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소녀의 얼굴이 움찔움찔거리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립니다. 사연을 들어보면... 신전에서 모시는 신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좋으신 천사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사악한 악마들도 이 소녀의 이야기를 들으면 것 참 하며 혀를 차지 않을지 걱정이 되는군요. 소녀는 겨우겨우 입을 열어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백과사전의 정령은 이 상황에서 눈치가 있어서 그러는 것인지, 없어서 그러는 것인지, 헬렌의 양심을 칼로 찌르는 듯한 배경 설명을 덧붙입니다.
'펠리네 수인족은 절도, 가품 매매 등 각종 경범죄에 연루되었다는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극단적인 사회적 차별을 겪습니다. 또한 펠리네 수인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사법 체계에도 존재하여, 타인이라면 간단한 벌금이나 훈방으로 끝날 범죄도 펠리네 수인족이라면 신체 불구형이나 화형과 같은 극단적인 처벌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뭐 그렇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도둑질은 도둑질이고, 헬렌도 뭐 여기 놀러 나온 건 아니니까, 헬렌이 이 소녀를 봐줘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질 필요는 없겠지요. 봐주면 고마운 거고, 아니어도 어쩔 수 없는 거니까요.
>>119 엘리 딴에는 그냥 조금 빠르게 섰을 뿐이지만, 사람들 입장에서는 고개를 돌렸더니 이쪽에 나타났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더니 저쪽에도 나타나고, 고개를 또 돌렸더니 그쪽에도 있는 상황입니다. 뱀파이어가 이단심문관과 함께해서 자기를 대적하는 것도 무시무시한 상황인데, 거기에 더해 저 정도로 날쌘 뱀파이어가 나타났다고 생각하니 귀족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십니다. 에레야는 한 손에 총을 든 채로, '긴급 이단심문'을 계속합니다. 평소의 결연하지만 정중했던 목소리는 어디로 가고, 분노에 찬 듯한 웅변이 신전을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마치 '네 죄를 네가 알렷다'라고 외치는 듯 에레야는 역으로 귀족과 주교를 몰아붙입니다.
"피에흐 뮈테 주교! 당신은 대주교좌에서 사건을 종결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고 이야기하면서 나한테 이 문서를 보여주었죠. 예. 종결하라고 했죠. '수사의 상당성이 의심되는 추가적인 사건이 없을 때' 종결하라고 했는데 당신은 이 부분을 뺐습니다!"
"그, 그건...!"
"이유야 내가 알지! 당신이 저 귀족들한테서 챙긴 돈이 한두푼이 아니니까!"
에레야는 속속들이 증거를 제출합니다. '훔친' 증거부터 정상적으로 수집한 증거까지 모든 것이 내밀어지고, 에레야는 자신이 확보한 것과, 엘리가 경비대 본부에서 처리한 것을 보여주는군요. 물론 신전에 들어오면 반-뱀파이어 혐오체들은 전부 불타야 하지만, 엘리가 수호부의 영향으로 멀쩡한 것처럼 그들도 무언가 특수한 처리가 된 것 같습니다. 레트 자작은 창에 꽂힌 상태 그대로 들어와서 끄르륵거리며 쓰러져 있고, 사제복 입은 여자는 가슴에 태양교 심볼 수십개가 처박힌 채 기절한 상태입니다. 경비병들이 그새 이 레트 자작을 가져온 모양이군요. 세스타우 성의 거대한 음모를 지탱하던 축들 중 두 개가 박살난 꼴을 보자, 귀족들은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십니다.
에레야는 귀족들과 주교를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보더니, 그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불경한 사술을 통해 태양의 교세를 위축하고자 시도한 혐의, 이단의 유혹에 빠진 혐의, 수백명의 인명을 살상하고 수만명의 인명을 위험에 빠트린 혐의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나 이단심문관 에레야는, 이 자리에 모인 너희 벌레들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그리고 너희의 형량은 오직..."
엘리가 기껏 가져온 서류를 바닥에 팍 던진 에레야는 허리춤에서 철퇴를 꺼내고, 그들에게 외칩니다.
"...죽음이라!"
하지만 귀족들과 주교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있고, 거한들도 움직이는 대신에 엘리에게 물어볼 뿐입니다. 아마 이렇게 멋지게 선언한 다음에 좀 복잡한 실무 절차가 있나 보군요. 얼굴을 붕대로 싸맨 거한은 엘리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말합니다.
@@>>121 헬렌은 고양이 소녀의 이야기를 듣고 백과사전 정령의 설명도 듣는다. ‘알려줘서 고마워.’ 백과사전 정령의 이번 설명은 이제까지 중에 가장 도움이 되는 설명이었다. 물론 그것이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사정도 모르고 다그치는 사람은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도둑질은 안 돼. 어머니는 집에 계시지?”
