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렌 정말 게이트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대체가, 그 날 이후로 그는 그녀에게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수업 중에도, 의뢰 중에도, 길드 회의에서나 멀찍히 떨어져 앉을 뿐 그녀를 계속 노골적으로 피했고 이는 그녀에게 답답함을 넘어 울분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메세지 옆에 1이 사라진 것을 보아서는 읽기는 한 모양인데.' 그 이후로 아무런 답도 없었다. 며칠간의 교착 상태 끝에 린은 그제서야 그나마 이성적으로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다.
'드디어 내 행동에 질린 모양이네. 그래도 생각보다도 오래갔어.' 애초에 그녀가 그와 붙어지내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나. 처음에도 알렌은 린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었다. 그저 그녀의 제멋대로의 행태에 원래대로 돌아갔다고 생각하면 되었다. 그녀가 모두 다 알고서도 자초한 일이었다.
'다 알고서도...' 며칠을 정신이 있는지 없는지 보내다가 오늘 옷장을 여니 한국에서 새로 산 옷에 미리내고의 교복마저 빨래방에 맡겨버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남은 옷은 반쯤 잊었던 검고 붉은 세일러복이었다. 남몰래 학교를 가고 싶어했던 그녀를 위해 전 길드원들이 잠입의뢰라는 핑계로 마련해준 옷이었다.
검은 우산에 검은 투피스, 검은 머리에 창백하게 흰 얼굴의 소녀. 목가에 걸린 붉은 리본만이 비까지 내려 우중충한 가운데 유일하게 색채를 띠고 있었다. 붉은 눈은 우산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잠시 외출하고서 소리없이 돌아오던 소녀는 앞에 온통 먹색인 가운데 이질적인 빛을 띠는 머리칼을 발견했다. 비를 그대로 맞고서 허무하게 서있는 이는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오랜만이네요." 소리없이, 기술을 써서 인기척을 지우고 다가간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뒤에 훅 나타난 그림자가 우산의 모습을 하고 알렌의 위에 드리워졌다. 검은 우산에 가려졌던 붉은 눈이 어떠한 감정도 띠우지 않고서 그를 가만히 응시한다.
"...전에 카페에서 그렇게 나간 것, 병실에서 화낸 것 다 미안해요." 내 멋대로 내 삶을 생각치도 않고 그저 당신이 이해하기를 바라며 그리 설명 하나 없이 멋대로 굴어서 미안하다고, 뒷말은 잇지 않고 린은 담담하게 사과를 하였다.
"그 말을 하고 싶었어요. 이제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다시 원래대로 망자의 미련과 헛된 꿈은 버리고 자신의 위치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감정을 숨기는 것 하나는 자신있었다. 몸을 숨기고 표정을 숨기고 감정을 숨기고 하나씩 어둠속에 숨기다 보면 점차 숨겼던 것이 원래 제게 있었던 건지 기억마저도 숨겨져 잊어버리니 그 공허한 망각의 가면에 기대어 그녀는 살아왔었다. 그렇기에 평소 표정을 잘 지어내던 마츠시타 린은 역설적으로 모든 환각을 베어내었을 때 그녀 자신으로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가 없었다. 린은 갑작스레 끌어안겨 멍한 얼굴을 했다.
둘 사이 그녀가 들고 있던 우산이 휘청거리다 다시 제자리에 서서 맞닿은 두 사람위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빗줄기가 투둑 투둑 방울이 되어 우산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크게 울려퍼지는 것 같았다. 멍하게 있다가 그녀가 어떤 반응을 하기도 전에 다시 알렌이 그녀를 밀어내었다. 머리가 핑 아파왔다.
"제가 어떤 말을 해드리면 좋을까요."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다 한데 일그러져 도리어 어떤 표정도 되지 못한 얼굴이 그에게 담담하게 묻는다. 피하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새 훌쩍 선을 넘고 다가오고 그러다 밀어내고, 이제 그녀도 더 이상 판단이란 것을 하기 힘들었다.
"떨어져 달라면 떨어져 드리고 옛날처럼 다시 존대를 쓰며 굴라면 그리 굴어 드리죠. 하지만 이대로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알기 힘드네요." 그를 이용하겠다고 마음먹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을 심지어 자신마저도 수단으로 여기겠다 맹세했고 지금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이성 한켠의 외침은 한겹 한겹 그녀조차 의식하지 못하도록 쌓인 수많은 감정에 눌려 사라졌다.
