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지휘부에 보내는 용병단 결성 보고. 선적화물 리스트. 출항 및 도착 예상일자. 고향 행성 입항후 필요한 정비사항 우주공항측에 발송할 선적화물 리스트, 출항보고서, 운항계획서 등등 용병길드에 발송할 클라리스 고용 관련 서류 평소엔 대부분이 딸깍 한번에 자동으로 처리됐지만 용병단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니 새롭게 해야 할 업무가 늘었기에 아헨은 혼자서 온갖 서류와 씨름하고 있던것이다.
"어우 좀 쉬자"
한참을 화면을 보며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이미 식어버린 따끈한 커피를 쪽쪽 들이키며 창밖을 바라본다. 우주외곽 개척자들로 보이는 사람들 한무리가 지나가는게 눈에 띈다. 저 사람들도 돈 많이 벌겠지? 하는 생각이 드는 그녀였다.
빵집 벽에 걸린 TV에서는 최근 급격히 세력을 늘린 해적집단 '말라카'에 대한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주요 목격지역은... 이쪽과는 영토 반대편의 국경지역이니까 별 신경은 쓰지 않아도 될것 같다. 다른 뉴스는... 엘프족 거주지역 암흑물질 연구를 시작한다는 뉴스인가. 장기적으로 암흑물질을 제거하여 툭하면 고립되는 테라항성계에 대한 원할한 교통환경 제공.
"원 쓸데없는것만 잔뜩이네."
TV에서 시선을 돌려 다시 노트북 화면을 바라본다. 작성중인 문서에 커서가 깜빡이며 입력을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 이 짓거리를 몇백년동안 더 해야할텐데 벌써부터 질려온다. 커피나 마저 마시려고 했더니 잔이 비어있다. 한잔 더 시켜야겠다.
클라리스가 SDF용병단과 계약한 후 4일이 흘렀다. 여전히 도크에 정박중인 화이트 레이븐호는 화물칸을 열어놓고 화물적재 작업을 하느라 바쁜 모습이었다. 여러대의 지게차와 운반로봇들이 컨테이너 박스를 함내에 집어넣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함교에서 CCTV로 지켜보던 아헨이 클라리스에게 메세지를 발송했다.
[17시간뒤 랭글리 표준시 기준 D+1 11시 00분에 출항예정. 목적지는 사전 고지대로 테라항성계 제3행성이며 항해시간 7일 소요 예정.]
탑승함선 이지스 스완. 부메랑처럼 생긴 기묘한 배다. 게다가 화이트 레이븐보다 훨씬, 어마무지하게 거대하다. 화이트 레이븐이 길이 270m / 넓이 107m인데 클라리스의 이즈스 스완은 길이만 1100m에 달한다. 겉으로만 보면 화이트 레이븐이 이지스 스완을 수행하는 그림으로밖에 보이지 않는것이다.
전투시에는 무인기를 대량을 출격시켜 싸우는 타입이니 교전시엔 앞으로 내보낼일은 없을테니 본함(화이트 레이븐)옆에서 같이 항해하면 될것 같다. 게다가 경력상으론 대전쟁 당시 최전선에서 싸웠던 전직 군인이니 실질적으로 해적을 만나면 클라리스한테 모든것을 맡겨야 할것 같다. 아헨 본인도 군복무를 했지만 어디까지나 전선과는 완전 반대편인 최후방에서 군수업무만 했을뿐이니 경험치가 다르니까 말이다.
"...생각해보니 이 사람 쩔어주네..."
그녀의 과거는 모르지만 지난번에 만났을때의 행동이나 모습을 보면 귀족이거나 돈 많은집 출신인것 같기도 하다.
함선에 머무를 때, 클라리스는 자기 머리를 의체에서 떼어내 생명유지 장치 속에 담아둔다. 이른바 통 속의 뇌라는 것이다. 그녀의 의식은 함선의 컴퓨터와 연결되어 광활한 전자 공간 안에 흩어져 있었다. 그녀의 두뇌는 의체의 뇌이자, 이지스 스완의 뇌이기도 했다. 절약과 효율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오히려 이런 조치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미 클라리스의 머리는 탈착식이니 어디에서 거부감을 느낄 여지가 있겠는가?
"17시간 이후... 테라 항성계 제3행성이라."
