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위한 이야기의 소품이자, 단역이자, 조연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는 비참할 수도, 행복할 수도 있고, 기승전결이 갖춰졌거나 이야기의 어떤 구성요소 하나도 제대로 된게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엉망인 이야기가 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선택하고, 때로는 강요당하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써낸다. 이야기의 악마 이프가 이제 마침표를 찍으라 권할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 찾아올 때까지. 왜냐면 우리는 살아있으니까.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니까.
>>848 옐리사베타의 술 취하고 비틀거리는 컨셉을 유지한자는 느낌에서도, 노인을 택하는 건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옐리사베타는 술을 들이킨 상태로 온갖 추태를 부리면서 다가가는데, 그 몰골을 보고 비법하는 이들에게는 유감입니다! 옐리사베타는 웨이터가 들고 가던 술을 뺏어서 병나발을 불고, 탁자를 엎고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가다, 노인이 다시 들어간 응접실 근처에 엎어집니다. 그리고...
"애들이 다 어이없게 죽었어. 한 년은 잡혀서 나발을 븰지 않나."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나는 살아야지..."
...노인이 다시 나가고 텅 비자, 옐리사베타가 아닌 엘리로서 고개를 든 그녀는 응접실을 쳐다봅니다. 들어가나요?
>>850 지금만큼은 술을 먹어 앞뒤 분간이 안 되는 동방귀족 옐리사베타, 그리고 뭐 하나라도 건져가야 하는 엘리자베스의 의견이 일치하고, 안 그래도 거리낌없던 성격에 술까지 들이붓자 거침없이 일어나 들어갑니다. 응접실 안에는 세월의 흔적이 녹아든 가구들이 놓여있는데, 개중에 유일하게 새로운 종이가 보입니다...
'하수구를 이용할 수 없으니, 거름으로 위장해 외부로 나가야 한다.'
'그 개새끼가 우리 쪽 끄나풀을 고문했다. 마리엘의 허브가 노출되었다.'
문득 이 부분에서, 엘리는 그 팔 잘린 밀수업자가 했던 말을 떠올립니다.
'마리엘의 허브! 마리엘의 허브 창고 42번 칸에 내 밀수품을 팔아서 쌓은 금화가 많아! 제발 그만 때려! 으아아아악!!!'
'이 마을 인간들이 적어도... 그 도시 근처에서 마주친 녀석들이랑 다른 녀석들이란 건 알고있어.' 그렇지만, 누누코에게 지금까지 박혀버린 관념과 부족의 관습. 그리고 보팔토끼의 흉폭한 본능. 만약 그들의 언동이 누누코의 신경을 조금이라도 거스른다면 -그들이 그런 의도가 없다고 해도-
'누누코는 이 인간들을 해칠지도 몰라.' 누누코의 진홍색 눈이 저편의 여인들에게 힐긋 향했다. 웃고 떠드는 얼굴들이 보였다. 그리고 마차 위에서 들었던 요한의 주의도. 아무래도 저들과 섞이는 건 어렵겠다고 누누코는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어느새 몸을 씻는 것을 모두 마치고 개울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855 누누코는 몸을 씻습니다. 어제만 해도 요한이 소독해줘야 했던 상처는, 소독을 잘 하고 연고를 바른 덕분인지 붉은 딱지가 앉아서 손이 닿을 때마다 간지럽습니다. 못 씻은지 얼마나 되었을까요? 일주일? 한 달? 누누코는 몸 곳곳에 묻은 때와 흙먼지를 씻어내고, 놓여있던 자갈 한움큼으로 몸을 박박 긁어서 때도 벗깁니다. 마지막으로 누군가 놔둔 잿물에 머리를 담갔다가 다시 헹구고... 누누코는 개울 아래로 땟국물이 흘러가는 걸 봅니다.
"..."
누누코는 바깥으로 나옵니다. 그녀는 고슴도치입니다. 그것도, 원치 않는 이에게 가시를 세우지 않는 법을 모르는 고슴도치. 계속 이렇게 살 순 없다지만 상관없습니다. 그녀는 찾아야 할 부족원이, 해야 할 복수가 있습니다. 빠르게, 기계적으로 목욕을 끝낸 누누코는 옷을 다 입고 나섭니다. 이제 어떻게 하나요?
@@ >>857 누누코는 물 밖으로 나와서 자신이 착용한 입은 옷을 살핀다. 허리를 비틀어도 보고, 팔을 움직이거나 엉덩이를 올려보기도 한다. 전사에게 장비란 중요한 것이었다. 지금 당장은 평화롭다고 하지만, 싸움이라는 것은 언제나 원할때에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신의 몸을 날카로운 칼처럼 준비시켜 놓을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나서는 미련없이 물가를 벗어나 자신이 거슬러 왔던 길을 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리알이라고 했었나. 보팔토끼는 육식이었다. 사실은 지금 저기 닭장에 있는 닭을 생으로 뜯어먹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지금은 오리알에 만족하자고 생각하면서 요한을 찾아갔다.
