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지만 나는 직접 출연하는 것보다 보는 게 좋아~ 너는 방금 내가 카메라 앞에 섰던 걸 봤으면서 그런 말이 나와?”
지나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찬을 흘기며 말했다. 카메라 앞에서 인사하라고 했더니 빳빳한 로봇 같은 모습을 보여줬던 걸 말하는 것이었다. 단순한 인사도 그럴진대 어떻게 연기를 하겠는가. 연기라는 것도 한 번도 안 해봤다! 그러고보니 상황극을 한 다음에 춤을 추자고 했으니 이번이 생애 첫 연극ㅡ물론 초등학생 이전의 장기자랑 같은 것을 제외하면ㅡ일테다!
“하긴 지금같은 상황은 컷, 하고 다시 할게요ㅡ 같은 건 못할테니까.”
지나는 작게 쿡쿡 웃으면서 말했다. 잠시 상상했던 모양이다.
“맞아! 나는 답답하진 않았는데? 감정이라는 게 원래 무르익어야 더 좋은 것들도 있잖아~ 기억으로 남겨졌을 때 더 애틋해지고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들도 있고. 특히 현재의 모습과 과거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비슷했던 점이나 달라진 점들을 강조하는 점이 좋았달까. 10대 때에는 40대에서는 가질 수 없는 풋풋한 감정이라는 게 있잖아. 미숙해서 더 이뤄지지 못할 수밖에 없고 후회가 남는, 하지만 그렇기에 더 예쁘고 반짝이는 그런 거ㅡ!”
지나는 살짝 흥분해서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그러다 양 손을 모아잡고 자신이 좋아했던 설렘 포인트 장면들을 머릿속으로 재생했다. 역시 로맨스가 좋아!
“타임슬립도 재밌었어. 네 말을 들으니까 확실히 그 느낌 난다! 하지만 시대극에서 현대와 과거 사이에서의 간극에서 나오는 재미 포인트들은 클리셰처럼 많이 쓰이니까. 아, 그거 보면서 너 연기 정말 잘한다고 생각했어~ 어떻게 이렇게 성격이 다른 배역인데 이렇게 잘 소화해내는 거지? 하면서!”
상기된 채로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던 지나는 떡볶이 왔다는 말에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맛있겠다ㅡ!” 하면서 도도도 뛰어가 문을 열고 떡볶이를 받았을 것이었다.
찬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포기한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그러면서 테이블에 있던 쿠키를 하나 집어 먹으며, 이런 프로그램은 다시 촬영을 진행하기 어렵다는 것에 공감했다.
"응응, 진짜 엄청난 뇌절을 치지 않는 이상 중간에 끊지는 않을 거야. 어... 이거는 재촬영 각이다 싶으면 한 번 쎄게 뇌절을... 아, 이거 무인촬영이잖아."
찬은 무인촬영이라는 사실에 살짝 아쉬워했다. 그런데 문득 생각이 들었다. 저 카메라... 꺼도 되지 않을까? 이거 라이브도 아닌데... 설마 라이브는 아니겠지?
"역시 선배가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가? 감상평이 아주 만족이야, 굳굳. 드라마의 시청 포인트를 잘 잡았네? 확실히 선배처럼 해석하는 관점이 남다르니까, 같은 드라마를 봐도 훨씬 재미있게 느껴지네."
찬은 "크으으으... 이 맛에 연기하지!"라고 말하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근데 이거는 작가의 역량 아닌가?"라며 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설렘 포인트 장면에 대해 얘기하자, 찬은 그 장면을 줄줄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거? 과거 회상 때 남주랑 여주가 둘이 우산 쓰고 걸어가면서, 여주가 고백하기 직전에 둘이 눈 마주치는 장면 말하는 거지? 사람들이 그거 많이 좋아하더라. 근데 그 뒤 장면이 진짜 압권이잖아."
