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기 무섭다, 혼자 밥 먹기 싫다 말했던 것이 핑계였다는 걸 숨길 생각도 없는지 은아는 한울을 챙기려고만 할뿐 정작 자기는 깨작깨작 밥을 먹는다. 한울은 나름대로 은아를 해석해보려 했으나 실패한다. 왜 저렇게까지 생판 모르는 남을 챙기려고 하는지. 여전히 한울은 알 수 없다.
밥은 맛있고 한울은 묵묵히 식사를 한다. 내려앉은 침묵은 편안하고 빗소리가 그 사이 틈을 부드럽게 매꾼다. 비 오는 날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한울은 이런 것이라면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가 이내 지워버린다.
그러다 은아가 상처에 대해 말을 꺼내자 한울은 그제야 상처에 대해 인지했다. 아니 잊고 있었다는 것에 가까웠을까.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으니까.
“으음.....”
내키지는 않지만 딱히 거절의 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저 조용히 식사를 계속 이어나가다 다 먹은 뒤 수저를 내려놨을 뿐.
밥을 먹으며 자연스럽게 이어진 침묵은 의외로 편안했다. 은아는 새삼스레 한밤중에 한울이 자신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이 비현실적이라고 느끼면서도 어쩐지 만족스러운 기분이었다. 특히나 저렇게 식사를 하는 걸 보니 역시 배고팠던 것이 맞는 듯 싶었고. 한국인은 밥심이라잖아. 따뜻한 밥을 먹이니 뿌듯한 마음이 들어, 계속 창문을 두드리는 세찬 빗소리에도 은아는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지는 것만 같았다.
한울이 식사를 마칠 즈음에는 은아의 밥도 텅 비게 되었다. 다 먹은 그릇들을 싱크대로 옮기며 은아는 한울에게 다시금 말을 걸었고.
"저기 소파에서 잠깐 기다려줘. 구급상자 좀 가져올게."
그릇에 물을 받고서 은아는 장난스럽게 씩 웃어보였다.
"상처 치료한 다음에 설거지는 네가 하는 거다?"
계속 호의를 받기만 하면 왠지 한울이 신경쓰여 할 것 같아 일부러 던져주는 일거리였다. 한울이 이해할 수 없는 은아의 배려는 빗방울처럼 자연스럽게 한 방울씩 똑똑 떨어졌다.
식사가 끝난 지금에도 한울은 조금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어디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혹여나 꿈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비를 맞고 있는 자신을 은아가 찾아온 것부터 이상하지 않던가. 허리를 끌어안고 가지 말라고 했던 것도, 자신이 이 집에 들어와서 씻고 밥을 먹고 있는 것도.
은아가 식탁을 치우는 것을 쳐다보다가 이내 소파에서 기다리라는 말에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향하려고 했다. 그리고 설거지를 부탁하는 말에
“뭐어... 그래.”
라며 대답했을 것이었고. 부엌에서 거실로 향하면서 집을 둘러보다가 이내 소파에 앉은 한울은 편하게 기대며 눈을 감았다. 밥을 먹으면서 조금 마르긴 했지만 아직 머리카락은 덜 마른 듯 살짝 촉촉했다.
잠시 후 은아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지면 한쪽 눈만 나른하게 뜨고는 나직하게 물었을 것이었다.
아니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랜만에 보니 뭔가 뭔가 넘 부끄럽다...........ㅋㅋㅋ큐ㅠㅠ 벌써 2년 전이라니........... ㅋㅋㅋㅋㅋ저 때 문구들 찾아볼 때 둘의 미래를 생각하고 고른 거라서 그럴지도ㅋㅋㅋㅋ 노래 가사는 과거~현재 같은 느낌이니까 3판, 4판 꾸준히 가다보면 저 문구들도 쓰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난 노래 가사도 예뻐서 좋은 걸~~!!!~!!! ><
정반대 영역에 있던 고양이 둘이 만나 기싸움 하는 느낌이었지.....(대체) 에이 한울이가 은아 고집을 잘 받아줘서 그런 거지~~ >< 은아가 아직 더 보듬보듬할 거지만!! 한울이가 비 오는 날이면 은아를 떠올리게 만들어주겠어~~!!!!(?)