우우우ㅡ 귀청을 뒤덮는 소리 아닌 소리가 절그럭거리는 쇠사슬 소리와 슥슥 끌리는 살이 마찰하는 소리를 멀리 밀어내고, 시야는 마치 물 속에 갇힌 것처럼, 두 눈이 따로 움직이는 것처럼, 여러개의 상을 띄우지만 겹치지도 합치지도 못한 채 따로 놉니다. 겨우겨우 눈을 뜨면 복면 쓴 남자가 그녀의 발을 묶은 채 질질 끌고 가는 것이 보이고... 이내, 그녀를 다른 '고기'들처럼 들쳐업어, 천장과 연결된 쇠사슬에 거꾸로 매답니다.
"...오랜만에 좋은 고기 납품이군."
복면 쓴 사내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엘리는 간신히 맞춰진 초점으로 주위를 다시 바라봅니다. 돼지라기엔 팔다리가 너무 길고, 소라기엔 머리가 너무 작은 '출처 불명의 고기'들이 창백하게, 쇄골부터 하복부까지 절개된 채 내장을 싹 비웠습니다. 옆을 보면 복면 쓴 사내가 엘리 팔뚝만큼 긴 칼을 그녀의 목에 대는데, 그 순간ㅡ
"멈춰. 그 년. 연회로 간다."
엘리의 목을 그을 뻔한 칼날은 엘리의 경동맥 대신, 한 여자의 손아귀를 벱니다. 그 여자는 엘리가 지하수로에서 죽였던 사제와 똑같은 옷을 입었는데, 손아귀가 베여 피가 흐르는데도 무덤덤합니다. 그에 사내는 어깨를 으쓱이고 사슬을 다시 풀기 시작합니다...
...엘리는 어떻게 합니까? 좀 더 비련의 희생양을 연기할 수도 있고, 연기는 집어치울수도 있고, 선택은 당신의 몫이니까요.
>>860 내키는 대로 한다면, 그리고 그럴 수 있다면 누누코는 당장이라도 저 닭장에 들어가서 한두마리 정도는 물어 나오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팔토끼 수인은 일부의 경우(구토를 위해, 소화를 위해, 식물성 기름 섭취)를 제외하면 육식 이외에는 입에 대지 않았고 지금의 그녀는 숲에서 토끼 한두마리에 숲쥐 굴 하나를 비운 것을 제하면 먹은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누누코는, 그녀가 개울의 목욕하는 아가씨들에게 말한 것과는 달리 아무튼 '인간'이었기에 참습니다.
누누코는 요한을 찾아 마을을 돌아다니다, 요리 냄새를 따라 자기가 깨어났던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누누코는 아낙과 함께 요리하는 요한을 발견합니다. 정말... 지나칠 정도로 안 어울리지만요.
"누누코 씨! 앉아계시죠! 조금 있으면 다 됩니다!"
요한은 아낙네를 도와서, 토끼고기를 퐁당퐁당 썰어넣고 치즈와 함께 뭉근하게 끓인 밀죽, 기러기 간 구이, 어포-토끼 꼬치, 통닭을 내옵니다. 군침을 흘리는 부부와 함께 앉은 요한이 말하는군요.
@@ >>864 누누코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은듯 시선을 때지 못했다. 그것은 음식 재료에 토끼고기가 들어가있어서도 아니고, 요한이 요리를 돕고 있어서도 아니었다. 단지... 시야에 담고있는 현장에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호화로운 만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누코는 자기도 모르게 순간 입에서 침이 고이는 것이 느껴졌고, 그것이 입술 사이로 새어 흐르려고 할때 얼른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오리알이 준비되어 있는 거 아니었어?" 근처의 자리에 천천히 몸을 내려 앉고서는 요한에게 그렇게 물었다.
>>863 툭! 옐리사베타를 계속 연기하기로 한 그녀의 몸이 바닥에 툭 떨어지고, 사제복을 입은 여자는 엘리의 턱을 붙잡더니 쯧, 하고 혀를 차면서 복면 쓴 사내를 책망합니다. 뭐든 간에, 사람 죽을 뻔한 자리에서, 그리고 곧 죽을 자리에서 할 말은 절대 아니지만 말입니다. 복면 쓴 사내도 지지 않고 맞서지만 결국 져주는 척 하는군요.
"내가 버러지들 말고 좀 있어보이는 애들, 특히 아가씨들은 좀 조심히 다루라고 말 안 했나?"
"1분 전까지만 해도 도축 확정된 년이었잖아. 아무튼, 이 년은 왜 그렇게 난리지?"
"나로즈녜 차르국, 먼 동네에서 왔어. 죽어도 소식 닿는데는 한참이고, 처리만 잘 하면 그냥 죽었다고 판단하고 끝날 거란 말이야."