뒷장면에서는 남주의 표정이 차갑게 식으면서 설레던 분위기가 깨지고, "꺼져."라는 말과 함께 우산을 여주에게 주고 혼자 떠나버린다. 상황을 설명하자면, 여주는 남주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남주도 짝사랑이 실현될 것 같은 기대감에 여주에게 줄 선물을 고르려고 백화점에 가던 중, 여주와 그녀의 친구들이 카페 테라스에서 하던 대화를 듣게 된다. 여주의 친구들이 남주가 뭐가 잘나서 만나려 하냐고 묻자, 여주는 어린 마음에 남주가 공부를 잘하니 도움이라도 되겠지 하고 잠시 만나주는 거라며 어색한 거짓말을 했다. 남주는 이 대화를 듣고, 결국 이루어질 듯했던 사랑을 깨뜨린 것이다. 이 사건이 남주가 후에 외모 관리와 운동을 시작하게 된 이유였고, 그로 인해 그는 40이 넘도록 피해망상에 시달리며 결혼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여주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자책을 하고, 자신이 또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 이성을 만나오지 않았다.
남주는 여주에게 제대로 된 진심을 물을 자신감과 결단력이 없었고, 여주는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어린 생각으로 인한 거짓말로 10대들이 흔히 겪을 수도 있는 갈등을 표현했다.
하지만 결국은 어른이 되어 재회하고, 둘의 감정이 풀리면서 후에 결혼을 할 가능성이 높은 열린결말로 끝났다!
"나 보기와는 다르게 감정이입 잘해~ 여기서는 가볍게 보일지 몰라도, 촬영장에서는 엄청 까칠하거든?"
떡볶이가 배달 오고, 지나가 떡볶이를 받아오자 찬은 봉지에서 떡볶이 담긴 플라스틱 상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리며 말했다.
너와 눈을 맞추고, 네 미소를 바라본다. 익숙하고도 그리운 미소. 부디 한 번 더 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미소가 더는 기쁨이 아닌 고통의 그늘로 물들어 있는 모습에, 선아는 소리 없이 숨을 들이켰다. 이어지는 너의 말에 담긴 무게가 무겁다. 그렇지 않다 반박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내가 네게 전할 수 있는 건 연기 밖에 없다. 어이없는 소리라도 들은 사람처럼 눈썹이 치켜 올라간다. 곧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오른다. 너는, —
"...그럴 때는, '당연하지'라고 해주는 거야."
—너는 그냥 배우가 아니라 내 상대역이다. 그러니 이전처럼 네 머리칼을 다정히 쓸어줄 수는 없지만. 지쳐있는 너의 도피처가 되어줄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 동안은 너만을 바라보겠다 홀로 마음 속으로 다짐한다. 눈에 짓궂은 빛이 어린다. 손으로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모습은 선전포고라도 하는 사람 같고, 살짝 대각선으로 기울어진 고개와 그에 맞춰 삐딱해진 시선은 꼭 그를 놀리는 사람 같다. 은밀한 비밀 이야기를 전하듯 목소리가 살짝 낮아진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걸, 좀 많이 예쁠 테니까."
슬그머니 휘어져 있는 입꼬리가 능청스럽다. 이 길의 끝이 너를 다시 사랑할 용기일지, 다시금 너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 용기일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태양이여. 우리에게 드리운 밤의 끝에 찾아오는 것이 아침이 아니라 해도 당신을 원망할 이가 아무도 없으니. 그저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기를. 이 모든 일의 결말을 납득할 심장을 주기를.
"아직. 너는 먹었어?"
짐을 풀 준비도 할 겸, 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가져온 짐이 놓인 곳을 바라보며 발을 뗀다. 손목에 걸어둔 머리끈을 빼낸 다음 머리카락을 한 데 모아 높게 쥐었다. 한 번, 두 번, 그렇게 끈으로 묶어 내자 마치 폭포처럼 등 뒤로 곧게 쏟아져 내리며 흔들린다. 발을 멈추고 반쯤 고개를 돌리며 너를 바라본다. 옅은 웃음이 입가에 여전하다.
구슬 쟁반 구르듯 까르륵 웃음소리, 복도를 울리며 문 열리고. 뒤늦게서야 등장한 얼굴에 제법 뻔뻔한 웃음기가 돈다. 기가 차 일어나 반기지도 않고 물끄러미 보았더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달라는 능청스러운 대답만 돌아올 뿐이다. 설마 자기도 직접 참가하게 될 지는 몰랐다나. 듣기로 요즘 사람들은 도파민에 죽고 산다더니, 자기네들 동아리 부장까지 냅다 들이밀 정도면 아마 <하트시그널> 동아리 부원들은 이미 코 꿰인 노예라도 된 모양이지. 허. 가벼운 비음 섞인 한숨. 혹은 탄식.