우는 얼굴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을 다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 의심하여 들지도 않았고. 일단 현 상황에서는 정도의 말을 할 뿐이고 보호자 인계라는 방법이 적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 혼이 났으면 또 다시 도둑질은 하진 않겠지.
‘나무의 정령아. 이 소녀를 바닥에 내려두고 풀어준 뒤 원래대로 돌아가줘.’
소녀가 안전히 풀려난다면 그 손을 잡고 집 문을 두드리려고 한다. 아이의 어머니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인계하려는 생각이다.
>>120 두 사람은 휴식을 가집니다. 여기서 오래 산 아앨라나도 검은 숲이라는 이명에 걸맞게 이 숲에서 햇빛을 쬘 기회는 달에 몇 번 꼽을까말까 할 정도로 별로 없었던 만큼, 아앨라나는 반갑게 햇빛을 맞이하고 잠시 눈을 감습니다. 그간 베스니의 한쪽 다리를 말다리로 바꾸거나 온갖 불행을 만들 것처럼 겁을 주던 가말라시엘도 이번에는 눈치를 챙기기로 결심했는지, 안심이 될 법한 이야기를 합니다.
"잠시 보호 결계를 만들겠습니다. 불곰이나 괴물이 온다고 막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너무 늦기 전에 깨울 수는 있겠죠."
...그렇게 말하니 안심하고 두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앨라나는 언제까지 휴식하나요?
...라고 말하며 거한이 양피지를 꺼내들어 엘리가 읊어주는 일족 영지의 주소를 적습니다. 뭐, 엘리도 자기 살아있을 때 '인편'으로 산제물을, 그것도 이단심문소가 주는 산제물을 받을 줄은 몰랐을 겁니다. 다른 거한들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단과 괴이를 쳐죽이기 위해 톱니바퀴와 캠이 연결된 기계처럼 배심원석으로 가서, 알아서 차라는 듯 수갑을 던집니다. 그리고 동작이 느리면 어깨를 철퇴로 내려쳐 부숴버리는 방식으로 다른 이들의 동작을 재촉하는군요.
@@ >>98 "...요한은 누누코를 얕보지 마." 그의 반응에 엄중히 경고하듯이 말했다...지만, 딱히 반박할 것은 없고. 괜스레 심드렁한 기분이 들어 정면을 향하고 있던 몸을 마차 바깥쪽으로 돌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신성한 들판에도 교환 정도는 있었어. '거래' 는 그것의 연장이라 들었고." "붉은 잎 나무의 축복이지... 후흥. 무엇이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누누코는 그렇게 말했고, 마차와 시간은 그저 유유히 흘러가 어느덧 비든베일을 지나고 있었다. 이르다고 해야할지, 벌써 동이 트고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그저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누누코의 귀가 요한의 물음에 쫑긋 올라갔다.
"석궁이라면... 이상한 장치 활이구나. 물론 알고있어." "누누코에게는 그 둘이 좀 더 편할뿐이야." 그 둘이라면 투척을 말하는 것일테다. 당장 손에 있는 것을 던져서 맞추면 되는데 뭣하러 그런 복잡한 장치가 필요하냐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않아 있었던 저는 자리에서 평온히 몸을 맡기듯이 기대었어요. 그대로 있어서 신체가 한 껏 풀어지자 천천히 졸음이라는 이름의 방문자가 저에게 오고있어요...
"고마워요, 그것은 큰 도움이 될거에요"
저는 이때 먼저 나서서 가말라시엘 님까지 친히 도움이 주는 이 순간에 지팡이를 살며시 품으로 끌어안듯이 잡고는 눈을 감은채로 흐릿하게 미소를 한번 지어보이고는 중얼거리듯 말했어요. 이것은 드문 기회니까 제대로 활용해야겠어요. 충분한 만큼 쉴 수 있겠지요? 하지만, 시간을 너무 허비해서는 안될 거에요. 기운을 차리고 난 다음에는 다시 행동하는 것이 아무래도 좋겠지요
>>123 나무의 정령은 헬렌의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소녀를 풀어줍니다. 소녀는 헬렌이 도둑인 자신을 그대로 풀어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어안이 벙벙한 채로 헬렌을 올려다보다가 허무하게 손이 채이고, 헬렌은 문을 두드립니다. 하지만 헬렌이 소녀에게 '도둑에게 수갑보다 더 악질적인 구속을 기껏 해놓고, 그걸 그냥 풀어버린다고?'라는 의외를 주었듯, 이번에는 그 소녀가 사는 닭대가리 굴뚝집이 헬렌에게 또다른 의외를 줍니다. 노크를 아무리 해도 문이 열리지 않아 슬쩍 문을 열어보니, 작은 탁자와 의자들이 놓여있고, 비쩍 마른 고양이 수인 한 명이 그녀를 맞이합니다. 긴 머리칼과 갸름한 턱선이 아니라면, 여자라는 것도 겨우 알아봤을 것 같습니다. 그러더니 헬렌을 보고는 바로 자기 할 말만 합니다.