...에레야가 나로즈녜 차르국 소속으로 위장 신분을 만들어준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일단 나로즈녜 차르국은 정말로 먼 곳에 있으니까, 남작가 한둘쯤이야 즉석에서 지어내도 그럴듯하게만 꾸미면 당장은 의심받을 일도 없고, 아무리 간 큰 범죄자들도 귀족은 안 건드리지만, 먼 나라의 '남작'이라고 하면 조용히 제끼면 할만하겠는데? 라 착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다시 엘리사베타가 되어, 이번에는 묶인 상태 그대로 테이블에 올라서 실려갑니다. 그리고, 다시 어둠이 옵니다. 기절한 것은 아닙니다. 갑자기, 어두운 곳에 들어간 겁니다.
"...여러분. 오늘의 미식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눈이 아플 정도로 밝은 빛이 옐리사베타, 엘리를 비춥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십수명 정도 되는 이들의 박수 소리가 들려옵니다.
"요즘 들어 많이 힘드셨을 겁니다. 자꾸 쓸데없는 일로 사람 귀찮게 만드는 놈들이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오늘은 다릅니다. 저 먼 나라에서 온 귀족 영애 하나 죽는다고, 그 나라에서 신경이나 쓸 수 있겠습니까? 하하, 농담도."
그 와중에, 아까 전에 봤던 흉갑 입은 청년이 나와서 이 '미식'이 얼마나 안전한지 설명하는군요.
"언제나 그렇듯, 집 지키는 개새끼들은 아무 말도 못 합니다. 아마 이 여자가 여기 왔다는 것도, 잊어버리겠죠."
계속 헛소리가 나오는 동안, 엘리는 자신의 상태를 확인합니다. 뒤통수를 처맞아서 생긴 뇌진탕은 가라앉았지만, 손발이 묶여있습니다.
요한은 손가락을 딱 튕기더니, 호주머니에서 삶은 오리알을 꺼내 누누코 쪽으로 휙 던집니다. 보팔토끼의 반사신경과, 그에 더해 오랫동안 해온 수련 덕분에, 누누코는 '잡아야겠다'는 생각보다도 손이 앞서서 오리알을 탁 잡아냅니다. 갓 삶았는지 따뜻함이 느껴지는군요. 요한은 침 안 새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하는 누누코를 귀여운 듯 바라보면서 이야기합니다.
"많은 문화권에서 더 많은 술과 더 많은 식사를 해치우는 것도 전사의 한 덕목으로 간주합니다. 많이 먹어야 힘도 많이 쓴다는 거죠. 아무리 누누코 씨가 힘이 세도, 그 많은 이들에게 일일이 다 복수를 하고 다니려면 좀 먹고 다니셔야죠?"
약간은 아버지 같으면서도, 약간은 어머니 같은 말투로 요한은 다시 한번 앉으라고 권유하고, 옆에 앉은 부부도 불평합니다.
@@ >>867 "아니, 누누코는―"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달걀이 휙하니 날아왔고. 누누코의 손은 순전 반사적인 반응으로 그걸 받아내었다. 아직도 속에 뜨거울 정도의 온기를 담고있는 오리알이었다.
'...딱히 오리알이 먹고싶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누누코가 무어라 하려 했던 것은, 오리알이 특별히 먹고싶었다기보다는 이미 이 식탁엔 오리발 보다 훨씬 호화로운 만찬이 올라올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에 대해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구태여 외부인인 사람들에게 왜 이런 만찬을 먹이려 하는가. 이것도 요한이 그들을 구워 삶았기 때문일까. 의심 반, 본능 반. 그리고 알 수 없는 작은 감사함을 느끼며- 누누코는 조용히 삶은 오리알을 우적 씹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868 식사가 시작됩니다! 원래대로라면 그냥 허여멀건한 밀이나 잔뜩 들어갔으면 다행일 밀죽은 네모나게 썰린 고기와 치즈가 들어가 맛이 더 진해지고, 부드러워졌습니다. 물론 토끼고기는 고기치곤 특유의 맛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래도 고기는 고기라고 육식성인 누누코의 입 안에서 원래대로라면 고통스러워야 할 밀죽의 풋내를 진한 고기맛으로 바꿔 주었습니다. 그리고 기러기 간 구이는... 누누코는 숲쥐나 토끼를 먹을 때는 뇌까지 먹어치워야 겨우 맛볼 수 있던 기름의 맛에 눈을 빛냅니다. 한 입 베어물 때마다 기름이 들어찬 풍선이 터지는 것 같은데, 다른 상황이라면 구역질이 나겠지만 영양 섭취가 부족한 그녀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따, 덩치도 작은 처자가 밥은 황소처럼 해치우고 있네잉."
"나는 밥 못 먹고 돌아가신 우리 어매 옆에 있어도 이거 다 못 먹을 거 같은디 대단도 혀."
