었다.
빗속에 뒤로 하얀 민들레 한 송이를 제치고 비그림자 색을 한 여인은 빗속으로 차를 달린다 잠깐 달음질하던 차가 도달한 곳은 자욱이 쏟아져내리는 망념의 가운데
이대로 가로질러 갈까도 했을지 모른다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갈까도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베이시스트는, 가장 오른쪽 차로로 거기에서 핸들을 더 꺾어서, 반대편 차로로 차창에 흐르는 망념을 거슬러 빗발 드리운 피시하우스의 처마 아래로 되돌아왔다 하얀 민들레는 거기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어이 거기, 하는 카나자와의 말에 민들레는, 하얀 웃음을 안녕? 하고 인사하듯 띄운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카나자와의 눈을 바라보고, 문득 어디든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요- 하고 말할까 쿠모하시는 그리도 생각했으나, 결국 카나자와도 쿠모하시도 발을 딛고 서있는 것은 무엇이건 할 수 있는 환상의 지평이 아닌 그저 비 내리는 쿠라하마
"그러면, 감사히."
해서, 쿠모하시는 쿠라하마에 묶인 어느 곳을 순순히 말하기로 했다
"○○ 플라자에 내려주시면, 거기서부터는 혼자 갈 수 있어요."
「○○플라자라면, 카나자와 준에게는 형편좋게도, 인터체인지로 가는 길에 거쳐가는 작은 상가다. ○○플라자를 지나서 인터체인지로 향하는 길이 붐비지만 않는다면 그 앞을 필연적으로 지나게 되어있고, 방금 차를 돌이키지 않고 꿋꿋이 목적지로 향했더라면 약 이십 분이 될까말까즈음해서 ○○플라자 앞을 지났으리라.」
거대한 토끼의 물음에 아주 잠깐 생각하는 얼굴을 짓는 소녀. 지갑이 없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실은 그렇게 멀지 않은 과거였지만,
"역에서 전철을 타려고 했는데..." "지갑씨,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유배되었어요."
그런 사실조차 새로이 떠올려야 할 정도로 알리나라고 하는 소녀는 얼이빠져 있는 것이었을까. 게다가 유배되다니 퍽 대담한 단어선택이다. 21세기의 일본은 중세가 아닌만큼 그렇게 각박하지 않다. 실제로는 미소를 두른 상냥하기 그지 없는 역무원이 도와주려던 상황에 가까웠겠지만. 소녀는 그런 역무원이 무안할만큼, 들은 척도 본 척도 하지 않고 지갑이 없다는 사실만에 사로잡혀 유유히 역을 떠났을테다. 그것이 소녀가 지금 이 자리에 서있게 된 이유― 보다 자세한 경위는 그렇게 된다.
"..."
그러기를 잠시, 다시 침묵에 빠진 소녀는 바닥을 내려다보았지만,
"...그러고보면."
다행스럽게도 또 다른 힌트를 흘리려는 듯이 그렇게 운을 띄우며 입을 연다. 우연찮게 그녀와 맞닥뜨리게 된 시로우사에게는 다행인 일일 것이다. 그녀와 함께 이 상점가의 모든 쓰레기통과 고양이에게 말을 걸지 않아도 좋게 되었으니.
"―그러고보면, 시계탑이 기억나요..."
대신에 단지- '시계탑'이라는 키워드를 입에 올린다. 그건 마치 꿈에서 본듯, 혹은 이미 까마득해진 기억을 상기하듯, 몽롱한 한 마디였다.
"시로우사씨는 알고 계신가요?" "시계탑이 있는 장소..."
미덥지 못한 이국의 소녀, 알리나는 자신의 고개 둘 정도 밑에 있는 토끼에게 시선을 내려 마주쳐오며 그렇게 묻는다.
턱에다 앞발을 대며 흠흠, 하고 생각하고 있다. 유배라는 단어에 신경을 쓰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우리 집이 있는 곳인데 유배라 하는건 너무하지 않은가 싶기도 하지만 이걸 이야기하면 지는 거라 생각하자, 응, 그러자.
"음음, 꽤 곤란하시겠군요... 호오?"
그러면서 생각하다가 들리는 것은 시계탑이라는 힌트. 시계탑이라는 것은 높은 자리에 아날로그 시계가 있는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하다면 이 동네에 시계탑이 있는 곳이라 함은... 요아케사카학원고등학교 정문에 위치한 시계, 혹은 교회 쪽의 종이 달린 시계. 그 둘 중 한가지가 아닐까.
"시계탑인가요, 시계탑, 시계탑..."
곰곰히 생각하다가, 둘 다 위치해 있는 곳은 같은 방향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저를 따라와주세요, 생각이 나는 장소가 두 군데 있으니!"
활기차게 통통 튀어나가면서도, 은발의 숙녀분과 5미터 이상은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며 길을 틔여나가는 시로우사. 물론 그렇게 인파는 없었고 그 인파도 시로우사를 알고 있는 눈치로 흐뭇하게 바라보지만, 그것은 시로우사군에게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토끼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였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저먼저 얼마 없는 인파 속을 해치며 나아간다. 생각보다도 앞서는 토끼의 행동력에 미처 따라가지 못한 소녀는 그런 시로우사를 보며 작게 소리내었다. 그리고는 얼마있지 않아 소녀도 그 뒤를 따른다. 토끼의 걸음과는 달리 바닥을 밀며 걷는듯한 느릿한 걸음이었다.
"..."