한울은 전혀 졸린 상태는 아니었다. 뭐랄까. 낯선 곳 낯선 상황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말수를 줄인 것 뿐이었다. 아니면 평상시에 쌓아두던 벽이나 긴장이 조금 풀어졌기 때문에 평소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일수도 있고. 본래 한울은 그렇게 말이 많다거나 하지 않으니까. 물론 장난스러움은 본성에 속했다.
“나 살면서 설거지 한 번도 안 해봤어.”
지금처럼 말이다. 장난처럼 말하지만 사실이긴 했다.
하긴 그 누가 한울에게 설거지를 시키겠는가. 이내 두 눈을 뜬 한울은 소파에 기대던 허리를 세우고 은아 쪽으로 몸을 돌려 구급상자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뒤적이며 찾는 걸 내려다본다.
도대체 어떤 점이 부끄럽다는 거지...?? ㅋㅋㅋㅋㅋ 2년 전에 은아주가 일댈을 구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이어져올 수 있었던 것이구만. 근데 시간 참 빠르다... 벌써 2년이 지났다고....? 대체...... 진짜 문구들 보니까 3판 4판 열심히 만들어 가야만 해.....!! 아까워서 견딜 수 없다...!!! ㅋㅋㅋㅋㅋㅋㅋ 완전 반대 성향의 고양이들이구만 ㅋㅋㅋㅋ 기싸움 한다는 말 넘 귀여워..... 지금은 서로 간보면서 옆에서 털 붙이면서 식빵 굽고 있는 걸려나. 한울이가 비오는 날마다 은아를 떠올릴 수 있게 다음 일상에서도 비를 내리게 해야겠어(네?)
한울의 말이 들려올 무렵, 순간 은아의 손이 삐끗한 것도 같았다. 이윽고 은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경악에 가까운 표정으로 한울을 바라보았고.
"농담이지?"
하고 물어보지만, 은아는 한울이 사실을 말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뻔했다. 한울이 재벌 3세라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한울이 가정에서 설거지 같은 것을 했을리가. 특히 집안 사정이 좀 복잡한 듯 싶었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 설거지를 한다는 건 더욱 말이 되지 않았고. 결국 은아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럼 내가 가르쳐줄게. 같이 천천히 해보자."
어차피 비가 그치기엔 아직 멀은 듯 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설거지를 하며 비가 그칠 때까지 시간을 좀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리고 얘 안 해서 그렇지, 한 번 가르치면 잘할 것 같으니까.
"그럼 이제 약 좀 바르자."
은아는 연고를 손가락에 짜내며 한울에게 말했다. 그리고 한울에게 바짝 몸을 기울였고.
"따가워도 좀 참아줘. 알겠지?"
눈을 감고 싶다면 감아도 된다고 속삭이며 은아는 조심스럽게 한울의 뺨에 연고를 발라주려고 했다.
과거의 내 모습이 부끄러워......ㅋㅋㅋㅋㅋㅋ큐ㅠㅠ 마자마자 갑자기 해보고 싶다고 생각해서 일댈을 구해봤는데 한울주가 딱 받아줬어! 시간 진짜 빠르지.... 한 것도 없는데 2년이 지났어....ㅋㅋㅋ
한울주가 문구들 이렇게 좋아해줄 줄은 몰랐는데..!!ㅋㅋㅋㅋㅋㅋ 열심히 찾은 보람이 느껴져!! >< 나야 3판 4판 열심히 만들어 가면 너무 좋지~ 한울주 표현이 더 귀여워......같이 식빵 구우면서 은아가 그루밍도 해주는 중일 거야(대체) ㅋㅋㅋㅋㅋㅋ그거 좋은데? 한울이 비 오는 날마다 은아가 끌어안았던 거 떠오르게 또 끌어안아야지!! ><(???)
자신의 장난이 통했는지 은아가 놀란 얼굴로 한울을 쳐다봤다. 한울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한다.
“너는 매번 내 말을 안 믿더라.”
지난번에 말한 또 그 레파토리다.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한 적이 있냐, 못 믿을 행동이라도 했냐 등등. 물론 은아를 놀려먹기 위해 하는 말이지만. 나 같은 놈의 말을 믿지 않는 게 당연하지 않나.
“설거지를 배워서 해야할만한 거야? 나도 대충 봐서 어떻게 하는지 정도는 알거든?”
한울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답한다. 이내 은아가 약을 찾은 듯 연고를 꺼내 손가락에 짜냈다. 연고를 바르기 위해서라지만 생각보다 바짝 붙어오는 은아의 모습에 한울은 조금 긴장해 몸을 굳혔다. 어린애를 달래듯 속삭이는 목소리도 간지럽다. 뺨에 조심스럽게 손가락이 닿고 한울은 느껴지는 따가움에 왼쪽 눈을 살짝 찡그린다.