"무엇이 그리도 제게 미안한가요. 제가 곤란하다는 사실이 미안한신가요? 그렇다면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는 이번 헨리 파웰건이 마무리 되는 대로 곧 다시 일본으로 떠날 생각이니까요." 그녀의 곁에 언제나 무리짓고 있는 망자들이 묻힌 곳으로 떠나 교단을 키우며 몰래 진상을 되짚어 보기나 할 생각이었다. 그것이 애당초 죽었어야할 그녀가 살아있는 이유였다.
"바티칸에서 린 씨와 만난 이후로,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린 씨는 줄곧 저에게 소중한 사람이였습니다."
그날 린이 알렌을 위해 울어주었던 것은 계기였다, 그 전부터 린은 이미 알렌의 소중한 사람이였다.
"언제나 린 씨의 곁에 있고 싶었습니다. 린 씨가 너무나도 소중하니까, 린 씨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싶으니까."
린이 행복할 수 있도록 늘 곁에서 돕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다 스스로에게 하는 변명에 불과했습니다."
터져나오려는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듯 알렌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간다.
"저는 어느 순간부터 소중한 사람에게 품어서는 안될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린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던 알렌이 고개를 들고 린을 바라본다.
"네, 저는 린 씨에게 욕망을 품고 있습니다. 저를 위해 울어주고 저를 다시 일으켜준 소중한 사람에게 음습하기 그지없는 욕망을 품은 것을 숨기고 곁에서 머물고 있었습니다."
웃고있었다, 자신을 한껏 혐오하듯이 자조하며 뒤틀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참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다 괜찮아 질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린 씨는 저에게 소중한 사람이니까, 이까지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언제나 린 씨의 곁을 지킬 수 있을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 제 착각이였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 린 씨의 곁에서 이 음습한 욕망을 채우려고 저 자신에게 변명하며 린 씨를 속이고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을 한껏 비웃은 알렌은 다시금 고개를 떨구고 다시금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연다.
"...저는 이런 쓰레기같은 남자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저 때문에 마음을 낭비하지 말아주세요."
자욱히 깔린 먹장구름 아래 쏟아지는 굵은 빗줄기 소리에 남자의 절규와 닮은 고백도 잠시 주변에 울리다가 파묻혔다. 잠시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남자와 마주하고 선 흑의의 소녀는 미동도 없이 서있었다. 깜박, 정지된 흑백화면 속 창백한 인형처럼 못박힌 듯 가만히 선 소녀의 적안이 깜박였다. 온통 백짓장처럼 하얘진 머리로 그녀는 말없이 한 걸음 내딛어 그와 발끝을 마주했다. 가까이서 올려다 본 얼굴은 며칠 전 병동에서보다도 더 초췌해 보여 왠지 낯선 느낌을 주었다.
쉬잇. 뭔가 더 말할까. 또 그가 어떤 속을 뒤집는 말을 할지 몰라 그녀는 그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만히 대었다.
"감히 신의 대리자에게 욕망을 품다니 불경하기 그지없는 지라 저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네요." 잔잔히 눈을 내리깔고서 읊조리듯 속삭인다. 어린 왕께서는 이성관계에 대해서는 어떤 의사도 보이지 않았지만 한때나마 죽은 심장의 태아에게 휘둘렸던 이를 좋게 볼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비로우신 신께서는 저희에게 고해하고 바로잡을 기회를 주셨나니,"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극복해내었고 직접 원흉을 베었다. 이미 그 전에도 바티칸의 수많은 시민들이 남긴 증언에서 그녀는 교주로서 그를 용서했고 한 사람으로서 그리워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직하게 한 마디만 따라 말해주시면 눈감아드리겠습니다."
"Я люблю тебя" 그녀의 평소 말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친 억양이었다.
어지러히 저도 흐름을 잡기 힘들 정도로 흘러가는 머릿속이 그대로 파도치게 두고서 발끝을 들고 서로의 숨을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하고서 한 마디 속삭이고서 부드러히 끌어당겼다. 위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검은 우산이 입술이 포개어질듯 가까워지는 두 사람을 가리고서 떨어져 바닥에 도르륵 굴렀다. 우산이 굴러간 자리 옆에 어느새 다시 거리를 반걸음 정도 벌리고서 빗물에 젖은 두 사람이 서있었다.
"최악의 최악까지 보아서 그런가? 당신이 쓰레기에 최악의 남자라는 건 잘 모르겠어. 하지만 그에 비할 정도로 바보 멍청이란 건 잘 알 것 같아." 빗물이 흘러내리는 얼굴을 들어 린은 알렌을 바라보았다. 씁쓸한듯 기쁜듯 흰 낯이 비에 젖은 미소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