부부는 보기만 해도 배부른 누누코의 먹방을 보면서 혀를 내두르고, 요한은 그 옆에서 친절하게 꼬치를 한접시 더 밀면서 말합니다.
"조금 돈을 내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이 정도면 가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그렇게 빠르게 식사를 끝마치고, 요한은 누누코에게 말합니다.
"잠시 방으로 들어가서 이야기 좀 나누실까요? 물론! 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방이래봤자 누누코가 일어났던 그 식료품 창고입니다. 네, 거기요.
//참고로 토끼고기는 누누코가 보팔토끼 수인이라서 등장하는 건 아니고, 전근대 시대에서 사냥꾼의 도움 없이 평범한 농민 선에서 사냥할 만한 한계선이라 그런거!
"그런가요. 숲의 밖에서 보고 가질 수 있는 것에는 흥미롭다고 생각되어요. 특히, 그 생물은 독특해요. 그러나 생물은 기른다는 것은 그 존재를 확실히 책임져 줄 수 있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좋아요. 하지만 저로서는 스스로를 확신할 수 없어요. 그러니 일반적인 도구가 좋겠지요"
그녀가 말했던 명칭들은 제작자나 그 관계자들을 일컬는 것일거에요. 그들은 숲의 밖에서 어떠한 모습, 무엇을 할까요? 물건을 사고 팔고 하는 것이겠지요. 그녀의 설명은 흥미로운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앞에 두 가지는 보통의 도구라고 생각되지만 마지막 세번째는 아니에요. 마법적으로 인위적인 방식으로 탄생한 생물. 자연적으로는 없을 특징을 가진 부여되어 꾸며진 존재. 정말 자연적으로 없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러다가 저는 문뜩 묘한 느낌이 들었고 이내 생각이 들었어요. 냄새란, 생물의 활동에서 여러가지 의미와 역활을 가져요. 저희가 하는 행동은 그 냄새를 퍼트리게 되는 것이 되었어요. 그리고 그것은 다른 존재들에게 우리의 존재를 과시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어요. 즉, 숲 어느 한켠에서 그것이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네요. 곰...인가요? 그러고 보니 저희의 행동은 좋지만 나쁜 것이에요. 곰의 후각은 뛰어나요. 그리고 그 곰은 기분이 좋지 않는 것처럼 보여요"
제가 느끼게된 묘한 느낌의 정체는 숲 속의 어느 한 존재, 곰 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존재의 출현을 알려주었던 것이였어요. 이것은 저희가 한 행동이 화근이 된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베스니 씨, 즐거운 대화 시간은 지금부터 아니게 될 것 같아요. 저의 말을 침착하고 들어주세요. 저 앞 쪽에 냄새에 이끌린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인 곰이 나타났어요. 저희의 곁에 다가서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희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아보여요"
성급한 행동은 포식자의 본능을 자극하고 유도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럴때 일 수록 침착하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할 거에요. 저희가 단순한 피식자가 아닌 존재로서 상대하기에 난해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에요. 저는 그녀에게 제가 파악한 상황을 전달하였어요. 곰의 시선과 마주치지 않도록 하면서도 주시하며 즉시 곰의 행동에 대하여 움직일 수 있도록 경계했어요
@@ >>870 맛이 어떤지,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따질 겨를이 없었다. 고작해야 굶주린 산 짐승 정도를 잡아먹었던 지난 날에 비해서는 최고의 식사였다. 그렇게 오리알을 시작으로, 통째로 구운 닭까지. 상에 있는 모든 것을 먹어 치울때까지 이미 누누코에게서는 주변의 사람 말은 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누누코는 만찬을 해치운다.
그리고 잠시 뒤, 요한과 누누코는 단 둘이 방 안에 있었다. 물론, 짚단과 곰팡이 냄새가 가득한 누누코의 아늑한 임시 침실이었다. 그런 곳의 창문으로 누누코는 눈만을 빼꼼 내밀고서 토끼귀를 세우고 있었다.
"주변엔 아무도 없네." 누누코는 결론을 내린듯이 그렇게 말하며 다시 종이로 기운 창문을 닫았고. 벽에 기댄 채로 요한이 운을 틔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869 "여러분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종자 숫자? 언제부터 그들이 사라진 사람들의 숫자를 셌다고 생각합니까? 그들은 '제가 원하는 숫자'를 눈치껏 적어내는 겁니다. 한동안만 숨 죽이고 있으면..."
...있으면? 있으면 그 다음은? 귀족들은 다음 이야기를 들으려고 귀를 더 가까이 기울입니다. 그래서 뭐? 안전하다는 건가? 안심해도 된다는 건가? 하지만 청년은 답이 없습니다. 그저, 가래 끓는 듯한 소리가 잠깐 들리더니, 뚜둑 하는 소리가 들리고, 툭! 하는 소리가 들릴 뿐입니다. 뭐가 됐건 간에 인간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귀족들이 웅성거리는데... 잠깐. 이게 뭐죠?
