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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이라는 말을 듣고 데구르르 굴러가는 혜성의 눈동자는 딱히 어디에도 고정되지 않았다. 종말. 무겁고 동시에 퍽 와닿지 않는 단어 아니었던가. 잠시간 혜성의 눈동자가 먼 어딘가를 향해 물끄러미 고정됐다. 어찌하고 싶은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본들 정해진 답은 없었다. 언제나, 항상. 늘 그러하듯, 준비할 겨를도 없이 답을 내야한다. 게다가 지금은-
준비할 시간을 주고 있으나, 이미 답은 정해져 있지 않나. 온갖 색채들로 물들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풍경을 눈에 담은 채 혜성은 느리게 눈 깜빡인다.
"굳이 말해야하나."
나는 객성이고, 이곳은 이미 내가 자리잡기로 결정한 천구이니.
"나는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냥 지켜볼 뿐이야."
자리잡기로 결정한 천구를 쉬이 포기할 객성이 어디 있나. 혜성은 가까이에 있음이 분명할 금이의 어깨에 팔 뻗어 감싸며 느릿하게 매달렸다.
웨이버도 쓰러졌고, 더 이상의 저항의 의지가 없다는 것은 곧 구태여 무언가를 할 일도 없다는 뜻이었다. 잘 해곃된 것인지는 그녀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최소한 큰 문제 없이 해결된 것은 맞긴 하겠지.
"항복할 때를 잘 잡는건 좋은 검다~ 이쪽도 괜히 다친 사람을 늘리는 건 사양이니까여."
하지만 이걸로 일이 전부 끝날 리는 없지. 어쨌든 제로는 버젓이 있었고, 종말까지 거론하면서 확실하게 휘어잡으려 하고 있었다. 뉴트로미니컬 에너지... 어차피 이쪽이던 저쪽이던 누구 한쪽이 끝나지 않는 이상 이런 진흙탕 싸움은 계속될듯 하지만...
적어도 그녀는 누군가의 경고를 곧이 곧대로 듣는 이도 아닐 뿐더러 그렇게 순순히 행동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전과는 다른 사태라고 하는 말도 이젠 몇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슴다~ 그리구 죽을 위험이라던가, 굳이 사지로 들어가도 말릴 수 없다던가, 죽어달라곤 못하지만 죽을 수도 있기에 피하라는 말을 듣고서 쉽게 물러날 거라면 이 일을 하지두 않았겠져."
종말, 그 무겁고 어두운 단어가 내재되어있던만큼 은우의 목소리는 여느때와 달리 무겁고 진지하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그동안 저지먼트가 움직이지 않아도 될, 움직이면 안될 일들도 굳이 완장을 벗어던지면서까지 온 길이다. 정말 저지먼트로서의 일만 하고 싶었다면 그만둘 일, 피할 일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래서, 그 퍼스트클래스들이 우루루 몰려가서 상대한다구 말끔하게 해결 할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있슴까? 어차피 저기서 뭐라 안한다믄 쪽수로 밀어붙여도 되는 거잖아여~"
끝까지 나아가면 말 그대로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벗어나면 적어도 인첨공의 평범한 학생으로서 안전해질 수는 있었다.
"3주동안 벌크업 해오라는건 좀 빡센거 같은데... 까짓거 한 번 해보져!"
은우가 준 3주의 시간은 분명 충분히 생각하고 이 뒤의 일들을 결정하라는 뜻이겠지만, 그녀는 이미 결론을 낸 모양이다.
"머, 이런 일 말고도 목숨을 위협받는 일은 누구씨 덕분에 수십번이고 해봤구... 이미 죽을 뻔한 일들도 많았는데 말임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셔서일까. 웨이버의 살인이 부장께는 매우 쓰라린 일인 모양이다. 부모의 원수가 아직도 본인을 포함한 퍼클들의 목숨줄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입장인 것만으로도 머리도 맘도 복잡하실 텐데, 절친이 살인자로 전락하기까지 했으니, 많이 힘드시겠다. 그런 생각이 절로 들지만, 내가 함부로 위로하고 어쩌고 할 영역은 아닌 거 같다. 당장 세은이부터가 부장한테 참으라는 듯 손 잡고 고개를 젓고 있으니.
그나마 좋은 일은, 나랑 언니의 합리적인 위협(???)이 효과를 본 거 같다는 거다. 리버티들이 저항을 포기했는지 잠수함이 한결 잠잠해졌고,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느릿하게 올라가는 것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수함이 물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나 보다. 일단은 살아서 햇빛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앞으론 어째야 할까..................................
막막한 가운데 부장이 크리에이터 짝퉁의 얘길 들었냐면서, 3주간 시간을 줄 테니 계속 함께할지, 빠질지 결정하란다. 이제는 마음가짐만으론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이라면서.