백색 허공을 유영하며 각종 문구를 검토하던 그녀에게, ‘해적 활동 징후 없음’ 이라는 구절이 포착되었다. 미세한 전자의 요동이 일어난다. 부정적인 피드백, 즉 실망감의 표출이었다. 그녀의 의식 속에 섞인 기계적 프로세스가 그 의미를 단순히 ‘안전’이라 여길지라도, 인간적인 감정이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전자 공간에 배어들었다.
"해적 무리의 비루먹은 함선을 나포하는 일도, 그 속에서 소소한 전리품을 챙기는 것도 쏠쏠한 재미일 텐데요.. 하찮은 잡동사니라 해도 모아보면 꽤 쓸모가 있으니까요."
클라리스가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계속 군문에 남기를 택했으리라. 그녀가 아무리 우아하게 자신을 치장해도 그 본질은 이윤을 좇는 용병이었다. 으레 용병은 고용주의 의뢰를 수행하는 와중에도 이런저런 부수입을 추구하는 법이었다.
[클라리스 드 빌리에입니다. 출항 및 항해 경로, 목적지에 관한 정보를 모두 확인하였으며, 무탈한 항해를 기원합니다. 다만 만약을 위한 대비 태세는 철저히 유지할 터이니, 불의의 사태에도 염려 없으시길 바랍니다.]
클라리스는 무표정하게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그녀의 메시지는 종이비행기처럼 날아가 고용주 아헨에게 닿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미리 실망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심우주 항해 중에는 어떤 사건이 벌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으니까요.."
그녀는 마음을 추스르며 조용히 미소지었다. 치켜올라간 입꼬리가 어쩐지 음침스레 보였지만, 전자 공간 안에서 클라리스를 훔쳐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통신을 마친뒤 평소에 하던대로 화이트 레이븐의 동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고 잠시후 충분한 추진동력이 확보되자 아헨은 자동조종 모드를 활성화한다. 함이 도크 바닥에서 적당한 높이까지 떠오른뒤 이미 완전 개방된 게이트를 향해서 천천히 후진한다. 화이트 레이븐이 천천히 출항해서 우주공간으로 나가는 사이에 아헨은 클라리스에게 메세지를 발송했다.
[출항후 에리스행성 가상의 라그랑주점 L2에서 집결후 테라 방향으로 항로전환 실시. L2포인트 통과후 테라 방향 항로는 암흑물질 농도가 매우 짙어지므로 화이트레이븐이 선두에서 항로선도를 실시함.]
"뭐 이렇게 쓰면 잘 이해하겠지."
메세지 발송을 마친 아헨은 함교 창문으로 보이는 에리스 우주공항 도크를 바라본다. 우리 용병단 말고도 적당한 크기의 화물선과 그 호위로 보이는 전투기가 천천히 출항하는 모습이 보인다. 후진을 마친 화이트 레이븐이 좌회전으로 180도 회두하더니 서서히 우주공간을 향해 전진하게 시작한다.
아헨은 겉으론 표현은 안하고 있지만 마음속은 나름대로 희희낙락이었다. 이번에 집에가면 화이트레이븐 정비가 진행된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화물칸 공조장치 개조... 엔진과 동력부 업그레이드가 주요항목이라고 하니까 아주 좋은 일이다. 만약 잘 된다면 생명유지설비(전기/산소/물/위생 등)를 더 쾌적하게 돌릴수 있으리라. 그리고 또 그것도 하고 또... 그렇게 잠시 망상에 빠졌다가 정신을 차린 아헨이다. 자기도 모르게 실실 웃고 있었던것 같다.
"그렇게 오늘도 또 고향을 향한 지루한 항해가 시작되었다."
혼잣말로 되뇌이면서 모성에 도착한 이후 다시 출항하고 그렇게 반복될 이 일을 생각해본다. 자신도 몇십년간 계속 반복해서 해온 일이었다. 도대체 조상들은 이런걸 몇백년씩 어떻게 반복했던걸까.
거대한 모함과 작은 수송선의 조합. 그리고 그 둘을 호위하는 진형으로 나란히 비행중인 무인드론들. SDF용병단의 함선들은 아직은 평화롭고 지루할 뿐인 우주를 항해해 나가고 있었다.