가까운 거리만큼 한울에게서 나는 샴푸향이 은아에게 닿았을지도 모른다. 은아가 매일 쓰는 것이니만큼 익숙한 향이었겠지만.
이윽고 은아는 한울이 조금 머쓱한 표정을 지어도 그냥 웃을 뿐이었다. 은아의 말은 딱히 다른 마음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단순히 같은 샴푸를 써서 같은 향기가 난다는 것이었으니까. 자신이 퍼스널 스페이스를 침범하고 있다는 자각도 없어, 한울의 복잡한 심정까지도 미처 알지 못했고. 은아는 이어진 한울의 대답에 놀라 손을 멈추었다.
"뭐?"
천하의 그 이한울이 맞았다고? 은아의 상상은 한울이 정말로 다른 누군가와 격하게 싸우는 것으로 이어졌고.
"네가 이렇게 다칠 정도면 그 사람은 완전 묵사발이 났겠네."
은아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상처가 길게 날 정도면 얼마나 세게 맞은 걸까. 은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아프지는 않았어?"
반창고를 꼼꼼하게 붙여준 후, 은아는 여전히 한울과 가까운 상태에서 한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빗소리 사이로 은아의 목소리가 조용히 물었다.
어제 내가 먼저 자버렸다....한울주 잘 잤어? 난 덕분에 잘 잤다!! 왕크면 왕귀여우니까 왕고양이 한울이 왕귀여워..........(??) 은아는 아마 자각하고 나서 뚝딱거리지 않을까?ㅋㅋㅋㅋ 어제 피곤해서 그랬나 보다. 괜찮아!! 나도 단어 잘못 쓸 때 많은 걸~ >< 고마워!!! 한울주도 오늘 하루도 힘내자~~!!!! 점심도 맛있게 먹구~!!~!
은아는 입을 삐죽 내밀며 대꾸했다. 의뭉스럽게 나오는 한울을 보며 은아 역시 지지 않고 "그럼 내 맘대로 한다?" 하고 나오기도 했고.
"때려서도 피해서도 안 되는 사람?"
은아는 눈을 깜빡거렸다. 짐작가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은아는 한울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어쩐지 은아의 감이 한울이 말하고 있는 사람이 한울의 가족 중 한 사람일 것 같다고 말하고 있었다. 외동이라고 했으니까 아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중 한 사람일까.
무력하게 맞아야만 하는 기분이 얼마나 비참한지는 은아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은아는 자신이 함부로 한울의 상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자격이 없음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은아는 그렇기 때문에 한울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은아는 대답을 피하고 거리를 두는 한울의 모습에서, 다시금 한울이 혼자 천사상을 등지고 분수대에 앉아있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에.
"......많이 아팠겠다."
그래서 은아는 자신도 모르게 조용히 중얼거리며 천천히 한 손을 뻗었다. 마치 한울 대신 대답을 해주기라도 하듯.
"아프지 마."
만약 한울이 피하지 않았다면 은아의 손이 한울의 머리 위에 닿았을 것이었고. 은아의 손바닥이 한울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었을 것이었다. 차마 맞서 때리라고도, 피하라고도, 맞지 말라고도 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은아는 제일 작지만 제일 큰 것을 대신 바래주었다. 몸도 마음도 아프지 마. 은아는 어쩐지 앞으로 천사상에 빌 소원이 하나 더 늘어나게 될 것만 같다고 생각해버렸다.
그 때 되면 한울이가 은아 이상하게 볼 지도.... 잘 끌어안던 애가 갑자기 긴장하고 그러니까ㅋㅋㅋㅋ 열심히 일 했으니까 더 피곤했겠지....(보듬) 그래도 잘 잤다니 다행이라구~~ >< 잘했어~!! 나도 맛점했다!! 대충 안 챙겨먹었어!!!ㅋㅋㅋㅋ 한울주도 저녁도 맛저하길 바라~~!!~!!
한울이 뻔뻔하게 답한다. 확실히 은아의 말은 틀린 게 없었지만 무논리에는 대응할 방법이 없는 법이다.
“.......”