"...'미식'이 어디 갔지?"
"뭐야, 어디 간 거야?"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커지다가, 불빛이 다시 원래 비추려던 '미식', 아니, 이제는 '미식가'를 비추자 사라집니다.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아주 잠깐 동안 옐리사베타로 위장했던 그녀는 청년의 목을 잘라서 바닥에 던져버린 채, 관중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눈동자로 전합니다.
너네 다 죽었다고.
어둠 속에서 귀족들이 비난하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괴물이라고, 미친년이라고, 죽일 년이라고. 다 사실입니다. 하지만 엘리가 할 말은 그것뿐입니다: 그래서요?
요한 브룬은 원래 휘황찬란한 미사여구를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누누코가 그런 것을 극도로 혐오한다는 것도 잘 아는지 이번에는 정말로 빠르게 본론을 찌릅니다. 누누코는 아까 전에 깨끗하게 씻어서 더러운 몸을 정결하게 만들었고, 옷도 새로 입었고, 밥도 먹었으니 이제는 일에 대해 얘기할 시간이 되었다. 요한 브룬은 아침까지만 해도 누누코가 침대로 쓰던 곡물 푸대 위에 앉더니, 손가락 세 개를 펴고 그 중 하나를 접습니다.
"첫째, 그냥 우리 둘이 힘으로 뚫는 겁니다! 방해하는 사람들은 죽이고, 막는 것들은 전부 부수면서요. 아마 누누코 씨가 미스터 스위트를 죽이고 탈출할 때 이런 대범한 방법을 쓴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너무 많은 이들이 죽으면, 그 사망자들의 죽음이 윤리적으로 옳은지는 둘째치고 우리한테 많은 이목이 쏠릴 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제가 한 행동은 공식적으로 '마차 강도', 누누코 씨의 행동은 '반역 및 살인' 인 상황에서, 그렇게 이목을 끌어봤자 현상금 사냥꾼 말고는 붙을 이들도 별로 없구요."
본론 찌르나 싶더니만, 또 장황하고 어렵고 긴 말 하는 버릇 나옵니다. 대충 말하자면, 누누코가 미스터 스위트네 저택 박살내던 때처럼 그냥 들어가서 다 때려부수고 들어가서 다 때려부수고 나오는 방법인데, 이목을 너무 심하게 끌어서 앞으로 처신하기가 힘들어질 거란 얘깁니다. 요한은 두 번째 손가락을 접습니다.
"두번째, 도둑처럼 숨어서 들어가는 겁니다. 물론 몰래 움직이려면 준비할 수 있는 장비가 삽 말고는 없어서... 솔직히 말하면 누누코 씨의 전투력에 완전히 의존해야 할 겁니다. 그래도 성공만 한다면, 미스터 스위트의 고용인들은 자기한테 봉급 주던 주인 시체가 사라졌단 것도 모를 겁니다! 그러기가 조금... 어렵겠지만요."
네. 그냥 시체 도둑질 하자는 얘깁니다. 그리고 요한은 마지막으로, 누누코의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정하고 정갈한 평복을 가리킵니다. 상의와 하의로 나뉘는데, 상의의 긴 밑단이 아래로 내려가 바지를 가려 원피스 역할을 수행하고, 밑단의 옆에는 길게 옆트임이 나 있어 누누코가 각력을 발휘해 누군가의 골통을 박살내야 할 때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조치해놨습니다. 요한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군요.
"그 옷은 살인에도 훌륭하지만... 사회적인 친교 기능을 보조하는 데에도 더없이 훌륭한 옷이죠! 그러니까, 만약 누누코 씨만 원하신다면, 저는 마차 행상, 그리고 누누코 씨는 그 마차 행상의 조수 같은 느낌으로 위장해 미스터 스위트의 집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들키면 뭐... 고생하겠지만, 마차를 가지고 저택에 들어갈 수 있으니 시체만 한번 파내고 나면 나가는 건 쉬울 겁니다!"
요한은 세 가지 선택지마다 손가락을 다 접어 결국 주먹을 쥐었습니다. 그리고 누누코에게 묻는군요.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제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손가락을 딱딱 칩니다. 그러자, 주변을 지키고 있던 붉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엘리에게 칼끝을 겨누고 달려들지만, 엘리는 그 병사들의 움직임이 정말 가소로울 뿐입니다.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불 하나 안 켜고, 고작무대 조명 하나에 의지해 그녀를 쫓겠다고요? 굳이 엘리가 얼마나 멍청한 발상인지 지적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엘리가 자신을 비춘 무대 조명의 자리에서 살짝 발을 비켜 어둠 속으로 숨자... 그들의 칼은 허공을 가르고 찌릅니다.
"이이익!"