기함인 화이트 레이븐의 유일한 승무원이자 선장이자 SDF용병단의 리더인 아헨은 선장석에 앉아서 팔짱을 끼고 잠에 들었다가 알람소리가 들려오자 잠에서 깬다. 사전에 설정해둔 에리스 행성 라그랑주 L2 도달시 소리가 울리도록 설정해둔 알람소리였다. 지난 몇십년간 항상 반복해온 일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레이더 한번 돌리고 주변 통신상태 확인하고 함의 상태를 한번 슥 훑어본다.
"웅... 이상없네. 구조통신도 특이사항도 없음."
이상이 없는것을 확인한뒤 그녀는 클라리스의 이지스 스완을 호출한다.
"클라리스. 여기는 아헨. L2지점에 도착했으니 항로변경 실시할거야. 항로변경 끝나면 암흑물질때문에 항로가 물리적으로 좁아져서 일렬로 줄줄이 가야되니까 드론은 전부 집어넣거나 후방에서 따라오게 해. 길이 많이 좁으니까 내가 가는 항로 스캔해서 그대로 따라와. 그러면 통신종료."
통신은 끝낸 아헨은 그제서야 화상통신용 카메라를 켜지 않고 보이스 모드로 말한것을 깨달아서 앗차 했지만 이미 늦었다. 잠깐의 후회를 마친 그녀는 미리 입력해둔 테라 행성 방향으로의 항로를 컴퓨터에 입력했고, 화이트 레이븐호는 테라 항성계 방향으로 천천히 회전하여 방향전환을 완료한다.
항로를 변경하긴 했는데 뒤에서 따라오는 클라리스는... 저 큰 새를(이지스 스완) 몰고다니니 조함은 세심하게 하겠지. 컴퓨터 모니터에 다른창을 열어서 잠시 용병모집 상황을 열어본다. 음. 아무도 신청하지 않았다. 창을 닫아버린다. 이제 테라 항성계로 진입할때까진 자동으로 운항될테니 당분간 할 일이 없다.
"...마실까"
선장의자에서 내려온 아헨이 함교 뒤쪽 벽에 설치된 작은 미니냉장고에서 음료수캔을 꺼낸다. 뚜껑을 따는 청량감 넘치는 뽕~ 하는 소리와 함께 뚜겅이 개방되었고, 아헨은 그자리에서 음료수를 원샷 해버린다.
"캬~ 죽이네. 역시 이맛이야."
다 마신 빈 캔을 냉장고 옆 쓰레기통에 던지고는 냉장고에서 새로운 캔을 한병 더 꺼낸다. 그리고는 다시 선장석으로 돌아가 컵홀더 자리에 캔을 집어넣고는 한쪽 모니터에 TV를 출력하여 뉴스를 시청하기 시작한다. 늘 몇십년간 해오던 루틴이다. 앞으로도 이 루틴은 변할일이 없을것이다. 아마도.
이지스 스완의 등과 배에 드론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드론을 완전히 화수하면 대응이 어렵고, 그렇다고 전개하면 드론이 암흑물질에 녹을테니 차선책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통신까지 끊긴다면 드론들은 꼼짝없이 우주 미아 신세이니 어쩔 수 없이 드론을 들여야 했다. 통신 차단에 대한 대응책도 마련되어 있지만, 암흑물질은 규격 외였으니까.
"여기는 이지스 스완. 제가 만약 해적이라면 터널에서 나오는 순간 기습할 겁니다. 해적이라도 암흑물질 지대에서 활동하기는 어려울 터이니, 좁은 통로를 빠져나오는 때를 노리겠죠."
약 40시간 경과. 슬슬 암흑물질 터널을 빠져나갈 시간이 되자 브릿지의 조명이 켜지면서 알람이 울린다.
"으어어... 이제서야 출구에 도착이냐..."
잠이 덜깬 목소리로 아헨이 안대를 벗으면서 의자에서 일어난다. 그와 동시에 브릿지의 조명이 밝아지면서 수많은 모니터들이 일제히 켜진다. 아헨이 선체의 상황을 간단히 모니터링 해보니 아무 이상 없다. 저 뒤쪽 멀리서 따라오는 클라리스의 이지스 스완도 레이더와 광학장비에 확실하게 탐지되고 있다. 아무일 없는듯 하다. 점검을 마친 아헨이 브릿지 뒤에 있는 샤워실쪽으로 걸어가다가 다시 돌아와서 클라리스에게 통신을 보낸다.