반박할 수가 없었다. 여태 살해당하기 무서워서, 살아남으려면 뭐로든 보탬이 돼야 할 거 같아서 출동할 때마다 꾸역꾸역 꼈지만, 그럴수록 나는 있으나 마나인, 아니, 어쩌면 있는 게 짐일지도 모르는 존재임을 절감해 왔기 때문이다. 내가 낀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게 아니고, 내가 빠진다고 상황이 나빠지는 것도 아닌데, 굳이굳이 참여할 이유가 있나??
그런 생각이 굳어져 갈 때 불쑥 의문이 솟구쳤다. 3주? 유니온 측은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난 모양인데, 3주나 생각할 여유가 있나? 그 사이에 유니온이 일을 쳐도 치겠는데???;;;; 설마 부장이 14만 원의 제곱이고 뭐시고 쌩까고 퍼클끼리 닥돌하려고 저러시나???
@최은우 " 어, 그, 저... 부장;;;; 크리에이터 짭의 말대로면 쟤넨 준비란 준비를 다 끝낸 거 같은데요... " " 저희 3주나 생각하고 있어도 되나요?;;;;;;;;;;;;; " " 생각하는 사이 유니온이 시밤 쾅 하고 다 박살내 버리는 거 아니래요???;;;;;;;;;; " " 설마, 3주는 핑계고 이승 탈출 넘버원 찍으러 가시려는 건 아니죠??;;;;;;;;; "
세은이가 걱정할 만해 걱정할 만해;;;;;;;;;;;;;;;;;; 그렇게 조마조마해하는 사이 선배의 말에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다 같이 시한부 신세인 게 현실인데도 선배가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건, 상상하기 끔찍했다. 전처럼 안 죽을 거라고, 함께 살 거라고 말해 줬으면 싶지만... 그런 말이 터무니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도 안다.
그렇다면, 나는, 어째야 할까.
숨이 잘 안 쉬어지는 듯해 애써 심호흡을 하다가 선배에게 전할 영상 편지에서 했던 말이 생생해졌다.
" 나도 노력할게. 선배한테 희망이 될 수 있도록!! "
그래. 이번엔 내 차례다.
@강철현 " 죽는 얘기부터 하고 그래... " " 지금은 살아 있으니까. " " 죽기 위해 살진 말자. " " 살아서 뭐할지 생각하자. 선배!! " " 그럼 그게 뭐든, 나도 같이 할게!!! "
상황 종료. 리버티는 항복했고, 포세이돈은 육지를 향해 천천히 나아가고 있다. 결국 이번에도 저지먼트는 승리했다. 그러나 정말 완벽한 승리인가 묻는다면, 확신할 수 없는 것 역시 사실이었기에. 랑은 은우가 꺼내는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결국 빼앗긴 뉴트로미컬 에너지와 종말의 거론.
그래, 정말로 이젠. 학생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만 남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무작정 함께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정말 죽음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다며 떠날 사람은 떠나라는 말을 꺼내고 있는 것이겠지.
주어진 3주 간의 유예. 랑은 빤히 은우를 쳐다보다가 하품을 했다.
"3주 휴가인가."
휴가라는 말. 휴가는 결국 끝이 나고, 다시 일을 하기 위해 복귀해야 함을 의미하기에. 랑은 별 망설임 없이 그런 말을 꺼냈다.
"나쁘지 않지, 저지먼트로 있으면서 이렇게 길게 쉬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방학 때도 저지먼트는 저지먼트. 랑은 3주간 주어지는 유예에 대해 그런 감상을 꺼내면서, 회수해 온 채찍을 잘 말아 묶고 허리춤에 걸었다.
다른 학생들의 반응을 보면. 즉답을 하는 녀석들도 있고, 고민하는 녀석들 역시 보인다. 어느 쪽이든 잘못된 건 아니다. 대체 누가 여기서 완벽한 답을 낼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랑은 그들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그 대신이랄까. 은우를 향해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지만.
"그런데, 도망갈 방법이 존재는 하는 건가? 어차피 우린 여길 못 나가."
엄밀히 말하면... 시도해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지만, 유니온이 그걸 내버려 둘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대의 같은 걸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온 게 아니니까, 결국 달라지는 건 없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사라지면 죽는 거나 다름 없지. 결국 어느 쪽이든 나한텐 똑같다."
금은 제 팔짱을 낀 채 서있었으니, 3주의 시간을 주겠다는 대장의 말에 그저 눈가를 좁히며 인상을 찌푸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부장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오는 것이야, 그 어느 때보다 험난한 길이 될 것이 분명하다. 금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젓는다. 감옥과 같은 이 도시에서 '종말'을 피해서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도망친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었고, 이제는 물러설 수 없는 상태였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계속돼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으니. 금은 일말의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어버리기로 했다. 성서 속 아마겟돈의 대결전이라도 죽음의 공포 따윈 금에게 없었다. 반대로 차가운 각오만이 남았으니 금은 제 어깨에 닿는 느낌에 고갤 돌려 혜성을 바라본다. 그래, 나에겐 이제 바라던 삶이 있는 것이었으니.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물러 설 수 없었다. 금은 고개를 돌려 혜성을 바라보며 어정쩡한 미소를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