"..너..."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 말았다. 뒤따라 이어지는 장대한 설명들에 턱 가로막혔기 때문이다. 진행 내 방송실에만 있고 싶었다며 몸 배배꼬는 걸 봐 버린 탓도 크다.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어도 말문이 막힌다 했던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래, 어디까지 하나 보자, 하는 마음이 30%, 그래도 설명을 잘 들어 두면 나중에 곤란할 때 도움 될 일이 있지 않겠는가 싶은 마음이 30%, 자포자기 가까운 마음이 30%, 나머지 10%정도는 남 말하는 것 잘 끊지 못하는 성미의 영향도 있고 그래도 처음 제대로 마주했으니 예의는 차려야겠고 그 외 기타 등등. 복잡한 심경으로 듣고 있던 설명이 마침 끊어졌다 싶었더니. 씩 웃는 얼굴이 왜 묘하게 불안한지 모를 일이고. 아직 어떻게 수행할지 감 안 잡히죠? 아. 미묘한 얼굴을 하고 소민의 얼굴에 박혔던 시선을 가져다가 미션카드 모서리 끝만 만지작거렸다. 아마 어림짐작하기에 한 3초 즈음, 만지작거리던 카드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문제가 있어."
손을 가져다가 깍지를 껴 무릎 위에 내려놓는다. 사뭇 진지한 얼굴이다. 무슨 중요한 말을 하려길래 그러나 싶으면,
연기해줄까. 하지 마. 그 뒤로 드러난 깊은 그늘. 그 끔찍했던 날 이후로 서로에게 무엇이 남았는가─ 그것을 일부나마 먼저 확인한 것은 당신의 쪽이었다. 그리고 당신은 눈앞에 드러난 그것을 향해 미소를 지어보이기를 택했다. 숙련된 배우답게, 당신은 시작부터 들이닥친 돌발상황 하나를 매끄럽게 넘기는 데에 성공했다. 당연하지, 라고 해주는 거야- 하는 당신의 대사에, 호랑은 당신을 빤히 바라보다가 하하, 하고 허무한 웃음을 흘리고 만다.
"못 당하겠네, 진짜."
많은 것이 이전과 같을 수는 없다는 암시를, 호랑 딴에는 그나마 점잖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한 것이다. 연기하지 말라고는 했지만, 결국 당신이 말이 아니라 대사를 하는 이상 대답 역시도 그 대사에 대한 대답이어야 할 테니. 아무리 진심이라도 아무리 어설퍼도 무대 위에 오른 이상 호랑 역시 배우다. 좀 많이 예쁠 테니까- 하는 당신의 능청에, 호랑은 짧게 숨을 내쉬곤 유들유들한 미소를 얼굴에 걸었다. 많은 것이 이전과는 다르지만, 아직 이전처럼 할 수 있는 것도 몇 가지는 있었다. 아직 상기되어 있는 눈가가 무색하도록, 호랑은 마주 여유를 부렸다.
"그건 잘 알지, 내가 그걸 모를까."
굳이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도, 오랫동안 눈꺼풀 속에 담고 살아갔어야 했을 너인데. 마침내 막이 오른 이 무대가 별 사고 없이 마무리되기를 바랄 뿐이다. 너는 먹었어? 하고 태연하게 대답하는 네 모습을 보고, 호랑은 몸을 일으키며 천연덕스레 헛소리 한 마디를 던졌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근데 촬영하는건 본 적 있을거같애요.. 관심이 없어서 슬릭백같은걸봐도 oO( 뭐이런해괴망측한 ) 이런생각만 했을 뿐.. 교실에 앉아있으면 들리는 말도 있을거고 교실뒤에서 촬영하는 애들도 좀 있었을 거 같으니까...^^ 그냥 알아갈 필요성을 못 느껴서 더 심해졋을 뿐
>>38 쟈쟈쟈쟌 놀랍게도 첨부터 3학년이었다는 사 아 실 아마 저번에 해인이랑 소꿉친구 선관 짠 걸 보셔서 그런걸수도잇어요~~!!^^ 제가 먼저 드밀어놓고 앗.. 이러면 나이가 헷갈리려나.. 하는 생각이 나중에 들긴 했지만 그냥 암말두안하고잇엇는데.... 하학..^^ 이게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