엘리만큼은 아니지만, 최소한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알아볼 밤눈은 있는지 엘리가 움직인 방향으로 다시 칼을 휘두르고 찌릅니다. 하지만 엘리는 그들을 비웃듯, 춤을 추듯, 경동맥을 찌르려는 칼을 옆으로 몸을 틀어 가볍게 피하고, 배를 그으려는 칼을 뒷걸음을 성큼 해서 피하고... 마지막으로 누군가 둔기로 엘리의 머리를 찍으려고 다가오자, 엘리는 그 둔기에 엉겨붙은 피와 은발 머리칼을 보고 저게 누굴 때렸었는지 깨닫습니다.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죠. 엘리는 피하는 대신, 초인적인 속도로 그 경비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서, 둔기를 잡은 어깻죽지에 머리를 턱 올리고 속삭입니다.
너구나?
"커흑?!"
엘리는 그의 호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옆구리를 찌르고, 경비가 비명을 지르며 둔기를 놓치자 그것도 놓치지 않고 둔기를 붙잡아서, 다른 경비병들이 엘리를 뒤돌아보기도 전에 그의 허리, 무릎, 어깨를 순서대로 부숴버리고 주저앉힙니다. 순식간에 병신이 되는 고통을 느낀 사람의 비명은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소리가 되어 울려퍼지고, 엘리는 둔기를 던진 채 무대조명 위로 그를 던지고, 그 위에 올라타 칼로 수십번을 난자합니다. 더 좋은 점은, 그러고도, 상대는 살아있다는 겁니다.
"아, 으아아...!"
"씨... 씨발! 불 켜!"
"안 돼! 불 키면 우리 다 좆된다고!"
엘리의 밤눈에, 불을 켜려고 옥신각신 다투는 귀족들이 보입니다. 왠지 알 것 같습니다. 불을 켜면 신원이 다 특정될테고, 그러면 다 '좆될' 테니까요. 하지만 불을 끄고 싸우자니 어둠 속에서 서로 찌르지나 않으면 다행일 판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엘리는 어떻게 하나요? 저 귀족 말대로 불을 켜는 걸 돕습니까? 아니면 일단 어둠 속에서 싸우고 죽일 만큼 죽이고 찌를 만큼 찌르고 빨 만큼 빤 뒤 불을 켜겠습니까?
눈 앞에 불곰이 있습니다. 그것도 며칠 굶은 지 침을 질질 흘리는 불곰이. 이건 좋지 않습니다. 베스니는 아앨라나의 뒤에 생쥐마냥 숨더니, 도움 안 되는 온갖 헛소리를 합니다. 혹시 마녀가 호신 마법은 안 가르쳐 줬느냐, 드루이드의 동물 교감 같은 것으로 저 불곰이랑 어떻게 대화 안 되냐, 아니면 정신지배 마법 같은 건 없냐, 텔레포트 마법으로 도망치면 안 되느냐... 아앨라나보다도 가말라시엘이 더 거슬렸는지, 그녀에게 텔레파시로 말합니다.
'저라면 저 음유시인을 곰에게 던지고 도망치겠습니다. 어차피 이 근방 지리는 훤하시지 않습니까, 사도님?'
베스니에게는 참 심한 소리를 하는데, 아앨라나는 양 쪽의 말을 전부 다 씹고 곰의 시선을 피하면서, 천천히 몸을 들고 당당한 자세로, 겁먹지 않았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합니다. 하지만 곰이 계속 다가오고... 베스니의 숨은 점점 가빠지고... 가말라시엘이 재촉합니다.
>>880 순식간에, 동방에서 온 이름모를 귀족을 잡아먹으려는 파티는 대학살 현장으로 변합니다. 어차피 여기 앉아있는 모두는 적이니, 엘리는 아무나 붙잡아 등을 찌르고 목에 이빨을 꼽아 피를 마십니다. 밝은 밤눈으로 보면, 식인종들보다도 더 웃기게 싸우고 있습니다. 그놈들은 최소한 피아식별이라도 됐는데, 이 녀석들은...
"으아아아악!!!"
"이봐! 난 너랑 같..."
퍽! 철퍽! 푸쟉! 귀족들은 패닉에 빠져서 서로를 찌르고 죽입니다. 정말로 우스운 광경입니다. 일부러 이러는 거라 봐도 무리가 없을 지경입니다. 얼마나 멍청한지 모릅니다. 엘리는 그걸 보고 웃는데, 어째 엘리가 죽이는 인간들보다 서로 죽이는 인간 수가 더 많을 지경입니다. 하지만 그 때, 갑자기 불이 확 켜지더니 폭음탄이 터집니다.
꽝!!!!