"어이 클라라. 곧 출구라서 테라 항성계로 진입할거야. 항성이 가까우니까 광학장비같은거 빛에 노출돼서 고장 안나게 조심해."
잠이 덜깨서 그런지 클라리스의 이름을 잘못 불렀지만 개의치 않고 통신을 마친뒤 샤워실로 향한다.
키보드 타자를 열심히 치던 아헨의 모니터 한쪽 측면에 레이더 스크린이 띄워지며 경고벨이 한번 울린다. 준중형급 미식별 함선이 본함으로 접근하는 항로로 운행중이라는 메세지와 함께. 아헨은 즉시 접근하는 미식별 함선 방향으로 전파를 집중하며 통신을 보낸다.
"...이쪽은 드레이크 가문 소속의 목재수송선 화이트 레이븐의 아헨 선장이다. 본함의 비콘 신호를 확인하고 귀함도 비콘신호 및 신원을 밝혀주기 바람."
가끔 기습적으로 불심검문을 걸어오는 테라 항성계 방위군이 있지만 누군지 뻔히 아는 상대에게 이러지는 않는데 이상하다. 클라리스의 이지스 스완때문에 그러는걸지도 모르겠군. 아헨이 레이더를 조절해서 접근하는 상대를 분석해보려 하지만 구닥다리 수송선인 화이트레이븐의 레이더 따위로는 '어느 방향쯤에 뭔가가 있는것 같다' 수준밖에 되지 않아 확인은 불가능하다. 선장인 아헨이 다시한번 무전을 보낸다.
"접근중인 선박에게 알린다. 이쪽은 화이트 레이븐의 아헨 선장이다. 귀 함선의 예상 항로가 본함과 교차되어 충돌의 우려가 있음. 본함에 대한 기습 검문은 필요없으니 물러..."
정체불명의 상대는 작은 전투기 집단과 이를 수용하는 모함 한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클라리스의 드론과 대치하는 상대의 전투기 수는 .dice 4 12. = 8 로 확인된다. 그리고 반대쪽(오른쪽)에서 .dice 2 4. = 2 수량의 전투기가 선두에 있는 아헨의 화이트레이븐을 향하여 접근해온다.
너무 심하게 몰아붙였다. 도망치다니! 나와 맞서 싸워라. 그래야 네가 한때 타던 고철덩어리를 팔아넘길 명분이라도 생길 게 아니냐! 클라리스는 속으로 분을 삭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무뢰배나 다름없는 해적이 아니었다. 클라리스는 랭글리 정부가 정식으로 발행한 면허를 지닌 사략 용병이며, 명부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린 자였다. 게다가 지금은 화이트 레이븐의 호위를 맡은 처지. 비록 실망스러웠지만, 원칙과 명분을 저버릴 순 없었다.
"이지스 스완이 테라 방위군에 보고합니다. 미식별 모함이 ICRS 기준 RA 22h 42m 24s, Dec +12° 30' 55″에서 최초로 포착된 후, RA 23h 15m 08s, Dec +13° 05' 12″로 이동하며 신호가 소멸하였습니다. 이상."
클라리스의 목소리는 기품과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감정하고 기계적인 정중함을 통해 말했다. 그러나 가상 공간 속에서 흩어진 그녀의 의식 어딘가에서는 억누를 수 없는 실망감이 미세한 전자적 동요로 드러났다.
이지스 스완의 드론, 통칭 ‘미운 오리 새끼’들은 클라리스의 지시에 따라 대형을 갖춘다. 마치 백조의 날개에서 흩어진 깃털같았다. 그러나 일부러 대형의 한 곳에는 빈틈을 남겨두었다. 방심으로 인한 공백처럼 보이는 위치였다.
"이지스 스완에서 화이트 레이븐에 전합니다."
클라리스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진형에 의도적으로 공백을 두었습니다. 어리석은 적들이 그곳을 허점이라 착각하고 덤벼들도록.... 하지만 염려 마십시오. 덫을 놓아두었으니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한 치의 동요 없이 담담했으나, 교묘한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클라리스는 미세한 조정들을 거듭하며 함정을 세밀하게 점검했다.