"도둑질은 미안하게 됐습니다. 수색대에 쓸 인재를 찾고 있었는데, 이렇게 쓸모 없는 년일 줄은 꿈에도 몰랐군요."
"오늘 일진이 안 좋았다니깐요! 갑자기 바람이 불지, 갑자기 하늘에서 양동이가 떨어지지..."
"운 좀 안 좋아서 탈락할 놈이라면 잘 탈락한 거다. 아무튼 넌 돈 돌려주고, 꺼져."
쾅!!!!!
닭대가리 모양 굴뚝집이 문전박대하듯 문을 닫아버리고, 정적만이 남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를까봐, 아는척 좋아하는 백과사전의 정령이 이럴 때 필요한 아는척을 해줍니다.
'베르누 수색대: 베르누 수색대는 왕국의 다인종, 다계급, 다계층 정보 기관입니다. 밀정, 조사, 잠입, 정찰 등의 임무를 수행하며, 일정 조건을 만족하면 공무 수행을 위해 범죄 행위를 저지를 수 있는 제한적 범죄 면허를 발급받기도 합니다.'
>>131 "물물교환을 아는 것과, 화폐 경제를 아는 것은 조금 다른 개념이라서 말입니다. 먹을 수 있는 고기 한 덩이와 누군가를 찌를 수 있는 칼 한 자루를 바꾸는, 즉 직관적인 가치를 즉각 활용할 수 있는 물건을 거래의 수단으로 삼는 게 아니라, 오지거 개래의 수단을 위해서만 이용되는, '가치가 있다'는 믿음으로만 지탱되는 화폐를 이용한다는 발상은 생소할 수도 있으니까 한 말이었습니다. 제가 자립을 도와드렸던 한 부족민 친구는 화폐 경제에 대한 설명을 장장 일주일 동안 듣고 결론내리기를, 현대 상업을 신봉하는 이들은 전부 정신병자라는 겁니다! 제가 봐도 좀 그런 면이 있지요."
...라고 말합니다. 이 긴긴 말을 대충 요약하자면, 딱 앞에 있는 말만 들으면 됩니다: 물물교환을 아는 것과, 화폐 경제를 아는 것은 조금 다른 개념이라서 말입니다. 아무튼 요한이 보기에도 이게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은지, 요한은 턱짓으로 짐칸을 가리키고, 누누코가 짐칸을 열어보면 도끼와 칼 따위가 잔뜩 들어있습니다. 대체 이렇게나 많은 걸 무슨 목적으로 준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침 준비했으니 좋...기는 개뿔. 요한은 상황을 설명합니다.
"그럼 잘 됐습니다. 지금 우리의 정당하고 독점적인 노동의 산물을 빼앗아가려는 비신사적인 친구들이 달라붙어서 말입니다. 그 도끼랑 칼로 비신사적인 놈들에게 비신사적인 방식으로 대응해 주십시오."
잠에 듭니다. 수면 속에서, 아앨라나의 몸은 중력이라는 그녀를 이 땅에 속박하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 잠시 동안 휴식을 취합니다. 앨리스님의 가르침도 떠오르고, 뷔르트겐 호수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의 전경도, 그리고 한때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연락이 끊겨 그냥 잘 지내겠거니ㅡ하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도 들려옵니다. 하지만 피로의 마법도 피로가 조금씩 풀릴수록 힘이 약해져서는, 점점 그녀를 속박하는 중력과의 싸움에서 져가기 시작해, 문득 아앨라나는 자신이 잠에서 깼다는 사실을, 햇빛이 참 따갑다는 사실을 느끼고 눈을 뜹니다. 베스니는 아직도 세상 모르고 쿨쿨 자고 있습니다만, 아앨라나는 벗어놓은 양말이 바짝 마른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해가 조금씩 서쪽으로 갈까 말까 하는 것이, 하루에 두 번이나 숙영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슬슬 일어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132 어느새 으악, 아이고 하는 곡소리와 퍽, 딱, 깡! 하는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난무하는 폭력의 장이 된 신전을 떠나서, 에레야는 자신이 준 특수한 수호부의 영향 없이도 숨쉬고 있을 법한 곳으로 엘리를 데려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에레야는 엘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엘리가 생각하던 것처럼 '그동안 수고했다'며 철퇴를 꺼내 머리통을 터뜨리는 대신, 의외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원래는 네 존재는 최대한 숨기고 사건을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배심원들 말마따나 그 모든 끔찍한 상황을 겪고도 살아남은 '협력자'의 존재를 대충 얼버무릴 수는 없어서 말이야. 우연히 만난 별종 뱀파이어의 도움을 받았다고 처리할 거고, 그 별종 뱀파이어는 바로 너야.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길이 갈리지. 이단심문의 꽃은 역시 공개 화형이고, 그 전에 무슨 일을 저질러서 장작더미 위에 끌려가게 되었는지 대중들에게 설명하는데... 그 과정에서 네 존재도 대충은 설명할 거거든. 여기서 어떻게 이야기할지는 네 의사를 들어보려고 해."