언제 들어도 적응되지 않는 귀청이 터지는 폭음과 함께 아직도 살아남아 있던 이들이 쓰러지고 불이 켜집니다. 귀족들은 작게는 베인 상처부터 크게는 배에 찔린 상처를 입은 채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누군가 엘리의 어깨를 턱 잡습니다. 엘리가 반사적으로 손아귀를 들어 베려고 하지만, 그 손아귀는 익숙한 얼굴을 보고 멈춥니다. 그녀를 데려온 거한도 아닌, 비냐입니다. 그녀는 후드를 뒤집어쓴 채 주변을 둘러보다가 말합니다.
@@ >>874 누누코야 당연히 첫번째 안에 더 이끌리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본능대로 고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신성한 들판의 전사에게 싸움이란 살아가는 이유와도 같았고, 겸사겸사 인간들을 자신의 손으로 찢고 부술수 있다면 그것은 호재나 다름 없었다. 그 최후가 죽음이라도 기쁘게 맞이할 것이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누누코는 자신의 목표를 떠올렸다. 누누코의 목표는 물론 인간들을 향한 복수이다. 그러나 혼자서는 그것을 이룰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정보가 필요했고, 저택에 되돌아가서 무사히 나온다 한들 요한의 말대로 얼굴이 알려지면 곤란했다. 자신뿐이라면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대변인 -사실은 거의 변호인에 가까웠지만- 역할을 맡고있는 요한이 움직일 수 없게되는 것은 곤란했다. 결국엔 그가 자신같은 외지인이 아니고, 인간사회에 몸담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선택지가 없군." 그것을 알아차린 누누코가 언짢으면서도 마지못해 인정하는듯이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어쩌면 이 눈앞의 입 살은 남자가 처음부터 자신이 두 번째 안을 고르도록 유도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게 그다지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쨌든 누누코는 복수로 이어지는 혈흔을 찾을 수만 있다면 상관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넘기고는, 그의 설명에 몸을 움직여 자신이 입은 옷을 찬찬히 살폈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무리에 숨어들 수 있도록 '평범한 옷' 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마치 검을 곱게 감싸둔 천처럼, 언제든지 누누코가 야생의 폭력을 드러낼 수 있도록 사적인 조치가 되어있는 옷이었다.
>>882 엘리는 비냐를 마치 짐짝처럼 들고 움직입니다. 엘리가 그렇게 힘이 강한 편은 아니지만, 아까 전에 대량 학살의 현장에서 기름기 흐르는 영양가 좋은 피를 꽤나 마셨기에 체력은 부쩍부쩍 오른 덕분입니다. 비냐는 엘리가 잡고 가는 대로 흔들리면서도, 할 말은 다 하고, 가리켜야 할 방향도 다 가리킵니다. 사교 파티장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그 덕분에 비냐와 엘리가 움직이기가 더 편한 면도 있습니다. 어차피 사방팔방이 피바다가 되는 마당에, 피 묻은 여자 한 명이랑 그 여자한테 잡혀가는 하플링 여급 하나가 눈에 띌까요?
"왼쪽 계단으로 내려가요! 그리고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비냐는 악악대면서도, 계단의 단차에 발이 닿을때마다 콩,콩, 콩, 하면서 시야가 위아래로 마구 흔들리는 것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할 말은 다 하는군요.
"제가 오늘 사교파티 주방보조 한 명으로 들어오라고 임무를 받았는데, 이렇게까지, 심하게 할 줄은, 그 분도... 오른쪽이요!"
휙! 엘리는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고, 딱 봐도 '나 식료품 창고요'하는 듯한 곳에 도착합니다. 엘리는 그 안으로 들어가는데... 엘리를 마차로 이곳에 데려왔던 거한이 배를 움켜쥔 채 피를 흘리고 있군요. 그는 입으로도 피를 흘리면서 둘을 바라봅니다. 왼쪽으로 돌아, 오른쪽으로 돌아, 정신없던 비냐는 엘리의 손을 뿌리치고 그 거한에게 달려갑니다.
"엘리 님! 일단 이 아저씨를 지혈할 테니까 누가 안 오나 좀 봐주세요!"
비냐는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거한의 입에다가 쓴 뿌리를 물리고, 횃불을 들어 배를 냅다 지져버립니다. 으으으으읍!!!! 미친 듯한 고통의 소리와 고기 익는 냄새가 퍼지지만, 다행히도 기절하지 않았습니다. 비냐는 한숨을 쉬고 나서 곡물 푸대를 당겨서 숨겨놨던 개구멍이 드러나게 하는데, 갑자기 식량 창고를 쾅! 두들기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쩌다 실수로 부딪친 게 아니라, 반대편에서 고함이 들리고 하나, 둘, 하는 구령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여기에 무언가가 숨은 걸 눈치챈 것 같습니다.
>>883 "그건 나중에 조치해드리죠. 아무튼 알겠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앞으로 할 행위를 '도둑질'이라 부르겠지만, 저는 좀 더 정중하게... 당사자들과 사전 조율이 잘 되지 않은 채증 절차라고 부르겠습니다."