긴장이 풀리자 아헨은 함교의 통풍시트를 풀가동하고 에어컨 온도를 낮추며 양손으로 얼굴에 손부채질을 한다. 너무도 오랜만에 겪어본 전투의 긴장감은 식은땀 나기에 충분한 상황이었으니. 그리고 들려오는 클라리스의 보고를 듣고 레이더를 한번 돌려본다. 그녀의 말대로 대놓고 어색하게 배치한 호위망의 틈이 보인다.
"오케이 확인했어. 아마도 드론의 머릿수에 밀렸으니 또 습격하진 않겠지만 말이지." "화이트레이븐 아헨. 사령부다. 응답바람."
클라리스의 말에 대꾸하는순간 통신이 또 들어온다. 드레이크 가문의 본부에서 온 통신이었기에 클라리스도 들을 수 있도록 공유 해놓고 통신이 응답한다.
"여기는 아헨. 오랜만이에요. 아까 내가 보낸 통신때문에 연락한거?"
"그래. 성계 방위군이 너한테 갈 수 없으니 조심하라고 연락한거다. 자넬 호위하는 용병이 있다고 하니 좀 안심이군."
"계내들은 또 반대쪽에 있나보네요. 그러면 아까 호위 필요한건 왜 물거본건지 원."
"테라5 소행성 집중구역 궤도에 초계함이 주둔중이니 위험하면 그곳으로 향하도록."
"네 알았어요. 통신 끝."
많이 긴장이 풀린듯한,어쩌면 지인과 대화하는 듯한 편안한 대화가 끝나고 다시 클라리스를 호출한다.
"뭐... 얘기 들어보니 테라 항성계 방위군은 지금 너무 멀리 있어서 못도와준다네... 제일 가까운 방위군 함선도 48시간 거리에 있다고 하니 내가 믿을건 클라리스 너밖에 없겠어..."
"어쨌든 항로는 변동없이 테라3 최단거리 루트로 계속 진행할거야. 좀 힘들겠지만 테라5 행성 궤도를 지날때까지는 계속 경계해줘."
해적으로 의심되는 세력이 나타났다고 긴급통신을 주변에 전파할까 생각했지만 성계 방위군과 사령부가 알아서 할거라 믿고 그마둔다. 그러다가 함교 스크린에 에너지 부족 경고가 울리자 그제서야 황급히 전투시스템의 전원을 차단했다. 그래도 이 고물 시스템이 동작을 하는구나 하는 감탄사와 함께.
"어이구 씨... 용병 고용하니까 바로 저런 위협이나 당하고... 별일도 다 있네 진짜..."
혼자 불평하면서 기지개를 편다. 그 잠깐 사이에 몸이 많이 긴장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잠깐의 소동(?)이 지나가고 화이트 레이븐과 이지스 스완은 테라3을 향해 항해를 이어간다.
아헨의 화이트레이븐은 그렇게 클라리스와 그녀의 배를 우주에 버려둔채(...)혼자서 테라3 우주스테이션 도크에 입항한다. 할당된 도크는 4번이다.
"기관정지. 고정완료. 항구 전력... 연결... 완료."
도크에 정박후 전기를 끌어쓰기 시작하니 에어컨이 눈에띄게 강하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얼마나 동력부가 낡았는지를 속으로 욕하면서 휴대전화를 꺼내서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사령부. 나 입항했는데 왜 아무도 없어요? 대기하는거 아니었던가? ...네. 그러면 나는 여기서 대기? ...응 알았어."
짧은 통과를 끝내고 전화기를 충전기에 올렸다가 다시 꺼내들어 클라리스에게 문자메세지를 발송한다. 그나저나 이걸로 메세지 보내면 클라리스 개인 단말기로 메세지가 갈까? 아니면 이지스스완 자체 통신으로 연결될려나?
[테라3 체류기간 최소 14일 소요예정. 화이트레이븐 대수선 공사 실시함. 지금부터 추후 연락시까지 자유행동 실시바람.]
삑. 메세지 발송 완료.
"자 그럼... 우선 잠이나 자야지..."
