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었다. 불어오는 바람을 굳이 창을 닫아 막지 않고서 그대로 창가에 기댄 여인의 긴 머리칼이 부드럽게 휘날렸다. 갸름한 흰 얼굴에 긴 속눈썹이 드리워진 아래의 붉은 눈이 우수수 이파리를 휘날리는 나무를 바라보았다.
"시월이 다시 왔구나." 느릿한 움직임으로 권태롭게 기숙사 밖을 훑다가 그 아래 담벼락 근처에 핀 붉은 꽃잎을 발견한다. 바람에 살랑이는 피안화 이파리가 비친 붉은 동공이 확장되었다가 감은 눈꺼풀에 가려진다.
"알렌, 우리 얘기 좀 해요." 그가 또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손을 잡고 가볍게 포옹하는 것까지는 그도 이제 크게 거리끼는 것 같지 않았는데 그 이상의 표현을 할 때마다 그는 겁에 질린 것처럼 물러섰다. 혹은 무언가를 꾹 내리누르는 것처럼 애써 그녀를 밀어내었다. 마치 사귀기 전의 그처럼 말이었다. 무엇인 문제인지 몇 번 은근슬쩍 밀어붙여 실토하게 하려 하였지만 그럴 때마다 어설프게 둘러대며 빠져나갔고 린은 잔뜩 골이나 있었다.
"혹시 제가 잘못한 게 있나요?" 만일 그가 정말로 싫어하거나 거부하는 표시를 하였다면 구태여 그녀가 이럴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린이 보기에는 알렌은 정말로 싫어하는 것보다는...
다시 눈을 반개하고서 저 아래에 핀 피안화 몇 송이를 바라보며 린은 창턱에 팔을 올려 턱을 괴었다. 며칠 전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 끝에 머리에 한 손을 얹어 곤란한 얼굴을 하던 그가 머뭇거리다 꺼낸 사정은 그녀 또한 어느 정도 예상했던 얘기였다. 하아, 작게 한숨을 쉬고서 헌터 챗을 열어 오간 문자를 다시 읽었다.
'내일 생일이라고 했었으니까.' 내일은 특별반에서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 단체로 생일을 축하하기로 한 만큼 오늘 둘이서만 미리 만나기로 약속한 메세지를 쭉 바라보다 린은 한쪽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렸다.
"이제는 슬슬 결판을 낼 때가 되었으니까요." 사귄 지 1년이 지났다. 손을 들어 살며시 가리고서 비스듬히 무언가를 꾸미듯 올라간 미소를 감추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몸을 돌려 나붓하게 걸음을 옮기는 복도에 노을빛이 드리워진다. 슬슬 해가 지니 곧 약속시간이었다.
...
"어디 불편하셔요?" 적당히 저녁 식사를 하고 상가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까무룩 시간이 지나가 밤이 되었다. 잠시 숙소 근처 벤치에 앉아 얘기하던 중 그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보였다.
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제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알렌에게서 답이 흘러나오자 화기애애한 대화가 뚝 끊기고 잠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제가 그날 이후로 많은 생각을 해보았는데요." 표정 없이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얼굴에 살며시 미소가 그려진다. 생각지 못한 말인지 그는 꼼짝 얼어붙은 것처럼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담은 붉은 눈에 짓궂은 웃음이 어렸다.
"저도 청소년기를 녹록하지 않은 곳에서 보냈으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해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고 우리는 우리잖아요? 잠시 말을 끊다가 린은 그를 바라보았다. 적안과 벽안이 서로를 담고서 마주 보았다.
"그 사람들은 감정 없이 쾌락만을 좇았고 쾌락과 수반되는 책임을 질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일방의 쾌락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겼으니 잘못된 것이지만. 저는, 그리고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요." "무엇보다 우리는 서로를 많이 좋아하잖아요?"
린은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 그의 손을 포개어 가벼이 깍지를 끼고서 잡았다. 약간의 짓궂음과 그 괜한 심술로도 가려지지 않은 애정이 담긴 붉은 눈이 가로등의 빛으로 은은하게 반짝였다.
"저는 독심술사가 아녜요.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러니 더 피하면 이제는 정말로 미워할 거예요. 빙긋 웃는 얼굴을 하며 옆에 기대어 본다.
"기숙사 화단에 피안화가 피었어요." 가만히 붙어 앉아 조근거리며 얘기를 시작한다.
"마침 내일은 알렌군의 생일이고, 아시나요?" '당신의 생일인 초가을은 피안화가 만개하는 계절이라는 것을.' 조금 상기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작게 웃는다. 그가 자신을 많이 좋아하여 어찌 할 줄 모르고 조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린은 몸을 더 기울여 알렌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私も一緒に咲くことはできないでしょうか? 가만히 있던 알렌이 순식간에 확 붉어진 얼굴을 양손으로 덮는다. 다시 원래의 거리로 떨어져서 린은 별이 점점이 박힌 별하늘을 바라보며 웃어본다. 허공에 뜬 헌터넷 스크린의 시계가 열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생일 축하해요 알렌." 붉어진 볼에 가볍게 입술을 대고서 뗀다. 환한, 조금은 장난스럽고도 수줍은 미소가 린의 입가에 번진다. 드물게도 별이 쏟아질듯 행복하게 반짝이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쏴아아 빗방울이 은빛 줄기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분노하지도 나아가지도 긍정하지도 않는 그녀가 처음보는 간절함과 우울함에 찬 얼굴의 그가 그녀에게 두 사람이 그 동안 서로에게 갈구해온 감정이 무엇인지 묻고 있었다. 그제서야 마츠시타 린은 그 동안의 알렌과 관련된 모든 수수께끼가 풀린 기분이 들었다.
"제 이름은 본명이 아니에요." 다시 한번 다가가 그를 감싸안았다. 감싸안은 손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를 껴안고 그제서야 알았다. 비에 젖어서인지 조금씩 떨리는 몸을 한 번 숨을 쉬어 울컥 솟는 감정까지 같이 진정시키려 해본다.
"...여태 진짜 이름도 말할 수 없었던 제가 그래도 좋으시다면 말해주세요." 이제서야 제 인생을 찾아가는 그에게 물러설 기회는 주어야했다. 서로를 바라고 원하는 것이, 상대와 시간을 공유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마땅히 주어져야 함도 지금에서야 깨달은 그였다.
"제가...제 삶이, 계속 쫓겨왔던 과거가 만약 당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더라도, 그래도 좋으시다면..." 얼굴을 타고 물줄기가 방울져서 흐른다. 차가워야 할 빗줄기가 왜인지 체온을 품은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 오랜 시간 눌러오다 터진 감정은 그녀의 생각보다도 더 거친 물살이 되어 마음을 휘저었다. 더 주체하기 힘들어 그 이상 말을 잇지 않고 가만히 서서 품에 고개를 묻었다.
"...줄곧 미안했어요." 거짓말을 해서. 말할 수가 없어서. 아무것도 전할 수가 없어서. 흐린 빗물을 머금은 먹구름 같은 목소리가 먹먹함을 담고서 작게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