한울은 은아가 되물었음에도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은아라면 어느정도 눈치 채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뭐, 알아채든 알아채지 않든 자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다. 은아와도 상관 없는 일이고. 그렇기에 은아가 자신의 사정에 깊이 공감하고 마음 아파한들 그건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일 뿐이다. 누구나 상처입고 비맞은 고양이를 보면 안타까움을 느낄 테니까. 그 잠깐의 순간에는 그럴 수 있다. 그리고 제 갈 길을 가야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한울은 은아가 뻗은 손이 머리에 닿기 전에 그 손을 잡아 내렸다. 저를 위로하려는 손은 달갑기도 하면서 달갑지 않았다. 순간의 감정에 자신을 맡길 정도로 자신은 아둔하지 않았다.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냐.”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은아의 손이 작은 것인지 한울의 손이 큰 것인지 한울의 손 안에 은아의 손이 포개지듯 덮여졌다. 한울은 그 손을 놓으며 일어나려 했다. “이제 설거지만 하면 끝이지?” 하면서. 부엌으로 향하려는 모양이다.
한울은 역시나 거절의 뜻을 보였다. 은아는 한울이 자신의 손을 잡아 내리는 것을 말 없이 지켜보았다. 한울이 계속 이렇게 거부한다면 자신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은아는 포개진 두 손을 물끄럼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알고 있어."
하고 조용히 속삭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였다.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단지 바람일 뿐이었으며 누군가는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비웃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한울이 먼저 마음을 열고 말해주지 않는 이상 은아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은아는 어쩐지 한울이 앞으로도 절대 말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은아는 떨어지는 한울의 손을 따라 일어서는 한울을 올려다 보았다. 은아의 손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설거지 하다가 어려운 거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
이윽고 한울이 부엌으로 향하면 은아는 소파에서 일어나 베란다 쪽으로 나갔을 것이었고. 말 없이 비 내리는 어두운 바깥을 응시했을 것이었다. 빗줄기는 그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한울은 부엌으로 가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 다른 사람이 설거지하는 걸 보았던 것처럼. 수세미에 세제를 묻히고 그릇을 닦는다. 그리고 물로 헹궈낸 뒤 식기 건조대 위에 올려놓는다. 생각보다 단순한 과정이다.
그릇을 닦으면서 한울은 생각했다. 마치 방금 자기가 한 말이 꼭... 자신이 아프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프지 않다, 라고 말하면 될 것을. 그러면서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나는 아픈가? 아파하고 있었는가? 지금 나는 아픈 상태인가?
상처 받았나?
무덤덤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제 생각 뿐이었던 걸까. 왜 아픈 걸까. 아직도 그 치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남아있는 것인가.
어느 새 마지막 그릇을 헹구어내어 식기 건조대 위에 올려놓는다. 한울은 손을 닦고 부엌을 나왔다. 은아가 베란다에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모습이 외로워 보인다고 생각된다면 자신의 착각일까. 한울은 은아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 은아의 옆에서 창에 등을 기대며 선다.
“삐졌어? 내가 설거지만 하고 갈 것처럼 굴어서?”
한울이 비스듬하게 은아의 쪽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한울은 방금보다는 평상시의 모습을 되찾은 것처럼 보인다. 조금은 여유로워 보이고 조금은 장난스러워 보이는 그런 모습.
어쩐지 이 모든 대화가 그냥 은아를 실없이 웃게 만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비도 많이 오니 그냥 자고 가라고 하고 싶었지만, 은아는 또 다시 거절 당할 거라 짐작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므로 대신 우산을 빌려줄 가능성도 열어놓으며 은아는 어떤 우산이 제일 크던가 생각하기도 했고.
"그래도 처음 해본 거잖아. 원래 뭐든지 처음이 제일 어려운 법이거든. 그런데 넌 처음 해본 설거지도 열심히 잘했으니까 칭찬하는 거지."
가만 보면 생긴 것과는 다르게 성실한 면이 많단 말이지. 반창고까지 붙여 양아치 내지는 악동의 모습이 완성된 한울을 보며 은아는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그래? 칭찬 스티커 10개 모으면 내가 소원 하나 들어줄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장난스럽게 대답하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럴 것 같아!! 약속 있어서 나갈지도 모르지만? 병원도 갈까 말까 고민 중이기도 하고~ ><
실없이 웃는 은아에게 한울이 가볍게 물었다. 이미 여기까지 들어온 거 걱정을 주렁주렁 매달고 나가느니 차라리 소파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나가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선 탓이다. 들어오기 전에는 이건 아니다 싶었지만 막상 들어오고 나니 별 것 아니다는 판단이 선 것일지도 모르고.