함교를 나와 곧장 선장실로 향하는 아헨. 항해기간동안 함교에 마련된 간이침대에서 잠을 잤으니 자기 방에 놓여진 부드러운 침대가 그리울 따름이다. 잠든 사이에 가문에서 파견된 기술진들이나 인부들도 들어올 수 있게 출입문도 미리 잠금해제 해놓고는... 그대로 잠이 들어버리는 아헨이었다.
테라3 우주상공에 떠 있는 스테이션. 일명 테라3 우주공항은 테라항성계를 관할하는 수도성이자 엘프들의 고향행성이기도 하다. 테라1,2,4 행성도 테라포밍이 완료되어 엘프들이 상주하고는 있으나, 아직은 자연이 자리잡지 못한 불모지 행성이다. 그러다보니 우주의 희귀한 전략자원인 나무를 키우는건 테라3 행성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귀중한 자원인 나무를 심고 키우고 벌목하는 행위는 매우 철저한 계산하에 이루어져 목재의 수량이 줄어드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이 나무를 화물선으로 에리스 행성까지 운반하는것이 아헨의 일족인 드레이크 가문이 맡은 일이다. 나무를 심고 키우는것은 다른 가문의 일이다. 드레이크 가문은 그저 그들이 할당해주는 나무를 베어서 운송할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 나무를 운반하는 수송선들중 하나인 화이트레이븐호의 선장인 아헨은 테라3 우주스테이션에 있는 테라 항성계 방위군 기지로 호출되어 조사를 받고 있었다. 지난번 테라9 행성궤도 외곽에서 만난 정체불명의 적대집단, 아헨 주장으로는 해적으로 의심되는 그들에 대한 조사차였다.
SDF용병단. 그것은 리더이자 설립자인 아헨을 제외하면 단 1명밖에 없는 기이한 구조를 가진 용병단이다. 하지만 그 유일한 1명의 대원이 놀라운 전투력을 발휘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는 법이다.
하지만 머릿수만 가지고 호위용병의 수가 적다는 이유로 이것저것 잔소리를 해대는 드레이크 가문의 지휘부는 용병단 대장인 아헨을 성질나게 만드는데 충분했다. 아직 본격적인 전투도 아니고 적대세력과 대치하여 물러서게 한것이 유일한 성과였지만 그것도 엄연히 성과였다. 그렇기에 도크에 계류되어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받고 있는 화이트레이븐의 선교에서 아헨은 익룡과도 같은 괴성으로 지휘부와 감정섞인 말싸움을 하는데 여념이 없다.
대충 새끼동물을 언급하고 상대방 부모님 안부인사라는 훈훈한 발언들이 오고가면서 충돌하는 두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SDF용병단의 인원수를 늘릴것 VS 클라리스 1명만 있어도 충분함. 계속 주장할거면 자금을 지원해달라]
그 와중에도 클라리스의 전투력은 인정받고 있었다. 전쟁당시 전방에서 활약했던 군 경력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듯 하다.
"[대충 심한 욕] 그럴거면 돈 지원이라도 해주고 하든가! 늬들이 용병 고용하라고 했잖아!!! [대충 욕] 뭐 이딴것들이 다 있냐고 [욕]"
얼굴이 벌개질 정도로 화가난 아헨은 그냥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어버렸다. 지들이 호위용병 고용하래서 했더니 이젠 호위용병을 더 늘리되, 본인의(아헨) 개인재산으로 진행하라는 소리는 누가 봐도 이상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 가문 지휘부는 그걸 요구하고 있다. 결론은 '헛소리 하지마라' 라는 답장을 보내줬지만. 가운데 손가락을 올린 사진도 같이 보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클라리스는... 그래 휴가보냈지... 그래... 좋겠다..."
아까의 싸움과는 별개로 화이트레이븐의 공사는 순조롭지는 않지만 어쨌든 잘 되고 있었다. 화이트레이븐을 전부 분해해서 다시 조립하면서 최신기술의 장비를 집어넣는, 차라리 새 배를 사는게 더 싸게 먹히지 않을까 하는 대대적인 공사였기 때문이다.
조금전의 말싸움과 같이 생각하니 동족들이, 아니 우리 가문 지휘부가 단체로 맛이 간것인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이래저래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아헨은 다시 함교를 떠나 작업현장으로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