에레야는 꽤나 진지한 얼굴로 두 가지 옵션을 제시합니다.
"첫째, 네 이름을 적당히 숨기고, 동방귀족 옐리사베타 같은 다른 가짜 신분이나, 신원 불상의 용병 같은 엉뚱한 신분을 댄다. 이 경우에 넌 세스타우 성을 떠나게 되면 널 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고, 이건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내가 보장할 거야. 좋은 의미로는 너한테 복수하려고 칼을 들고 찾아오는 미친 년놈들이 없을 거고, 나쁜 의미로는 어딜 가도 넌 그냥 머리 희고 눈 빨갛고 대낮마다 가면 뒤집어쓰고 다니는 이상한 여편네 취급이나 받는거고. 두번째, 네 정체를 밝히는 거야. 아직도 네가 우리를 도운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뱀파이어가 사람을 도울 수도 있다는 걸 만방에 알리는거지. 이것의 장단점은, 정확히 내가 말했던 첫째 길의 정반대다."
소녀는 헬렌에게 돈을 휙 던져줍니다. 후드에 걸린 고양이귀가 바닥에 깔릴 듯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쭉 올라가더니, 주먹을 꽉 쥐는군요. 그리고는 홀연히 옆으로 사라집니다. 그래도 그 베르누인지 배터져인지 뭔지, 수색대에 들어가려고 시험을 보던 게 사실이긴 한지, 헬렌이 잠시 안 본 사이에 사람들 사이에서 마치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헬렌은 다시 돈자루를 얻었습니다. 넉넉한 돈자루도 얻었겠다, 다시 의뢰나 탐사를 알아보기 위해 정보를 사거나, 용병을 알아볼 수도 있겠습니다. 아마 이 정도의 마을이라면 마차 여관이 그나마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겠군요!
>>143 "넌 정말 뭘 봐도 특이한 뱀파이어다. 내 짧은 삶에서는 두번째고, 이단심문관 되고 나서는 처음이야."
에레야는 그렇고 말하고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처음에 불타는 여관, 그 난리통에서 만났던 그때와는 다르게, 에레야는 마치 엘리의 외견적 나잇대, 즉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사이의 소녀를 보는 것처럼 대견스럽다는 얼굴로 보는군요. 사실 나이차이를 숫자 그대로 적용한다면 입장은 반대지만, 엘리는 뱀파이어의 기준에서 살 날 한참 남은 '아기 때 먹은 젖피가 아직도 안 마른 젊은이'고 에레야는 인생의 절반을 산 좋게 말하면 노익장, 나쁘게 말하면 아지매니까 말입니다.
그리고는 엘리에게, 다른 것을 또 질문하는군요.
"이단심문소 협력자 보상 규정에 따르면, 재량에 따라 좀 달라지긴 하지만... 넌 엄청 많은 일을 해줬어. 네가 만약 일반적인 인간이었다면 세스타우 귀족들도 싹 다 태워버리겠다, 남는 귀족 이름이랑 귀족영지 중에 마음에 드는 거 몇 개 골라서 이 동네에서 지역 유지라도 하라고 시켜줬을 거야. 만약 네 성씨에서 '블라드'만 없었다면... 왜, 블라드 일족이 좀 옛날에 안 좋은 의미로 많이 날렸잖냐... 아무튼 그 성씨만 없었다면 아마 세스타우에 가짜 뱀파이어가 아니라 진짜 뱀파이어인 네가 경영하는 영지가 생겨났을 수도 있었겠지. 각설하고, 그러니까 기본적인 보상은 줄 거야. 예를 들어서 이단심문관 에레야의 이름으로 이 뱀파이어는 '일단은 무해하다'고 보증하는 문서를 써 준다던지. 그리고 다른 보상 하나도, 지역 귀족사회의 대규모 이단 타락 사건을 해결하고 온 이단심문관의 정치력이 닿는 선에서 가능한 소원은 뭐든 하나 들어주는 거로 하지."
뭘 원하나? 라고 묻는군요. 뭐, 원할 수 있는 건 많습니다. 돈도 되고, 책도 되고, 아니면 동료도 되고...