요한은 웃으면서 자신이 가장 마음에 드는 안을 골라준 누누코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누누코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첫번째 방안대로 간다면 당장 누누코를 못살게 굴었던 인간들을 깡그리 죽여버리고, 겸사겸사 때리는 시모보다 말리는 누이가 더 밉다고 남 일이라 지나가던 놈들도 팔다리 한두짝 정도는 간단하게 불구로 만들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큰일이 날 거고, 세번째 안도 분장을 정말 잘 하지 않는 이상 누누코를 알아볼 이가 한 명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그렇다면 답은? 시체 도둑질입니다. 요한은 작전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줍니다.
"로데스는 여기서 마차를 타고 하루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서, 마차를 적절한 곳에 숨긴 뒤에, 삽 두 개만 들고 몰래 미스터 스위트가 소유했던 대농장으로 들어가서, 누누코 씨가 그 미스터 스위트를 죽였던 곳, 묻었을 만한 곳을 찾아서 거기를 파낼 겁니다. 그러고 나서, 시체를 확보하면 빈 관뚜껑은 다시 덮어버리고 우리는 달콤한 현상금 200탈러를, 합리적인 비율로 나누고 우리의 첫 번째 동업에 기쁜 마침표이자, 다음 동업의 행복한 따옴표를 찍겠지요."
그리고 요한은 누누코에게 로데스에 대해 조사해온 것들을 줄줄이 말합니다. 키가 큰 옥수수, 과일 등을 재배하고 있는데 지금은 옥수수 수확기 직전이라 옥수수 사이에 숨으면 방향은 잘 잡아야겠지만 접근하기는 쉬울 것이다, 밤중에 들킬 것 같으면 과수 위에 올라가 둥지인 척해도 된다는 등... 누누코도 당장 다 죽여버리겠다는 본능에 사로잡혀 지나쳤던 것들인데, 그것들이 요한의 설명과 함께 하나둘 떠오르니다. 아무튼 설명을 다 마치고 나서, 요한이 되묻는군요.
비냐는 엘리가 방금 저지른 짓을 보고 말을 잃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지만, 그럴 새도 없이 문이 열리자 경비병들이 쏟아져나옵니다. 문을 들이받아야 했던 공성추... 대신 기둥이 먼저 비냐의 머리를 향하지만 거한이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아 당겨버리고, 경비들은 어어할 새도 없이 제 몸무게를 못 이기고 앞으로 쏟아지다가 맨 앞에 있던 이는 선반에 턱이 부딪쳐 목이 뒤로 꺾이고 뒤에서 오던 이들도 마구 엎질러지다가 선반이 무너지면서 쾅! 하고 깔립니다. 그 혼란 와중에도 몸을 건사했던 비냐와 거한은 엘리를 죽일 듯 바라보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음... 괜찮으려나요?
"하아... 아무튼 나가야 해요!"
비냐는 아직도 살이 지져진 고통에 비몽사몽한 거한의 양 어깨를 붙잡고 낑낑대며 그를 개구멍으로 밀어넣은 다음, 자기도 개구멍으로 들어간 뒤 엘리에게 손짓합니다.
"뭐 해요? 빨리 들어와요! 그리고 들어올 때 곡물푸대 같은 거로 가리는 거 잊지 말고요!"
>>891 "잠입해야 한다는 것, 시체를 파내야 한다는 것만 이해했으면 다 이해하신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 될 걸 그렇게 놀랍도록 길게 말하는 것도 재주라는 생각이 들지만, 누누코는 굳이 따지지 않고 넘기기로 합니다. 나머지는 이해 못 했지만 어차피 중요한 게 아니고, 누누코는 언제나 그랬듯 자기 할 일만 잘 하면 그만일 테니까요. 요한은 웃으면서 곡물푸대가 쌓인 '침실'을 누누코와 함께 나서고, 마을 어귀에 세워놨던 마차에 '바퀴벌레'를 끌고 와서 다시 이어줍니다. 하루종일 바퀴벌레마냥 뭔가 먹고만 있던 '바퀴벌레'가 더 못 먹는게 아쉬운지 젖은 코를 혀로 낼름낼름 핥자 요한은 주머니에서 콩을 한움큼 꺼내 먹여주고, 마부석에 올라서 누누코에게 손짓합니다.
"이번 시체 절도는 누누코 씨의 잠입 실력이 생명이 됩니다. 그러니까, 좀 더 휴식을 취하고 싶으시다면... 비좁긴 해도, 마차에 들어가서 주무셔도 됩니다."
요한은 대단한 친절을 베푼 것마냥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는군요. 그러다가 아! 하고 뭔가 생각났는지 손가락을 튕기고는 말합니다.
"여기서 뭔가 더 하실 일이 있으시면, 오늘 석양이 지기 전까지 하다 오셔도 되고요."
누누코는 어떻게 하나요? 바로 출발할 수도 있고, 아니면 좀 더 비든베일에 머무르다 갈 수도 있습니다.