활기찬 뜀걸음의 거대토끼와, 그 뒤를 졸졸따르는 유령같은 소녀― 구라하마의 하늘은 노을빛으로 적셔져있었고, 상점가는 저녁 특유의 향취가 흐른다. 거기에 있는 그 둘의 존재는, 이 거리에 묘한 대비를 일으키고 있었다.
"다들 이쪽을 바라보네요..."
시선을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듯이 소녀가 시로우사의 등 뒤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정확히는, 거리의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눈치는 아니었다고는 하나, 같은 방 안에 있던 사람마저도 놀라게만드는 은닉의 저주가 있는 알리나에게 있어서는 사람들의 이목들이 한곳으로 집중 되고 있는 이 상황 자체가 꽤 드문 것일 터였다.
○○ 플라자는 그녀에게도 연이 있는 장소였다. 공연을 했다기 보다는 퇴근 길에 간단히 들릴만한 상가가 루트 상에는 거기 밖에 없었기에. 아이를 태운 차는 조용하게 달린다. 어느새 꺼버린 오디오는 정적을 유지하고 베이시스트는 구태여 말을 하지 않았으니, 민들레는 그저 자리에 앉아 있었을까. 창 밖으로는 도시의 풍경이 휙휙 지나갔다. 한창 봄이 되어가는 계절이었지만 콘크리트로 세워진 숲에는 계절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아 무겁게 내린 우울만이 봉우리 가득 맺혀 있었다.
그것에 삼켜진 듯 정적이 길었다. 투둑, 투둑. 차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마치 웅대한 오케스트라처럼 차안을 가득 채웠지만 별 의미는 없이, 빗소리를 듣고 싶을 때도 있는 법이다. 적막에 쌓인 채로 그 우울한 인상을 드러내는 도시는 저물어가는 태양빛을 가리고 내 우울함도 가린다. 비가 온다. 정적이 조금 더 길어지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혼자네. 늘 같이 왔던 그 시끄러운 녀석은 어쩐거야?”
싸움이라도 한 거야? 하는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런 이야기까지 할만한 사이는 아니었지. 그저 동네 라이브 하우스의 아르바이트생과 자주 오는 손님 정도의 관계였다. 그 채도가 높은 녀석과는 이런저런 싸움을 하기는 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한 사이인가? 하면 단연코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다른 사람. 완전한 타인. 격리 되어 있다고 할지 나에게는 과하게 시끄럽게 느껴졌다. 그렇기 때문에 괜히 더 날이 선 태도를 취했던 걸지도. 그에 반해서 이 여자애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작고, 하얗다. 그냥 그뿐. 어쩐지 조금 조용하네 했던 인상은 있었지만 그마저도 드럼을 치는 모습을 보고 난 이후에는 묘한 이미지였다. 확실히 말해서, 그렇게 까지 강렬하지는 않았다. 훌륭한 테크닉이라고 생각이야 했지만 드러머로서는 선천적으로 불리한 위치를 가질 수 밖에 없는 아이. 그 정도 실력이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나에게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기에.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천재인 나는 다른 사람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누군가의 실력을 보았을 때 ‘헤에, 열심히 했네’이상의 표현을 하는 것이 서투르다. 어린 시절에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런 말을 한다면 조금 건방지게 보일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천재란 것은 고독한 법이니까. 어쩔 수 없지. 묘하게 상냥한 말투인 것은 상대가 초등학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따라오는 것을 보자, 조금은 중년스러운 발라드 음정으로 흥얼거리며 주변 바닥을 둘러보며 속도를 그 교복차림의 살짝 느지막한 그녀의 발에 살짜금 맞추는 시로우사.
"어떤 생김샌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색감이나 재질같은것, 그리고 특징도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끄덕이면서 물어보는 타이밍, 조금 늦지 않나 싶기는 하지만. 그것은 시로우사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 떨어진 지갑을 두세번 주워 맞는지 확인하고 경찰서에 가져다 주기 위해 챙겨두거나, 그 옆에서 왠지 흐뭇한 표정으로 자신 것이라 이야기하는 아주머니에게 돌려준 이후에야 물어본것은 지나가도 괜찮으리라. 응, 괜찮을것이다.
"아, 제가 워낙에 이 시장에서 알려진 쪽인지라- 월묘떡집! 다음에 시간 나실때 들러서 맛있는 모찌가 만들어지는 장면을 구경해주시길!"
시로우사의 좀 더 근본적인 물음은 소녀가 시선을 허공에 두고 곰곰스레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내 지갑의 특징들을 말해주기 시작하는데,
"갈색에... 주름이 많고... 네모에요." "크기는 이 정도..." "만지면 느낌이 좋아요. 파파가 저에게 선물해 준 거예요... 그리고, 음..." "...네모에요..."
하나같이 '도움이 되는' 정보라기에는 터무니 없을 정도로 사적이고 보편적인 것들 뿐. 아니, 도음이 된다기 보다는 오히려 혼란에 빠트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런 소녀의 얼굴 만큼은 진정 순진에 가까운 근심빛이 감돌고 있어서― 이제와서 따지는 것도 의미가 없어보였다. 그것이 그녀에겐 최선의 대답이었다는 것일까.
"월묘떡집..."
알리나는 시로우사의 말을 되뇌이듯이 입 안에 담고 중얼거린다. 아직 허공에 뜬 채인 그 시선은 시로우사― 정확히는 우이가 토끼의 탈 안 에 든채로 찹쌀떡을 만드는 모습을 멋대로 그려보며 공상에 빠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