저는 그렇게 잠들었고 꿈 속 세상에 도달했어요. 그곳에서 저는 과거에서 비롯한 여러가지를 보았어요.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요? 저는 더는 그 곳에 있지 않았어요
"꿈... 빛이 찌르듯이..."
그 모습이 이리저리 달라지는 꿈 속으로부터 다시금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에 돌아왔다는 것을 알았어요. 저의 그 뜬 그 눈에는 익숙한 숲의 모습과 동시에 이곳에서는 드물게도 강하게 저에게 내려쬐는 빛에 대한 느낌이 남았고 저의 입에서는 말이 흘러가듯이 나왔어요. 주변을 둘러보면 그녀는 지금도 잠들어 있는 것을 보았어요. 제가 꿈 속으로 떠나고 돌아온 것이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거나, 그녀는 그동안 육체적으로 더 많은 힘을 썼으니 좀 더 피로가 쌓여있던 것이겠지요?
"베스니씨 일어나세요~ 꿈 속 세상으로부터 돌아올 때에요~"
하늘을 올려다 보았을때 해의 위치가 미루어 보면 지나간 시간은 짦은 것도 긴 것도 아닌 것 같았어요. 그러니 이제 길을 떠나야할 시간이에요. 저는 챙겨야 될 것들을 가지고는 그녀의 가까이에서 그 신체를 조심스럽게 가볍게 쿡쿡 찌르듯이 하면서 말했어요. 그녀가 실제로 꿈을 꾸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베스니는 아무래도 좋게 말해서 일어나는 스타일은 아닌 듯합니다. 뭐, 많지 않습니까. 조금만 더 자겠다. 10분만 더 자겠다 하면서, 그 10분을 되는 한 최대한 연장시키려는 인간 군상이요. 하지만 불행히도, 지금 옆에 있는 아앨라나는 그녀의 어머니도, 보호자도, 아니면 유사한 법적 의무를 지니 늑 누군가도 아닙니다ㅡ 그냥 뷔르트겐 호수까지 우연히 같이 가게 된 동행자일 뿐이죠. 그래서인지, 아앨라나의 수고를 덜기 위해, 아앨라나가 양말을 신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는 동안 가말라시엘이 아앨라나의 수고를 덜어주려는 듯, 난데없는 번개를 만들어냅니다.
콰콰콰쾅!!!!
거대한 천둥 소리에, 베스니가 아마 그 나이를 먹고도 천둥 소리에 쪼는 찔찔이는 아니겠지만, 마른 하늘에, 그것도 자고 있는데 얕은잠에 천둥 소리가 들리면 깰만합니다.
저의 행동에도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어요. 아마도 계속 이럴 것 같아요. 그녀는 잠이 많은 사람, 깊은 사람인가요. 하지만 이대로 계속 두고는 시간이 마냥 가도록 할 수는 없어요. 그녀를 깨우기 위해서는 과감해지거나 다른 방법을 사용할 수 있겠네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제가 이동할 준비를 마무리하는 동안에, 저희가 잠들기 전에 먼저 나서서 도와주신 것처럼 이번에도... 저의 의도보다 과감했던 가말라시엘 님의 조치로 인해 그녀는 확실히 깨어날 수 있었어요. 그녀만큼은 아니겠지만 저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을 거에요. 갑작히 만들어진 천둥의 우렁찬 소리는 그렇겠지요
"그렇지 않아요, 이것은 깨어나기를 바라는 것처럼 울리는 천둥 소리이에요"
저는 소리로 인해 순간적으로 조금 움츠러들었다가 곧바로 돌아왔고 화들짝 놀라서 일어나서는 그렇게 묻는 그녀에게 그리 대답해주었어요. 저는 대략 준비가 된 것 같으니까, 이제 그녀가 할 차례에요. 해야 될 것을 하고나면 얼마 남지 않는 목적지를 향해서 가도록해요
>>148 베스니도 어느새 짐을 다 챙겨서 출발할 채비를 마쳤고, 두 사람은 이제는 정말로 뷔르트겐 호수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희망을 원기 삼아 앞으로 나아갑니다. 장거리 행군 상황에서 애매하게 쉬면 근육이 굳어버려서 오히려 더 힘들어진다는데, 지금 같은 경우는 푹 쉬었으니 상황이 좀 다릅니다. 밤에 자야 하는데 못 잔 잠을 지금 잔 셈이라 치면, 오히려 컨디션이 아주 좋아졌다 볼 수 있죠. 두 사람은 한층 나아진 기분, 뽀송뽀송해진 양말, 바싹 마른 옷가지와 함께 기분 좋게 발을 내딛습니다. 백 걸음도 못 가 만난 습지에 다시 젖어버렸지만 뭐 어떻습니까. 잠깐이라도 '발'과 '양말'이란 게 마를 수 있는 존재라는 걸 확인했는데.