“칭찬에 후한 편이시네.”
하면서 한울이 픽 웃었다.
“딱 끌리는 소원이 생각나는 건 없는데. 예를 들면?”
한울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부엌을 나와 거실로 향했다. 어느새 집이 익숙해진 듯 소파에 털썩 앉는다.
물론 설거지를 이 나이에 처음 해봤다는 게 자부심을 가질만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은아도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닐터였다.
“계약 기간 끝나기 전엔 다 줄거지?”
하며 한울이 묻는다. 물론 안 줄 수도 있지만. 은아의 말이 장난임을 알고 있기에 가벼운 어투다.
“오케이ㅡ.”
라고 말했지만 한울은 따로 TV를 틀지는 않았다. 그저 소파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나름 은아에게 장난을 칠 수 있을 정도로 기분이 나아진 상태였다. 비를 맞고 있었을 때는 확실히 상태가 말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평소라면 이정도까지는 아니었을 텐데. 이게 다 비가 와서 그렇다.
그리고 은아한테 위안받고 있는 자신이 조금 역겹기도 하다.
/요즘 힘든 일이 있는가보네 ㅠㅠㅠㅠㅠ(토닥토닥) 오늘 내일 푹 쉬고 어떤 문제이든 잘 해결되길 바라 ㅠㅠㅠ!!!! 늘 응원하고 있으니까!!!
한울은 ‘너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라는 내용을 어떻게 행동으로 알려줄 수 있는지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영 짚히는 건 없었지만.
한울은 칭찬 스티커를 모으겠다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기억은 해두었다. 왠지 게임처럼 다가오기도 했고 말이다. 아니, 이거 새로운 길들이기인가?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나 안 자. 아직 졸리지도 않...”
한울은 눈을 감은채로 말을 하다가 눈을 떴을 때 보이는 은아의 모습에 잠시 말을 먹은 채 눈을 깜빡였다.
“...고. 너... 잠옷 귀엽네.”
라고 무의식적으로 말을 뱉고 말았다. 아니, 놀라서 그랬다. 잠옷으로 갈아입을 거라곤 생각 못했어서. 그런데 귀엽기까지.... 아니. 그게 아니라. 얘는 경계심이라는 게 아예 없나? 남자애를 집에 불러서 재우는데 그렇게 무방비해도 되는 거나고. 이거 진짜 고양이 취급인가?
/다시 건강한 은아주라니 축하해~~!!!! 아프지 말자 ㅠㅠㅠㅠㅠ 한울이는.... 한울이니까......(?) 좋은 주말 오후야~~!!! 푹 쉬고 풀충전하자~~!!
하나하나 구체적인 예들이 은아의 입에서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나왔다. '나는 너를 싫어하니까 착각하지 말고 마음을 접어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에는 이런 방법이 제일 확실할 테니까.
이윽고 한울의 잠옷이 귀엽다는 말에 이번에는 은아가 놀라 눈을 깜빡였다.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이거 꿈인가, 하는 생각들이 짧게 지나간 후, 은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고.
"아, 안 귀엽거든? 그냥 할인하니까 어쩔 수 없이 산 거야...!"
은아는 팔짱을 끼고 일부러 새침한 표정을 지어내려고 하며 대꾸했다. 귀여운 걸 좋아하는 은아의 취향이 잔뜩 들어갔음에도 한울한테 솔직하게 인정할 수는 없었고.
"시간이 늦었으니까 자려면 잠옷 입는 건 당연하잖아...!"
은아가 잠옷으로 갈아입은 이유는 그렇게 매우 단순한 것이었다. 한울이 남자아이이기는 해도 딱히 자신을 이성으로 보지 않을 거라는 확신도 있었고.
/고마워~~!!! >< 한울주도 아프지 말자!!(보듬) 한울주 말대로 오늘은 푹 쉬면서 뒹굴뒹굴만 해야지~ㅋㅋㅋㅋㅋ 아니 한울이는 어째서......ㅠㅠㅠㅠ 한울이가 자기혐오를 멈추게 하기 위해 은아가 귀여워진다(대체) 사실 은아 토끼 캐릭터 무늬가 가득한 잠옷도 있었는데 한울이가 있으니까 일부러 나름 제일 무난한 거(덜 귀여운 거) 입은 거래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