"후우, 후우, 뷔르트겐 호수..."
베스니는 뷔르트겐 호수를 묘사하기 위해 노트의 가장 많은 페이지를 남겨놨다고 자신만만해하며 웃는군요. 이거, 호수가 대단하지 않으면 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습니다. 정말로...
>>146 축복받은 물건이라. 엄청나게 많을 겁니다. 태양교의 각인부터 그 외 기타등등 모든 것까지. 주는 건 전혀 문제가 아닙니다. 아마 이단심문관이 아니더라도, 신실한 사람이더라도, 그냥 달라면 줄 겁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상대가 그냥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라... 엘리자베스 블라드 바토리 체페슈, 뱀파이어라는 겁니다. 네, 태양교의 신성한 힘으로 축복받은 것에 노출되면 고통스러워하고, 너무 오래 노출되면 죽는 존재 말입니다. 그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엘리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에레야는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의 철퇴를 꺼내더니 짧게 성가를 외워 태양의 힘을 담고는, 엘리의 손가락을 때리는 것도 아니고 슬쩍 대봅니다.
치이이이익...
그리고, 엘리는 진심으로 자기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싶은, 아니, 자기 손목을 잘라버리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의 격통에 시달리고, 마치 태양이 어떤 전염병이나 기생충처럼 그녀의 팔을 따라 심장까지 뻗어가려는 듯한 환상에 빠졌다가, 에레야가 철퇴를 빼자마자 그 느낌이 조금씩 사라져 잦아듭니다. 에레야가 이거로 말하려는 것은 명백합니다.
"줄 수야 있는데, 진짜로?"
//왜 안올라오지 하고 있었는데 여태껏 이걸 안보고 있었네 진짜 미안하이 내가 씹을라고 씹은게 아녀 늙어서그래!!!
에레야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손수건을 먼저 꺼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바닥 위에 그 손수건을 펼치더니, 그 손수건 위에 태양교의 상징인 태양 인장을 올려둡니다. 에레야 같이 '신실한' 이단심문관의 몸에서 한참 오랫동안 함께 있어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축성을 잘 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지켜보는 것만으로 눈알이 구워질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고통스럽습니다. 아무튼 에레야는 손수건에 태양 인장을 돌돌 싸더니 엘리 쪽으로 휙 던지고, 엘리는 잡는 것만으로 마치 인간이 맨손으로 녹기 직전의 쇠를 잡는 것처럼 달달대다가, 장갑을 끼고 나서야 겨우 참을 만하게 잡게 됩니다.
"...그래. 혹시라도 그거 말고 다른 보상을 요구할 생각이 있다면 나를 찾아와라. 아니면 편지를 하던지. 할 수 있다면 말이야. 그리고..."
에레야는 엘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인간 문화에 꽤나 관심이 많은 것 같던데, 뱀파이어 같이 보통은 화형당하는 입장에서 화형을 집행하는 건 수천년을 살았대도 쉽게는 못하는 경험이야. 이번에 저놈들이 저지른 짓도 짓이겠다, 그리고 저놈들이 뱀파이어가 되고 싶어서 이 모든 미친 짓을 벌였겠다, 뱀파이어들은 인간이 뱀파이어가 되길 원하지 않는 걸 넘어서 혐오한다는 메시지를 주는 의미에서 네가 장작더미에 불을 당겨주는 건 어떨까 싶은데."
...엘리, 뱀파이어한테 사형 집행을 요구하는군요. 아마 이번에 묶일 인간들은 그냥 태어난 거 자체가 죄인 게 아니라, 진짜 산채로 불태워질 만한 죄를 지은 놈들이긴 합니다만.
에레야는 질렸다는 듯 이야기하고는, 집게를 들고 가던 사람 하나를 붙잡습니다. 그 사람이 갑자기 붙잡혀서 멀뚱멀뚱 쳐다보기도 전에, 그 사람의 가슴팍에 돈자루를 확 던지더니 집게를 냅다 뺏어버리고는, 그 집게를 다시 엘리에게 던집니다. 네. 그제야 좀 나아지는군요. 집게를 써서라도 성물을 꼭 들고야 말겠다는 엘리의 저 집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에레야는, 고개를 젓더니 엘리에게 이야기합니다.
"뭐 됐고, 아무튼 넌 이제 할 일 없다. 들어가서 쉬고 있어. 설마하니 여기까지 와서 사고를 치진 않겠지만, 그러지 말고."
...라 이야기하고, 에레야는 체포해야 할 사람들이 많은 성당으로 들어갑니다.
이제 엘리는 어떻게 하나요? 별달리 할 일이 없을 경우, 다음날 화형식이 거행되는 황혼 시간대까지 시간을 돌릴 수 있습니다.
>>161 네. 셀프 고문입니다. 엘리가 몸에 대자마자 격통에 몸부림치고, 다른 사람한테 슬쩍 갖다대니 무슨 이상한 인간인가 싶으면서도 지나갑니다. 아무래도 엘리가 '특이한 체질'인 것을 확인하려는 목적이었다면 정말 맞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이대로 이걸 엘리와 비슷한 태양교의 성물에 치명적인 반응을 보이는 '불경한' 존재들에게 무기로 사용하려는 목적이라면 그건 확실히 괜찮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엘리는 그것을 가지고 지하수로의 안전가옥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황혼쯤이 되자, 에레야의 부하가 찾아와서 문을 두드립니다. 그는 문을 열고는 엘리에게 말하는군요. 그래도 엘리가 한 일이 일이고, 꽤 오래 봐서 그런지 존댓말이 입에 꽤 익었습니다.
"엘리자베스 님. 화형식 준비가 거의 다 끝났습니다. 아니, 그냥 다 끝났는데, 엘리자베스 님만 오면 진짜 준비 끝입니다."
한마디로 '너만오면ㄱ' 입니다. 엘리는 그 말에 따라 바깥으로 나가고, 에레야가 배려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거한은 빨간 노을빛에 태양의 기세가 약해지는 황혼 시간에도 여전히 뱀파이어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세스타우 성의 건물들 사이의 길어진 그림자 사이로 최대한 나다닐 수 있는 골목길 루트로 엘리를 안내합니다. 그리고 점점 열성적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심해지는 곳에 이르면, 사람들이 분노에 찬 괴성을 내지르며 무언가 비난하는 현장이 있고, 그 한가운데에는 장작더미에 꽁꽁 묶인 사람들과 그들과 군중 사이에 서 있는 에레야가 있습니다. 에레야는 군중들 사이의 엘리를 보더니 외치는군요.
"참 빨리도 왔구만! 심문관보들! 빨리 길을 열어줘라! 빨리 태우고 갈 길 가야지!"
그 말에 거한들이 성난 군증들을 헤치고, 그 사이로 경비들이 끼어들어 덩치로 군중들을 밀어 엘리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줍니다. 아마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엘리가 박쥐의 형태를 빌어 이 자리에 나타날 수 있겠지만, 뱀파이어로 변하려던 인간놈들 죽이는 자리에 뱀파이어가 그딴 식으로 나타난다? 난리 납니다.
그녀도 필요한 것들을 재빠르게 챙기는 것을 저는 지켜 보았어요. 그렇게해서 저희는 한 차례, 본래 했어야 했던 휴식을 끝냈고 다시 길을 떠날 준비를 모두 갖췄어요. 그녀도 같은 느낌인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저는 활력을 되찾아 가벼운 느낌마저 드는 상태로 길을 가고 있어요. 이제 호수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니 만큼 그 거리를 빠르게 좁혀서 도착하는 것에 전념하는 일만 남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기록 이외 것으로도... 호수에 도착하면 무엇부터 하시겠어요? "
길을 가면서도 이번에 그녀가 웃으며 그렇게 말해보이면 저는 그렇게 물어보았어요. 그녀는 호수의 풍경을 마음에 들어할까요? 저희가 마침내 호수에 도착하여 이 목표를 완수한다면 그 후에 무엇을 할까요...? 고생해가며 호수까지 왔으니 만큼, 호수에서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것들을 충분히 해두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저도 그 아름다운 풍경을 천천히 감상하면서 생각해볼까요
@@ >>136 누누코는 역시나 요한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었다. 지금까지의 일생을 살육에 바쳐온 토끼가 이해하기엔 너무 심오한 내용이었던 까닭이었다. 딱히 관심이 없기도 했던데다가... 이 무가치한 금속에 목숨을 걸고, 원하는 걸 받는다. 인간사회는 그걸로 전부인게 아니었나?
'이 인간은 말하는 걸 정말 좋아하네.' 입술 틈 사이로 짧은 한숨을 내보이며 짐칸으로 몸을 움직여 천을 걷고 트렁크를 열었다.
"탈러를 원한다는 거지." 그렇다면 현상금 사냥꾼 겸 외과의사 겸 이발사가 말하길, 인간 세상은 정신병자들이 가득한 세상. 그런 세상에서 누누코가 믿는 것은 오로지- 신성한 들판에서의 자유로운 바람과, 그곳에 사는 동료들. 그리고 쇠와 피 뿐이었다.
"가져가고 싶으면 가져가 봐," 누누코의 손을 떠난 도끼가 우아한 원을 그리며 날았다. 그리고 곧 강렬한 충격과 함께 누군가의 두개골을 반으로 쪼개고 파고들었다.
"이 썩은내 나는 송장 덩어리들이여!" 마차 위에 올라선 누누코의 손 마디마디에는, 아직 충분한 양의 쇠붙이들이 끼워져 있었다.
>>163 "음... 일단 뷔르트겐 호수에 있는 생물들을 기록할 거고요. 여기서 있던 일들로 쓸 법한 글감들을 최대한 기록할 거고요. 또 여기서 만난 사람들을 기록할 거고..."
놀랍게도, 베스니가 말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 중에서 '기록'이 아닌 것들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나마 찾고 찾아서 기록이 아닌 것이 딱 하나 나오긴 했는데, 이것도 광의의 의미로 따지자면 기록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검은 숲에서 병신이 되고 죽을 뻔해서 그런지 이 숲을 나름대로 생각한 방식으로 존중하려는 방식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신기한 조약돌 같은게 있으면 기념으로 하나 주워가고 싶어요! 그, 좀 귀중해보이는 생물이나 그런 건... 왠지 그런 거는 나중에 심하게 저주받을 거 같아서 안 되고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이런 거 있잖아요! 이거 좋네요. 이렇게..."
베스니는 눈 앞에서 작은 조약돌 하나를 주워서 아앨라나에게 보여줍니다. 우윳빛 색깔의 반투명한 방해석질의, 보송보송하게 구멍이 잔뜩 뚫려 해면 모양이 된 조약돌입니다. 베스니가 그 조약돌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아앨라나는 그 조약돌이 아닌 조약돌 너머를 봅니다. 이 검은 숲에서 보기 힘든, 나무가 단 한 채도 없는, 아니, 당연히 없을 수밖에 없는 공간. 가까이에서는 바닥의 흙빛과 초록색 이끼빛이 드러나고 저 멀리는 마치 거울처럼 지평선부터 저 위의 하늘까지 담는 일렁임 없이 수면(水面). 그리고 그 수면이 과연 물인지, 거울인지 의심될 때쯤, 물 위에 둥둥 떠 있던 새가 아래에서 올라오는 거대한 메기를 피해 하늘로 붕 뜨면서, 메기가 물 위로 잠시 나타나면서 그 수면이 일렁여, 밝은 태양빛이 그 일렁임을 기회 삼아 반짝이며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듭니다.
뷔르트겐 호수. 검은 숲이 품은 바다. 호수임에도 수평선을 볼 수 있는 호수가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베스니는 한참 동안 조약돌을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보더니 아앨라나에게 묻습니다.
아마 '년'이라고 말하려 했던 것 같던 사내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하고, 도끼날이 박혀 들어가는 두개골과 함께 두쪽이 나서 어휘가 끊어져 버리며 말 뒤편으로 낙마해 버립니다. 끌어줄 주인을 잃어버린 말은 바로 고삐가 힘없이 풀리자 정처없이 대열에서 이탈하고, 옆에서 다른 남자가 석궁을 쏘지만 누누코는 도끼를 던져 빈 손으로 그 살을 잡아버리는 묘기를 넘어선 신기를 선보이고는, 바로 도끼를 던져 이번에는 명치에 꽂아버립니다. 이번에는 의식이 있어서 피 끓는 소리로 어떻게든 끄아악, 그르아아앓 소리를 내면서 도끼를 빼내려다가 사이좋게 낙마합니다.
"이... 익... 이 개새끼들이!!!!"
그러자 누군가가 마차 앞에서 달려옵니다. 누누코가 도끼를 던지는데, 아까 전 그 놈들이랑은 다른지, 아니면 뇌가 조금 더 나아서 학습능력이 있는지, 도끼들을 피해서 달려옵니다! 어, 이번에는 위험하겠다 싶었는데, 그것을 말고삐를 잡고 있던 요한이 석궁으로 머리통을 쏘는군요. 석궁의 볼트가 날아가 개새끼들이!!!! 라고 욕하느라 벌린 입 안으로 쏙 들어가고, 목젖과 경추를 꿰뚫고 뒤로 나옵니다. 네, 사망입니다. 멍청한 주인을 싣던 말은 마차와 부딪쳐서 죽고 싶을 정도로 멍청하진 않은지라, 슬쩍 피해서 자유를 찾아 훨훨 도망치고, 요한은 누누코에게 웃으면서 이야기하는군요.
"만만하게 생겨서 나쁜 점이 있고 좋은 점이 있습니다. 나쁜 점이야 뭐 아실테고, 좋은 점은..."
요한은 누누코에게 도끼 몇 개만 남긴 채 나머지는 짐칸에 넣고, 석궁에 시위를 다시 먹인 뒤 정리하면서 껄껄 웃으며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